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은 왜 연평도를 공격했을까. 이로써 북한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한반도를 벗어나 ‘미국과 중국의 신(新) 냉전구도 형성’이라는 큰 틀에서 들여다보면 해답은 더욱 명확해진다. 한반도 서해를 도화선 삼아 이러한 대립구도를 앞당길 수 있다는 ‘힘’을 과시함으로써 중국을 압박하고자 한다는 분석이다.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에서 이러한 전략을 성공적으로 구사하며 소련의 지원을 얻어낸 바 있는 평양이 이번에는 중국의 보따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11월29일 서해 한미연합훈련에 참가한 미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에서 승조원들이 함재기의 이착륙을 돕고 있다.
북한의 도발과 관련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문제는 남북관계 변수로만 접근할 수 없는 사안이다. 한반도 문제는 21세기 세계사적 변화와 함께 동북아 지역의 국제정세 변화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지금 우리 시대 최대의 드라마는 다름 아닌 중국의 부상(浮上)이며, 앞으로 세계사는 중국의 행보를 둘러싼 패권국가 간의 각축으로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의 역학 구도도 미국과 중국의 힘 겨루기에 따라 판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거대한 체스판
오바마 정부의 세계 전략이 중동 전략에서 대중(對中) 전략으로 전환되고 있음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중국을 막지 못하면 앞으로 자신들의 전 지구적 헤게모니 구도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불안이 워싱턴 정책결정자들의 최대 고민으로 떠오른 지 오래다. 최근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이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는 말라카 해협을 중심으로 공세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언뜻 연평도 도발과 무슨 관계가 있으랴 싶지만, 잠시 동아시아 전체 지도를 머릿속에 떠올려놓고 이 거대한 체스게임을 따라가보자.
말라카 해협은 길이 800㎞, 최소 폭 2.8㎞로 세계 해상 물동량의 4분의 1, 세계 원유 수송량의 절반 이상, 동아시아 국가들의 원유 공급량의 90% 이상이 통과하는 지리적 요충이다. 미국은 한반도,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베트남을 잇는 해상루트를 장악하면서 중국의 해상진출을 억제하는 이른바 ‘헤징(hedging·울타리 치기)’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이에 맞서는 중국은 경제적·전략적 교두보 확보를 위해 서쪽으로는 미얀마, 동쪽으로는 북한의 나진항과 청진항을 통한 해상루트 확보를 추진하는 중이다. 이 과정에서 미·중 간의 정치적·경제적 갈등, 중·일 영토분쟁, 중·러 밀착 흐름 등이 복잡하게 뒤엉키면서 역학구도가 크게 흔들리는 것이 오늘날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판도다.
미국은 남중국해 길목을 지키고 서서 중국의 남진(南進), 즉 해상진출을 막고 있다. 남중국해는 동북아와 인도양을 잇는 해역으로 가장 중요한 통상 루트이자 군사전략적 요충지로, 300만㎢에 달하는 방대한 해역에서 나오는 천연가스와 석유, 광물 자원이 풍부하다. 중국이 서진 및 남진 정책에 주력하는 것은 단순히 자원을 확보하겠다는 목적만이 아니다. 미국이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는 서태평양 지역과 남중국해 지역이 봉쇄당하면 유사시 에너지와 원료 공급 루트가 차단당할 위험이 높기 때문이다. 중국이 수입하는 에너지 자원의 80%가 미국의 제해권 아래 놓인 말라카 해협과 서태평양 통로로 유입되고 있기 때문에, 유사시 이 해역이 봉쇄되면 매우 심각한 안보위기에 봉착할 수 있는 까닭이다.
이로 인해 중국은 남중국해 시사군도(西沙群島·파라셀) 및 난사군도(南沙群島·스프래틀리)를 둘러싸고 베트남,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과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다. 대만, 티베트와 더불어 남중국해를 자국의 ‘핵심이익’으로 규정하는 중국의 입장과 공해인 남중국해를 독점하려는 어떠한 행위도 용납할 수 없다는 미국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가운데, 최근 미국은 이 지역에서 중국과 분쟁 중인 나라를 지원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바 있다.
중국 입장에서 보자면 미국의 봉쇄를 뚫고 해상루트를 확보해 중동의 산유국에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때문에 중국은 파키스탄과 이란을 지원하면서 인도양 진출을 위한 교두보 확보를 모색하는 한편 이란 가스전 개발을 위해 대규모 투자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이와 함께 미국의 해양봉쇄를 우회해 육로로 중동 산유국에 접근하는 서진(西進)전략 위에서 이란-아프가니스탄-타지키스탄-키르기스스탄-증국 신장으로 이어지는 철도 연결을 시도하고 있다. 이처럼 중국이 이란에 최대 경제협력국가로 떠오르며 손을 잡자 미국은 이란의 안보위협을 문제 삼으며 경제제재를 결의하고 나선다.
