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호

우리가 몰랐던 ‘열 살 고아’ 바흐의 기막힌 삶

[음악으로 보는 세상] 20명 자녀 이끌고 여러 도시 전전한 ‘음악의 아버지’

  • 김원 KBS PD·전 KBS 클래식 FM ‘명연주 명음반’ 담당

    입력2026-02-11 07: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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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바로크 시대 작곡가 바흐는 두 번 결혼해 모두 20명의 자식을 뒀지만, 성인이 된 자식이 열 명뿐이다. 첫 번째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와는 4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낳았고, 바르바라와 사별한 후 재혼한 안나 막달레나와의 사이에선 7명의 아들과 6명의 딸이 태어났다. 이 중 6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이 살아남아 성인이 됐다. 아들 넷은 유명한 음악가가 됐고,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한 명은 평생 가족의 돌봄을 받다가 24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열 살에 고아가 된 바흐는 20명이 넘는 대가족의 가장으로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독일의 음악가이자 작곡가인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1685~1750)가 1725년경 오르간을 연주하는 모습. 영국 박물관이 소장한 판화에서 발췌한 사진. Gettyimage

    독일의 음악가이자 작곡가인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1685~1750)가 1725년경 오르간을 연주하는 모습. 영국 박물관이 소장한 판화에서 발췌한 사진. Gettyimage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1685~1750)는 그가 남긴 업적처럼 화려한 삶을 살지 못했다. 열 살 되던 해에 부모를 여읜 후에는 독일 튀링겐의 작은 도시인 오어드루프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일하던 열네 살 위의 형과 5년간 함께 살았다. 오어드루프에서 바흐는 교회의 합창단원으로 일했고, 지역 학교에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웠다. 

    고아가 된 후 형의 집에서 더부살이

    이 시절 바흐가 어떤 집에서 살았는지는 구체적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당시 시대 상황을 토대로 추측해 보면 작은 도시의 오르간 연주자였던 형의 집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종교전쟁으로 황폐해진 17세기 말, 독일 소도시 교회에선 오르간 연주자 한 명이 혼자서 교회의 음악을 담당하는 일이 흔했다. 오르간 연주자는 안정적 직업이긴 했지만 여유 있는 주거 공간이 제공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형의 집에는 부부가 쓰는 침실 하나와 거실, 부엌, 그리고 자녀나 교회음악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쓰는 방 하나 정도가 있었을 것이다. 바흐는 형의 어린아이들과 함께 방을 쓰거나 거실 한쪽에 침대를 두고 지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시기에 바흐가 형의 악보를 허락 없이 필사하다가 압수당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형의 집에는 프레스코발디와 파헬벨의 악보, 북독일 오르간 악파의 귀한 악보들이 있었지만, 형은 어린 바흐가 이 악보들을 마음대로 보거나 오르간을 연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악보는 구하기 어려운 고가의 물건이었고, 오르간은 교회의 자산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바흐는 형의 악보를 달빛 아래서 몰래 베껴 쓰곤 했다. 사진은 ‘위대한 음악가들의 이야기’(1907)라는 책에 쓰인 작가 미상 삽화. Gettyimage

    어린 바흐는 형의 악보를 달빛 아래서 몰래 베껴 쓰곤 했다. 사진은 ‘위대한 음악가들의 이야기’(1907)라는 책에 쓰인 작가 미상 삽화. Gettyimage

    기록에 따르면 바흐는 형의 허락 없이 이 악보들을 밤에 몰래 꺼내 달빛 아래에서 베꼈다. 몇 달에 걸쳐 하루하루 정성스럽게 필사한 악보는 결국 형에게 들켜 압수당한다. 이 이야기를 조금만 깊게 들여다보면 바흐가 형의 집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추측이 가능하다. 형의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방에서 나와 거실에서 지내던 바흐가 거실의 책장에 보관된 악보를 가족이 모두 잠든 밤중에 꺼내서 베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수치스러운 경험은 훗날 바흐가 가족과 제자들을 위한 가정용 악보 노트와 교육용 악보를 직접 정리해서 만들어주는 습관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로 유명한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두 권의 노트가 만들어졌다.



