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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그 역동적 세계와 미디어를 통해 연결돼 살아간다. 역동적 세계는 나뉘고, 분리되고, 다시 미디어로 연결된다. 분리됐다가 다시 연결된 세계는 이전보다 더 역동적으로 확장된다. 더 많은 사람을 더 커진 세계와 연결하는 이 과정은 때로 냉정하고 폭력적이다. 전쟁이나 팬데믹 같은 대재앙이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을 촉진해 인간이 세계와 만나는 방식을 바꾸기도 한다.

1068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프랑스 캉의 생테티엔 수도원 성당 전경. 위키피디아
중세 ‘성당’ = 신의 세계 전달한 ‘미디어’
8세기 후반, 샤를마뉴가 통일한 프랑크 세계의 교회에선 라틴어로 표준화된 그레고리오성가가 불렸다. 그러자 각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하던 다양한 언어의 교회 성가들이 사라졌다. 토착어 대신 라틴어를 쓰는 수도원과 성당은 중세인들을 일상생활에서 분리했다.중세 교회는 음악을 통해 중세인들과 교회를 다시 연결했다. 10세기 후반 서유럽 전역에 걸쳐 로마네스크 양식의 수도원과 성당이 빠르게 확산됐다. 베네딕트 수도회, 클뤼니 수도원, 시토회 등의 수도원 운동이 조직적인 수도회 네트워크를 구축하면서 수도원과 성당이 모범적 양식에 따라 건축됐다. 벽을 두껍게 쌓고, 반원형의 아치를 사용해서 무게를 분산한 결과, 높은 천장을 갖게 된 로마네스크 수도원과 성당은 어둡지만 소리의 반향이 좋은 내부 구조를 갖게 됐다. 단선율의 그레고리오성가는 깊은 울림을 통해 이 아름다운 건축물과 조화를 이뤘다.
중세의 ‘성당’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낙원에서 쫓겨난 인간에게 신의 세계를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해주는 ‘미디어’였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성당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신의 세계와 연결되는 경험을 했다. 이 시대에 사람과 세계를 연결하는 또 다른 미디어로 ‘책’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을 읽지 못했고, 성경은 라틴어를 읽고 말하는 사람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중세 사람들은 대부분 평생 글을 배울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들에게 기리에(Kyrie)는 그리스어이고, 이어지는 글로리아(Gloria)와 상투스(Santus)는 라틴어라는 것은 큰 의미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교회의 전례 중에 뒤늦게 통상미사에 포함된 신앙고백인 크레도(Credo)의 긴 라틴어 가사를 제대로 알아듣는 이는 사제들뿐이었다.
중세인들은 성당 벽에 조각된 성인들의 모습과 스테인드글라스 위에 표현된 예수의 탄생과 고난, 성모의 슬픔을 보면서 노래를 들었다. 그들은 그 노래가 천장에 닿아 아름다운 화음으로 성당을 채우는 순간 천장에 그려진 하늘나라를 보았을 것이다. 이곳에서 노래는 스스로 의미를 드러냈고, 그 순간 예배에 참여한 신자들은 뜻 모를 라틴어를 알아들었다. 성당이라는 미디어를 지배하는 교회는 중세 유럽 세계를 지배했다.

프랑스 베네딕도회 수사 12명이 910년 로마네스코 양식으로 지은 클뤼니 대수도원. Gettyimage
다성음악과 함께 시작된 권력구조의 변화
12세기 프랑스에 유럽에서 가장 큰 노트르담 대성당이 지어지고 최초로 다성음악이 등장했다는 것은 당시 세계의 지배 권력이 변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랑스의 왕권이 교황의 권위를 능가하기 시작하면서 교황청이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겨졌다. 우여곡절 끝에 교황은 다시 로마로 돌아갔지만 한동안 로마교회에는 2명의 교황이 존재했다. 서유럽의 정치적 구심점이 로마와 파리로 나뉘면서 세계에는 여러 개의 중심이 존재하게 됐고, 세계는 좀 더 입체적으로 변화했다.중세의 미디어였던 성당은 다성음악을 품으면서 공간의 새로운 차원을 열었다. 신을 중심으로 하나의 선율로만 채워지던 평면적 공간이 입체적 공간이 됐고, 르네상스 시대가 가까워지면서 소리로 만들어지는 입체적 공간은 더욱 정교해졌다. 대위법이 발전하면서 독립적인 각 선율이 조화를 이뤘고, 음향의 구조는 입체적 도형을 다루는 복잡한 기하학처럼 발전했다. 기욤 뒤페(Gillaume Dufay·1397~1474), 질 뱅슈아(Gilles Binchois·1400~1460), 요하네스 오케겜(Johannes Ockeghem·1410~1497) 같은 뛰어난 작곡가들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음악을 통해 일상에선 체험할 수 없는 세계를 경험했다.
