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호

신자유주의로는 인류 미래 없다

  • 장행훈 경원대 교수

    입력2007-01-26 10: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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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산품과 서비스에 대한 규제를 더욱 푸는 등 자유무역의 길을 토의하기 위해서 미국이 오랫동안 준비한 12월초의 시애틀 WTO(세계무역기구) 각료회의는 세계각국에서 모인 4만여명의 NGO(비정부기구)회원들과 시애틀 경찰의 충돌로 수라장으로 변하고 세계 134개국 통상장관과 무역전문가들은 회의 의제에도 합의하지 못한 채 뿔뿔이 헤어져야 했다.

    시애틀의 WTO회의가 농민, 노동자, 환경운동가 등 다양한 이익대표들의 격렬한 반대시위로 상가 유리창이 깨지고 경찰과 충돌한 시위자들이 다치는 유혈사태로 바뀐 것은 이제 WTO회의가 단순한 무역회담으로 인식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WTO를 통상과 고용과 같은 전통적 경제문제만을 토의하는 기구가 아니라 사람들이 먹는 음식, 숨쉬는 공기, 그들이 사는 사회적·문화적 환경에 영향을 끼치는 광범위한 문제를 다루는 장소, 우리의 생활환경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모임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일반인에게는 낯선 세계무역기구가 각국의 국회에서 통과한 국내법까지도 무효화시킬 수 있다는 것, 그것도 미국과 같은 선진국이나 다국적기업의 이익을 위해서 그와 같은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반발이 더욱 거세지게 됐다.

    이제는 WTO를 신자유주의 및 세계화의 대행기관으로 의식하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애틀 WTO회의의 결렬은 단순히 미국이 자국의 농산물과 서비스의 판로를 확장하기 위해서 준비한 계획이 좌절됐다는 사실보다 훨씬 큰 이데올로기적 문제를 제기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21세기에 들어섰다. 새 세기에도 지난 20여년간 국경을 넘어, 이데올로기의 벽을 뚫고 세계 곳곳에 침투하고 있는 세계화 및 신자유주의의 공세와 맞닥뜨리게 될 것 같다. 레이건과 대처 치하에서 그 활력을 과시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특히 소련이 붕괴한 이후 세계의 유일한 가치로 군림하게 됐다. 국가의 간섭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국경의 벽을 낮춰 시장이 경제를 지배할 수 있도록 자유의 영역을 최대한으로 확대하여 자본과 물자가 자유롭게 유통하게 하면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는 논리는 매력적이다. 세계화의 논리는 설득력도 있어 보였다.

    세계화의 함정

    국경도 경비병도 없는 세계화는 처음부터 금융의 세계화를 노린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양의 외화가 짧은 기간에 아무 통제 없이 들어오고 나가게 되면 경제생활에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을 야기시킬 수 있다. 이 간단한 진리, 그 위협을 프랑스의 ‘르몽드’ 같은 신문에서는 90년대 초부터 지적하고 경고했다.

    그러나 세계화의 매력에만 눈이 어두운 개도국의 정부나 학자들은 매력 뒤에 가려져 있는 함정을 보지 못했다. 그 무지와 과도한 욕심의 대가가 한국을 비롯해서 태국, 인도네시아가 97년부터 겪은 외환위기인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세계은행과 IMF(국제통화기금)가 몇 해 전부터 과감한 외환자유화를 권고했고 그 권고를 따른 것이 아시아에 금융위기를 불러왔다는 것도 다 아는 사실이다. 세계은행의 부사장이며 경제학자인 스티그러츠까지도 “이들 나라에서 자본이동을 자유화시키지 않았더라면 위기를 겪지 않았을 것”이라고 시인한 바 있다.

    전세계적으로 하루에 거래되는 외환의 양은 1조8000억 달러로 상품과 서비스 교역액의 54배에 달한다. 이 거액의 돈이 하루에도 여러 차례 거래될 수 있다. 환차(換差)를 노리는 외환투기꾼들의 환거래 때문이다. 이들의 장난으로 외환시세가 바뀐다. 그렇기 때문에 외채가 많은 약소국가는 이들의 농간에 피해를 볼 수 있다. 불행히도 우리도 그 피해국의 하나다

    무력해지는 국가

    금융시장은 거래되는 외환량이 천문학적 수준에 이를 뿐 아니라 이른바 파생(Derivatives)상품, 선물(Future)상품 등 거래상품이 다양하고 규칙이 워낙 복잡하다. 이 복잡한 규칙을 능숙하게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은 세계적으로도 십여 명에 지나지 않을 정도다. 이들은 ‘금융시장의 지배자’로 간주되며 이들의 말 한마디, 몸 동작 하나에 따라 값이 오르내리고 증권시장이 요동치기도 한다.

