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호

“인명 피해 내는 기업은 야만 기업”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 ‘래미안’ 주역 이상대 전 부회장의 ‘이건희式 안전사고 대응법’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5-03-03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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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건희, 조사 업무 위해 카이스트 석·박사 대거 들여

    • A급 인재 직접 비밀 면접·스카우트하며 힘 실어줘

    • 구포 열차 사고 터지자 직접 세세하게 일 처리

    • “삼성이 잘못했습니다” 전면 광고… 일 풀리기 시작

    • “면허 반납은 쉽다, 하지만 책임지는 자세 아냐”

    • “사람 죽이는 회사는 없어져야” 꾸짖어

    • 임직원 사과면 충분하다던 내부 의견에도 직접 사과

    • “조그마한 사업장이 그룹 수종사업 망칠 수 있다” 경고

    이상대 전 삼성물산 부회장은 아파트 ‘래미안’ 브랜드를 기획한 당사자다. 사진은 2024년 11월 6일 래미안 용산더센트럴 전경. [동아DB]

    이상대 전 삼성물산 부회장은 아파트 ‘래미안’ 브랜드를 기획한 당사자다. 사진은 2024년 11월 6일 래미안 용산더센트럴 전경. [동아DB]

    삼성엔지니어링, 삼성물산 부회장을 지낸 이상대 전 부회장은 2000년 삼성물산 주택부문 대표이사 사장으로 그룹에서 건설 사업을 주도해 온 ‘건설맨’이다. 외환위기 당시 적자를 기록했던 주택부문장을 맡아 2년 만에 흑자로 전환해 경영 능력을 입증받았다.

    초고층 빌딩인 버즈 두바이와 장대 교량인 인천대교 건립의 주역이며 아파트 ‘래미안’ 브랜드를 기획한 당사자다. 이번 호는 그로부터 듣는 ‘건설’과 ‘안전’을 키워드로 보는 이건희 회장의 이야기다.

    입사 후 배차 담당으로 시작, 임원들 리더십 배워

    삼성에 입사한 이야기부터 해주시죠.

    “1973년 6월 말에 ROTC 9기로 제대한 뒤 그룹에서 최초로 선발한 장교 출신 1기로 입사했습니다. 호암 이병철 회장님이 직접 인터뷰하신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때는 연수원이 없어서 다른 시설을 빌려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애니콜’ 신화 주역인 이기태 부회장이 입사 동기입니다.”

    그가 처음 시작한 일은 섬유업이었다고 한다.

    “제일합섬에 배치됐습니다. 한 달 동안 경산 공장에서 연수를 받는데 인문계 출신이다 보니 ‘방적’이니 ‘직포’니 하는 섬유 관련 용어 자체가 생소해서 애를 먹었습니다. 연수가 끝나면 저녁에 서점에 가서 책들을 사와 밤새 읽고 내용을 정리해 무조건 쓰고 외우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저만 그랬던 건 아니고 동기 20~30명이 다 그렇게 했습니다.

    연수를 마치고 본사로 출근해 리포트를 써내라고 해 제출했는데 칭찬을 받았습니다. 제 리포트가 나중에 신입 사원 교육 교재로 쓰였으니까요. 섬유 문외한이 열심히 공부해 만든 리포트가 칭찬도 받고 교재로도 활용되니 보람이 컸습니다. 그런데 정작 발령을 받은 곳은 총무과에서 차량 배치를 하는 일이었습니다.”

    무슨 연유였나요.

    “그쪽에서 사람이 급하게 필요했다는 건데 너무나 의외의 발령이어서 사표를 써야겠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제가 대학에서는 ROTC 장교로 참모총장상도 타고 학생회장까지 했는데 ‘차량 배차 같은 일을 하려고 삼성에 왔나’ 착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친구들한테도 면이 안 서고요. 며칠 고민하니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배차 일을 하찮다고 생각해서 버티지 못하면 앞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일을 열심히 했는데 저 나름대로 소득이 있었습니다.”

    그게 뭔가요.

    “회사 차를 쓰는 분들이라면 리더로 성공한 임원들이죠. 이분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면서 배우는 것이 많았습니다. 리더십은 물론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해결하고 대처하는지를 생생하게 배울 수가 있었으니까요.

    회사 돌아가는 사정도 누구보다 제일 먼저 알게 됐습니다. 신입 사원으로서는 엄청난 경험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개월 정도 일하다 제일합섬으로 건너가 인사 담당을 맡게 됩니다.”

    그는 제일 먼저 한 일이 공장의 적정 인원수를 파악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만들기만 하면 팔리던 ‘양’의 시대여서 직원들도 무조건 많이 투입하면 좋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생산성 개념이 없었죠. 저는 신입 사원 시절 공장에서 연수를 할 때 생산성 개념을 우리 회사 합작선이던 일본 도레이사에서 배울 수 있었습니다.

