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롭고 넓은 세계를 경험하고 다니는 청해진 뱃사람들을 상대하고 당나라에서 함께 유학한 선사들과 새 사회를 이끌어갈 새로운 이념 수립을 모색하는 일이, 이들을 이곳으로 유인하는 견인차 노릇을 하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이곳에 설립되는 남종선문을 신라조정으로 하여금 공인하게 하는 등 거중 조정 역할을 함으로써 선종과 신라조정 간의 적대관계를 해소해 나가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그래서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고려 태조 때 비로소 선문을 개설하는 수미산문(須彌山門)을 제외한 8개 선문을 신라 조정에서 공인하게 하는 빛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분명히 반(反)신라적 기치를 들고 지방호족들을 부추기며 장보고의 잔존 세력인 청해진 세력과 밀착해 그들의 이념기반이 되어주는 것이 남종선이었다. 그런데도 신라 조정에서는 이를 공인하고 그 중심인물들인 각 선문의 조사들을 신라왕들이 왕사로 떠받들다가 돌아가면 시호와 탑호를 내리고 비문을 지어 탑비를 세우게 했다.
일을 이렇게 이끌어간 것은 당나라 유학생 출신 관리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입김이 얼마나 막강하였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더욱이 그들은 당나라에서 연마하고 돌아온 탁월한 문장력과 해박한 학식을 바탕으로 선사들의 탑비문을 직접 지어 이 시기 탑비미술을 극치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글씨와 문장을 겸비한 이는 의 비문(도판 2) 전반부를 쓰고 양양 의 비문을 지은 김원이라고 보아야 한다. 김원이 홍각선사탑비문을 지은 때가 헌강왕 12년(886)이라 하였는데 이때 김원의 관직은 유림랑수병부낭중겸숭문각직학사사비어대(儒林郞守兵部郞中兼崇文閣直學士賜緋魚袋)라 하였으니 당나라 유학생 출신으로 빈공과에 급제했던 인물임에 틀림없다.
선림원 터는 강원도 양양군 서면(西面) 황이리(黃耳里) 미천곡(米川谷)에 있다. 현재 이곳에는 홍각선사 이관(利觀, 814∼880년)의 부도인 보물 제447호 (도판 3)와 보물 제446호 (도판 4)가 남아 있다. 그러나 부도는 기단부까지만 남아 있고 비석은 비신을 잃은 채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
그런데 기단부까지만 남아 있는 부도가 이제까지 보아왔던 부도 형식과 매우 다르다. 상대와 하대를 앙련대(仰蓮臺; 위로 피어난 연꽃 모양의 좌대)와 복련대(覆蓮臺; 아래로 뒤집어진 연꽃 모양의 좌대)로 표현하여 연화좌를 상징하고, 복련대를 8면석으로 다시 받치면서 8면에 안상(眼象)을 새기고 그중 사방에 해당하는 4면에만 사자를 두 마리씩 돋을새김으로 장식하여 사자좌를 상징하였다.
이것만으로도 특이한데 중대석에 이르면 상촉하관(上促下寬 : 위로 갈수록 좁아지고 아래로 갈수록 넓어짐)의 높은 원통형 몸체 위에 높은 돋을새김으로 운룡문(雲龍文; 구름 속에 잠긴 용무늬)을 장식했다. 수미좌를 상징한 내용이다.

우리의 고유한 8각당형 부도양식의 시원이라고 할 수 있는 (제25회 도판5) 양식 이래 기단 중대석은 짧고 좁게 표현되어 연꽃대와 같은 의미를 상징해 왔다. 부도를 사자 등으로부터 일어나는 구름 속에서 피어나는 한 송이 연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래서 가는 꽃대 위에 넓은 꽃송이를 달고 하늘거리는 경쾌성이 돋보였던 것인데, 여기에 이르러서는 마치 죽순(竹筍)처럼 땅에서 솟아오르는 맹렬한 기세를 자랑하듯 표현하여 그 의장(意匠)에 일대 혁신을 기도하였다.
사실 이런 기미는 이미 884년에 세워진 에서 보인다. 중대석이 높고 커지면서 북통처럼 배흘림 형식을 취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이 그보다 2년 뒤에 세워진 에 이르러 이와 같이 운룡문을 장식한 상촉하관의 원통형으로 바뀐것이다. 거기에다 높고 커져 중대석이 기단부의 중추를 이루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복련대의 출현과 중대석의 고대화(高大化; 높고 커짐)는 더 이상 부도를 한 송이 연꽃으로 이해하고 느낄 수 없게 만들었다. 이를 계기로 부도양식은 일변하여 경쾌성이 사라진다. 이런 의장(意匠)은 863년경에 이루어진 (제26회 도판 1)의 운당초사자문(雲唐草獅子文; 국화잎새 사자무늬) 중대석을 염두에 둠으로써 출현했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이런 부도형식이 출현하자 이후의 모든 부도 양식이 이 영향을 받아 중대석을 확대하여 8각당형의 탑신을 압도하거나 최소한 그와 맞먹는 규모를 보인다. 그래서 조선시대로 들어와 부도가 파괴되었을 경우 이 한 쌍의 석재가 짝을 이루어 연자방아로 쓰이는 수난을 당하기도 한다.
한편 중대석에 운룡문을 돋을새김하는 형식은 홍각선사가 속해 있던 봉림산문(鳳林山門; 慧目山門이라고 해야 옳음)의 전통양식이 되어 이후 이 산문의 근본사찰이던 여주 혜목산 고달사(高達寺)를 중심으로 전국에 확산된다.
선림원(禪林院)터 탑비와 월광사(月光寺)터 탑비

