2011년 1월호

아버지 없는 세상, 그 막돼먹음과 비천함

  • 장석주| 시인 kafkajs@hanmail.net

    입력2010-12-22 15: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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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의 기저에는 무엇이 놓여 있을까. 전업 작가 장석주씨가 현실과 인문학 텍스트 사이를 오가며 한국인·한국 사회의 원형을 분석하는 연재를 시작한다. 첫 번째 주제는 최근 불거지고 있는 갖가지 폭력 사건. 필자는 이 야만의 배후에 ‘아버지의 부재’가 있다고 지적한다. <편집자 주>
    아버지 없는 세상, 그 막돼먹음과 비천함
    북한군의 연평도 기습 피격으로 한반도가 전시상황으로 치달을 무렵 기이하고 야릇한 사건이 터졌다. 재벌 가정에서 자라난 젊은이가 맷값을 지급하고 노동자를 야구 방망이로 구타한 사건이다. 황당한 사건에 내 뇌는 빠르게 반응한다. 우리 사회에는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이 많다는 것, 그리고 아버지들이 점점 더 많이 사라진다는 것.

    재벌 회장을 아버지로 둔 그의 납득할 수 없는 기세등등함과 기행에 가까운 탈법적 폭력이라니! 파렴치한 작태는 공분을 자아낸다. 그가 저지른 기이하고 야릇한 활극은 아비의 훈육 없이 자라난 ‘후레자식’의 전형적인 행위다. 이 막돼먹음과 비천함이라니! 유영철도 그렇고, 김길태도 그렇고, 조두순도 그렇다. 정신분석학에서 사이코패스로 분류하는 이런 사회적 돌연변이들이 잇달아 나타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부성(父性)이 멸종되었음을 알리는 불길한 징후는 아닐까? 아버지들은 종종 아이를 안아 하늘로 올렸다가 되받는 행동을 한다. 아버지와 아이에게 동시적으로 상징성을 띤 인류학적인 몸짓이다.

    “하늘을 향해 자식을 들어올리는 아버지의 행동은 단순한 신체적인 행동이지만 자식에게는 일종의 축복이고 통과의례였다. 동시에 아버지에게 이 행동은 남성성에서 부성으로 도약하는 계기였으며, 신체적인 기증(정자의 기증) 이상의 의미를 지닌 정신적인 도약이었다. 부성이라는 의미가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어떤 새로운 탄생과도 같은 것이라면, 자식을 들어올리는 행위와 성인식은 아버지로서의 의미를 자식에게 펼쳐놓는 것과 같은 정신적인 고양이라고 할 수 있다.”(루이지 조야, ‘아버지란 무엇인가’ 중에서)

    즉 아버지가 아이를 하늘로 들어올렸다가 되받는 행위는 아이의 성장에 필요한 축복이고 통과의례다. 그것은 동시에 남성성이 부성으로 도약하게 하는 계기적 행위다. 부성은 남성성에 견주어볼 때 인격적으로 더 고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남성성의 특성인 제멋대로 함, 막돼먹음, 야만성 등을 순치시켜야만 얻을 수 있는 게 부성이다.

    ‘후레자식’의 탄생



    아버지의 사랑이나 훈육 없이 자란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정신분석학자들은 부성의 몸짓이라는 축복과 통과의례를 겪지 않고 자라서 어른이 된 사람은 심리적 혼란을 겪는다고 말한다. 남성성에서 부성으로 도약하는 정신적 계기들이 생략된 환경에서 자란 그들은 한마디로 ‘아비 없는 후레자식’이 된다. 모든 혁명가는 반부성(反父性)의 언어를 내뱉고, 사회의 위계질서를 전복한다는 뜻에서 ‘후레자식’이다. 가부장적 권력의 억압 아래 놓여 있던 1980년대에 나온 이 반부성의 언어를 보라!

    “아버지, 아버지! 내가 네 아버지냐/ 그해 가을 나는 살아온 날들과 살아갈 날들을 다 살아/ 버렸지만 벽에 맺힌 물방울 같은 또 한 여자를 만났다/ 그 여자가 흩어지기 전까지 세상 모든 눈들이 감기지/ 않을 것을 나는 알았고 그래서 그레고르 잠자의 가족들이/ 매장을 끝내고 소풍 갈 준비를 하는 것을 이해했다/ 아버지, 아버지………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이성복 시, ‘그해 가을’의 일부).