    막강한 힘을 가진 금융그룹과 비교할 때 국가의 힘은 정말 미약하다. 1994년 12월의 멕시코 금융위기가 그 예일 수 있다. 멕시코를 돕기 위해 미국이 IMF와 세계은행과 함께 단시일에 모을 수 있었던 외화총액은 500억 달러에 불과했다.

    그런데 미국의 3대 연금 기금인 피델리티 인베스트먼트 (Fidelity Investment), 밴가드 그룹(Vanguard group), 캐피털 리서치 매니지먼트(Capital Research Management)가 운영하는 자금을 합하면 5000억 달러나 된다.

    그런데 이 거대한 돈이 이제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있다. 이것이 세계화다. 이 거액의 자본은 사이버 공간에서 전지구를 무대로 자유롭게 활동한다. 이 사이버 공간이 일종의 새 국경이고 새 영토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상당수 국가의 운명이 이 사이버 영토에 달려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사회계약도 없고 이들을 제재할 법도 제재할 사람도 없다. 이 제도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자의(恣意)로 만들어 놓은 법이 있을 뿐이다. 그 법은 그들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다. 금융재벌들은 정부로 하여금 인기 없는, 그러나 불가피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국가가 시장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뜻이다.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틱’의 이냐시오라모네 주간에 의하면 금융의 세계화는 세계적 금융그룹을 위한 독자적인 ‘국가’를 하나 만들었다. 이것은 초국가적인 ‘국가’로 독자적인 제도와 기구, 그 영향력 망(網)과 행동수단을 갖추고 있다. IMF, 세계은행, OECD, WTO 같은 것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 기구는 ‘시장의 미덕(美德)’을 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이 초국가적 국가는 금융시장과 대재벌기업이 좌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더 심해지고 있다. GATT(관세-무역일반협정)의 후계자인 WTO는 1995년 이후 의회민주주의의 제어권 밖에 있는 초국가 기관이다.

    WTO는 노동, 환경 또는 공공보건분야에서 회원국에 법률의 폐지를 요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회원국의 법률이 WTO 규정에 저촉될 때 ‘통상자유 위반’이라고 선언하고 회원국에 그 폐지를 명할 수 있다. 시애틀회의에 그렇게 많은 시민운동단체들이 반대시위를 벌인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1995년 이후 OECD에서 논의돼온 다자간 투자협정(MIA)도 WTO와 비슷한 권한을 인정하는 초국가적 규제를 시도하는 협정이다. 주로 프랑스 언론에서 쟁점으로 보도하고 있고 영-미 언론에서는 크게 취급하지 않았지만 문화주권을 침범하는 내용이 들어있는 협정이다. 원래는 1998년 조인될 예정이었는데 서유럽의 많은 시민단체들이 대대적인 반대운동을 벌여 아직도 최종안을 합의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적 규모의 기업합병으로 한 국가의 GDP(국내총생산)을 능가하는 거래기업이 더욱 늘어나고 있다. 미국의 자동차기업 제너럴 모터스(GM)의 매출액은 덴마크의 GDP를 능가하고 일본 도요타 자동차의 매출액은 포르투갈의 GDP보다 많다. 엑슨-모빌의 매출액은 오스트리아의 GDP보다 앞선다.

    신자유주의원칙에 따른 공기업의 민영화로 대기업은 그 규모가 더욱 커지고 대조적으로 국가는 점점 그 권한이 줄어든다. 1990~97년에 세계적으로 국가가 민영화한 재산은 그 총액이 513억 달러에 달했다. 이제 세계에서 100대 그룹에 드는 다국적 대기업은 하나 하나가 120개 국가보다 수출량이 더 많다. 23위 안에 드는 기업들은 인도, 브라질, 인도네시아, 멕시코와 같은 개발도상의 거인국들보다 더 많이 수출하고 있다. 이들 기업의 수출량은 전세계 무역량의 70%를 차지한다.

