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1996년 개편된 새 교과서에는 폴란드를 중심으로 동유럽 지역에 광범위한 유대인 저항조직이 있었으며, 그중 군사 저항조직은 이미 1939년부터 존재했음이 기술되었다. 또한 ‘반격, 불타는 바르샤바의 게토’ 등 유대인 저항시가 짤막하게나마 소개되고 있다. 이처럼 폴란드, 독일 양국은 전후 이스라엘 역사가들의 노력을 적극 수용하고 있다.
“…(중략)… 우리 유대인들이 들판에서 기도하는 것을 들어주었던 야훼여, 그리고 당신 독일인의 하느님이여, 우리의 기도를 들어, 우리가 독일인과 벌이는 피의 투쟁을 도우소서…(중략)”.
교과서에 담긴 이름모를 한 유대인의 절규가, 지금까지 역사의 증언대로 보존되고 있는 강제 수용소의 가스실과 화장터의 시공간적 한계를 넘어서, 오늘의 독일 청소년들에게까지 전해지고 있다.
독일 연방 각 주(州)정부 교육청은 ‘홀로코스트 교육’을 위해, 생존자와의 만남을 주선하고, 강제 수용소 방문과 학생 자치활동을 지원하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또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각 주정부마다 각각 ‘홀로코스트 교육 자료 도서관’도 운영하고 있다. 함부르크 자료 도서관의 경우 2000년 한 해 동안 총 3319회 대출되었다. 구체적인 대출 내역을 보면 홀로코스트 기록영화 134회, 강제 수용소 기록영화 41회, 아우슈비츠 기록영화 20회, 영화 ‘쉰들러 리스트’ 71회다.
폴란드·독일·이스라엘 학생 상호 교환 방문
독일 서북부에 있는 한 주의 경우, 이제까지 적극적으로 추진해온 강제수용소 생존자와 학생들의 직접적인 만남이 생존자 노령화로 교육효과가 줄어들고 있다고 판단하여, 폴란드·독일·이스라엘 학생들의 상호교환과 현장학습에 대한 지원을 한층 강화하고 있다. 폴란드 학생을 독일로 초청, 나치가 불태운 유대교 성소를 보여주기도 하고, 독일 학생들을 폴란드에 보내 나치의 강제 수용소를 둘러보게 한다. 또 학생들을 방문지역 폴란드 가정에 묵게 하는 등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히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 현장학습과 교류활동에 참여한 학생들은 직접 기록영화를 만들기도 하는 등,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학급 동료에게 소개하는 기회도 갖게 된다. ‘강제수용소의 여성들’이라는 소주제로 폴란드 참관기를 발표한 15세 독일 여학생은 “이제 내 머리 속에 당시의 일들이 그림처럼 또렷하게 남아 있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내가 찾아갔던 그곳, 만나본 사람들, 어떤 물감으로도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아요”라며 참관기를 마감하고 있다.
역사교육 연구가들의 적극적인 활동도 눈에 띈다. 이들은 연구활동뿐만 아니라, 수업 참관이나 새로운 역사교육 프로젝트를 운영해, 전후 2세대를 위한 과거사 교육 내용과 방식 개편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1951년 ‘교원노조’의 단위 노조로 설립된 ‘서독 역사교사 협회’는 ‘우리시대 역사교육’이라는 연구팀을 자체 구성하여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독일연방 정부의 지원을 받아 1979년 설립된 역사교과서 연구기관 ‘게오르크 에케르트 연구소(www.gei.de)’는 국제적 공동 학술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이 연구소는 1992년부터는 유네스코(UNESCO)와 협력, ‘국제 교과서 연구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국가의 경계를 넘어 국가간 선입관과 오해를 제거하는 연구작업에 기여하고 있다.
이 연구소가 주최한 2000년 학술대회에서는 매우 주목할 만한 연구결과들이 발표되었다. 지금까지 ‘전후 1세대’에 기초한 역사교육이 교육대상이 전후 2세대로 교체되면서 그 내용과 방식에 뚜렷한 한계를 보이고 있다는 지적이다. 또 과거사 교과과정에 대한 개혁이 시급하다는 의견도 개진되었다. 이 학술대회가 던지는 일차적인 질문은, 이른바 ‘입체적인 홀로코스트 교육을 하고 있으나 급격하게 늘어나는 청소년층의 극우파 동조 경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이다.
1998년부터 매년 진행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는 이 질문의 심각성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홀로코스트’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느냐는 질문에, 조사대상 청소년(14~18세) 중 평균 59%가 ‘모른다’고 답하였다. 실업계 고등학교의 경우 더욱 심각하여 ‘모른다’고 대답한 비율이 무려 87%에 이르고 있다. 14세 학생 중 90%가, 의무 교과과정인 ‘홀로코스트 교육’을 수업시간에 접해보지 못했다고 답해서 충격을 더했다.
이에 대해 한 역사 교과서의 저자인 질버만씨는 “최근 몇 년 동안 독일 전역에서 법적 구속력을 가진 교과과정이 지켜지지 않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나아가 “무려 60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살해됐다. 대량 학살 이후 이제 반세기가 지났을 뿐인데, 성인인구의 70%만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특히 구동독지역의 청소년들이 ‘무지’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성토했다. 그의 지적처럼, 구동독지역 청소년의 교육은 심각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이에 따라 관할 주정부 교육청에서는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베를린 주정부 교육청의 경우, 2001년 초부터 중·고등학교 역사 교사를 대상으로 ‘극우’ 문제에 대한 ‘재교육’을 한창 진행하고 있다. 봄부터 1년 과정으로 진행되는 3개조 재교육 세미나는 참가 희망 교사들로 만원을 이루었다. 각 25명 정원 세미나에 평균 45명의 지원자가 몰려들었고 참가 이유를 묻는 지원서 질문 조항에, 많은 교사가 ‘역사교육과 극우에 대한 교과과정이 자신들의 능력을 초과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재교육에 대한 이와 같은 열기는 최근 발표된 베를린 주 교육청의 통계자료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2001년 상반기에 발생한 극우성향 학생들의 사고는 총 24건으로 전년과 견주어 33%나 상승했다. 또한 24건 중 3분의 2에 해당하는 16건이 구동베를린 지역에서 발생했다. 칠판이나 벽에 낙서된 나치 문양과 ‘하일 히틀러’라고 구호를 외치는 학생, 유대인 여학생 책상에 유대인을 상징하는 ‘다윗의 별’을 그려놓은 경우 등이 사례로 보고되었다. 재교육을 통해 교사들은 극우파의 기초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항논리를 발전시킬 뿐 아니라, 그들이 선호하는 록밴드, 구호, 유행하는 옷 그리고 즐겨 사용하는 상징에 대한 정보도 얻게 된다. 특히 참가 교사들이 사례발표 등을 통해 경험을 나눔으로써, 문제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공동 대응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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