    전근대의 가부장적 세계에서 아버지는 독재자요 절대 군주였다. 아버지는 언제나 ‘안 돼!’라고 명령하는 초월적 이성이고 대타자다. 그 대타자를 향해 젊은 시인은 “아버지, 아버지………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라고, 신성모독적인 반항의 언어를 날린다. 이 아버지는 분명히 악성(惡性) 부성신화(父性神話)를 퍼뜨린 군사독재 권력자들을 가리키는 것일 게다. 유교사회의 전통이 엄연한 한국 사회에서 아버지는 실제의 아버지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아버지 없는 세상, 그 막돼먹음과 비천함

    재벌가의 자제인 최철원 전 M&M 대표. 그는 고용 보장을 요구하는 노동자를 폭행한 뒤 수천만원의 ‘맷값’을 건넨 것으로 알려져 물의를 빚었다.

    “우리에게도 혈통과 관계없는 아버지의 전통이 있었다. 스승과 임금이 그들이다. 서양처럼 여러 사람을 하나로 통일해서 부르는 호칭은 없지만,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고 해서 세 분의 위격을 동등하게 받들었다. … 서양에서는 하느님이 인간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하면서 계급이 높은 스승이나 임금이 아니라 아버지의 의미를 강조했다. 우리는 서양의 하느님이 위치하는 자리에 실제의 아버지를 배치했다. 이것이 한국의 아버지다.” (전인권, ‘남자의 탄생’ 중에서)

    스승도 아버지요, 법정 스님이나 김수환 추기경 같은 정신적인 지도자도 아버지요, 나라를 다스리는 대통령도 아버지요, 심지어는 믿고 섬기는 하나님도 아버지다. 군사독재 권력 아래서 우리의 사회적인 아버지들은 나쁜 아버지들이었다. 그들은 존경은커녕 타도 대상이었다. 좋은 사회적 아버지를 갖지 못한 시절, 우리는 불행했다.

    오늘의 젊은이들도 믿고 따를 아버지를 갖지 못한 건 마찬가지다. 그들은 동년배의 젊은이들을 학습하고 모방하면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치와 덕목을 배운다. 얼마 전 한 TV 프로그램에 초등학교 2학년 어린이가 쓴 시가 소개돼 화제를 모았다.

    “엄마가 있어서 좋다./ 나를 이해해주어서// 냉장고가 있어서 좋다./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강아지가 있어서 좋다./ 나랑 놀아주어서//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가족 내부에서 아버지의 자리가 어떠한지를 일러주는 의미심장한 시다. ‘아이의 눈’은 편견과 이그러짐이 없어 투명하다. 아버지가 생계를 책임지는 동안 풍부한 물질적인 혜택을 받고 자란 자식들이 아버지의 희생에 대해 나 몰라라 한다고 불효자라거나 배은망덕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문제의 책임을 자식들에게 전가하는 행위다.

    “아빠는 왜 있을까”

    이 시를 접한 뒤 나는 두 번 놀랐다. 첫 번째는 아이의 시선이 투명하다는 데서 오는 놀라움이고, 두 번째는 아이의 심리적 환경 속에 아버지의 자리가 없다는 데서 오는 놀라움이다. 아버지의 존재감이 냉장고나 강아지만도 못하다는 건 충격적이다. 당분간 아버지의 자리는 동결(凍結)이다. ‘부재(不在)’라는 이름의 자리다. 가족 안에서 부재한다는 점에서 아버지는 이미 죽었다.

