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 블록체인 덕후가 만든 이더리움
‘세계 컴퓨터’ 표방하며 영향력 넓혀
스마트 콘트랙트 갖추며 금융 플랫폼 역할도
소유권 증명 및 보안 정보 공유 기능도 갖춰
스탠다드차타드 “이더리움 1만4000달러 갈 수도”

비탈릭 부테린 이더리움 공동 설립자가 2022년 8월 4일 서울 송파구 소피텔 앰배서더 서울에서 열린 ‘비들 아시아 2022 콘퍼런스’에서 기조 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이더리움(Ethereum)은 블록체인의 가능성을 한 단계 확장하고자 2015년 세상에 등장한 플랫폼이다.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스마트 콘트랙트(자동으로 실행되는 프로그램)를 구현함으로써 탈중앙화 애플리케이션(dApp) 시대를 열었다. 이더리움은 “디지털 화폐를 넘어 다양한 활용이 가능한 분산 컴퓨팅 플랫폼을 만들겠다”는 젊은 프로그래머 비탈릭 부테린(Vitalik Buterin)의 비전에서 출발했다.
러시아 출신의 캐나다인 부테린은 2013년 19세의 나이로 이더리움 개념을 담은 백서를 발표했다. 그는 백서에서 블록체인이 금융거래 외의 응용 분야에도 쓰일 수 있음을 역설하고, 2014년 공동 창립자들과 함께 이더리움 프로젝트를 위해 초기 자금을 모집했다. 이때 약 1800만 달러(약 200억 원)의 자금을 끌어모았다.
이렇게 모은 자본과 개발 커뮤니티의 지원을 바탕으로, 마침내 2015년 7월 30일 이더리움 네트워크가 ‘프런티어(Frontier)’라는 이름으로 첫 블록을 생성하며 공식 출범했다. 이때 배포된 암호화폐가 바로 이더리움(ETH)이다. 이후 이더리움은 ‘세계 컴퓨터’를 표방하며 빠르게 성장해 나갔다.
‘블록체인 위에 작동하는 새로운 인터넷’
부테린이 이더리움을 구상한 배경에는 비트코인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그는 당시의 블록체인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비트코인의 제한적 스크립트 기능으로는 복잡한 응용을 만들기 어려웠기 때문이다.부테린은 완전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지원하는 블록체인 플랫폼을 만들려 했다. 블록체인 환경 내에서 누구나 자신만의 프로그램을 만들고, 이를 블록체인 위에 올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요약하면, ‘블록체인 위에 작동하는 새로운 인터넷’을 구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초기 이더리움 개발팀은 이상을 현실화하기 위해 2014년 비영리단체인 이더리움 재단(Ethereum Foundation)을 설립했다. 같은 해 7~8월 진행된 이더리움 초기 코인 공개(ICO·Initial Coin Offering)를 통해 프로젝트 자금을 확보했다. 당시만 해도 블록체인 플랫폼에 투자한다는 개념이 생소했다. 하지만 개발자들과 암호화폐 애호가들의 호응이 이어지며 이더리움은 순조롭게 첫발을 내디뎠다.
부테린은 이 자금을 바탕으로 “모든 블록체인 활용 분야의 해결책이 이더리움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금융, 계약, 자산관리 등 다양한 영역을 아우르는 범용 블록체인으로 자리매김하겠다는 포부였다.