음향 구조가 입체적으로 변모하자, 같은 연주를 듣고도 다른 선율에 집중해 특별한 감동을 느끼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성당은 음악을 감상하는 곳이 됐고, 음악을 통해 사람들을 새로운 세계에 연결하는 미디어로 변모했다. 중세의 갇힌 세계가, 같은 음악을 들어도 다른 감동을 느낄 수 있는 르네상스 세계로 확장되면서 권력의 중심이 재편되고 있었다.
미디어의 변화, 세계 연결 방식과 권력구조 변화시켜

프랑스 파리를 상징하는 건축물 중 하나인 노트르담 대성당. Gettyimage
그러나 손으로 옮겨 적은 악보의 필사본은 여전히 한정된 세계 안에서 유통될 수밖에 없었다. 15세기에 등장한 인쇄술은 악보의 대량 복제를 가능하게 만들었고, 악보는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벗어나 다양한 지역과 다른 시대의 연주자와 청중에게 음악을 전달하는 미디어가 됐다.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미사를 스웨덴에서도 연주할 수 있었으나, 훈련된 연주자가 필요했다. 복잡한 다성 합창음악 대신에 연주자를 훈련하기 쉬운 현악기와 건반악기를 중심으로 기악음악이 발전했고, 3대의 현악기와 건반악기인 하프시코드만으로 연주할 수 있는 트리오 소나타가 인쇄돼 인기를 얻었다. 인쇄된 악보는 음악을 하나의 고정된 장소에서 벗어나게 만든 최초의 대중적 미디어였고, 이 미디어는 음악 양식을 변화시켰다.
인쇄된 책과 악보는 교회가 독점하고 있던 지식과 음악을 대중화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가 독점하던 권력도 분산시켰다. 인쇄술은 정보를 교회의 울타리 밖으로 끌어내 일반 대중과 연결했다. 15세기 말과 16세기 전반에, 라틴어 성경이 독일어와 영어, 프랑스어와 체코어로 번역돼 출판됐다.
신에 대한 지식도 공동체의 제약을 벗어나 ‘읽기’를 통해 전달됐다. 17세기 후반과 18세기에 중국어로 번역된 가톨릭 교리 책자는, 18세기 후반이 되자 성당과 성직자가 없는 조선에도 전해져 자생적 신앙 공동체를 만들었다. 정보와 지식이 성당 밖으로 확산하면서 교회의 권력은 약화됐고, 종교개혁과 근대 시민사회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미디어의 변화가 세계가 연결되는 방식과 권력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국가가 지배하는 미디어 등장
라디오 방송 기술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군사적 목적으로 급격히 발전했다. 항공기, 잠수함과의 교신이나 작전과 명령의 전달을 위해 전파를 이용한 통신은 필수적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전쟁 중에 개발된 기술을 민간 기업이 사용하면서 본격적 라디오방송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주파수는 국가의 소유였고, 국가로부터 주파수의 사용을 허가받아야 하는 라디오방송사는 국가의 지배와 영향 아래에 있었다. 전쟁 이후엔 방송과 함께 녹음 기술도 발전했고, 음악은 음반 형태로 복제돼 방송을 통해 대중에게 전달되기 시작했다.그런데 복제 기술인 사진이 등장했을 때 그림을 촬영하는 것은 규제된 데 비해, 녹음된 음악을 방송을 통해 공유하는 것은 쉽게 허용됐다. 1928년에 ‘공연자, 음반 제작자 및 방송 기관의 보호를 위한 로마 협약’이 체결됐다. 방송사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약이었다. 대부분의 라디오방송사들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국가 주도로 설립된 공영 라디오방송이었고, 국가 간에 맺어지는 국제협약에서 국가의 이익이 우선시되는 것은 당연했다.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은 자신의 음악이 라디오에서 방송되는 것을 막을 수단을 잃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연주할 수 있는 공간마저 찾을 수 없게 된 유럽의 음악가들은 국민과 병사들을 위로하는 도구로 동원됐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음악가들의 권리는 희생됐다. 반면 회화는 미디어로 전달되는 예술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쟁과 국가의 지배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수많은 나라를 연결하는 미디어가 태어나는 과정에서 음악가들의 권리는 희생됐고, 음악은 급격히 표준화됐다. 그 결과 1937년에 카네기 홀에서 연주한 베니 굿맨의 ‘Sing Sing Sing(싱싱싱)’이 수록된 음반은 도쿄를 통해 경성에 도착했고, 1939년엔 목포의 눈물의 작곡자 손목인 선생이 리갈레코드에서 우리말 가사로 번안한 ‘싱싱싱’을 취입할 수 있게 됐다.