    실을 만드는 섬유 공장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실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겁니다. 끊어지면 잇는 것이 중요하고요. 주로 여직원들이 실을 감아둔 실패가 돌아가는 기계 앞을 오가면서 했지요. 도레이에서는 직원 한 명이 끊긴 실을 1분에 몇 개 잇느냐 수치를 내어 생산량 목표치를 세웠습니다. 이러면 적정 인원이 나오지요. 직원들을 무조건 많이 투입하는 게 정답이 아니라는 보고서를 만들어 사장님께 결재를 받으러 갔더니 ‘지금까지 이런 리포트를 본 적이 없다’면서 적극 수용해 주셨습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본사 비서실로 파견(1975)되는데 마침 이건희 회장이 이사 직함으로 비서실로 출근을 시작한 때였다고 한다.

    “호암 회장님 사무실 옆에 이건희 이사님 방이 있었습니다. 저는 말단 직원이라 직접 뵙거나 한 적은 없었습니다만 직원들이 소신껏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려 하신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밑에서 올리는 보고를 거의 다 승인해 주셨으니까요.

    비서실 조직도 바꾸셨습니다. 이전까지는 비서실장 1인 중심 체제하에서 팀 단위로 일했는데 기획실장직을 신설하셨습니다. 재무·인사·감사는 비서실장이 맡고, 기획실장은 신사업 기획을 맡아 앞으로 삼성이 무엇을 해야 먹고살 수 있을지 새로운 사업 분야에 대한 고민을 그때부터 시작하셨습니다.

    물론 각 계열사에서도 그 나름대로 신사업을 기획했는데 대부분 단기 계획이어서 장기적 관점에서 발굴해야겠다고 생각하신 거 같았습니다. 아울러 삼성의 행보가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사회가 돌아가는 것을 제대로 알고 해야 된다면서 조사 업무도 특화하셨습니다. 각 분야에서 인정받은 외부 인력도 스카우트하셨는데, 기획실에는 카이스트 석·박사 인력이 대거 들어왔습니다.

    인사 쪽은 유럽에서 조직론을 공부한 조태훈 박사 같은 분이 영입돼 효율이 높은 조직, 신바람 나는 조직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도록 하셨어요. 저도 박사님을 도와 관계사 전 임원들을 2~3시간씩 인터뷰해 결과 보고서를 낸 적이 있습니다. 조직 진단 작업을 처음 본격적으로 했다고 할 수 있죠.”

    비서실 근무를 마친 그는 1978년 삼성종합건설에 배치받으며 건설 맨으로서 첫발을 내디딘다.

    이건희 회장이 직접 스카우트 나서

    삼성건설 사옥이 되는 동방생명 여의도사옥 준공식 테이프 커팅 장면. 1979년 7월 20일 이병철 창업회장과 이건희 선대회장 모습. [삼성건설 사사]

    삼성건설 사옥이 되는 동방생명 여의도사옥 준공식 테이프 커팅 장면. 1979년 7월 20일 이병철 창업회장과 이건희 선대회장 모습. [삼성건설 사사]

    삼성은 건설 사업을 어떻게 시작하게 됐을까. 삼성물산에서 발간한 ‘건설 30년사(1977~2007)’를 인용한다.

    “1973년 말 1차 오일쇼크로 세계경제가 심각한 불황에 빠져들었지만 중동 산유국들은 유가 폭등에 따른 막대한 오일달러를 재원으로 대규모 개발 사업에 나섰다. 중동에 진출한 우리나라 건설업체들도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이른바 ‘중동 특수’였다. 건설 노동자들이 중동에 수천 명씩 나가서 일하며 벌어들인 막대한 외화가 들어오던 시절이었다.

    1970년대 중반 현대건설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산업항 공사를 수주했다는 소식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우리나라 국가 예산의 절반 정도인 4500억 원 규모의 대공사였기 때문이었다. 건설회사가 없었던 삼성으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진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시 이상대 전 부회장 말이다.

    “여러 방안이 검토됐지요. 그룹 내에서 유일하게 토건업 면허를 갖고 있던 중앙개발을 육성할 것이냐, 삼성중공업에 건설 분야를 신설할 것이냐, 아니면 별도 회사를 만들 것이냐 등등 말이죠. 그러다 세 번째 안으로 가닥이 잡혔습니다.”

    하지만 중동 붐을 타고 건설업에 너도나도 진출하고 싶어 하는 기업들이 나오면서 면허가 난립될 것을 우려한 정부가 신규 건설업 면허를 불허하는 바람에 삼성은 강원도 홍천에 연고를 둔 지방 건설업체였던 통일건설을 인수하는 식으로 방향으로 바꾼다(1977. 2). 자본금 8800만 원에 연간 매출액이 1억5000만 원 정도 되는 소규모 회사였다.