    그래서 대금융그룹, 대미디어그룹의 경영주들과 이들 다국적 기업의 경영주들은 권력의 실체를 장악하고 강력한 로비를 통해서 각국의 정치적 결정에 적극적으로 간여하고 있다. 거대기업의 권력증대로 이들 앞에서 전통적인 반권력(反權力)-노조, 정당, 독립언론-은 점점 무력해지는 것 같다. 세계화의 제1차적인 주역도 국가가 아니라 이들 다국적 대기업이다. 국가는 점점 그 주권을 잃어가고 있다.

    과거에는 정복의 주역이 국가였다. 그러나 오늘의 정복자는 세계를 지배하는 대기업, 산업그룹, 금융그룹이다. 지구를 지배하는 지배자가 지금처럼 그 수가 적은 것은 일찍이 없었다. 이 재벌그룹은 미국, 유럽, 일본의 3대 경제권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절반은 미국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므로 새로운 정복자의 출현은 근본적으로 미국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미 지구적인 영향력을 가진 금융과 기업그룹이 다시 덩치를 키우는 기업합병이 기술과 정보혁명의 영향하에 무서운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1998년 세계적으로 기업합병 규모는 2조 유로(2조 1000억 달러)를 넘었다. 세계화가 그만큼 빨라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세계화는 다른 국가의 정복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시장 정복을 노린다. 이 현대적 새 권력의 관심은 왕년의 침략이나 식민시대처럼 영토의 정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富)를 장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정복과 마찬가지로 오늘의 정복도 그 과정에 무수한 피해자를 내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세계 곳곳에서 토착산업체가 세계화의 강풍에 휩쓸려 쓰러지고 있으며 그 결과 사회가 입는 고통이 엄청나다. 대량실업, 불완전 고용, 직장의 불안정, 소외현상이 나타난다. 유럽에만 5000만명의 실업자가 생겼고 전세계적으로는 실업자와 불완전 고용상태에 있는 사람이 10억에 달한다.

    ‘르몽드 디플로마틱’ 라모네 주간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은 날카롭다. 문자와 물건, 몸과 정신, 자연과 문화 등 모든 것을 거래 대상으로 만드는 총체적 상품화는 사회의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세계의 기초식량생산은 110%에 이르지만 매년 3000만명 이상이 굶어죽고 있으며 8억 이상이 영양부족상태에 있다.

    1960년에는 전세계적으로 소득고위층 20%의 소득이 저소득층 20%의 소득보다 30배가 더 많았으나 오늘날 그 소득차는 82배로 벌어졌다. 지구상 60억 인구 중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5억에 불과하며 55억이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70개국 이상에서 국민 1인당 소득이 20년 전보다 더 떨어졌다. 인류의 절반인 30억이 하루 10프랑(2000원)이하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으며 개도국 주민 45억 중 3분의 1이 식수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발상지인 미국을 보자. 세계에서 가장 돈 많은 이 나라에 문맹자가 5000만명, 빈곤선상에 있는 사람이 4500만명,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4000만명에 이른다. 신자유주의는 빈부의 격차를 더욱 벌려놓고 있다.

    99년 8월 미국의 친 노조 연구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기업의 최고 경영자와 일반 노동자의 보수 차이가 80년대에는 42 대 1이던 것이 최근에는 419 대 1로 10배 이상 벌어졌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아킬레스건이다.

    레이건과 대처는 신자유주의와 ‘시장의 종교’를 전파하는 선교사들이었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 사람보다 시장을 앞세우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의문이 하나둘 제기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빈부의 차가 벌어지고 노동조건, 복지서비스가 열악해지면서 대처 총리의 인기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97년에는 대처의 후계자인 존 메이저정권이 제3의 길을 내세운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에 정권을 넘겨주게 된다. 한 달 뒤 프랑스에서 사회당이 총선에 승리, 리오넬 조스팽정권이 들어서고 1년 뒤에는 독일에서도 슈뢰더의 사민당 정권이 출범한다. 유럽연합(EU) 15개 회원국 가운데 13개국에서 사민당 또는 사회당 정권이 집권하며 유럽에 좌익정권시대가 열린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유럽인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곧 시장경제의 부정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시장경제의 원칙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경제적 논리를 강조한 나머지 인간에 대한 배려를 소홀히 하는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의 대외적 형태인 세계화에 대해서는 비판이 일고 있다.