    오어드루프의 기숙사와 바이마르의 하숙 생활

    1700년, 열다섯 살이 된 바흐는 오어드루프에서 자동차로 4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는 뤼네부르크의 성 미하엘 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성 미하엘 교회에서 운영하는 부속학교였다. 바흐는 학교 기숙사에서 1702년까지 생활했고, 성 미카엘 교회의 아침 예배 성가대의 단원으로 노래를 불렀다. 당시에는 음악적 재능이 있지만 가난한 소년들이 교회의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며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일이 많았다. 하이든도 변성기가 오기 전까지는 빈의 성 미하엘 교회의 소년 합창단에서 노래를 부르며 기숙사 생활을 했다. 기숙사의 한 방에는 아마도 4명 이상의 소년이 같이 지냈을 것이고, 꼭 필요한 옷가지를 보관하는 작은 개인 공간과 함께 침대 정도가 제공됐을 것이다. 

    이 시기에 바흐는 오르간을 본격적으로 접하고 연주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교회의 합창단원으로 연주에도 재능을 보였던 바흐가 합창 연습 시간에 오르간을 연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바흐가 이 교회를 떠날 즈음에는 이미 유능한 오르간 연주자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이를 토대로 유추해 보건대, 합창 연습 보조 오르간 연주자로 활약하던 바흐는 정규 오르간 연주자가 자리를 비웠을 때 오르간을 연주할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1702년 성 미하엘 학교를 졸업한 바흐는 이듬해 바이마르로 가서 7개월 동안 궁정음악가로 일했다. 이곳에서의 행적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가난한 18세 소년이 화려한 궁정에서 음악가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궁정의 예절에 익숙한 노련한 정식 음악가들 사이에서 악보를 필사하고, 악기를 운반하는 일을 도우면서 오르간을 연주할 기회를 얻기 위해 노력했을 것으로 보인다. 바흐는 아마도 궁정 근처에서 하숙했을 텐데, 침대와 책상 정도가 있는 10m2(3평) 내외의 장기 투숙용 여관방에서 혼자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바흐의 오르간 연주 실력은 본격적인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생애 첫 직장과 첫 클라비코드

    바흐가 가장 사랑한 악기인 클라비코드. Gettyimage

    바흐가 가장 사랑한 악기인 클라비코드. Gettyimage

    바이마르에서 자동차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아른슈타트에 새 교회가 지어졌는데, 교회에 새로 설치된 오르간을 점검하기 위해 바흐가 초빙됐다. 바흐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바이마르에서 오르간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할지라도 18세 소년을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영입하기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오르간 점검은 아마도 소년의 실력을 검증하기 위한 자리였을 것이다. 바흐는 오르간을 점검하면서 오르간을 다루는 기량을 충분히 보여줬고, 이어진 기념 연주회도 멋지게 해냈다. 그 결과 도시는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오르간 연주자를 얻을 수 있었고, 바흐는 당당한 음악가로서 생애 첫 직장과 집을 갖게 됐다. 

    미혼의 바흐에게 제공된 집은 교회와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부엌, 작은 거실, 침실과 함께 작곡할 공간을 갖추고 있었을 터. 그리고 작곡하는 방에는 오르간 대신 작은 클라비코드가 있었다. 오르간은 교회나 성당, 궁정이나 귀족의 저택에 설치되는 건물의 일부분 같은 악기이기에 음악가들은 집에서 소리가 작은 클라비코드를 사용했다. 전통적 형태의 클라비코드는 피아노와 다르게 하나의 현을 여러 건반이 공유하는 구조를 가진 악기다. 