    이어 상호를 삼성종합건설로 바꾼 뒤 해외 사업 면허를 갖고 있던 신원개발을 인수해 본격적인 해외시장 개척에 나선다. 다시 이상대 전 부회장 말이다.

    “신원개발은 신진자동차(1955년 설립된 한국 최초의 자동차 회사) 계열사였는데 국내 최초로 이란에 진출해 해외 건설 시장을 개척해 온 회사였습니다. 이라크, 리비아 같은 미수교국 시장에도 뛰어들어 국내 공사 도급 순위는 28위였던 데 비해 해외 공사는 8위에 랭크될 정도로 해외 건설 시장을 개척하던 기업이었죠.

    그러다 어려워지면서 적자가 쌓이니까 오너가 직접 호암 회장님을 찾아와 인수해 달라고 합니다. 그렇게 신원개발을 인수한 뒤부터 삼성종합건설은 해외 건설, 플랜트 수출, 선박 수출 합작 등 해외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됩니다.

    이때 발족한 팀이 1978년 8월에 만들어지는 해외사업추진위입니다. 이사이던 이건희 회장님이 위원장이 되시죠. 그리고 1979년 2월에 삼성종합건설과 신원건설의 합병이 이뤄집니다.”

    삼성종합건설은 후발 주자이다 보니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제일 큰 문제가 사람이었다.

    “여기저기서 스카우트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건설 현장은 현장별로 회사별로 공사 스타일, 방법이 다 달랐습니다. 어떤 회사는 현장소장한테 일괄적으로 도급을 주면서 수익을 나눠 갖는 구조였고, 어떤 회사는 본사가 자재 등 모든 걸 다 대주면서 직접 진행하기도 했고요.

    이렇게 각자의 방식에 익숙했던 사람들이 모이니 뭉치기가 힘들었습니다. 또 패거리가 만들어져 끼리끼리만 일을 하고 소통은 안 되고 한마디로 오합지졸이기 일쑤였죠. 주도권을 쥔 집단이 맘에 안 들면 우르르 한꺼번에 나가는 일도 비일비재했고 말이죠. 건설회사라는 것이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사고도 많고 돈도 떼이는 경우가 많아 여기저기서 문제가 터지는 일이 많았어요.

    사업 추진을 맡고 있었던 이건희 이사님 입장에서는 신경을 안 쓰려야 안 쓸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중동 특수를 노리고 사람들을 여기저기서 대거 뽑아놨는데 일은 안 되고 적자만 쌓이는 상태가 계속된 거죠. 다들 업을 접어야 하는 거 아닌가 비관론이 팽배했는데 그때 이건희 회장님이 한 일이 뭔지 아십니까.”

    뭔가요.

    “인재 스카우트였습니다. A급 인재들을 수소문해 비밀리에 직접 면접을 보고 데려오셨어요. 그때 좋은 인재가 많이 왔습니다. 무엇보다 오너가 직접 면접 보고 데려온 사람이니 그 사람 말을 누가 안 듣겠습니까.

    여기서 스타급 현장소장이 많이 배출됐습니다. 나중에 대표이사 부사장까지 하시는 오성환 사장님 같은 분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건물이라 할 수 있는 조선호텔 현장소장을 하신 분이었고요. 이강태 사장님도 국회의사당 현장소장을 하신 분이죠. 이렇게 인재들이 모이면서 점점 회사도 틀을 잡아가게 됩니다.”

    삼성건설은 1990년 수주 1조 원, 1991년 매출 1조 원을 달성하는 비약적 성장을 이루면서 이상대 전 부회장은 감사실 실장, 인사부장을 거쳐 1992년 이사 승진을 하게 된다.

    그 이듬해인 이건희 회장이 신경영을 선언한 1993년은 문민정부의 출범으로 한국 현대사의 새로운 페이지가 열리는 해이기도 했지만 이전까지 없었던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 삼풍백화점·성수대교 붕괴 등 대형 사고가 한꺼번에 터진 때이기도 했다.

    최악의 열차 사고 직접 수습

    구포 열차 사고로 휘어진 철로. 당시 사고는 1993년 3월 28일 서울에서 부산으로 향하던 무궁화호 열차가 구포역 도착 직전 탈선해 78명이 사망하고 198명이 다친 초대형 사고였다. [동아DB]

    구포 열차 사고로 휘어진 철로. 당시 사고는 1993년 3월 28일 서울에서 부산으로 향하던 무궁화호 열차가 구포역 도착 직전 탈선해 78명이 사망하고 198명이 다친 초대형 사고였다. [동아DB]

    삼성건설은 문민정부 대형 사고의 서막이라고 할 수 있는 부산 구포 열차 전복 사고와 맞닥뜨리면서 창사 이후 최대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구포 열차 사고는 1993년 3월 28일 오후 5시 반 서울에서 출발해 부산으로 향하던 경부선 하행선 무궁화호 열차가 부산 구포역 인근에서 뒤집어져 78명이 죽고 198명이 다친 사고였다.

