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디는 골퍼에게 조언과 지원을 아끼지 않는 유일한 우군(友軍)이다. 플레이어와 일심동체인 캐디는 플레이어와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골프 종주국인 영국 세인트 앤드루스(Saint Anderws) 골프클럽이 1775년에 제정한 ‘캐디헌장’의 일부다.
1만여 명에 이르는 우리나라 골프장 캐디들이 줄기차게 주장해온 것도 ‘캐디의 정당한 위상 확립’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아직도 ‘짐꾼’ 취급을 받으며 열악한 근무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한 실정이고 보면 ‘골퍼와 동등한 권리’는 요원해 보인다.
‘특수 고용직은 근로자가 아니다’는 근로기준법의 벽을 뚫고 최근 사업주와 단체협약을 체결한 전국여성노동조합 88컨트리클럽(경기도 용인시) 캐디 분회는 사측에 안경 착용 허용, 생리·출산휴가 보장, 성희롱 예방 등을 요구했다. 하나같이 상식적인 내용이라 이런 것들이 어떻게 ‘요구조건’이 됐는지 의문스럽다. 그중에서도 안경 착용을 허용해 달라는 노조의 요구는 어이없다. 그래서 신윤자(44) 분회장에게 설명을 청했다.
“시력이 나빠 안경을 껴야 하는 사람이 요즘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단지 ‘건방져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안경을 못 끼게 하는 겁니다. 뜨거운 햇볕 아래서 오랜 시간 필드를 돌아야 하는 캐디들이 하루종일 안경 대신 렌즈를 끼고 있어 결막염이나 각막 손상 등 각종 안질환에 시달리고 있어요. 터무니없는 편견 때문에 캐디들에게 그런 고생을 시킨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이른바 ‘특수 고용직’이라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없는 전국 150여 개 골프장 캐디의 상당수가 이런 부당한 대우와 고용불안에 시달린다. 골퍼들에게 짐꾼이나 심지어 ‘몸종’ 취급당하기 일쑤인 캐디들은 “골프 못 치는 사람은 용서해도 매너 없는 사람은 용서 못 한다”고 입을 모은다.
‘경기보조원’으로 불러주세요
골프 대중화시대에 접어들었다는 2001년 대한민국의 골프문화는 한마디로 ‘수준 이하’이며, “골퍼 10명 중 7명은 매너가 엉망”이라는 게 캐디들의 말이다.
“골프장에서 일하기 시작한 20여 년 전만 해도 밖에 나가서 직업이 캐디라고 말 못했습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날려댄 공이나 주워 담는 밑바닥 인생으로 비쳤으니까요. 접대부쯤으로 여기며 색안경을 끼고 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사정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요.”
그래서 캐디 경력 22년인 김경숙(41)씨는 일정 부분 편견이 내포된 ‘캐디’라는 이름보다 ‘경기보조원’이나 ‘도우미’쯤으로 불러 주었으면 한다.
김씨의 일과는 내장객 수가 많고 적음에 따라 새벽이 될지 오후가 될지 모르는 불확실한 출근으로부터 시작된다. 회사가 지정한 순번에 따라 부킹시간보다 한 시간 앞서 출근하면 먼저 캐디 대기실에서 서둘러 경기에 필요한 용구를 챙긴다. 팬잔디를 보수할 흙주머니와 잔디 보수기, 볼타월과 볼마크(볼 낙하지점을 표시하는 도구) 등은 경기를 진행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 무더운 여름날엔 손님을 위해 얼음물통을 준비하는 일도 캐디의 몫이다. 그는 매일 집에서 밤새 냉동실에 넣어둔 얼음물통을 챙겨 온다.
18홀 골프장에는 라운드를 돌다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식사를 하는 그늘막이 서너 군데 있다. 이곳에 도착하면 김씨는 종종 손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캐디의 식대를 회사가 부담하는 곳도 있지만 김씨의 골프장에선 캐디가 자기 돈으로 밥을 사먹어야 한다. 음식을 싸오는 캐디도 있지만 카트가 무거워 빈손으로 오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밥을 사먹으면 손님들이 종종 밥값을 치러주는데, 괜히 부담을 떠넘기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 속도 편하지 않다.
“하루종일 무거운 카트를 끌고 그린을 오르내리다 보면 뱃속에 거지가 들었다는 표현이 딱 맞을 만큼 허기집니다. 아무리 먹어도 돌아서면 배고픈 게 우리 일이에요. 그런데 손님이 음식값을 내니까 양껏 먹고 싶어도 눈치가 보입니다. 그렇다고 도시락을 싸오자니 손님들 앞에서 궁상 떠는 것 같고….”
더러는 “캐디가 밥을 너무 많이 먹는다”고 투덜대는 손님도 있다. 그럴 때면 부끄럽다기보다는 서글프다. 캐디들은 그늘막을 지날 때 “배에 잔뜩 기름 낀 사람들이 허기진 우리 속을 어떻게 알까” 하는 생각에 씁쓸해진다.
용구 준비가 끝나면 김씨는 캐디를 관리하는 마스터실에 올라가 자신에게 배당된 예약티켓을 받고 고객의 이름표가 붙은 골프가방을 찾아 카트에 옮겨 싣는다. 김씨가 골프채를 닦을 물을 준비하고 볼타월을 적시는 동안 손님이 티오프하는 곳에 인접한 티박스로 내려오면 소지품을 받아 카트에 싣고 그린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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