최근 미국이 보여주고 있는 강도 높은 대(對)이란 경제제재 조치는 핵개발 문제뿐 아니라 중국과 이란의 제휴와 결속에 따른 전략적 위기감이 반영된 것으로 봐야 옳다.
9월에는 동중국해의 센카쿠(尖閣)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를 둘러싸고 중국과 일본이 영유권 분쟁을 벌이기도 했다. 주변국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일본이 중국의 경제적 압박 카드에 굴복함으로써 일단락된 이 사건의 진행과정에서 중국은 분쟁의 핵심 원인으로 미국의 대중 압박전략을 지목하고 나섰다. 이후 중국은 다시 미·일의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댜오위다오 문제를 자국의 ‘핵심이익’으로 격상시킴으로써 새로운 갈등의 불씨를 남겼다.
두 차례의 정상회담
다시 한반도로 돌아와보자.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국제정치 파도가 한층 높아지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 균형추도 함께 흔들리고 있다. 동북아에서 미국과 중국 사이의 새로운 세력균형이 형성되면서 한반도에서도 지각변동의 조짐이 일고 있는 것이다. 동북아에서 미·중 간 세력균형이 형성돼 남북 간의 ‘균형’이 회복된다면 한반도 분단구조는 새로운 형태로 주조(鑄造)될 수 있다. 즉 군사적·경제적 측면에서 한·미 동맹에 대응하는 북·중 혈맹이 강화되어 분단구조가 새로 강화될 수 있다는 뜻이다.
2010년 3월 천안함 사태는 바로 이러한 구도 아래에서 벌어졌다. 이를 통해 한·미 동맹이 강화되고 대북 압박수위를 높여가자 중국의 대미(對美) 긴장 역시 순식간에 급상승했다. 중국이 북한의 전략적 가치를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는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천안함 사태를 계기로 후진타오(胡錦濤) 주석과 두 차례의 정상회담을 통해 밀착을 과시했다. 장기간의 대북압박과 제재 국면에서 북한은 체제보장을 위해 중국으로 기울지 않을 수 없었고, 중국은 완충지역의 존속과 동해로의 출구 확보를 위해 (내심 탐탁지 않았다 해도) ‘말썽꾸러기’ 북한을 떠안아야 했다. 양측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한층 강화된 상황이다 보니 밀착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하겠다.
그러나 혈맹의 회복에도 불구하고 아직 북한이 얻은 것은 별로 없다. 김 위원장은 5월 베이징 회담 당시 대북원조 ‘청구서’를 내밀었지만 중국 측의 미지근한 반응에 발길을 돌린 바 있다. 8월 창춘에서 열린 회담 후에도 지금까지 중국으로부터 만족할 만한 군사·경제적 원조를 받아내지 못했다. 9월말 이래 후계체제 확립을 서두르고 있는 북한의 어려운 형편을 뻔히 알면서도 중국은 ‘화끈한’ 지원 모션을 취하지 않았다.