    사고 장소는 북부산 변전소에서 구포 삼거리 간 전력구 건설공사 현장. 삼성건설이 한국전력으로부터 공사를 수주해 1989년 12월에 착공, 1994년 10월 완공을 목표로 한진건설산업과 함께 막바지 공사를 하던 중이었다. 지하터널 발파 작업 도중 철길이 갑자기 무너지면서 여기를 통과하던 열차 9량 중 4량이 탈선해 뒤집어진 거였다.

    이 전 부회장은 당시 이건희 회장이 사고 수습에서부터 유가족 대응까지 세세하게 지시하며 챙겼다고 증언했다. 이건희 회장이 신경영 선언에서 “양에서 질로 바꿔야 한다”고 절박하게 부르짖기 석 달 전 일이었다.

    이 전 부회장은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일요일이었어요. 그해 이사에서 갓 상무가 돼 본사에서 인사 업무를 맡고 있었는데 소식을 듣자마자 부랴부랴 구포역으로 내려가 수습 과정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선 사고 원인을 파악하는 과정부터 쉽지 않았어요. 사고가 난 구포천은 습지였는데 습지 같은 약한 땅 위를 열차가 과속을 해 사고가 난 건지, 지반 자체가 약했기 때문인지, 도면이나 설계, 엔지니어링이나 시공 잘못이었는지, 빠른 시간 안에 원인을 따지기가 참 힘들었어요.

    우리 직원들은 섣불리 잘못을 인정했다가 회사에 누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니 최대한 시간을 갖고 꼼꼼하게 잘못을 따져야 한다는 거였고, 공사를 맡았던 회사들도 서로 책임을 미루는 상황이었죠.

    구포 열차 사고 현장을 찾은 김영삼 전 대통령. [동아DB]

    구포 열차 사고 현장을 찾은 김영삼 전 대통령. [동아DB]

    ‌하지만 상황은 엄중했습니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하루빨리 책임자를 찾아 처벌하라고 지시했고, 언론도 연일 대서특필을 했으니까요. 저는 그때 회장님이 직접 세세하게 일 처리하는 걸 보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지시들이었나요.

    “사고 직후 80여 명의 임직원을 급파해 대책반을 구성하고 복구 장비와 인력을 투입해 이틀 만에 철로를 완전히 복구했습니다. 원인을 밝히는 일에도 국내 전문가뿐 아니라 일본을 포함해 세계적 기술자들에게 의뢰하라고 했습니다.

    이어 신문에 ‘삼성이 잘못했습니다. 전적으로 책임지겠습니다’는 사과 광고를 전면 통으로 내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들 입장에서는 책임 소재도 불분명한데 ‘우리가 다 뒤집어쓰겠구나’ 불안감이 컸지만 그렇게 전면 광고가 나간 뒤부터 관(官)은 관대로, 공사 발주처였던 한전은 한전대로, 또 저희도 더 적극적으로 대처하게 되면서 일이 오히려 풀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일부에서는 ‘삼성이 다 책임진다고 했으니 면허도 반납하라’고 했지만 회장님은 단호하게 ‘면허 반납은 쉽다. 하지만 책임지는 자세가 아니다. 오히려 사고를 계기로 기술력을 제대로 갖추는 것이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다’라고 하셨어요.”

    이건희 회장은 홍보 담당자를 대책반에 투입하라고도 했다고 한다.

    “홍보 담당은 핵심 보직이 아니다 보니 현장의 대책 회의에 참석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회장님 지시 이후 홍보 임원이 현장 회의에 참석하면서 기자들의 질문에 대처를 잘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전에는 담당자들 설명력이 떨어져서 본의 아니게 오해를 사는 경우가 많았는데 말이죠.

    사망자와 부상자 가족 보상 문제도 삼성화재 보상팀을 현장에 보내 가족들을 직접 만나 협의하되 보상금도 법이 정한 것보다 훨씬 많이 주라고 하셨습니다. ‘절대적으로 겸손한 자세로 유족이나 부상자 가족들이 마음이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특별 지시도 내리셨습니다.

    구속된 임원들도 회사가 변호사비를 대 최고 변호사를 쓰라고 하셨습니다. 임원들 가족까지 돌봐야 한다고 하면서 말이죠. 이렇게 회장께서 세세하게 지시를 내려주시니 현장에서 일을 하는 데도 엄청나게 힘이 실렸습니다.”

