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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힘’, 이건희의 경쟁력

‘삼성의 힘’, 이건희의 경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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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을 잘 아는 사람이 드문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그는 선친의 사업과 전란 등으로 인해 국내에서 초등학교를 다섯 차례나 옮겨다닌 끝에 일본으로 건너갔고, 중학교 때 귀국해서 서울사대부고를 졸업한 뒤에는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했다. 그후에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기 때문에 국내에 동창생이 얼마 되지 않는다. 1966년 미국에서 돌아와 경영수업을 시작한 후로는 선대 회장과 ‘태사부’들의 관리체제에 들어갔으므로 기업 이외의 영역과 접할 기회가 흔하지 않았다.

이회장의 성격 또한 사람들과 왁자하게 어울려 술 마시고 노는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말수가 적었고 혼자 생각에 빠져 있는 시간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젖 떨어지자마자 어머니 품을 떠나 고향인 경남 의령의 할머니댁에서 세 살 때까지 자랐고, 일본에서 소학교를 다닐 때도 형과 자취생활을 했다. 이 회장 남매가 부모와 함께 모인 자리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삼성 회장 초기에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나면서부터 떨어져 사는 게 버릇이 돼서 성격이 내성적이 됐고, 친구도 없고, 술도 못 먹으니 혼자 있게 됐고, 그러니까 혼자 생각을 많이 하게 됐고, 생각을 해도 아주 깊게 하게 됐다…가장 민감한 때에 민족차별, 분노, 외로움, 부모에 대한 그리움, 이 모든 걸 다 느꼈다….”

책, 영화(일본 소학교에 다니던 3년 동안 1300여 편의 영화를 봤다고 한다), 그리고 생각이 삶의 전부이다시피 했다.

전란중에 이회장과 부산사범부속국민학교 4, 5학년을 함께 다녔던 권근술 전 한겨레신문 사장은 “건희가 천장에 매달면 끈을 물고 빙빙 돌아가는 비행기, 레일 위를 달리는 모형 기차 등 당시로선 구경하기도 힘든 장난감을 가져와서 함께 놀던 생각은 나는데, 말이 없고 장난도 잘 치지 않던 아이라 다른 기억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이회장과 서울사대부고 동기생인 홍사덕 한나라당 의원은 “건희는 늘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생각’이라기보다 ‘묵상’에 가까웠다. 그때도 지금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말이 없었다. 친구들이 말을 걸면 돌아오는 답은 ‘응’ ‘아니’뿐이었다. 동작도 느릿느릿했고 한번도 놀라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너는 천둥벼락이 내리쳐 다른 놈들은 다 기절해도 터덜터덜 집에 가서 다음날 아침에나 기절할 놈’이라고 놀려줬다”고 고교시절을 회상했다.

설탕공장(제일제당)을 거느린 부잣집 아들 건희와 그때껏 설탕이란 걸 먹어본 적이 없는 시골 고학생 사덕이 판이한 생활환경에도 불구하고 유별나게 친했던 것은 둘 다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그 또래답지 않게 머릿속이 복잡했던 건희는 여느 동급생들과는 ‘수준’이 맞지 않아 거의 입을 다물고 지냈지만, 시골 서점에 있는 책을 모조리 섭렵하고 상경한 사덕만큼은 드물게 말이 좀 통하는 친구였던 것.

홍의원은 “건희는 어쩌다 입을 열면 싱거운 소리를 잘했는데, 더러는 충격적일 만큼 독특한 시각과 발상을 내비쳤다. 그런 말을 앞뒤 설명도 없이 ‘본체’만 툭툭 던졌는데, 책깨나 팠다고 거들먹거리던 나도 한참을 생각해봐야 겨우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가령 “미국에서 차관을 많이 들여와야 미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우리 안보가 튼튼해진다”느니 “공장을 지어서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게 어떤 웅변보다 애국하는 길이다”는 등 그때 고교생으로선 상상도 못했던 얘기를 지나가는 말처럼 던졌다.

“건희는 생각은 많았지만 그것들이 제각기 연결돼 하나의 얼개를 이뤘다. 여러 구조물이 공학적으로 긴밀하게 서로 연결돼 거대한 건물을 지탱하듯, 한 가닥의 실만 잡아당기면 실타래 전부가 풀려나오듯, 그와 얘기해보면 음악이나 미술에서 화두를 열어도 기업경영, 국가, 인류의 주제로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는 북(鼓) 같은 친구였다. 작게 두드리면 작게, 크게 두드리면 크게 울려오는 북…. 그것은 묵상과 직관의 힘이었다.”