    오늘날 방황하는 젊은이들은 부성의 은혜와 축복 없이 자란다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그 결과 그들은 아버지에게 적개심을 품는다. 세대 간의 불화에서 나온 이런 분노와 적개심의 누적으로 더러는 사이코패스와 같은 사회적 돌연변이가 나타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정자 기증자’나 ‘경제적인 기부자’가 아니다. 진짜 아버지다. 실패를 겪었을 때 따뜻하게 위로해주고 격려해주는 자애로운 아버지, 위기나 위험에 처했을 때 나서서 구해주는 용감한 아버지, 내가 삐뚤어질 때 붙잡고 훈계하거나 야단쳐서 바로잡아주는 엄격한 아버지. 그게 진짜 아버지의 모습이다. 그러나 불가피하게 세상은 점점 더 아버지가 없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본래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 무엇으로도 훼손할 수 없는 힘과 권위를 가진 ‘영웅’이었다. 가족 안에서 아버지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지금 아버지의 권위가 절대적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왜 이런 사태가 빚어졌는가? 인류가 겪은 산업화 이후의 불가피한 현상이다. 산업혁명 이후 서구사회에서 수많은 아버지가 가족을 떠나 일자리를 찾기 위해 떠돌아다녀야 했다. 산업화와 더불어 집에서 더는 아버지를 볼 수 없는 아버지의 비가시성(the invisibility of the Father)이라는 현상이 생겨난 것이다.

    아버지 없는 세상, 그 막돼먹음과 비천함
    “산업화는 낮에는 아버지들을 공장으로 빨아들였다가 밤에는 작업장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공동숙소로 이들을 뱉어내었다. 가족들과 자식들에게 아버지는 점점 더 낯선 사람이 되어갔다.”(루이지 조야, 앞의 책)

    그러는 사이 국가는 부성의 권위를 빼앗아갔다. 아버지들이 너무 바빠져서 가정에서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할 수 없게 되자 국가는 교사들에게 그 역할을 맡겼다. 어떤 아버지들은 집단적으로 심리적인 상실감 때문에 난폭해졌고, 자식과 가족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불량 아빠’로 전락했다가 이윽고 ‘용도폐기’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19세기에 ‘신’이 죽고, 시민혁명으로 ‘왕’이 단두대에서 사라졌는데, 이 두 가지의 사태는 머지않은 미래에 다가올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사태를 예고하는 상징적인 퍼포먼스였다.

    “아버지의 권위는 민주주의의 원칙들에 굴복했고 그의 권력은 다양한 방식들을 통해 감소되어 왔다. … 소작농이 곡괭이를 집어던지고 공장 문을 드나들게 되던 날부터 그는 동시에 자식들의 시선이 닿을 수 없는 영역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동일한 운명은 차차로 수공업 장인들과 대장장이들 그리고 목수들에게도 다가왔다. 이들이 만들던 생산품들은 기계에 의해 만들어진 보다 저렴한 상품들로 대체되었고, 나무와 쇠를 가지고 작업하던 아버지들은 거리로 쫓겨나와 비인간적인 경영자의 이윤에 봉사하는 기계에 내몰리게 되었다. 공장에서의 작업은 한정되고 반복적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들은 차차로 자신들이 소유했던 기술들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들은 일정한 행동만을 반복하는 단순노동자들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책임감도 부여되지 않았고, 그에 따라 독창성 역시 모두 상실하고 말았다. 직업적인 전문 능력을 상실한 이후 아버지들은 자부심마저 잃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생산해 낸 제품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소유가 아니었고, 심지어는 이 제품들을 구경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도 흔했다. 하지만 이런 상실감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자식들에 대한 권위와 따뜻한 품(집)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들의 일과와 노동과 감정들은 자식들의 시야 밖에서 벌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아버지의 생활은 자식들의 생활과 관련된 것이 없었다. 아버지들은 여전히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지만 자식들이 성인으로 성장하게끔 이끌어주는 교사의 역할을 할 수는 없었다. 학교 선생님이 가족의 모든 역할을 대체할 수 없는 것처럼, 어떤 제도나 단체들도 대체할 수 없는 귀중한 교육의 기회가 박탈되어 버린 것이다.” (루이지 조야, 앞의 책)

    아버지의 죽음

    우리 역사 속에서 아버지는 어떤 수난을 겪었을까? 일제강점기 식민지 근대 속에서 우리의 아버지들은 독립운동을 하거나 아니면 일자리를 찾아서 만주 등지를 떠돌았다. 많은 아버지가 6·25전쟁 와중에 군인으로 차출돼 전쟁터에 끌려 나가야 했다. 그들 중 많은 아버지가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개발독재 시대에 아버지들은 산업역군으로 중동이나 독일 같은 먼 곳으로 떠났다. 그렇게 가족 곁을 떠난 아버지들은 역시 오랫동안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어디에도 진짜 아버지는 없었다.