    어떻든, 그 일로 삼성건설은 영업정지까지 당하죠.

    “검찰은 발주자, 감리자, 시공자, 하도급자 모두의 총체적 부실에 의한 사고였다면서 모두를 법원에 기소했습니다. 삼성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해 임직원 16명이 구속 기소되고, 영업정지 6개월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최종 사고 원인은 검찰 발표와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철로 밑에 사람이 예측하기 어려운 V자 형태의 급격한 지층 변화가 원인이었고, 불가항력적 측면이 많았다는 걸로 결론이 났거든요. 결국 법원에서 최종적으로 모두 무죄가 나왔어요.”

    사고 이후 이건희 회장은 “사람 죽이는 회사는 절대 안 된다. 지구상에서 없어져야 된다’ 식의 거친 언어로 꾸짖었다고 한다. 하지만 담대한 태도를 보여줘 아랫사람들에게 걱정을 나누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건설 현장이란 게 늘 조마조마하잖아요. 하지만 회장님은 큰 사고가 나도 화를 내시기보다 ‘문제가 뭐냐, 원칙대로 대처하라’고 하셨어요. 한 번도 회장님으로부터 ‘걱정’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어요.”



    “회장 명의 사과문 내라”

    1991년 12월 5일 경영대상을 수여하는 이건희 회장. 삼성건설은 1978년 도급 순위 28위에서 1991년 4위로 뛰어오르지만 구포 열차 사고로 영업정지를 당하는 최대 위기를 맞는다. [삼성건설 사사]

    1991년 12월 5일 경영대상을 수여하는 이건희 회장. 삼성건설은 1978년 도급 순위 28위에서 1991년 4위로 뛰어오르지만 구포 열차 사고로 영업정지를 당하는 최대 위기를 맞는다. [삼성건설 사사]

    한편 기자는 관련해서 사고 당일부터 이건희 회장에게 직접 보고를 했던 배종렬 당시 중앙일보 부사장의 보고서를 입수했다. 여기에는 이 회장의 더 상세한 대응 방식이 나와 있다. 배 부사장 보고서는 첫날 이건희 회장에게 사고 경위를 보고할 때 “삼성의 잘못이 없었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보고서를 인용한다.

    “사고 발생 후 비서실장 외 팀장 3명은 삼성건설을 방문해 사고 경위를 파악하고 당일 밤 11시경 회장에게 ①공사 현장은 사고 지점에서 약 30m 이상 떨어진 지역으로 당일 발파 작업은 없었고 ②사고 지점은 토사 지역으로 근본적으로 지반이 약한 곳이어서 삼성건설은 사고와는 무관하다고 보고했다. 사고 후 이틀 뒤에도 현지 지반이 기본적으로 약하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방법 등으로 향후 대책을 보고했다.

    하지만 사흘 뒤 경찰의 현장 확인, 비서실 홍보팀의 현지 보고, 삼성건설 임원들의 엇갈린 목소리가 들려와 이를 종합 판단한 결과, 삼성건설이 직접적·도의적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으로 급선회했다. 3월 30일 밤 11시 비서실장 외 팀장 3명이 다시 회장에게 보고하러 가는데 앞서 두 차례에 걸쳐 허위 보고를 했던 터라 죄인의 심정으로 어떠한 질책과 조치도 감수하겠다고 각오하고 있었다.

    당시 보고 요지는 ①진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허위 보고한 점에 대해 깊이 반성하며 ②삼성건설 명의로 대국민 사과 광고를 내겠다는 거였다. 사고에 따른 직접적 예상 피해는 영업정지 등으로 수주 5000억 원 차질, 배상 등 이익 손실 500억 원뿐만 아니라 무형의 기업 이미지 실추가 막대하고 대 정부 관계도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까지 포함했다.

    보고 후 벼락같은 꾸중을 예상했으나 이건희 회장은 놀라거나 질책은커녕 평상시와 똑같은 자세와 목소리로 다음과 같은 전혀 뜻밖의 지시를 했다.

    ①내일 조간신문에 사과 광고를 내고 문안을 확정해 새벽에 가져올 것 ②삼성건설이 아닌 삼성그룹 회장 명의 사과 광고를 검토할 것 ③삼성건설 임직원으로 조를 짜서 부상자와 가족을 매일 위문하고 부상자에 대해 완치될 때까지 치료를 다하겠다는 뜻을 전하고 최대한 배상을 검토할 것 ④사망자의 영안실을 찾아 조문하고 가족에게는 최대한 수습하겠다는 것과 가족 중 원하면 삼성에 취업을 보장하겠다는 뜻을 전할 것 ⑤사장단 및 임원진으로 면회팀을 구성해 수감 중인 삼성건설 사장 및 임원, 간부를 매일 면회할 것이며, 가족들에게는 생활비를 보내고 변호사를 통해 그룹이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하고 안심시킬 것 등이었다.

