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우크라이나 시장 복귀 채비하는 韓 기업들

[재계 인사이드] 어느덧 3년 남짓… 끝이 보이는 러‧우 전쟁

  • 김형민 아시아경제 기자 khm193@asiae.co.kr

    입력2025-04-13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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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늦어도 6월 러·우 시장 재입성할 것으로 점쳐져

    • 국제사회 ‘전범’ 취급 러시아, 우리 기업엔 ‘기회의 땅’

    • 우크라이나는 1200조 재건 시장, 러시아는 가전·자동차

    • 복귀 준비 LG·삼성·현대차, 재건 사업 기대 HD현대

    • 美 제재·새 정부 출범 등 각종 변수로 조심스러워

    2022년 10월 당시 촬영된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도심에 있는 삼성전자 사옥. 러시아군의 미사일 공격에 이 건물 하단부가 심각하게 파손됐다. 동아DB

    2022년 10월 당시 촬영된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도심에 있는 삼성전자 사옥. 러시아군의 미사일 공격에 이 건물 하단부가 심각하게 파손됐다. 동아DB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2022년 2월부터 3년 넘게 이어온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결심을 하고 관련 행보를 밟기 시작했다. 이에 우리 기업들도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두 나라로 다시 돌아가 3년 전에 영위했던 사업을 다시 하기 위해 채비해야 할 때가 됐기 때문이다.

    우리 기업들은 이르면 5월, 늦어도 6월에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시장에 재입성할 것으로 점쳐진다. 종전 협상을 주도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다음 달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러시아, 우크라이나의 대표단과 만나 회담한다. 전쟁 당사국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그리고 미국은 이 자리에서 종전 방식에 대한 가닥을 잡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해진다. 종전이 확정되면 러시아·우크라이나는 시장의 문을 공식적으로 열 것이고, 그때 우리 기업들은 현지 사업을 본격적으로 재개할 수 있게 된다.

    우리 기업들은 이 순간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 재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돈을 벌어야 하는 기업들은 사업을 전개하는 데 전쟁의 옳고 그름은 따지지 않는다. 러시아는 국제사회에서 전쟁을 일으킨 ‘전범’으로 취급받고 있지만, 기업들은 수익성 사업을 전방위로 펼칠 수 있는 ‘기회의 땅’으로 여긴다. 우크라이나 역시 마찬가지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역에 대해 대규모 재건 사업을 계획하고 있어 기업들 사이에선 ‘금싸라기’로 급부상했다. 사업 규모는 자그마치 9000억 달러(1200조 원)에 달한다.

    우리 정부는 2023년 5월 우크라이나 정부와 재건 사업 관련 양국 간 협력을 강화하기로 하는 내용의 업무협약(MOU)을 일찌감치 체결했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우크라이나에서 3580억 달러 규모(523조 원)의 전력·수소에너지 프로젝트, 1300억 달러(189조 원) 규모의 에너지 생산 관련 설비 구축 등의 기회를 제공받기로 약속돼 있다. 해당 분야에서 강점을 지닌 우리 기업들은 강한 의욕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전쟁 발발 전 가동되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내 현대자동차 공장. 동아DB

    전쟁 발발 전 가동되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내 현대자동차 공장. 동아DB

    움직이는 LG·삼성·현대차…러시아 복귀 1등은 韓?

    러시아 현지 언론은 종전 후 우리 기업들이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자국 시장에 돌아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LG전자가 선두 주자로 꼽힌다. 러시아 가전업체 재키스를 설립한 구세인 이마노프는 지난 3월 말 자국 일간지 ‘코메르산트’와의 인터뷰에서 “LG전자가 러시아에 공식 복귀하는 첫 해외 대형 공급업체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 LG전자는 최근 러시아 모스크바주 루자 도로호보에 있는 공장의 라인 일부를 조금씩 돌리기 시작했다. 전쟁 발발 이후 가동되지 않아 노후화 우려가 있는 생산설비를 다시 살리고 공장에 비축된 재고 자재를 소비하기 위한 조치다. 이들 공장은 전쟁 발발하기 직전까지 세탁기, 냉장고 등을 만들었다. 조주완 LG전자 최고경영자(CEO)는 이와 관련해 “아직 전쟁이 끝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조심해서 보고 있다”며 러시아 복귀를 확언하진 않았다.