    멕시코의 외환위기, 아시아의 외환위기가 일어나면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대한 비판은 더욱 그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시장경제 옹호론자들 안에서까지 근본주의적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시인하고 그 처방을 찾아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의 전개에 빨간 불이 켜진 것이다. 지금까지는 신성 모독으로까지 여겼던 규제가 필요하다는 호소가 늘고 있다. 98년 가을 G7의 정상들은 IMF의 강화와 함께 새로운 금융규제를 지지했다.

    전통적 경제질서를 대표하는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와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Wall street Jour nal)’까지 일정한 조건하에서는 현재의 폐해를 줄일 수 있게 자본이동을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시아의 외환위기 가능성을 예언했던 미국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이 확언했듯이 지배적인 경제 사고(思考)에 극적인 변화가 증폭되고 있는 것이다. 크루그먼은 “현재 개방적인 경제학자들의 견해가 대담하게 변화하고 있다. 이들은 신생경제(Emerging economy)에서 단기자본의 완전한 자유화를 촉진하는 것은 불을 가지고 노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유럽지식인들은 지구차원의 좀더 과감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특히 자본이동의 비합리적 팽창으로 촉발될 국제금융질서의 혼란과 약소국의 피해 가능성을 차단하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투기자본의 이동에서 파생될 외환시장의 불안정을 예방하기 위해 1972년 노벨 경제상을 받은 토빈 교수의 발상인 토빈세 실시를 주장한다. 토빈세는 외환거래마다 0.1%의 세금을 징수해서 그 돈을 국제공동체에 활용하라는 것이다. 0.1%의 세금만 걷어들여도 그 돈이 연간 1800억 달러에 달하며 세계에서 극단의 빈곤을 제거하는데 소요되는 연간 자금총액의 2배보다 많다. 그래서 최근 토빈세 징수를 위한 시민단체가 조직돼 하나의 압력단체로 활동을 시작했다.

    시장경제 시장사회

    신자유주의의 개선방향을 놓고 작년 이후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과 슈뢰더의 ‘새로운 중도’가 접근했고 이들과 거리를 두고 사회민주주의 전통에 더 충실한 노선을 유지해 온 것이 프랑스의 리오넬 조스팽이었다.

    지난 11월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열린 미국과 유럽 6개국 중도좌파 정상들의 모임에서도 그 차이가 그대로 드러났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지금의 번영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세계화 추진과 제3세계의 채무 탕감, 국제테러리즘과 조직범죄로부터 국가를 보호할 국제적 협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실용주의를 중시하는 미국인답게 그는 이론을 제시하기보다는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조치를 열거했지만 그 제안의 바탕에는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가 깔려 있었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와 독일의 슈뢰더는 중도좌파를 표방하지만 시장경제를 중시하는 ‘사회자유주의’의 냄새를 강하게 풍겼다. 자신의 생각을 가장 분명하게 밝힌 것이 리오넬 조스팽이었다.

    그는 시장경제의 원칙을 받아들이면서도 경제와 사회정의를 조절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의 과도한 자유를 제한하는데 주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조스팽 총리는 “우리는 사회의 구석구석에 시장의 브랜드를 붙이고 민주주의에 도전하는, ‘화학적으로 순수한’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19세기의 자유주의를 가지고 21세기에 들어갈 생각은 없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윌리엄 파프는 최근 그의 칼럼에서 흔히 유럽에서는 블레어가 말한 ‘새로운 스타일의 사회주의’가 대륙의 ‘전통사회주의’를 정복했다고 생각하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조스팽은 사회주의 연대의 가치를 철저히 믿고 소외계층에 대한 국가의 지원을 약속한 전통적 사회주의자다. 그는 시장경제는 받아들이지만 ‘시장사회’ 즉 사회의 시장화는 반대한다. 그가 97년 5월 집권했을 때 영-미의 비판가들은 그의 사회주의적 프로그램이 성공하지 못하고 프랑스는 적자지출과 경기침체, 고율의 실업사태를 맞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 모든 예상은 빗나갔다. 오히려 슈뢰더가 아주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주로 블레어식 새 사회주의로 개종한 탓이다. 그는 경제계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하고 같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는데도 실패했다. 독일의 고 실업률(10.5 %)은 내려갈 줄 모르고 있다.