    새벽 2시에 보고를 마치고 당일 아침 7시 사장단 회의를 했는데 모든 사장들이 ‘삼성건설 임직원 명의의 사과 광고면 충분하지 않겠는가’라며 회장 명의 사과문 발표를 극력 반대했다.

    하지만 다음 날 3월 31일 아침 8시 이런 의견을 전달받은 회장은 ‘원안대로 하라’며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①과거 5년간 사상자를 낸 회사(계열사)에는 특별 경고를 한다(회장은 1988년까지 연평균 10명이던 것이 1991년 18명, 1992년 17명이며 5년간 64명, 그중 건설이 35명의 희생자를 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②사망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은 앞으로 삼성이 해야 할 사업과 해서는 안 될 사업의 기준이 된다.

    ③그룹의 명예와 국가경제를 위해 몇백억 원의 벌금을 내더라도 사고 수습에 만전을 기한다.

    ④초기에 진상을 정확히 분석하지 못한 이유를 파악한다.

    ⑤중공업 관련사는 이번 사고와 관련해 유사 사고의 근본적인 재발 방지를 위해 서로 협력하며 사장단이 스스로 인명 중시 철학을 솔선수범하라.

    ⑥뇌졸중 환자는 초기 30분, 사건 수사는 초동수사, 화재도 초기 진화가 중요하듯 사고 처리 수습도 첫 3일이 중요하다. 사고는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최선이며 조기 수습이 차선책임을 명심하라.”

    배 부사장은 보고서 마지막에 “회장의 큰 뜻, 큰 도량, 큰 스케일을 느끼고 이런 분을 보좌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며, 평생을 따를 분이라는 각오를 더욱 새로이 하게 됐다”고 적고 있다.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돈을 번다고?

    이건희 회장은 생전에 안전과 환경문제에도 매우 강도 높은 주문을 했다. 관련해서 그의 어록을 정리해 읽다 보면 매우 세세한 분야까지 지시하고 있음에 놀라게 된다. 그는 “사람을 죽이는 기업은 야만 기업”이라고 했다(뒤에 소개하는 이 회장의 어록은 1993년 신경영 선언 이후 구성된 신경영팀에서 1996년까지 어록을 정리해 보관해 놓은 것으로 대외적으로는 공개된 적이 없다).

    이 회장은 구포 열차 사고가 나기 훨씬 전부터 안전문제를 중차대한 이슈로 끌어올리며 각별한 주의를 요구했다. 1992년 10월 26일 사장단회의에서 한 말이다.

    “각 사업장의 과거 안전사고를 유형별로 분석하고 강도 높은 개선 조치를 취해야 한다. 협력업체가 낸 사고도 우리 책임이다. 안전사고 문제는 매우 중대한 것이므로 반드시 이사회에서 논의가 되도록 하고, 첫해에 사망은 제로(Zero), 안전사고는 3분의 1로 줄이도록 해보자.”

    그러다 구포 열차 사고가 나자 강도 높은 언어로 개혁을 주문한다.

    “이번 사고나 과거 사고들을 보면 안전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다. 일본의 안전 기술자 1~2명을 확보하는 것이 좋겠다. 토목, 건축에 각각 1명씩 해서 기초를 단단히 해야 한다. 우리 현장에서는 절대로 사람을 죽이지 말아야 한다. 왜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돈을 벌어야 하는가.” (1994. 9. 28. 한남동)

    “인명 피해를 내는 기업은 기업이 아니다. 일종의 야만적인 행동이다. 구포 열차 사고 조사와 보고 내용을 일지별로 작성하고 원인, 문제점, 조치상의 반성할 점 등을 정리, 분석해 보라. 특히 정보 보고가 정확지 못했던 점에 대해 종합적, 객관적으로 원인을 점검해 두라.” (1993. 4. 8. 승지원)

    “사람 죽게 하고 공해를 발생시키는 일은 절대로 안 된다. 그럴 거면 차라리 회사 문을 닫아야 한다. 자신 없는 것은 아예 수주를 하지 말아야 하며, 토목 관련 중역은 모두 징계한다. 토목 부문을 줄이든가, 없애든가, 1년쯤 쉬고 공부를 시키든가 해야 한다. 건설 부문은 적자가 나더라도 절대 사고를 내서는 안 된다. 과거 15년간 그룹에서 건설한 모든 것에 대해 안전점검을 실시해 보아야 하겠다.” (1994. 10. 21. 본관 집무실)