2024년 8월 5일 서울 강남구 업비트라운지에 설치된 패드에 이더리움 시세가 표시돼 있다. 동아DB
이러한 혁신적 설계 덕에 이더리움은 단순한 암호화폐를 넘어 ‘블록체인 2.0’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스마트 콘트랙트로 금융까지 섭렵
프로그래밍 가능 블록체인은 기존에 한정된 기능만 수행하던 비트코인과 달리 응용 범위의 무한한 확장성을 보여주었다. 이더리움이 가져온 가장 큰 혁신 중 하나는 단연 ‘스마트 콘트랙트(Smart Contract)’의 도입이다. 스마트 콘트랙트는 블록체인상에 기록된 자기 실행적 코드다. 특정 조건이 충족되면 미리 정의된 대로 거래나 조치를 자동 수행한다. 말 그대로 ‘프로그램화된 계약서’다.스마트 콘트랙트 덕분에 2015~2016년 사이 이더리움 생태계 이용자는 크게 늘었다. 빠른 성장의 부작용도 있었다. 사용자가 늘어난 만큼 보안에 취약점이 생겼다. 2016년 이더리움 기반의 분산 자율 조직인 ‘The DAO’ 프로젝트에 대규모 해킹 사건이 발생했다. The DAO는 투자 펀드 형태의 스마트 콘트랙트로, 이더리움상에서 약 1억5000만 달러 상당의 자금을 모집하며 큰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스마트 콘트랙트의 취약점을 노린 해커가 그중 5000만 달러 상당의 이더리움을 탈취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더리움 커뮤니티는 피해 복구를 위해 거래 전으로 블록체인을 되돌리는 ‘하드포크(hard fork)’를 단행했다. 하드포크로 인해 이더리움 블록체인은 두 갈래로 분리됐다. 해킹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그대로 블록체인을 유지하자는 사람은 이더리움 클래식(ETC)에 남았다. 반대로 해킹 피해를 무효화해야 한다는 사람들은 신생 이더리움(ETH)으로 옮겨갔다. 이후 이더리움은 보안 강화와 프로토콜 개선에 한층 더 신경 쓰기 시작했다.
이더리움은 새로운 암호화폐 발행 플랫폼 기능도 있다. 2017년을 전후로 이더리움 기반 토큰 개발 붐이 일어났다. 토큰은 자체적 블록체인을 보유하지 못한 암호화폐다. 이더리움 등 개방형 블록체인을 사용해 토큰을 발행한다. 토큰을 통해 투자금을 유치하는 사례가 많았다. 일부 스타트업이나 블록체인 프로젝트는 토큰을 만들고, ICO를 통해 이를 팔아 자금을 조달했다. 2017년 한 해에만 ICO를 통해 약 47억 달러(약 5조 원)에 달하는 자금이 모였다.
ICO 열풍으로 수백 종의 토큰과 블록체인 프로젝트가 쏟아져 나왔고, 이더리움은 토큰 이코노미(token economy)의 중심지로 급부상했다. ICO 덕분에 이더리움 네트워크 사용량과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며 2017년 이더리움 가격도 급등했다. 2017년 초 8.10달러에 불과했던 이더리움의 개당 가격은 같은 해 말 1463.72달러로 올랐다.
한편 무분별한 프로젝트의 난립과 투기 열풍의 부작용도 나타났다. 2018년에는 ICO 거품이 꺼지며 많은 토큰 가치가 폭락하고 규제 당국의 경고가 이어지기도 했다. 대한민국을 포함한 일부 국가는 ICO를 전면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미등록 증권 이슈로 여러 ICO 발행사를 제재하는 등 규제도 강화했다. ICO 시대는 이렇게 저물었지만, 이더리움은 이 과정을 통해 전 세계 투자자와 개발자들에게 프로토콜의 유연성과 확장 가능성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2019년경부터 이더리움 생태계에서는 탈중앙화 금융(DeFi·Decentralized Finance)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디파이란 은행이나 증권사 같은 중개자 없이도 블록체인과 스마트 콘트랙트만으로 예금, 대출, 거래, 파생상품 등의 금융 서비스를 구현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2020년 들어 ‘디파이 열풍’이 불었다. 암호자산을 예치하고 이자로 수익을 얻는 ‘이자 농사(Yield Farming)’ 때문에 관련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2020년 중반 전 세계 디파이 관련 프로젝트에 예치된 암호화폐 자산 규모는 10억 달러에 육박했다. 2021년 말에는 1000억 달러를 넘어설 정도로 급증했다.