    슈뢰더의 사민당 내 전통주의자들은 그가 사회정의와 평등정책에 대한 당의 전통적 공약을 버렸다고 보고 반항한다. 그가 주 선거에서 참패한 요인도 여기에 있다. 영국의 블레어도 유럽의회선거에서 슈뢰더처럼 심각한 패배를 맛보았다. 노동당은 보궐선거에서 졌고 블레어 총리의 인기도 떨어졌다. 영국경제는 99년에도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다.

    세계화의 첨단무기 매스미디어

    반면 프랑스에서는 경제가 호황이다. 조스팽은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이다. 집권 2년을 넘긴 그는 지난 4반세기에 등장했던 어느 프랑스 총리보다 더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프랑스의 실업률은 아직 독일보다는 높지만 최근 6년 중 가장 낮다. 정부는 99년 직장창출이 미국만큼 높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주(週) 35시간으로 노동시간을 단축한 결과 정말로 일자리가 더 늘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노동현장의 분위기는 많이 개선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영국, 독일, 프랑스 3국의 경제실적 차이는 이념 때문이라기보다는 각국이 처한 특수상황과 더 관련이 깊다. 그런데도 프랑스 경제가 호황을 누리게 된 데는 이념적인 요인도 작용하고 있다. 조스팽 총리와 그의 내각은 경제성장은 사회적 희생의 대가로만 얻을 수 있다는 시장이론을 무시하고 사회정의를 강조하면서 경제성장을 달성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희망의 복음’으로 전세계에 전파된 데는 매스미디어, 특히 영-미 미디어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세계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등장하고 있는 대자본그룹들은 매스미디어와 정보고속도로를 장악하는데 생사를 걸고 있다. 역사상 처음으로 위성으로 중계되는 TV채널을 통해 온갖 메시지가 지구전체에 하루 24시간 방송되고 있다.

    이들 미디어는 정치지도자보다 앞서 메시지를 전하고 정치인들의 행동을 앞지른다. 국가보다 더 강한 대자본 세력이 민주주의의 가장 귀중한 재산, 즉 정보를 약탈하고 있다고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르노 드 봄(Renaud de Ba ume)과 장-제롬 베르톨뤼(Jean-Jerome Bertolus)는 경고하고 있다.

    앞으로 디지털 위성방송이 실시되면 수십개의 위성TV채널이 이들 새로운 세계정복자들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이들의 법을 전세계에 강요하는 도구 노릇을 할 것이다. 이들에게는 민주적인 토론은 필요가 없다. 언론매체를 통해 세계인을 자기들 팬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들은 공익이나 사회의 행복, 개인의 자유와 평등 같은 개념에 무관심하다.

    그들은 부를 더 늘리고 축적하고 자기들이 제품을 많이 파는 것 외에는 별관심이 없다. 이들의 눈에는 정치권력은 권력서열에 있어서 3위에 지나지 않는다. 제1은 경제권력이다. 그 다음이 미디어의 권력이다. 이 두 권력만 장악하면 정치권력을 잡는 것은 하나의 형식에 불과하다. 90년대 초 이탈리아에서 금융재벌이며 미디어 재벌인 베를루스코니가 하루 아침에 총리로 변신한 것은 아주 좋은 실례다.

    세계의 새 정복자들은 그들이 장악한 막강한 매체를 통해 국가의 주권을 무력화(無力化)하고 그들의 군림을 정당화해 주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를 유일한 진리처럼 전파하고 이에 반대하는 사상은 ‘이단’으로 매도한다. 유일사상의 강요이며 언론자유라는 가면을 쓰고 자행되는 새로운 형태의 사상통제고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다.

    유럽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신자유주의의 위험을 경고하는데 열을 올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행히 이들의 주장이 차츰 여론의 동조를 얻게 되고 다국적 대기업들의 지나친 이기주의가 소비자들의 분노를 촉발해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연원지인 미국으로 반 세계화운동이 역류하는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막대한 자본의 후원을 받고 있는 세계화 공세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떤 투쟁보다 꾸준한 시민운동이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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