    “과거에는 수주할 때 미리 비자금을 주면서 해왔으며, 공사 대금에서 이돈 저돈 다 빼가고 남는 돈으로 공사를 하려 하니 부실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경부고속도로도 개통 직후부터 수리를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제일 싸고 빨리 만들었다고 자랑하지만 결국 세계에서 제일 나쁜 도로가 된 것이다. 건설업자도 자잿값, 그것도 제일 저렴한 철근, 시멘트 조금 아끼려고 부실을 초래하며 돈 몇 푼 아끼려고 저질의 기술자, 기능공을 쓰고 있다. 싱가포르 같은 곳은 업체에 제대로 이익을 내게 보장해 주되, 공사 중 불시에 체크해 보고 불합격이면 가차없이 재시공하거나 공사를 아예 못 하게 하고 있다.” (1994. 10. 21. 본관 집무실)

    “안전사고가 많이 난 회사·사업장은 엄중 경고 조치하고, 일본에 가서 안전관리기법을 배워오도록 하고 건설 현장소장과 같은 특수직에게는 특별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향후에는 사망사고가 재발되지 않도록 최고 경영층이 책임지고 관리해야 한다.” (1993. 4. 1. 승지원)

    “커튼, 카펫 등에 방염 처리가 되어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 삼성전자 포장실 등 화재가 발생하기 쉬운 곳에 어떤 대비책이 준비돼 있는지도 재점검해 봐야 한다.” (1995. 2. 23. LA)

    “삼성물산이 운영하고 있는 명보극장 건물의 안전점검은 물론 화재 등 비상사태 발생 시 대피 훈련 등이 잘되어 있는지 철저히 점검해 보아야 한다.” (1995. 7. 17. 일본 출장)

    “용접 작업 시에는 반드시 직원 2명 이상이 소화기를 들고 대기하다가 사고가 나면 곧바로 작동되도록 해야 한다.” (1994. 11. 22. 호텔신라)

    “돈의 액수가 아무리 많아도 과장·부장에게 맡길 것이 있고, 위생사고·안전사고·환경사고처럼 사장이 아니라 회장이 직접 챙겨도 시원찮을 것이 있다는 것을 평소 자주 얘기해 왔다…요즈음 옷은 50% 이상이 화학섬유다. 폭약과 같은 것이다. 만약 불이 났다고 생각해 보면 사후 수습은 아무 소용이 없다. 화재 전문가를 초빙해서 용역을 주어 정밀진단을 받아 최악의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 (1996. 5. 16. 본관 집무실)

    “건설의 토목 부문은 ‘건물 중심’으로 있는 것이다. 단단히 챙기고 소수 정예로 가져가야 한다. 토목 부문의 안전 관리, 예방 관리, 사고 방지 등에 대해서는 과거에도 여러 번 강조했었다. 일본인 고문 3~4명을 채용해 이들을 통해서 우선 토목 부문 최고 책임자인 부사장, 전무 이사 등을 직급별로 전원 교육하도록 해야겠다. 부산에서 사고 내고 또 여러 번 사고를 냈다. 정말 근원적으로 고쳐야 한다.” (1995. 2. 23. LA)

    “건설이 많이 뒤져 있다. 많이 변하는 정도가 아니라 혁명이 일어날 정도로 변해야 한다. 금년이 개혁하기에는 분위기로 보아 좋은 시점이다. 그룹 내 주요 공사 중 부실이나 문제가 있는 것은 즉시 공사를 중단하고 반성회 등을 먼저 가져야 할 것이다.” (1995. 8. 12. 본관 집무실)

    “그룹의 건설 관계사 사장, 중역을 다 불러 생각을 완전히 바꾸게 하고 앞으로 사고가 나면 영원히 삼성에 있을 생각을 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해 주어야 한다. 그런 경우 500명 중 200명, 300명이 되더라도 정리를 해 철저히 해야 한다. 그러면 삼성이 철저히 한다는 소문이 나게 될 것이고 비싸더라도 우리 쪽으로 오게 되어 있다. 건설은 이렇게 하는 것이 향후 2~3년간 투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철저히 시행해 나가야 한다.” (1995. 8. 12. 본관 집무실)

    “삼풍 사고 이후 아직도 생각이 바뀌지 않는 업체나 업계의 관행, 비리 등을 자세히 조사해 언론사로 하여금 특집을 기획하도록 권하는 것이 좋겠다. 아직도 관계사 공사에 공기단축을 위해 도면 없이 착공에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철저히 시정해야 한다. 도면 없이 시공을 하는 경우 사장이라도 대기발령을 내는 등 사장, 담당 중역, 건설 현장소장에게 책임을 철저히 물어야 한다.” (1995. 8. 12. 본관 집무실)

    “지금까지 여러 번 하겠다고 약속한 사항이 제대로 실천이 되고 있는가. 안 되고 있는 것을 전부 꺼내놓고 책임자가 누구인지 밝혀야 한다. 자기 발등에 떨어진 불이 아닌 남의 일이라 생각하여 심각히 반성을 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 텐데, 이런 사람들 회사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연구해 봐야겠다.” (1996. 5. 25. 전화)

    소음과 진동 공기의 질까지 점검하라는 지시도 이어졌다.