    1721년경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코드‘ 악보 첫 페이지 이미지. Gettyimage

    1721년경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코드‘ 악보 첫 페이지 이미지. Gettyimage

    기타의 줄이 왼손으로 누르는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음정을 내는 것처럼, 누르는 건반에 따라 하나의 현에서 여러 음이 만들어진다. 모든 건반 악기 가운데 가장 내밀한 악기라 할 수 있는 클라비코드는 탄젠트라 불리는 작은 금속 막대가 현을 치는 동시에 접촉을 유지하면서 소리를 낸다. 소리를 유지하려면 연주자는 계속 건반을 누르고 있어야 한다. 이런 기계적 메커니즘 때문에 탄젠트는 마치 손가락처럼 움직이는데, 손가락으로 건반을 문지르면 탄젠트도 현을 문질러서 미묘한 음정 변화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바흐는 평생 이 악기를 사랑했다. 오르간의 대가였고, 최초로 하프시코드 협주곡을 본격적으로 작곡하고 연주한 사람도 바흐였지만 그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악기는 클라비코드였다. 18세 되던 해 아른슈타트에서 바흐는 클라비코드가 있는 자기만의 방을 처음으로 가질 수 있었다. 이후 바흐가 가족과 살던 집에서 이 작은 방이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클라비코드가 있는 작은 방에서 토카타와 푸가의 악보를 완성했고, 무반주 첼로 모음곡과 프랑스 모음곡, 평균율과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작곡했다. 그리고 위대한 b단조 미사와 푸가의 기법도 클라비코드를 어루만지는 바흐의 손끝에서 만들어졌다.

    결혼 후 대가족을 이룬 바흐

    1707년엔 더 나은 여건에서 활동할 수 있는 뮐하우젠이라는 도시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 바흐는 뮐하우젠에서 첫 번째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를 만나 결혼했다. 이듬해 겨울엔 바이마르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첫째 딸 카타리나가 태어났다. 아이가 생기자 혼자 살고 있던 아내의 언니가 출산과 육아, 집안일을 돕기 위해 바흐 가족에 합류했다. 1710년, 첫째 아들 빌헬름 프리데만이 태어났다. 1717년 쾨텐 궁정에 악장으로 부임하기 전까지 바흐와 마리아 사이에서 여러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 중 몇은 일찍 죽었다. 

    바흐가 1717년부터 1723년까지 궁정 악장으로 활동한 쾨텐성에는 바흐의 초상화가 새겨진 부조가 있다. Gettyimage

    바흐가 1717년부터 1723년까지 궁정 악장으로 활동한 쾨텐성에는 바흐의 초상화가 새겨진 부조가 있다. Gettyimage

    쾨텐으로 이주할 때 바흐의 가족은 아내와 아내의 언니, 큰딸과 나중에 음악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는 두 아들, 그리고 장애가 있어 마지막까지 돌봄이 필요했던 아픈 손가락 같은 아들 요한 고트프리트까지 7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고아로 성장한 바흐는 항상 자녀 교육에 신경 썼다. 칼뱅파의 개혁 군주가 다스리는 쾨텐의 궁정은 칸타타와 교회음악을 작곡해야 하는 부담이 없는 곳이었고, 어린아이들을 키우기에 적합한 환경이었다. 

    쾨텐에서 바흐의 가족은 궁정에서 제공한 독립된 주택에서 거주했을 것이다. 궁정에서 걸어서 쉽게 오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바흐의 집에는 바흐 부부가 거주하는 침실과 어린아이들을 재우고 키우는 방, 성장한 남자아이들의 방, 딸들이 아내의 언니와 함께 거주하는 방이 있었을 것이고, 장애가 있는 고트프리트를 돌보는 작은 방이 따로 있었을 것이다. 5개의 침실 외에도 부엌과 거실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클라비코드를 연주하면서 작곡할 수 있는 방이 필요했다. 이런 조건을 모두 충족하려면, 쾨텐에서 바흐가 살았던 집의 규모는 한국식으로 환산해서 최소 165m2(약 50평) 이상, 넉넉하게는 200m2(약 60평)에 가까운 규모의 2층 주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736년 라이프치히에서 출판된 요한 지기스문트 숄체(필명 스페론테스)의 연가 모음집 제1권 표지로 쓰인 그림. 미술사학자이자 바흐 초상화 전문가인 테리 노엘 토위는 그림 속 두 사람을 바흐와 그의 아내 안나 막달레나로 지목했다. 위키피디아