    하지만 공장 가동은 곧 있을 수 있는 생산 재개를 앞두고 예열 작업에 착수한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LG전자는 전쟁 전까지 러시아 국민 사이에서 세탁기, 냉장고의 주요 판매처로 자리매김했던 만큼 재진출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이 유력해 보인다. LG전자는 2022년 2월 현지 사업의 일부를 중단, 철수하기 전까지 러시아 세탁기, 냉장고 시장의 약 25~26%를 차지하고 있었다.

    현대차는 세계 완성차 기업 중 가장 먼저 러시아 재진출 여부를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2023년 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을 1만 루블(16만 원)에 매각한 현대차그룹은 연말까지 재진출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현대차그룹은 러시아 벤처캐피털(VC) 아트파이낸스에 팔면서 2년 이내에 공장을 되살 수 있다는 조건(바이백)을 달았다. 바이백 권리 소멸 시효가 오는 12월인 만큼 최종 결정까지 시간 여유가 있다.

    전쟁 발발 전 현대차그룹도 러시아 수출 비중이 높았다. 한국무역협회(무협)에 따르면 2021년 한국의 대(對)러시아 수출 품목 중 자동차(25억 달러·25.5%)와 자동차 부품(15억 달러·15.1%)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 40%를 넘었다. 현대차·기아가 당시 러시아에서 판매한 차량은 35만7000대에 달했다. 시장점유율은 21%였다. 러시아로 다시 돌아간다면, 중국과의 경쟁이 불가피하다. 중국 기업들은 현대차가 철수한 러시아 자동차 시장의 절반 이상을 장악하며 새로운 강자로 군림했다. 한국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KAMA)가 4월 1일 발표한 ‘러시아 자동차 산업 현황 및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의 대러시아 자동차 수출은 2022년 15만4000대에서 지난해 117만 대로 약 7.6배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2021년 8%대에 그쳤던 러시아 차 시장에서 중국계 브랜드 점유율도 지난해 60.4%까지 늘었다.

    다른 대기업들도 러시아 재진출 계획을 면밀히 살피고 있다. 삼성전자는 러시아 공장 재가동, 시장 재진출 여부 등을 “검토하고 있는 단계”라고 밝혔다. 업계에선 삼성전자가 전쟁이 일어나기 전 러시아 TV 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기록했던 만큼 러시아 시장 재진출을 적극적으로 고려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전쟁 전인 2021년 삼성전자 러시아 법인이 현지 시장에서 기록한 매출은 3610억 루블(약 6조3247억 원)이었다. 삼성전자는 칼루가주 공단에 TV와 모니터를 만드는 공장이 있다.

    재건 사업 맞물린 우크라 진출, 주목받는 HD현대

    우리 기업들의 우크라이나 재진출은 재건 사업과 맞물려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HD현대그룹 건설기계 계열사인 HD현대인프라코어와 HD현대건설기계가 가장 큰 관심을 받는다. 두 회사는 최근 종전 이후 현지에서 필요로 하는 장비의 수요 예측에 돌입한 것으로 전해진다. 재건 사업을 위해선 굴착기, 휠로더, 백호로더 등 중장비가 반드시 필요하다. HD현대 계열사들은 성능이 높은 각종 중장비를 제공해 줄 능력을 갖췄다. 현지에서 근로자들이 이 기계들을 제대로 사용토록 하기 위해선 교육센터 설립, 테크니션 양성 등도 필요하다. 두 회사는 이와 관련해 현지 정부, 지방정부와도 협력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HD현대인프라코어와 HD현대건설기계는 전쟁이 발발하기 전 우크라이나 시장의 3분의 1을 점유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순위도 당연히 1위였다. 2004년 처음 현지 시장에 진출한 이후 맞춤형 장비를 공급하며 매년 판매량과 점유율을 높여왔다. 과거 1위 자리를 되찾기 위해 시장 진출을 서두를 가능성이 다분하다.

