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벌어 6개월~1년 반 세계여행 다녀와
취업·스펙 따기로 소진… “이렇게 젊음을 보낼 수 없다”
죽을 위기 겪기도 했지만 배운 게 더 많아
여행? 스스로를 재발견하고 자신감 쌓는 기회
2024년 1월 1일 볼리비아 우유니 사막에서 대학생 정재훈 씨가 새해를 맞이하고 있다. [정재훈]
취업·스펙보다 더 중요한 ‘지금’
이들이 처음부터 여행을 계획한 것은 아니다. 여타 대학생처럼 취업을 위해 자격증을 따려고 공부하던 정재훈(26·경기대 기계시스템공학과 4학년) 씨는 어느 날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취업 이후엔 무엇이 있는 거지?’ 그는 자주 ‘멍 때리는’ 스스로의 모습에서 심신이 지쳤음을 느꼈다. 그는 그길로 세계여행을 알아봤다. 먼저 싱가포르행 비행기표를 끊었고, 2023년부터 2024년에 걸쳐 484일간 30개국을 여행하고 귀국했다.
180일 동안 17개국을 돌고 2024년 2월 귀국한 천재희(23·미국 오클랜드대 생물의학과 4학년) 씨도 여행 1년 전 과감히 세계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한 경우다. 그는 9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뉴질랜드로 이민했다. 천 씨는 부친을 죽음에 이르게 한 암의 원인을 규명하고자 대학에서 생물의학을 전공했다. 집안이 넉넉하지 않았지만 장학금으로 학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분초를 아끼며 공부하던 어느 날,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젊음을 이렇게 낭비할 수는 없어!’ 천 씨는 도서관 창문에 비친 자신을 보며 세계를 갈망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본디 석·박사 학위 과정을 밟으리라고 계획하고 있었지만, 중단 후 세계여행을 시작했다.
2023년 11월 2일 에콰도르 갈라파고스 산크리스토발섬의 로베리아 해변에서 대학생 이정환 씨가 물개와 함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정환]
2400만 원, 1800만 원, 3000만 원. 정재훈, 천재희, 이정환 씨가 각각 세계여행에 쓴 돈이다. 정 씨는 “쉬지 않고 한 아르바이트와 주식투자로 직접 번 돈이기에 진정한 ‘나를 찾는 여행’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카페, 고깃집 서빙을 비롯한 각종 아르바이트는 물론 대학생 생활비 대출과 조교 활동 등으로 경비를 모았다. 천 씨는 “대학생이 된 후 신체적·경제적으로 독립하긴 했지만, 여행을 통해 완전한 자립심을 가질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2023년 9월 12일 이집트 다합 아일랜드에서 대학생 천재희 씨가 프리다이빙을 하고 있다. [천재희]
“위기를 통해 배운 게 더 많다”
여행은 으레 예기치 않은 사건 사고를 동반한다. 이들에게도 위기의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그 일로 오히려 배운 게 더 많았다”고 입을 모았다. 이 씨는 인도 자이살메르에 가서 현지인이 건넨 약물 음료로 정신을 잃었다. 손님을 위한다며 환각제를 넣은 차를 마신 것이다.
그는 정신이 혼미해졌고 길바닥에 누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상대방이 나쁜 의도를 가졌다면 변사체가 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이 씨는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동네를 빠져나왔다. 그는 “운이 좋아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혼자라는 사실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됐다”며 “낯선 환경에서 홀로 여행하며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나 자신에게 있음을 깨달은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천 씨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를 걷던 중 휴대전화 소매치기를 당했다. 팔목에 단단히 휴대전화를 고정했음에도 한 남성이 이를 낚아채 달아난 것이다. 브라질 출국을 앞둔 상황이었지만 천 씨는 ‘어떻게든 일은 풀린다’고 생각하며 차분히 분실 신고와 출국을 준비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며 대처 능력과 유연한 사고력을 발휘한 것이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경험
예기치 못한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이들은 확신에 찬 눈빛으로 여행하는 두 가지 이유를 말했다. 첫 번째는 ‘스스로를 재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홀로 상황에 대처하고 결정하며 스스로의 기준을 찾아갈 수 있었다. 이 씨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야 음식, 숙박 등을 선택할 수 있다”며 “여행을 통해 자기 감정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정 씨는 여행 중 유당 분해와 소화 기능 약화로 발생하는 유당불내증 질환을 발견했다. 그는 “여행하며 나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되니 몸의 신호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두 번째 이유는 ‘하면 된다’ 정신을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천 씨는 프랑스에서 스페인까지 산티아고 순롓길을 걸었다. 처음부터 그가 800㎞ 순롓길 완주를 확신한 것은 아니다. 발목 부상으로 아예 걷지 못한 날도 있었다. 서러움에 눈물범벅으로 하루를 보내기도 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다시 걷는 일뿐이었다. 약 한 달에 걸쳐 순롓길을 완주한 날,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그는 “스스로 한계를 규정하지 않고 일단 해보면 못 할 것이 없다는 것을 느낀 순간”이라고 회상했다.
이들은 모두 여행을 통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정답을 배우는’ 대학과 달리 ‘정답이 없는’ 여행을 통해 스스로만의 답을 찾은 것이다. 이에 대해 박선웅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는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는 자신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 필요하다”라며 “장기간 여행은 비로소 자기 삶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계기를 마련한다”고 설명했다.
배낭을 내려놓고 다시 펜을 잡은 대학생 여행자들. 이들은 여행의 배움을 바탕으로 인생의 새 여정을 열어가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감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경험은 돈 주고도 사지 못해요.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세계를 향해 ‘젊음’을 걸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