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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호위보살상 좌우 바뀐 채 100년간 방치됐다

석굴암 호위보살상 좌우 바뀐 채 100년간 방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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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호위보살상 좌우 바뀐 채 100년간 방치됐다
경덕왕(景德王, 723년경∼765년)이 부왕인 성덕왕(聖德王, 690년경∼737년)과 모후인 소덕왕후(炤德, 700년경∼724년)의 추복을 위해 부모의 왕릉이 모셔진 산자락의 주산(主山)인 토함산에 화엄불국사(華嚴佛國寺) 창건을 기획하여 불국사를 지을 때 석굴암도 석불사(石佛寺)라는 이름으로 함께 지었다고 한다. 이 사실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의 ‘대성이 2세 부모에게 효도하다(大城孝二世父母)’라는 항목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이에 현생(現生)의 양친을 위해 불국사를 짓고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창건하였다. 또 신림(神琳)과 표훈(表訓) 두 성사(聖師)를 청해다 각각 머물러 살게 하였다. 성대하게 상설(像設; 예배를 위한 불보살상 등 조각상과 불사를 위한 각종 설비)을 베풀어서 길러준 노고에 보답하니 한 몸으로 2세 부모에게 효도한 것이다. 예전에도 듣기 어려웠던 일이니 보시를 잘한 영험을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장차 석불을 조각하고자 하여 하나의 큰 돌을 다듬어 감실 덮개로 삼으려 했더니 돌이 홀연 세 쪽으로 갈라졌다. 분하고 성이 나서 자는 척하는데 밤중에 천신(天神)이 내려와서 만들기를 끝마치고 돌아갔다. 대성이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 남쪽 잿마루로 달려 올라가서 향을 살라 천신에게 공양하였다. 그래서 그 땅을 일컬어 향령(香嶺)이라 한다.”

이로 보면 경덕왕이 토함산에 화엄불국사를 지어 화엄불국세계를 지상에 구현(具顯)해 내려는 원대한 포부를 품었을 때 벌써 그 설계도 속에 석굴암이 불국사 못지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듯하다. 화엄불국사가 일체 경전에서 얘기하는 각종 불국세계의 총체적 집합체로서 전륜성왕으로 군림한 자신의 절대권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석굴암은 전대의 전륜성왕으로 자신의 절대 왕권 기반을 마련해놓은 부왕 성덕왕과 모후 소덕왕후의 불변하는 근원적 권능을 상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국유사’에서도 김대성이 전세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짓고 현세 양친을 위해 불국사를 지었다고 표현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근원적이고 불변적이며 신라 국토에 현실로 존재해야 한다는 세 가지 조건에 합당한 부처님을 석굴암의 주불로 삼아 성덕왕의 모습으로 재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신라화엄종에서는 종조(宗祖) 의상대사(義湘, 625∼702년)가 문무왕 16년(676)에 그 근본사찰인 부석사를 세울 때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신 전통이 세워져 있어 신라화엄종의 독특한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따라서 영원히 열반에 들지 않는다는 불변적인 요소를 지닌 아미타불상이 주불로 모셔질 가능성이 제기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미타불은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를 주재하는 부처님이 아니다.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주도하는 타방교주(他方敎主; 다른 지방의 교주)이시다. 그러니 신라 국토에 상주해야 한다는 조건에 맞지 않는다.

그 다음으로 가능성이 있는 부처님은 화엄불국세계의 구심점인 화엄교주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인데, 이 부처님은 법신불(法身佛)로 형상 없는 이념의 세계인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의 주불이시니 현실적인 존재여야 한다는 조건에 더욱 맞지 않는다.

이에 각종 불교 경전에 정통했던 경덕왕과 그의 측근 참모 내지 표훈, 신림 등 의상대사의 법통을 이은 신라화엄종 대덕들은 고심 끝에 석굴암의 주존을 기사굴산(耆山), 즉 영취산(靈鷲山) 석굴 속에 상주하여 영원히 열반에 들지 않고 있다는 석가세존을 택했던 듯하다.

‘신동아’ 20회에서 밝힌 바와 같이 ‘법화경’ 권5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서 석가세존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열반을 나타냈을 뿐 실제로는 멸도하지 않고 한량없는 세월 동안 영취산 상봉 석굴 속에 머물러 살아오고 계시며 또 영원히 이곳에 상주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영취산에 상주하시는 석가세존이라면 근원적이고 불변적이며 현실적이라는 세 가지 요건을 충분히 갖추게 된다. ‘화엄경’을 비롯한 일체 경전의 설주(說主; 말씀하신 주인공)이시니 근원적이라는 조건은 충분하게 되고, 영취산 즉 영산 정토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무수한 세월을 상주하신다고 하니 불변적인 조건도 충분하다.

따라서 인도의 영취산을 신라로 옮겨오기만 하면 되는데, 이미 낙산사나 금강산, 오대산 등을 신라 국토 안으로 옮겨다 놓은 경험이 있으니 영취산을 토함산으로 옮겨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 인도의 영취산은 마가다국 왕사성 동북쪽 14∼15리 지점에 위치했다 하니, 경주를 왕사성으로 생각하는 신라 사람들로서는 위치로 보아도 경주에서 동남쪽으로 40리 쯤 떨어진 토함산이 왕사성의 영취산과 비슷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성덕왕릉을 그 기슭에 쓰고 토함산에 화엄불국사 건립을 계획하였을지도 모른다.