    현대건설, 삼성물산, 대우건설 등 우리나라 주요 건설사들도 우크라이나 또는 근방에 있는 국가들에 다져놓은 기반을 바탕으로 시장 재진출 기회를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앞서 현대건설은 2023년 7월 우크라이나 보리스필 국제공항공사와 공항 확장 공사를 위한 MOU를 맺었고, 같은 해 11월에는 우크라이나 전력공사와 송변전 신설·보수공사에 관한 협약을 체결해 놨다. 삼성물산도 2023년 7월 우크라이나 리비우시와 스마트시티 개발 협력 MOU로 손을 잡았고, 대우건설도 같은 시기에 폴란드건설협회, 현지 3위 건설기업 이알버드(ERBUD)와 재건 관련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현지에서 진행될 각종 건설 프로젝트에서 협력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우리 건설업계는 그간 국내 경기의 침체와 부동산 시장의 위축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온 터라, 이번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을 분위기 전환의 기회로 삼고자 하는 의지가 매우 강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는 재건 사업 참여에 관심이 있는 중소기업들을 지원하고 있다. 코트라에 참여 방법을 묻는 기업들의 문의가 빗발치고 있는 것으로도 전해진다. 강경성 코트라 사장이 2월 27일 취임 100일을 맞아 개최한 기자간담회에서 “우크라이나의 재건 프로젝트가 본격화되면 코트라 내에 별도의 전담반을 꾸려서 기업 지원 활동을 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도 있다. 강 사장은 “정부와 상의해서 (기업이) 진입할 수 있도록 코트라 내 체제를 갖출 필요가 있다”며 “전쟁 이후 재건은 전력과 상수도, 의료 등이 있는데 우리 기업이 이런 인프라에서 강하다”고도 강조했다.

    2014년 국내 기업의 러시아 진출이 활발하던 당시 LG전자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연 프리미엄 가전제품 출시 행사에서 방문자들이 냉장고를 살펴보고 있다. 동아DB

    2014년 국내 기업의 러시아 진출이 활발하던 당시 LG전자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연 프리미엄 가전제품 출시 행사에서 방문자들이 냉장고를 살펴보고 있다. 동아DB

    포기할 수 없는 시장성… 美 제재·새 정부 출범 등은 관건

    전쟁으로 일부 폐허가 됐음에도, 우리 기업들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문을 두드리는 이유는, 이들 국가가 가진 ‘시장성’에 있다. 특히 러시아는 지난해 기준 인구수가 약 1억4482만 명에 이를 정도로 시장이 거대하다. 두터운 소비층은 미국과 중국·인도 등에 버금가고, 동유럽 시장 진출의 교두보가 될 수 있다는 지리적 이점도 매력으로 꼽힌다.

    러시아는 삼성, LG, 현대차 등 우리 기업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만큼, 기업들이 그간 현지에서 사업 기반을 잘 다져놓기도 했다. 오리온이 만든 ‘초코파이’가 러시아에서 국민 간식으로 불렸던 건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각종 지표에서도 우리 기업에 대한 러시아의 높은 호응도가 확인된다. 주러시아 한국대사관 자료에 따르면 전쟁 전인 2022년 기준 우리나라와 러시아의 교역 규모는 211억4000만 달러(약 30조9679억 원)로, 아시아 국가 중 중국 다음으로 많았다. 특히 우리 승용차, 자동차부품, 건설중장비, 합성수지, 화장품, 의료기기 등이 잘 팔렸다.

