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의 방콕공항을 떠난 대한항공 여객기는 내가 그토록 그리던 희망의 땅 대한민국을 향하여 밤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기내 방송은 아침 7시 서울 도착 예정이라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파란 많은 3국에서의 탈북생활을 마감하고 수연(여자친구·가명)과 함께 서울로 가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산뜻한 유니폼을 입은 스튜어디스의 상냥한 서울말씨만이 내가 정말로 서울로 가는 여객기에 탑승하고 있음을 확인해줄 뿐이었다. 만감이 교차하면서 눈가에는 삶과 죽음의 고비를 끊임없이 넘어야 했던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눈물의 두만강을 넘어
북으로 가는 평양-청진행 열차는 가쁜 숨을 내쉬며 양덕고개를 오르는 듯싶더니 다시 정전(停電)이 되며 허허벌판에 멈춰서버렸다. 벌써 이틀째 열차는 거듭되는 정전과 낮은 전압 사정으로 몇 정거장 가지 못하고 정지하곤 했다. 열차 안은 땀내, 담뱃내, 음식내, 썩은 내… 등 갖가지 냄새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지경이었다. 주위에는 여행객으로 보이는 사람은 얼마 없고 식량 구입에 나선 것으로 보이는 초췌한 사람들이 통로를 가득 메워 화장실 출입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열차가 멈춰서자 열차 안은 순식간에 사람의 욕질소리, 아이들의 울음소리, 싸우는 소리로 아비규환이 되어버렸다. 얼마 후 열차가 다시 힘겨운 기적을 울리며 출발해서야 사람들은 조용해졌다. 유리마저 깨져 비닐로 대충 가린 열차 창문 쪽에서는 한겨울의 찬 바람이 우-우 소리를 내며 언 몸을 자꾸만 파고들었다. 그러나 한겨울 추위보다 내 가슴을 더욱 얼어들게 하는 것은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와 형제에 대한 근심과 닥쳐올 앞날에 대한 말 못할 두려움이었다. 이번 길은 여행도 출장도 아닌 5, 6년 전부터 계획한 탈북을 실천에 옮기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반세기가 넘는 김 부자의 독제체제에 속아 살면서도 그래도 남한보다는 북한이 우월하다는 북한당국의 선전을 아직도 믿고 계시는 어머니였다. 내가 탈북을 생각한 것은 93년경부터였으나 이때껏 탈북의 발길을 잡아온 것은 외아들인 나만 믿고 험한 인생살이를 견뎌 나가는 어머니였다.
누가 자신이 태어나고 친구들과의 우정이 깃들인, 더욱이 사랑하는 어머니와 형제가 있는 고향에 대한 애착이 없으랴마는, 나는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암담한 북한사회에서 더는 살고 싶지 않았다. 어느날 나는 오래 전부터 친구로 지내오던 수연에게 심중을 털어놓았다. 그와 함께라면 어떤 어렵고 험난한 길이라도 함께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연, 우리 탈출하자…. 여기는 더는 살 곳이 못돼. 우리 조금이라도 더 젊을때 자유세상으로 가는 거야….”
느닷없이 나의 탈북결심을 들은 수연은 깜짝 놀라며 처음에는 반대했다. 그러나 수연의 마음을 돌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나를 믿었고 세상 어디라도 함께 갈 수 있는 여성이었다.
우리는 “늦어도 21세기 첫 설날 아침은 자유세상에서 맞이하자”고 굳게 약속했고 수많은 나날을 함께 지내며 탈북 계획을 무르익혔다. 10여 년 전부터 들어오던 ‘KBS 사회교육 방송’과 ‘희망의 메아리’ 방송 등을 통해 남한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의 탈북경로와 중국의 정세를 점검하며 나름대로 탈북 라인을 그어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KBS 사회교육방송의 ‘통일열차’ 프로그램에서 탈북자를 전원 수용하는 것이 한국정부의 방침이라는 내용과 중국정부도 북한인의 대량 탈북에 대비해 수용소건물을 세우는 것이 포착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은 나와 수연의 탈북 결심에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개혁·개방에 박차를 가하는 중국은 발전한 남한과의 협조를 중시하는 실리 정책을 추구하여 북한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때문에 중국은 ‘중국 내 탈북자를 강제송환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우리는 중국에 알고 지내는 사람이 있어 잠시 머물 수 있고 미국에 계시는 친척들의 경제적 도움을 기대할 수도 있었다. 잘만 되면 그분들 덕에 미국이나 남한으로 직접 인도되기를 기대할 수 있었다. 우리의 탈북계획은 성공확률이 높아 보였다. 관건은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국경지역에서 북한 국경경비대의 단속에 걸리지 않는 것이었다.