음악은 표준화된 결과 대량으로 복제돼 세계 어느 곳으로나 전달이 가능해졌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고유한 감각과 표현이 지워졌다. 라틴어로 교회 성가가 표준화되는 과정에서 각 민족의 언어가 가진 고유한 억양과 뉘앙스가 희생됐고, 음이 음표로 기록되는 과정에선 표준 음정 사이에 존재하는 미세한 목소리의 떨림과 탄식이 삭제됐다.
바흐의 평균율은 피타고라스의 순정률이 가진 자연스러운 화성 감각을 제거했고, 베토벤은 기악과 성악의 경계도 허물었다. 녹음과 방송은 소리를 전기 신호로 변환하면서, 고딕 성당 같은 아름다운 건축물 안에서 공기와 빛이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공간 감각을 희생시켰다. 그리고 음악가들의 권리마저 국가의 이익을 위해 희생됐다. 인간이 미디어를 통해서 세계를 만나게 되기까지 세계는 먼저 연결돼야 했고, 그 과정은 때로 냉정하고 폭력적이었다.
미디어가 된 AI 지배하는 자, 세계 지배할 것
아날로그 시스템에서는 음악이 전기신호의 형태로 선을 타고 헤드폰으로 직접 전달됐다. 불편하지만 손으로 다이얼을 돌리고, CD를 교체했다. 그러나 디지털로 데이터화된 음악은 블루투스나 와이파이, 인터넷, 5G 네트워크를 타고 수없이 복제, 전송되고 저장된다. 블루투스 헤드폰이나 스피커는 이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해석해 내가 선호하는 스타일의 소리로 변환한다. 인간의 뇌에 칩을 이식하는 기술이 현실화하기 직전 단계에서, 블루투스 이어폰을 통해 듣는 음악은 인간의 뇌에 가장 가까이 다가온 데이터다. 이제 음악은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의 경계를 넘어 보편적 맥락 속에서 취향을 학습하는 알고리즘에 의해 분류되고 추천된다. 음악은 듣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로 예측되고 소비되는 대상이 됐다.음악이 기보되고 표준화하면서 데이터가 되는 과정이, 인공지능(AI)을 통해 언어와 지식이 데이터가 되는 과정에서 반복되고 있다. 중세의 성당에선 모든 언어가 라틴어로 표준화돼 그레고리오성가로 불리면서, 성당이 인간과 신의 세계를 이어주는 미디어가 됐다. 그리고 이제 AI는 모든 언어 간 장벽을 허물고 언어를 데이터로 만들면서 인간을 세상의 모든 지식과 예술로 이어주는 미디어가 됐다. 인간과 신의 세계를 이어주는 성당을 지배한 교회가 중세를 지배했듯, 인간과 세계의 지식을 연결하는 AI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전쟁 이후 새로 등장한 미디어인 방송을 국가가 주도하면서 음악가의 권리가 희생됐듯이, 국가들이 각자의 역량을 총동원하는 인공지능 개발 경쟁 속에서 많은 희생이 있을 것이다. 언어를 다루는 사람들, 특별히 선생님과 학생들의 권리와 노력이 보상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수많은 창작자와 자료 관리자의 일자리를 AI가 대신하겠지만, 특별한 기술이 없는데도 의사결정 과정과 창작 과정을 복잡하게 구성해서 독점을 유지하던 많은 불합리도 사라질 것이다. 기악 음악이 발달하고 정교한 악보가 유통되면서, 목소리에 재능이 없어도 악보를 다양하게 해석하는 스타일리스트가 등장했다. 이제 강연자들은 인공지능을 잘 활용해서 강연에 재능이 없어도 뛰어난 강연 영상을 만드는 창작자들과 경쟁해야 할 것이다.
분리돼 있던 것들을 다시 연결하면서 등장하는 미디어가 이전의 것들을 모두 파괴하지는 않는다. 다만 새로운 미디어가 사용하는 수단이 이전보다 고도로 추상화되는 까닭에 전 시대의 가치를 고집하는 것이 의미를 잃게 될 뿐이다. 인공지능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전 세계가 정치적, 사상적으로 양극화돼 있다. 바흐의 평균율로 C장조와 f#단조 간의 차별이 사라졌듯이, 이제는 극단적 대립을 넘어서 새로운 차원의 가치를 기준으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해야겠다. 결국에는 대립을 만들어내는 정의나 옳고 그름 같은 기준이 아니라, 아름다움이나 세련됨처럼 누구나 교육과 훈련을 통해 다다를 수 있는 가치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