사실 ‘법화경’을 비롯한 수많은 대승경전이 이 기사굴산, 즉 영취산 중에서 설해지고 있어서 불경을 많이 읽은 사람이라면 그 경전의 첫머리에서 항상 이 이름을 접해 무척 친근감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통도사가 있는 영취산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도처에 영취산이란 이름이 이미 번져가고 있었다. 그러니 신라 오악(五嶽) 중 동악(東嶽)에 해당하는 토함산을 왕사성의 동악인 영취산으로 인식하는 것에는 조금의 무리도 없었을 것이다.



인공 석굴을 조성한 까닭

당 태종 정관 20년(646)에 현장(玄, 602∼664년)이 지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권29 길속타라구타산(粟陀羅矩山), 즉 영취산 대목에서 그 산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궁성(宮城; 왕사성의 궁성) 동북으로 14∼15리를 가면 길속타라구타산에 이른다. 당나라 말로는 취봉(鷲峯)인데 또 취대(鷲臺)라고도 한다. 예전에는 기사굴산이라 했으나 잘못이다. 북쪽 산의 남쪽에 이어져서 외롭게 우뚝 솟아 있고 독수리가 이미 많이 깃들이고 있으며 고대(高臺)와 비슷하다. 하늘 빛과 푸르름을 서로 비춰 짙고 옅음이 나누어진다. (석가)여래께서 세상에 사시던 50년 동안 이 산에 많이 계시며 신묘한 법을 널리 설하셨다. (중략) 그 산정(山頂)은 동서가 길고 남북이 좁은데 서쪽 절벽에 기대 벽돌집 정사가 지어져 있다. 높고 넓고 제도가 기이하며 동쪽으로 그 문이 열려 있다. 여래께서 예전에 많이 계시며 설법하셨다고 한다. 요즘 설법상(說法像)을 만들었는데 크기는 여래의 몸과 같다.”

현장이 갔을 때인 636년경까지 이 영취산 정상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거하시던 곳인 벽돌집 정사가 남아 있고 그 안에는 석가모니 부처님 크기와 같은 장륙(丈六; 16자)의 설법좌상이 모셔져 있었다는 얘기다. 그 장륙설법좌상은 그 어름에 새로 조성했던 듯 ‘지금 만들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이어진다.

“정사 동쪽에 긴 돌이 있으니 여래께서 경행(經行; 좌선하다가 졸음을 막거나 운동을 하기 위해 일정 구역을 거니는 것)하시며 밟던 것이다. 곁에 큰 돌이 있는데 높이가 14.5자(당나라의 큰 자 1자는 30cm)가 되고 둘레가 30여 보(步; 1보는 151cm)이다. 이는 제바달다(提婆達多; 석가세존의 사촌아우로 석가세존을 시기하여 항상 해치려 하다가 지옥에 떨어져 죽었음)가 멀리서 부처님께 돌을 던져 공격한 곳이다. 그 남쪽 절벽 아래에 스투파가 있는데 예전에 여래께서 이곳에서 ‘법화경’을 설하셨다. 정사의 남쪽 산 절벽 곁에 큰 석실이 있는데 여래께서 예전에 여기서 선정(禪定)에 드셨다.”

이어서 시자인 아난(阿難)존자가 거처하던 석실과 10대 제자 중에서 지혜가 가장 뛰어나 경전을 설할 때마다 문답의 대상으로 선발되던 사리불(舍利弗)이 거처하던 석실이 남아 있는 것도 밝히고 있다. 실재하는 영취산의 형상을 묘사해 놓아 영산정토의 실상을 짐작하게 한 것이다. 이런 기록과 더불어 이곳을 참배하고 왔을 신라 출신 구법승이나 인도 출신 전도승들의 신심에 의해 윤색된 순례담(巡禮談)은 이 영산정토의 신비감을 더욱 고조시켜 나갔을 것이다.

그러니 ‘법화경’을 통해 영산정토의 분위기를 머리 속에 새겨 놓고 있던 석굴암 설계자들은 자연히 토함산 정상에 가까운 동쪽 절벽 아래에 그 영산정토를 구현해 내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토함산 정상 부근의 동쪽 기슭에는 인도의 영취산처럼 자연 석굴이 뚫려 있지 않았다. 그리고 석굴을 뚫을 만한 절벽도 없으려니와 절벽이 있다 해도 바위의 성질이 굳센 화강암이라 도저히 석굴을 뚫을 수가 없었다. 이에 그 단단한 화강암을 다듬어 석실을 지어낼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하에 석실을 짓는 것은 이미 고구려에서 봉토 석실 벽화분을 지은 경험이 있었으므로, 평양 이남의 영유권을 확실하게 보장받은 당시의 신라 조정이 그 기술의 확인이나 전수자를 확보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터이니 이런 기획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고구려 석실 고분은 그 천장 처리를, 4면에서 판석을 켜켜이 덮어 층급을 좁혀 내려오다가 마지막 단계에서는 네 모서리를 차례로 줄이면서 마름모를 만드는 형식으로 마무리짓는 소위 말각조정법(抹角藻井法; 모를 죽이고 마름모를 만드는 천장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무덤과 같은 석실일 경우 평면이 네모진 형태일 것을 전제로 하는 이런 천장 마감법은 짜임새로나 생김새 및 네 벽과의 어울림에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화엄경’을 비롯한 일체 불경을 설하여 갖가지 불국세계가 어우러진 화엄불국세계를 토함산에 재현케 한 주인공인 석가여래께서 상주하는 영산 불국토의 상징으로 조성되는 석굴암이 이런 통속적인 구조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천연동굴로부터 비롯된 수행생활 공간인 인도의 석굴사원과 인공으로 굴착하여 예배 대상을 조각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 중국 석굴의 특징을 종합하여 이상적인 불국세계를 꾸미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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