    “빌딩 공사용 각종 재료들에 대한 카탈로그를 모두 구해 소음과 진동 등에 대비한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1993. 8. 27. 일본 출장)

    “소음과 진동 전문가를 초빙해서 전 공장의 소음, 진동을 조사하여 대책을 수립하고, 기계의 질을 향상시키고 공무과를 통합, 공장 짓는 기초를 마련해야 한다. 향후 건설 헌법을 제정하고 공장 내 운반을 전기식으로 하는 방안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 (1993. 7. 28. 후쿠오카 회의)

    “건물 내 공기의 흐름을 조사해 보되 멸균까지 가능한 것인지 연구해 봐야 한다.” (1993. 8. 27. 일본 출장)

    “연수원의 경우 강의실의 공기청정도, 특히 연수생들이 방에 다 들어찼을 때를 점검해 봐야 한다. 환기 전문가를 불러서 근원적으로 조사해 보되, 인원수에 따라 가변성이 있도록 소프트웨어가 준비되어야 한다. 건축물에서는 항상 배기 , 배관, 상하수도 등의 인프라가 중요하다.” (1994. 3. 8. 연수원)

    “현재의 공장은 거의 레노베이션(Renovation)을 해야 할 것 같다. 천장에 유리창을 많이 내서 햇볕이 잘 들어 오게 하고, 바닥의 턱을 없애고 벽에도 단열재·소음재를 넣어 방음·방온을 하며 용해로에서 나오는 폐열도 잘 연구해서 리사이클링해 보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1994. 7. 1. 독일 코닝 공장)

    “사고는 날 수도 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앞으로 사고 그 자체에 대해서는 절대로 책임을 묻지 않겠다. 그러나 똑같은 사고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은 10원짜리라도 허용돼서는 안 된다. 다시 강조하지만 단순히 실수, 적자가 났다고 책임을 묻지는 않겠다.” (1994. 12. 20. 사장단 회의)

    “부실이나 잘못을 꺼내놓았다고 야단치지 말고 많이 내놓을수록 칭찬해야 한다. 잘못한 것을 보여주어 반성하고 느끼게 해주면 되는 것이고, 또한 향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1994. 4. 14. 김포공항)

    “한 사람이라도 다치면 어떤 파장이 올지 생각하라”

    이렇게 세세하게 안전을 챙기고 강조하니 사장단도 초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신경영추진위 보고서에 실린 박홍기 삼성물산 대표의 증언은 그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백화점 ‘유투존’ 개점을 앞두고 이건희 회장에게 진행 계획을 보고하는 자리였다. 이 회장은 ‘화재 예방, 화재 발생 시 피난 대책, 매장에서의 안전사고 가능성, 엘리베이터 오작동으로 인한 사고 가능성 등에 대해 철저하고 완벽하게 점검했는가’ 질문했다.

    행정기관의 안전 점검, 건설 안전팀을 통해 안전진단은 받았지만 이 회장이 말하는 정도의 철저한 확인은 자신이 없어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회장으로부터 크게 질책이 쏟아졌다.

    ‘백화점은 수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곳인데 한 사람이라도 다치면 사고를 당하는 사람은 물론 20만 삼성 가족에게 어떤 파장이 올 지 생각해 봤는가. 신경영을 추진하고 인명의 중요성을 중시하는 삼성이 어떻게 그런 자세로 유통 사업을 하는가. 조그마한 사업장 때문에 그룹 전체를 망칠 수도 있음을 모르는가!’

    회장 말씀대로 안전 점검을 새로 하려면 개점을 연기해야 하는데, 이미 개점 날짜를 발표한 상태였고 이에 맞춰 입주 업체들도 준비하고 있던 터라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런데 보고를 드린 이후 그룹에서 ‘365 점검팀’이 급파됐다. 40여 명의 안전 요원이 48시간 철야로 점검을 했는데 무려 260여 건의 안전문제를 발견했다.

    만약 그때 회장님이 안전문제를 지적하지 않고 점검팀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지금도 오싹한 마음이 든다. 그 후로 나는 안전이 이렇게 중요한 거였구나 하는 것을 절감하고 백화점 운영은 물론 이후 개점할 점포에도 안전에 관한 한 절대 이상이 없도록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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