사실 북한은 김일성 시대부터 사회주의 대국 구(舊) 소련도 믿지 않았고, 과거의 중국이나 지금의 중국도 믿지 않는다. 중국 또한 아무리 정상회담을 연거푸 두 번이나 했다 하더라도 북한을 무조건 지원할 생각은 없는 듯한 모양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김 위원장 입장에서는 더 이상 저자세를 취하는 것이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중국이 북한을 대폭 지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더욱 현명한 전략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서해에 미군 항모가 들어오면
북한이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안보지형을 크게 흔들어대면 누가 가장 큰 피해를 볼까. 혹은 누가 적극적으로 나서 북한을 억제해야 할까. 일단 한국이 최대의 피해자라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우리나라가 주요 20개국 정상회의(G20) 개최로 최소 21조원 이상의 직간접 경제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전망한 바 있다. 쏘나타 자동차 100만대, 30만t급 초대형 유조선 165척을 수출한 것과 맞먹는 효과라는 추산이었다. 그런데 잠깐 동안 벌어진 북한의 포 사격으로 이러한 ‘코리아 프리미엄’은 순식간에 날아갔고,‘코리아 디스카운트’만이 부각됐다. 한국의 경제가 얼마나 안보위기에 취약한 구조인지 다시 한 번 확인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의 피해가 북측에 당장 직접적인 이익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포격으로 인해 북한은 이명박 정부의 대북지원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사실상 사라졌고, 스스로 그러한 기대를 완전히 접었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향후 협상국면이 회복되는 시점까지 고려하거나, 남한을 계속 흔들어가며 2년 후 출범하는 다음 정부와 다시 시작하겠다는 입장일 수도 있지만, 이 역시 불투명한 미래의 일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중국은 어떨까. 천안함 사건 이후 진행상황에서 확인됐듯 동북아의 군사적 긴장은 반드시 미국의 개입을 불러오고 일본의 군비확장을 부추긴다. 더욱이 서방언론이 북한의 도발을 중국의 지나친 관용 탓으로 비난하는 분위기도 베이징의 정책결정자들에게는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다. 아직은 오로지 경제성장에만 몰입하기를 원하는 중국으로서는 이러한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는 상황을 결코 바라지 않고, 위기의 발생 자체를 적극적으로 회피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연평도 포격에 얽힌 북한의 대외전략 포커스는 바로 이 부분에 맞춰져 있다. 동북아에서 긴장과 위기를 불러일으킬 힘이 자신에게 있음을, 그래서 미국의 항공모함이 중국의 코앞까지 진출하는 상황을 얼마든지 만들어낼 지렛대를 갖고 있음을 중국에 주지시킨 것이다. 베이징이 이러한 북한의 메시지를 간파했다면 후 주석은 북·중 간 당 고위층 인사의 상호방문을 통해 대외적으로 ‘6자 긴급협의 개최’를 제의하면서 김정일의 ‘청구서’를 진지하게 재검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푸에블로호의 선례
평양의 근로자들이 1968년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이 나포한 미국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를 구경하고 있다.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집권한 후 북·소관계가 회복되자 1965년부터 1968년 사이 소련의 대북지원은 조금씩 증가하기 시작했다. 1966년 북한은 소련에 발전소, 금속가공공장, 알루미늄 공장, 암모늄 공장 건설을 지원해달라고 요구했다. 심지어는 원유저장시설도 없는 형편에 석유정제공장까지 요청했다. 모스크바 근처에 공산품 공장을 세워 대외선전용 제품을 만들어 소련에 팔 수 있도록 해달라는 제의도 있었다. 중·소 분쟁이 한창이던 상황이다 보니 소련의 정책결정자들은 북한을 중국으로부터 떨어뜨려놓기 위해 일정 수준의 경제적 지원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지만, 경제적 부담을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1968년 1월23일 미국의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 함정에 의해 나포되는 사건이 터진 것은 바로 이 시점이었다. 미국은 엔터프라이즈호 등 3척의 항공모함을 출동시켰고 오키나와에 있던 공군기들도 남한으로 전진 배치됐다. 한반도에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았다. 미국은 북한의 행동 뒤에 소련의 방조가 있다고 여겼지만, 그러나 정작 북한의 모험적인 도발에 격노한 측은 극동지역에서조차 미국과 대립하기를 원치 않았던 브레즈네프 서기장 측이었다.
브레즈네프는 즉각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에게 “소련은 이번 사태와 전혀 무관하며 평화적 해결을 바란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마침 자국 내 반전 열풍 속에서 베트남 구정공세(Tet)의 충격에 휩싸여 있던 존슨 행정부는 브레즈네프의 중재를 받아들였고, 엔터프라이즈 항모가 동해상에서 철수하자 판문점에서는 곧 북·미 협상 테이블이 마련됐다.
이렇듯 김일성 당시 수상은 푸에블로호 나포를 통해 1961년 체결된 조·소 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과 1965년의 조·소 군사협정을 시험대에 올렸다.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김 수상을 모스크바로 불러들였지만 그는 이에 응하지 않았고 대신 부수상 김창봉을 보냈다.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그와의 장시간 면담을 통해 북한의 긴장완화와 대미협상을 촉구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핵무기를 제외한 최신 무기체계의 무상원조는 물론 경제지원에 대한 북한 측 요구를 전폭 수용하는 결정을 내린다. 비록 북한의 행동이 맘에 들지는 않지만, 사회주의 진영의 리더로서 국제주의적 책무를 다한다는 명분을 과시하는 동시에 북한을 달래기 위해 평양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 해 북한은 소련의 원조에 힘입어 시설용량 200만㎾의 북창화력발전소 건설 첫 삽을 떴고, 몇 단계의 확장공사를 거쳐 오늘날 북한 최대의 발전소를 완공했다. 같은 시기 북창 알루미늄 공장을 건설했는가 하면, 1980년대 중반까지 최신형 전투기 등을 지속적으로 지원받아 국방력을 강화하기도 했다. 이후 푸에블로호 승조원 82명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고 한반도를 바짝 긴장시켰던 위기사태는 일단락됐다. 발생 11개월 만의 일이었다.