‘갈탄 도시’ 청진
탈북 기회는 빨리도 찾아왔다. 97년 겨울, 우리는 평양에서는 마련하기 힘든 국경통행증을 지방 ‘ㅍ’시에서 구입할 수 있었다.
긴 기적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나 보니 열차는 드디어 종착역인 청진에 들어서고 있었다. 정상적인 운행이라면 하루가 걸릴 길을 꼬박 나흘이 다 돼서야 당도한 것이다. 온 도시가 갈탄을 주 원료로 사용해 ‘갈탄 도시’라는 별명이 붙은 청진역사에 열차가 도착한 것은 자정이 가까운 무렵이었다. 열차는 힘겹게 기적을 울리며 지칠 대로 지친, 남루한 차림의 사람을 갈탄에 찌든 컴컴한 역사로 토해내고 있었다. 역사 곳곳에는 ‘꽃제비’라 불리는 거지애들이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것이 보였고 구석에는 굶주림에 지쳐 죽은 듯 쓰러져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96년경부터는 북한의 어느 지역 역사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비참한 광경이었다.
역사 앞 도로는 집에서 만든 빵과 사탕 따위를 팔려는 장사꾼들로 북적거렸다. 도로 한쪽에는 젊은 처녀들이 줄줄이 서 있었는데 옆사람의 말에 따르면 여행객에게 몸을 파는 여인들이라 한다.
청진에서 떠나는 국경행 열차는 아침에 있기에 나와 수연은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기로 하고 여관을 찾았다. 이때 한 아주머니가 다가오며 잘 곳을 찾으면 자기 집으로 가자고 청했다. 흔히 ‘대기여관’이라 부르는 민박집 아주머니였다. 따라가보니 잠자리는 자기 집 윗방을 비워놓고 남루한 이불 몇 채 가져다 놓은 것이 전부였다.
자리에 들었으나 잠은 오지 않았다. 오만가지 상념과 두려움에 우리는 아침까지 뒤척이다 역사로 나갔다. 우리는 열차표(티켓) 파는 사람들에게 웃돈을 얹어주고서야 표를 구해 국경행 열차에 오를 수 있었다.
열차에는 늘어나는 탈북자 때문인지 승무안전원(경찰)의 국경통행증 검열과 증명서 단속이 매우 심했다. 아슬아슬한 단속을 몇 번 피하고 국경도시 ‘ㅎ’시에 당도한 것은 저녁이었다.
‘ㅎ’시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길림성과 맞닿은,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조그마한 도시였다. 국경지역이라 행인단속이 심해 우리는 어슬렁거리지 않고 약속한 집으로 소리없이 스며들었다. 그 집에서 일주일을 숨어 지내던 중 중국을 드나들며 밀수하는 사람과 선이 닿았다.
북한에서 마지막 밤
나는 그들에게 “미국 친척들을 만나 돈을 방조(원조)받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려고 하니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탈북하려 한다는 본심은 드러내지 않았다. 개중엔 북한 보위부의 앞잡이질을 하는 자가 있고 설사 마음이 바로 박힌 사람일지라도 후환이 두려워 탈북자를 도와주려고 나서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제의에 흔쾌히 응했지만 수연은 함께 갈 수 없다고 했다.
자기들이 아무리 길을 잘 안다지만 국경은 언제나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고 또 얼마 전에는 국경을 넘다 총에 맞은 사람도 있으며, 근래에는 국경경비가 몇 배로 증강돼 초소를 에돌아 산으로 강행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 친척을 만나 돈을 받고 다시 돌아올 것이라면 수연은 이 집에 있는 것이 안전하다는 주장에 반박할 말이 없었다. 계속 수연과 함께 가겠다고 주장하다가는 탈북하려는 것으로 의심받을 것 같아 일단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고 말았다. 방법은 내가 그들과 함께 중국으로 가면서 국경지형을 상세히 기억했다가 친척들을 만나고 다시 북한에 돌아와 수연을 데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내일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자리를 떴다.
중국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 저녁. 나와 수연은 잠자리에 누웠으나 잠들 수가 없었다. 내일은 과연 나에게 어떤 운명이 기다릴지? 수연과는 언제 재회할는지? 이런저런 생각에 헤매다가 수연에게 말했다.