    김훈의 장편소설 ‘내 젊은 날의 숲’은 가족 안에 ‘아버지’의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소설에서 군청 공무원이던 아버지는 뇌물을 받아 챙기고 일부는 상납하다가 구속된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뇌물을 받고 구속당한 아버지는 가족에게서 버림받는다.

    아버지 없는 세상, 그 막돼먹음과 비천함

    아들의 인생에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는 아버지의 존재를 그린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한 장면.

    “아버지는 식구들의 존재와 식구들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다. 세 식구가 마주 앉으니까, 포유류의 혈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지금 아버지가 앉아 있는 집은 아버지가 거처할 곳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다른 아파트로 보낼 것이었다. 아버지는 아직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따로 마련해준 아파트와 어머니가 정한 별거에 저항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어떤 방식으로 그 말을 꺼내게 될는지를 나는 짐작할 수 없었다. 그것은 오직 두 사람 사이의 일이었다. 아버지에게 교도소 안과 교도소 밖은 다르지 않았다. 이 세상에 아버지의 자리는 없었다.” (김훈, ‘내 젊은 날의 숲’ 중에서)

    아버지의 자리가 없다는 말은 곧 아버지의 죽음을 의미한다. 다시 ‘내 젊은 날의 숲’을 보자. 가족 내부의 위계질서에서 아버지는 가장 아래에 배치돼 있다. 권력은 어머니-딸에게 집중돼 있다. 아버지는 그 권력에 빌붙어 사는 비루한 가족 부양노동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 사회의 보편적인 도덕의 잣대로 볼 때 아버지가 특별히 더 나쁜 사람은 아니다. 밖에서 볼 때는 그저 평범한 가장일 따름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폐마(廢馬)’의 은유 속에서 쓸모를 다한 폐마와 하나로 겹쳐지는 존재로 그려진다. 김훈은 작중화자의 입을 빌려 “어린 내가 보기에도 아버지의 삶은 멸종의 위기에서 허덕거리듯이 위태로웠고, 비굴했다”고 적는다. 아버지가 멸종 위기의 종이라는 사실은 아주 분명해 보인다.

    “아버지가 구속된 후 어머니는 아버지를 그 인간, 또는 그 사람이라고 지칭했다. ‘인간’ 또는 ‘사람’이라는 익명성에는 어머니가 살아온 삶의 피로감이 쌓여 있었고, 익명성을 다시 구체적 대상으로 특정하는 ‘그’라는 말에는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재정자립도가 이십 퍼센트에 못 미치는 군청의 공무원이었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아버지의 삶은 멸종의 위기에서 허덕거리듯이 위태로웠고, 비굴했다. 아버지는 어린 자식들이 보기에도 민망하게 직장의 상사들에게 굽실거렸고 밤중에도 수시로 불려나갔다. 밤중에 상사의 전화를 받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슬펐고, 내 여고 시절은 그 슬픔에서 온전히 헤어나지 못했다. 삶이 치사하고 남루하리라는 예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나의 슬픔은 분노에 가까웠다. 밤중에 불려나간 아버지가 다시 돌아오는 새벽까지 나는 잠들지 못했다. 아버지가 교도소에서 모범수가 되었다는 소식이 놀랍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교도소의 모든 규칙을 지켰을 것이며 교도관들의 지시에 순응하면서 굽실거렸을 것이다. 아버지가 모범수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내 여고 시절에 밤중에 전화를 받고 어디론가 불려가던 아버지의 마른 등을 생각했다.”(김훈, 앞의 책)