선림원터 홍각선사탑비의 비문글씨(도판 5)는 운철(雲徹)이라는 승려가 왕희지(王羲之, 321∼379년)의 글씨를 집자해 썼다. 그런데 왕희지체가 유행하던 불국시대에 집자된 나 에 비해 글씨 크기도 작고 각법(刻法; 새기는 솜씨)도 졸렬하여 그 품격이 크게 떨어진다. 선종이념을 기반으로 새 사회를 건설하려는 기운이 싹트는 상황에서 보수적인 서체를 그대로 고수하려 하니 이와 같은 노쇠현상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왕조 중기 이래로 왕희지체를 숭상하는 풍조가 크게 일어나면서 이 왕희지체 집자비는 그 품격 여하를 떠나 왕희지체 집자비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탁본의 수난을 겪게 되고 이를 견디다 못한 인근 백성들이 결국 비석을 파괴하여 묻어버렸던 듯하다. 이후 그중 한쪽이 영조 51년(1778)에 발견되어 양양군 관아로 옮겨졌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해 경복궁으로 옮겨져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으로 보존되고 있다.
이수와 귀부는 현재도 양양 선림원터에 남아 있으니 보물 제446호 (도판 4)가 그것이다. 884년에 조성된 (제25회 도판 1) 양식과 가장 비슷하여 귀부의 용머리 형태나 여의주를 보이지 않게 숨기려는 듯 다물고 있는 입 표현 등이 거의 같고 앞발로 몸을 끌어당기는 듯한 힘찬 순간동작 표현도 비슷하다.
다만 홍각선사비의 귀부에서는 앞발로 땅을 찍어 당기는 듯한 모습이고 보조선사비에서는 물을 헤쳐나가는 듯한 모습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홍각선사비의 귀부 앞발에는 구름이 감겨 있고 용머리 앞이마에 뿔이 박혀 있었던 듯 깊고 긴 홈이 패어 있다. 가장 크게 차이 나는 것은 비신꽂이 부분이다. 보조선사비가 구름무늬로만 표면 전체를 채워 놓고 있는 데 반해 홍각선사비는 귀갑과 맞닿는 맨 아랫단에만 구름무늬장식을 붙이고 그 윗단은 안상으로 장식하여 장식효과를 추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수( 首)는 서로 달라서 홍각선사비에서는 두 마리 용이 액자(額子)처럼 생긴 전액판(篆額板)을 사이에 두고 몸을 일으켜 서로 다투는 듯한 표현을 하고 있다. 용의 표현은 홍각선사탑 중대석의 용 모습과 똑같고 구름도 마찬가지다. 전액판에는 ‘홍각선사비명(弘覺禪師碑銘)’이라는 여섯글자의 전서가 두 줄로 내리 쓰여 있다.

이 비문을 지은 사람은 헌강왕 10년(884)에 세워진 를 썼던 김영(金穎)이다. 보조선사 체징(體澄, 804∼880년)이 돌아가고 나서 헌강왕 9년(883) 3월15일에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기 시작하여 그 해에 이를 끝마쳤던 듯, 비석은 그 다음해(884) 9월19일에 세워진다.
이때 그의 벼슬은 조청랑수변부사마사비어대(朝淸郞守邊府司馬賜緋魚袋)였다. 6년이 지난 뒤인 진성여왕 4년(890) 9월15일에 세워지는 에서는 조청랑수금성군태수(守金城郡太守)사비어대로 벼슬이 올라 있다. 조청랑과 사비어대는 당나라와 관계 있는 벼슬이니 변동이 없고 수변부사마에서 금성군태수로 바뀌었으니 그 동안에 승진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는 충북 제천군 한수면(寒水面) 송계리(松界里) 월광사(月光寺) 터에 있었던 것을 1922년에 일제가 경복궁으로 옮겨와 지금은 그곳에 있다. 보물 제360호인 이 탑비는 886년에 세워진 양식과 884년에 세워진 양식을 계승, 절충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수에 용머리가 입체적으로 돌출한 것은 보조선사창성탑비를 계승한 것이고, 귀부에서 비신꽂이에 구름무늬와 안상 조각을 장식한 것이나 용머리 형태의 거북머리 표현 등 몇 가지 특징은 홍각선사탑비를 계승한 것이다. 입을 다물어 이빨만 보이게 한 것이라든가, 이마에 무엇을 꽂았던 구멍을 남긴 것이 그것인데 구멍 크기는 훨씬 작아져서 세련된 면모를 보인다. 귀갑문에서도 장식 효과를 보태기 위해 모란꽃과 같은 한 송이 꽃무늬를 돋을새김해 넣었는데 그 자리가 일정치 않아 오히려 경직된 느낌을 덜어주고 있다.

석재도 귀부와 이수는 발 고운 백색 대리석을 택하고 있다. 비문의 글씨는 오등산(五騰山) 보리담사(菩提潭寺) 승려인 석순몽(釋淳蒙)이 썼다 하였는데 구양순체의 해정한 글씨다(도판 7).
는 1916년경 일제의 고적 조사 시기에도 이미 파괴되어 있었던 듯,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권4의 463쪽에 실린 사진에서 지대석과 앙련대, 복련대 등의 기단 상·하대석만 확인할 수 있다. 1975년 정영호(鄭永鎬) 선생이 조사했을 때도 그 모습 그대로였다고 한다. 아마 중대석과 탑신석이 비슷한 크기의 8각돌이었기 때문에 무지한 촌부들이 연자방아로 쓰기 위해 빼내갔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이 는 887년경에 세워진 (도판 8) 양식과 비슷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