“수연아, 넌 날 믿지? 어떻게든 성공해서 다시 널 데리러 올 거야…. 언제까지든 어떤 일이 있든 꼭 나를 믿고 기다려 줘….”
수연도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아침 약속대로 국경 안내자들이 나타났다. 우리 일행은 동구 밖까지 따라나오는 수연의 배웅을 받으며 국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일행은 국경초소를 피해 안내자들이 정한 두만강가로 가느라 산과 산을 넘는 행군을 계속했다. 행군 도중 우리는 가져간 주먹밥으로 점심식사를 하려고 인적 없는 산속에 둘러앉았다. 그때 국경안내자들의 배낭에서는 뜻밖에도 낳은 지 얼마 안 된 강아지 두 마리가 나왔다. 이유를 물으니 식량이 떨어져 중국 농가에 가 식량과 바꾼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강아지 두 마리로 식량을 바꿔오려고 위험한 국경행을 감행한 것이다.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또다시 행군을 계속했다. 그들은 산골에 단련되어서인지 하루종일 산길을 걷고도 별로 힘들어 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도시에서만 자란 나에게는 너무나 힘겨운 일이었다. 온몸의 힘이 다 빠져버린 나에게 그들은 조금만 더 힘을 내라며 산봉우리 하나만 넘으면 두만강이라고 일러주었다. 다시 힘을 내 산봉우리에 올라서니 드디어 어둠이 내려 깔리는 산 아래쪽으로 흰 눈이 쌓여 희끄무레한 두만강이 아찔히 내려다보였다.
우리 일행은 담배 한 개비씩 피워 물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가파른 산비탈을 따라 두만강으로 내려갔다. 경사가 어찌나 급한지 모두 미끄러지고 뒹굴며 겨우겨우 내려갈 수 있었다. 두만강가에 이르니 강폭이 산봉우리에서 내려다볼 때와는 다르게 퍽 넓어보였다.
우리는 두껍게 얼어붙은 두만강을 조심스레 건너기 시작했다. 두만강 중간쯤에 이르러 조금은 안도의 숨을 내쉬려는데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뒤쪽에서 “섯, 누구야? 쏜다” 하는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총기가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고요한 두만강가를 가르며 들려왔다. ‘국경경비대다’ 하는 생각이 뇌리를 치자 나는 온몸의 힘이 발 밑으로 쭉 빠져나가는 듯했다. 우리 일행은 반사적으로 뿔뿔이 흩어져 중국 쪽 강둑을 향해 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
얼어붙은 두만강은 미끄럽기 그지없었다. 세 번인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 젖 먹던 힘을 다해 중국 쪽 강둑에 붙었다. 뒤에서는 일행 중 누군가 넘어지는 소리와 국경경비대원의 악에 받친 고함소리가 잇따라 들려왔다. 있는 힘을 다해 첫째 강둑을 넘었으나 두려움과 긴장에 맥이 풀려 도무지 달릴 수가 없을 듯싶었다.
다시 마지막 힘을 다해 엎어지면 기고 기다가는 일어서 달리기를 반복하면서 강둑을 세 개쯤 넘어서고는 또다시 넘어졌다. 그래도 나는 계속해서 두만강을 뒤로 하고 갈대밭 쪽으로 기어갔다. 그리고는 맥을 놓고 쓰러져버렸다. 체포된다 할지라도 더는 움직일 힘이 없었다.
조금 후 정신을 차려보니 뒤따라오던 발소리가 다른 사람들이 달아난 쪽으로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주위에 쌓인 눈을 두 손으로 긁어모아 온몸을 덮기 시작했다. 체포될지라도 후회는 없게끔 최선은 다하고 싶었다. 한참을 주변의 눈을 긁어모으니 두 눈만 빼고 몸 전체를 덮을 수 있었다.
조금 있으려니 일행 중 누군가 붙잡혔는지 욕설과 함께 구타하는 소리, 비명소리가 공포에 질린 내 귀에 들려왔다. 그리고는 손전등으로 주변을 훑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국경경비대가 수색을 하는 것이었다. 숨소리마저 죽이려 애썼으나 심장이 쾅쾅 울리는 소리가 그처럼 요란하게 들려본 적은 내 일생에 한번도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숨소리를 죽여가며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두만강가로 멀어져 가는 불빛을 볼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도 발견될까 두려워 두 시간 가량을 눈속에 누워 있었다. 긴장이 풀리고 땀이 식자 이번에는 뼛속까지 파고 드는 1월의 강추위가 매섭게 온몸을 얼려왔다.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