    부성의 종말, 야만의 복귀

    어느 시대나 아버지 노릇을 하기는 쉽지 않다. 다산 정약용과 같이 훌륭한 사람도 자식 앞에서는 작아진다. 정약용은 저술이 많기로 유명한 사람인데, 그 곡절에 대해 이렇게 쓴다. “내가 남의 아비가 되어서 너희들에게 이처럼 누를 끼치는 것이 부끄럽고, 그래서 내 저술로써 너희들에게 속죄하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날이 갈수록 아버지의 입지는 비좁아지고 그 모습은 한없이 불쌍하다. 김훈은 작중화자의 입을 빌려 “어린 내가 보기에도 아버지의 삶은 멸종의 위기에서 허덕거리듯이 위태로웠고, 비굴했다”고 적는다. 김훈이 그려내는 것은 부성 제도의 점진적인 궤멸의 징후들이다. 가족의 위계에서 최하위에 배치된 아버지는 이미 부성 제도의 궤멸이 상당히 진행되었다는 하나의 증표다. 아버지는 점점 더 작아지다가 결국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아버지가 없는 미래의 세상은? 부성 제도의 궤멸이 불러오는 것은 무엇인가? 루이지 조야는 그 결과가 사회적·심리적·동물학적 퇴행이라고 단언한다.

    “인간들이 수천 년의 문명과 부성의 관습들을 거슬러 원시적인 상태로 퇴보한다는 것이고, 이 퇴보 속에서 아무도 지켜줄 수 없는 이름 없는 후손들이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 후손들에게 아버지가 되어줄 어른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들은 부성을 알지 못하는 동물적인 남성성으로 자라날 것이고 악순환의 고리 속에서 세계는 점차 과거로 후퇴해 갈 것이다.”(루이지 조야, 앞의 책)

    아버지가 사라진 세상이 동물적 남성성이 판치는 원시사회로 퇴행할 것이라는 건 필연이다. 아버지란 ‘종(種)’이 인류 사회에서 멸종되면서 점점 더 많은 젊은 남자들이 아버지가 되기보다는 남성성에 머무르려고 한다. 젊은이들의 집단 비행은 남성성의 나쁜 발현이다. 상징어법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집단 강간을 통해 판(pan)을 낳는다.

    “판이란 이런 집단적인 범죄 속에 들어 있는 타락의 상징으로, 오늘날의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은 모든 엄격한 윤리적 기준을 부정하고 극단적인 자유를 추구함으로써 고대의 강간의 신을 부활시키고 있다.”(루이지 조야, 앞의 책)

    아버지라는 종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젊은 남자들은 부성에 부과되는 ‘사회적이고 시민적인’(루이지 조야, 앞의 책) 책임과 의무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부성에서 도피해 극단적인 자유만을 누리려고 한다. 아버지들이 살아 있어야 가정과 사회가 더 건강해질 수 있다. 아버지는 단순히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노동자가 아니다. 아버지는 ‘정신적인 중심축’이고 ‘형이상학적 최고의 원리’였다. 그러나 가족의 중심에서 밀려난 아버지는 더 이상 가정의 중심축이 아니고 문명의 위대한 건설자도 아니다. 부성의 회복은 사회가 건강성을 되찾는 데 아주 중요하다. 한 시인은 부성의 긍정적인 실체를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바깥은 요란해도/ 아버지는 어린 것들에게는 울타리가 된다./ 양심을 지키라고 낮은 음성으로 가르친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들이다./ 가장 화려한 사람들은/ 그 화려함으로 외로움을 배우게 된다. ”(김현승, ‘아버지의 마음’ 전문)

    아버지 없는 세상, 그 막돼먹음과 비천함
    장 석 주

    1955년 충남 논산 출생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입선

    동덕여대, 경희사이버대 출강

    저서: ‘느림과 비움의 미학’ ‘지금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 ‘몽해항로’ 등


    이 시는 가족의 ‘이상적인 영웅’으로서 진짜 아버지를 그리고 있다. 아버지는 어린 것을 위하여 난로를 피우고, 벽에 못을 박고, 가족을 돌보는 책임을 다하는 존재다. 그런 아버지들이 가정의 울타리가 되고, 세상의 울타리가 된다. 그런 부성은 진정한 뜻에서 가정의 정신적인 중심축이 되고, 형이상학적 최고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눈물이 절반”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아니,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고 그 아버지들을 ‘이상적인 영웅’으로 복권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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