    1736년 라이프치히에서 출판된 요한 지기스문트 숄체(필명 스페론테스)의 연가 모음집 제1권 표지로 쓰인 그림. 미술사학자이자 바흐 초상화 전문가인 테리 노엘 토위는 그림 속 두 사람을 바흐와 그의 아내 안나 막달레나로 지목했다. 위키피디아

    1720년 갑작스럽게 첫 번째 아내 마리아가 사망했다. 레오폴트 왕자와 함께한 긴 여행에서 돌아와 아내의 사망 소식을 접한 바흐는 한동안 망연자실했다. 작곡 방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바흐의 작품 중 가장 비통한 ‘샤콘’(17~18세기 바로크시대에 유행한 기악곡 형식)이 이때 만들어졌다. 이듬해 바흐는 16세 어린 소프라노 가수 안나 막달레나와 결혼한다. 막달레나가 임신하고 큰딸과 큰아들이 사춘기가 되자 바흐는 라이프치히로 이주하기로 결심한다. 쾨텐의 음악 환경이 변한 것도 큰 이유였겠지만, 아이들에게 고등교육을 시키고, 음악가로서 아들들이 경력을 쌓도록 하기 위해선 교육 인프라가 좋은 대도시로 이주해야 할 때였다.

    1750년경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학교. 바흐가 1723년부터 1750년까지 칸토르(유대교 성가대 지휘자)로 살았던 곳이다. Gettyimage

    1750년경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학교. 바흐가 1723년부터 1750년까지 칸토르(유대교 성가대 지휘자)로 살았던 곳이다. Gettyimage

    라이프치히의 마지막 집

    1723년, 라이프치히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유대교 성가대 지휘자)가 된 후 바흐가 거주한 관사에 대해선 비교적 상세한 기록이 전해진다. 몇 차례 구조를 변경하고 보수공사를 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중 마지막 기록을 바탕으로 바흐의 집을 구성해 보자. 바흐의 관사는 맨 꼭대기에 다락방이 있는 4층짜리 집이었다. 출입문이 있는 맨 아래층(유럽식으로 0층)은 주거 공간이 아니라 학교와 교회의 행정이 이뤄지는 공간이었을 것이고, 우리나라 식으로 2층부터 4층까지가 주거 공간이었다. 

    총 주거 면적은 250m2(75평) 남짓, 한 층이 83m2(25평) 정도고, 2층은 작업 공간이었다. 거실과 응접실이 있고 부엌 뒤에는 클라비코드가 있는 10~13m2(3~4평) 정도 크기의 작곡 방이 있다. 악보를 보관하는 방도 2층에 있었을 것이다. 바흐는 악보를 인쇄하기 위해 동판 위에 악보를 그리는 작업을 집에서 했는데 작업실도 2층에 있었을 것이다. 3층엔 부부의 침실과 자녀들이 함께 쓰는 방들, 불편한 아들을 위한 방이 있다. 평균 20~23m2(6~7평)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4층엔 제자들이 기숙하는 방과 소규모 연습실이 있었을 것 같다. 

    서양음악사를 통틀어서 바흐처럼 대가족을 이끌고 여러 도시를 이주하며 산 작곡가는 찾기 힘들다. 바흐가 남긴 곡들 중에서 불멸의 위치에 이른 많은 작품이 클라비코드가 있는 작은 방에서 아내와 자녀들을 위해 만든 교육용 작품들이었다는 걸 알고 나면, 바흐가 살았던 장소와 주거 공간을 살펴보는 것이 바흐의 작품을 한층 더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김원
    ● 1970년생
    ● 서울대 심리학과 졸업
    ● 2023년 제1회 대한민국언론인대상 수상
    ● ‘당신의 밤과 음악’ ‘노래의 날개위에’ ‘명연주 명음반’ 등 KBS클래식 FM에서 다수의 프로그램 제작
    ● 저서: ‘미디어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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