    우크라이나는 우리 기업들이 오랫동안 눈독 들여온 시장이다. 교역량은 전쟁 직전에 급증했다. 코트라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우리 기업들이 우크라이나에 수출한 규모는 3억7451만 달러(약 5486억 원)다. 전년(2억1693만 달러)보다 72.6% 증가했다. 우크라이나는 우리 기업들이 만드는 자동차, 플라스틱, 보일러, 철강 등에 호응도가 높다. 또 우크라이나는 반도체 등 분야에서 실력 좋은 엔지니어를 많이 배출하고 있어 이곳 인재들에 대한 우리 기업들의 관심도 높은 것으로 전해진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 새 정부가 들어선 미국이 4월부터 관세 폭탄을 전방위로 투하하는 등 세계시장의 불확실성이 심화한 점도 우리 기업들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재진출을 갈망하게 된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또 미·중 갈등이 더욱 심화된 가운데 나라별로 무역장벽이 높아질 가능성이 점쳐지며, 기업들 사이에선 기회가 엿보이는 시장이라면 발 빠르게 움직여 선점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생겼다는 분석이다.

    다만 러시아, 우크라이나 시장으로 재진출하는 데 우리 기업들은 확답을 내놓기를 조심스러워하고 있다. 각종 변수가 많아 우려되는 면이 없지 않아서다. 러시아가 특히 그렇다. 장상식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미국이 전쟁 기간 중 러시아에 대해 내렸던 각종 경제제재를 얼마나 풀어줄지 지켜봐야 하고, 러시아 정부가 어떤 자세를 취할지도 아직은 불분명하다”고 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공세 고삐를 늦추기 위해 전쟁 기간에 경제적 압박을 강화해 왔다. 러시아가 원유 등 에너지 자원의 수출을 제대로 하지 못하도록 억제하고, 러시아 은행들에 대해선 금융 제재를 내려 자금 유입 경로를 틀어막았다. 이에 따라 유럽의 주요 국가들도 러시아와 교역 관계를 끊은 바 있다. 이런 경제 관련 압박 조치들이 풀려야 우리 기업들이 러시아로 재진입했을 때 원활히 사업을 전개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2월 18일(현지 시간)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
디리야 궁전에 마주 앉은 고위급 인사들. 맨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미국의 스티브 위트코프 백악관 중동
특사,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 마이클 왈츠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사우디의 파이살 빈 파르한 알 사우드
외교장관, 모사드 빈 무함마드 알 아이반 국가안보보좌관, 러시아의 유리 우샤코프 대통령 보좌관,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교장관. AP 뉴시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2월 18일(현지 시간)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 디리야 궁전에 마주 앉은 고위급 인사들. 맨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미국의 스티브 위트코프 백악관 중동 특사,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 마이클 왈츠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사우디의 파이살 빈 파르한 알 사우드 외교장관, 모사드 빈 무함마드 알 아이반 국가안보보좌관, 러시아의 유리 우샤코프 대통령 보좌관,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교장관. AP 뉴시스

    또한 러시아는 여전히 정부가 막강한 권한을 갖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공산주의 국가란 점에서, 현지에 다시 들어오려는 우리 기업들에 호의적 반응을 보일지 아직 확실치 않다. 전쟁으로 인해 우리 기업들이 떠난 공장들에 대해선 국가 재산으로 귀속·가압류하는 조치가 내려질 가능성이 있고,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됐다는 이유로 우리 기업들이 러시아 현지에서 받아야 할 금액에 대해서도 제대로 송금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한다.

    대통령 탄핵 선고 이후 조성된 조기 대선 국면과 대선 후 출범할 새 정부의 성향 등도 우리 기업들로선 큰 변수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기업들이 해외 시장에 진출할 때 정부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의 경우엔 정부가 주도해서 참여 기업들을 선정하게 된다”고 강조하며 “대선 후면 물러날 현 정부가 두 달 동안 기업들의 시장 재진출을 제대로 지원할지 알 수 없고, 선거 후 새로 구성될 정부가 러시아·우크라이나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서도 기업들의 시장 재진출 여부가 크게 엇갈릴 가능성이 있어 기업들은 지금 운신의 폭이 좁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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