“나는 사람공부를 한다”

하루는 건희가 느닷없이 일본 소학교 교과서 몇 권을 건네면서 “니 일본어 배워놔라. 니 정도면 두어 달만 해도 웬만큼 할끼다”고 했다. 먹물 좀 들었다는 고교생들에겐 반일감정이 팽배해 있던 시절이라 사덕이 “그걸 뭐하러 배우노?” 하고 뜨악하게 물었더니 건희는 예의 그 심드렁한 표정으로 “일본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봐야 그 속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찾게 된다”고 하더라는 것.

홍의원은 “솔직히 그때는 건희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도 고등학교 1학년짜리 입에서 어떻게 그런 말이 나왔는지 놀랍다”고 혀를 내둘렀다.

이건희 회장의 그런 면모는 지금도 여전한 모양이다. 권근술 전 한겨레신문 사장에 따르면 “건희는 대화를 나눌 때도 계속 남의 얘기를 듣기만 한다. 잘 못 마시는 술이나 한 잔 들어가면 그제서야 띄엄띄엄 한 마디씩 입을 여는데, 말수는 적지만 결국은 자기 뜻을 모두 전달할 만큼 효율적인 대화법을 구사한다”는 것이다. 달변가인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도 “내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것, 느끼지 못했던 것을 이회장의 어눌한 몇 마디에서 깨닫게 될 때는 무력감까지 느꼈다”며 “내가 열 마디 할 때 이회장은 한 마디를 하지만 그 한 마디가 내 열 마디를 누른다”고 했을 정도다.

그런 이회장이 1993년 신경영 선언 당시 프랑크푸르트, LA 등지에서 평균 8시간 이상, 최장 16시간짜리 회의를 잇따라 열며 3개월 동안 8500쪽 분량의 말을 쏟아낸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것은 평소처럼 ‘본체’만 던져선 임직원들이 자기 뜻을 이해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잔뜩 ‘보충설명’을 붙인 결과였다. 이회장은 최측근들에겐 비디오테이프 한 개에 가득 담길 분량의 말을 불과 5∼6개의 문장에 담아 건넨다고 한다.

홍사덕 의원은 그런 이회장을 오다 노부나가에 비유했다. 노부나가도 그처럼 많은 뜻이 함축된 말을 거두절미하고 몇 마디씩 툭툭 던지는 스타일이었는데, 그것을 제대로 알아듣는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뿐이었던 것.

홍의원에 따르면 고교시절 이회장은 학과공부에는 별 뜻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무슨 궁리를 하며 사느냐고 물어보면 “나는 사람공부를 제일 많이 한다”고 황당한 답을 했다. 그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은 얼마 후의 일이었다. 그 무렵 삼성의 한 임원이 이병철 회장의 눈 밖에 나서 쫓겨난 일이 있었는데, 고교생 건희가 아버지를 찾아가 설득하자 이회장이 두말 하지 않고 그 임원을 다시 불러들였다고 한다. 용인술의 귀재였던 천하의 호암도 어린 건희의 사람 보는 눈을 그때 이미 인정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홍의원이 지금도 잊지 못하는 기억 중의 하나는 ‘제2한강교 사건’이다. 와세다대학에 다니던 건희가 방학 때 서울에 와서 사덕을 태우고 차를 몰았다. 시속 120km로 한강변을 드라이브하는데, 당시 포장도로라는 게 그저 땅만 대충 편평하게 다져놓은 정도라 차가 계속 요동을 쳤다. 그러자 건희는 “이건 길을 닦은 사람들의 성의 문제다. 일을 어떻게 이런 식으로 마무리할 수 있느냐”며 몇 번이나 분통을 터뜨렸다. 일본 구경 좀 했다고 우리 수준을 너무 무시하는 것 같아 떨떠름하던 사덕은 차가 마침 제2한강교(양화대교)를 지나치자 목에 잔뜩 힘을 주고 한 마디 했다.

“봐라, 저게 우리나라 기술로 만든 다리다. 어떻노?”

그 말을 듣고 다리를 힐끔 쳐다본 건희는 대뜸 이렇게 내뱉었다.

“이 생각없는 놈아, 통일이 되면 한강으로 화물선이 다닐 것 아이가. 그러려면 다리 가운데 있는 교각은 간격을 더 넓게 만들었어야지!”

사덕은 전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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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삼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an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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