디파이 사용자들은 이더리움 지갑 하나만 있으면 이들 서비스에 접속해 자금을 예치하거나 빌릴 수 있다. 이러한 개방성과 접근성 덕분에, 전통 금융 시스템밖에 있던 이들도 금융서비스에 참여할 수 있어 금융 포용성이 높아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으로는 과도한 개인 부채와 보안 사고 위험, 그리고 규제 공백 등의 문제도 노출돼, 이후 각국 정부가 디파이에도 자금세탁방지(AML)와 소비자 보호 규제를 적용해야 한다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그럼에도 디파이는 이더리움이 가진 프로토콜 혁신의 잠재력을 전 세계에 각인시키며 금융 분야 블록체인 혁신을 이끄는 핵심 축이 됐다.
진화 멈추지 않는 이더리움
2021년 이더리움 생태계에서 일어난 또 다른 혁신적 흐름은 NFT(Non-Fungible Token·대체불가토큰) 열풍이다. NFT는 각각 고유한 가치를 지닌 토큰으로, 디지털 예술품이나 수집품, 게임 아이템 등의 소유권을 블록체인에 등록하는 데 사용된다. 이더리움은 2017년 고양이 캐릭터 수집 게임 ‘크립토키티(CryptoKitties)’로 처음 NFT 개념을 대중에게 선보였다.2021년 3월, 디지털 아티스트 비플(Beeple)의 NFT 작품이 경매에서 무려 6930만 달러(약 800억 원)에 낙찰됐다. 이를 계기로 예술가, 스포츠 구단, 유명 브랜드 등도 속속 NFT를 발행하기 시작했고, NFT 시장 규모는 그해 폭발적으로 성장해 연간 거래액은 249억 달러에 달했다.

이세돌이 인공지능(AI) 알파고와 벌인 5번기 제4국이 2021년 5월 오픈씨(OpenSea)의 NFT 경매에 올라 19만8957달러에 낙찰됐다. OpenSea
비금융 분야에서도 이더리움은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공급망 관리에서 제품 이력을 블록체인에 기록하거나, 의료 데이터를 환자 중심으로 관리하는 플랫폼 등에 이더리움이 시범 적용되고 있다. 이렇듯 기술 발전과 응용 확산이 맞물린다면, 이더리움은 단순한 암호화폐 플랫폼을 넘어 미래 디지털 경제의 프로토콜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크다.
블록체인 경제 움직이는 ‘디지털 오일’
이더리움의 투자 자산으로서의 가치 역시 많은 이들의 관심사다. 비트코인이 ‘디지털 금’으로 불리며 가치 저장 수단으로 자리 잡아가는 가운데, 이더리움은 ‘디지털 오일’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는 탈중앙화된 경제를 움직이는 연료로 이더리움(ETH)의 쓰임새를 빗댄 표현이다. 실제로 이더리움 가격은 이더리움 네트워크의 활용과 직결되는 경향이 있다. 과거 ICO, DeFi, NFT 열풍 시기에 이더리움 수요가 급증하며 가격이 크게 뛰었고, 반대로 2018년 ICO 침체기나 2022년 거시경제 불안 시기에는 가격이 크게 하락하기도 했다.높은 변동성에도 불구하고, 기관투자자들은 이더리움의 장기적 성장성에 주목하고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 스탠다드차타드는 2023년 보고서에서 “미국에서 이더리움 현물 ETF 승인이 이뤄질 경우 2025년 말까지 이더리움 가격이 1만4000달러(약 1700만 원)까지 상승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궁극적으로 이더리움의 성공 여부는 탈중앙화 생태계의 유용성을 대중에게 입증하는 데 달려 있다. 누구나 신뢰할 수 있는 글로벌 컴퓨팅 인프라로서 이더리움이 자리 잡는다면, 그것이 곧 이더리움의 가치로 환산될 것이다. 블록체인 기술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이더리움은 실용적인 답을 제시하고 있다. “신뢰를 코드로 구현한다”는 혁신적 발상으로 시작된 이더리움 실험은 현재진행형이며, 그 미래 양상은 오늘의 인터넷만큼이나 우리 생활을 깊이 바꿔놓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더리움의 여정에 전통 금융권과 투자자들이 주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앞으로도 이더리움은 도전과 변화를 거듭하며 블록체인 혁명의 중심축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