안 줄 수 없도록 만들어라
지난 5월 후진타오 주석은 천안함 사태로 곤경에 처한 김정일 위원장을 베이징으로 불러들였다. 국제사회가 요구한 ‘북한 책임 인정’을 거부하고 북한을 끌어안는 한편, 이를 계기로 북한의 대중 의존을 확고히 할 심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국 측이 강조한 “전략적 소통 강화, 내정(內政) 문제의 의사소통”이라는 어젠다 가운데 ‘내정 문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두고 갖가지 추측이 쏟아진 바 있다. 사실 내정 문제에 대한 협의는, 그 상대가 아무리 혈맹과 우의를 강조해온 중국이라 해도, ‘자주’와 ‘주체’를 내세우는 북한 입장에서 볼 때 상당히 듣기 거북한 말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2010년의 북한이 안보, 경제, 후계문제, 대외관계 등 모든 분야에서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었음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김정일 위원장은 4년 만의 방중에서 북한 사정을 뻔히 아는 중국으로부터 대대적인 군사·경제적 원조를 얻어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기를 기대했을 것이고, 이를 위해 후진타오 주석과 담판 짓기를 원했다. 당시 김 위원장은 수십대 규모의 최신예 전투기와 300억달러 상당의 경제협력 지원, 매년 원유 100만t과 쌀 100만t 긴급지원 등의 ‘청구서’를 내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중국이 제안한 협력사안들은 원조나 지원에 대한 명확한 규정 없이 알맹이가 사라진 말뿐이었고, 특히 경제무역 분야에서는 상호주의적 접근방식마저 드러냈다. “13억 중국 인민도 굶지 않는데 2000만을 못 먹여 살리느냐”고 힐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원자바오 총리는 개혁·개방에 대해 ‘한 수 가르쳐주겠다’고 제의하면서도 결국 김 위원장을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5월의 만남이 이렇듯 해프닝으로 끝난 데다, 8월의 정상회담에서조차 후진타오 주석은 후계자 구축을 위한 정치일정을 앞두고 갈 길이 바쁜 김정일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않았다.
결국 평양의 눈으로 보자면, 이제 아무리 졸라대도 보따리를 풀지 않는 중국을 향해 다른 시그널을 울릴 타이밍이 된 셈이었다. 순순히 지원하지 않는다면 지원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간 ‘사회주의 형제국’이라는 립서비스는 무성했지만 중국은 북한을 ‘통 크게’ 지원한 적이 없다. 1950년대 말 중국이 대약진운동에서 실패한 뒤 만주지역의 주민 수만 명이 강을 넘어 북한 땅에 진입했을 때 평양은 성의껏 도왔지만, 중국은 이른바 ‘고난의 행군’ 3년 동안 북한을 외면했다.
이는 2010년에도 마찬가지였고 그 어느 때보다 군사적·경제적 지원이 절실한 북한을 중국은 계속 외면했다. 조약이나 혈맹 회복이라는 말의 성찬에 실망한 북한에 남은 카드는 단 하나였다. 남한을 때려 위기국면을 조성함으로써 동북아 긴장을 고조시킬 경우 누가 초조해 하겠는가. 바로 신(新)냉전의 먹구름이 너무 빨리 몰려와 자신들의 경제성장 전략에 방해가 될지 모른다고 두려워하는 중국이다. 그렇다면 김정일을 달래야 하는 것 역시 중국이 된다.
27세의 후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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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당시 27세의 김정일은 자신의 아버지가 극한의 위기를 조성해 미국과 소련이라는 세계 대국을 다루면서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얻어내는 솜씨를 옆에서 지켜본 바 있다. 이제 그는 27세의 세습 후계자에게 한국과 미국, 중국을 다루는 솜씨를 전수하는 중이다. 푸에블로호 사건이 한반도 동해에서 소련을 상대로 벌인 ‘전쟁 장사’였다면, 연평도 포격은 서해에서 중국을 상대로 벌인 ‘전쟁 비즈니스’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가장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인 것은 대미(對美)전략 차원에서 북한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중국이다. 후진타오 주석에게 대량원조로 김정일을 달래는 것 외에 과연 다른 카드가 있을까. 이것이야말로 연평도 포격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숨은 타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