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서 기왕의 비문들을 모두 섭렵하여 그 장단점을 분석하고 문투의 중복과 답습을 가려내는 등 면밀한 검토를 거친 후에 남들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학문적 함축을 바탕으로 유려한 4·6변려체(四六騈儷體)를 빌려 이 비문을 비단 짜듯이 엮어냈던 것이다.
우선 비문의 앞부분에는 선종 출현의 배경을 사상사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 그러자니 최치원 당시까지의 우리나라 사상사의 흐름을 간결하게 요약한 결과가 되었다. 이 시대 이전의 구체적인 역사 기록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현재로서, 이 시대 이전의 사상사 흐름은 이 지증대사 비문을 통해서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최치원이 8년을 고심한 까닭이 어디에 있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이 비문이 지어졌을 때는 이미 견훤이 전라도 지역을 차지하고 백제 건국을 표방하였기 때문에 각처에서 반란이 속출했다. 따라서 비석을 세울 형편이 아니었다. 최치원이 37세 때인데 이때 최치원은 부성군(富城郡; 지금의 충남 서산) 태수로 나가 있었다 한다. 아마 그곳에서 이 비문을 완성했을 듯하다. 비문이 문경 희양산 봉암사에 전해질 수도 없는 형편이었을 것이다. 이때 조정에서는 최치원을 하정사(賀正使)로 삼아 당나라로 보내려 하였으나 때마침 흉년으로 사방에서 도적이 일어나 길이 막혀 가지 못하였을 정도로 치안이 어지러웠기 때문이다.

이해 7월에 지증대사의 법손인 정진(靜眞)대사 긍양(兢讓, 878∼956년)이 후백제 땅인 전주 희안현(喜安縣, 지금의 부안군) 포구로 귀국한 것도 우연한 일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도판 12)는 문경 희양산 봉암사에 남아 있는데 보물 제138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혜강이 쓰고 새겼다는 글씨(도판 13)는 예스럽고 전아(典雅)하며 맑고 깨끗한 품격을 지닌 왕희지체인데 (도판 5)의 왕희지 집자비 글씨보다 더 아름답다. (도판 14)은 헌강왕 9년(883)에 왕명으로 시호와 탑명이 내려질 때 바로 조성하기 시작하여 신라가 크게 어지러워지기 이전에 공역을 끝마친 듯 상당히 정교한 솜씨로 만들어냈다.
기본구조는 874년경에 만들어진 화순 (제25회 도판 9) 양식을 계승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려는 약간의 변화를 보였으니 이는 헌강왕이 부도 미술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을 능가하려는 오기로 설계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양식 기법을 보인 것으로 생각된다.
기단 하부 8면에 안상을 설치하고 그 안에 사자상을 돋을새김한 것과 그 위에 다시 구름무늬 한 층을 놓고 8모에 구름기둥을 세우며 그 사이 8면에 날개를 활짝 편 가릉빈가를 돋을새김하여 중대석을 받치는 것은 분명 철감선사의 2단 구름무늬 사자좌 하대를 명쾌하게 정리해준 표현이다.

기단 상대인 연대는 앙련 위에 씨방을 상징하는 난간대가 표현되면서 탑신석을 받게 되어 있다. 그런데 탑신석이 기단 중대석보다 규모가 작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아 부도가 죽순 모양으로 땅속으로부터 솟아오르는 느낌이 들어 몸통은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옥개석의 물매가 갑자기 넓어져서 균형을 깨뜨리고 있다. 중대석이 좁고 가늘어 경쾌한 느낌을 자아내게 하던 철감선사탑 양식을 충실하게 계승했으면서도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게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옥개석 물매 표면에 기와골을 생략한 것도 여기서부터 비롯된 양식이다. 옥개석 물매가 탑신석보다 지나치게 넓은 결과 무게와 넓이를 지탱하지 못하고 상당부분 떨어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