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주의와 시장경제가 결합된 중국 특유의 혼합체제는 어디로 갈 것인가. ‘과감한 경제개혁, 조심스러운 정치개혁’이라는 아슬아슬한 원칙은 언제까지 지켜질 것인가. ‘포스트 장쩌민’시대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한 이래 중국은 겨우 마오쩌둥(毛澤東), 덩샤오핑(鄧小平), 그리고 장쩌민(江澤民)이라는 세 명의 ‘링쇼우(領袖·지도자)’만을 허락했다. 마오쩌둥이 평등과 해방이라는 제1차 혁명을 성공시켰다면 덩샤오핑은 1979년 경제발전과 개혁·개방이라는 제2의 혁명을 성공시켰다. 장쩌민은 사회주의 시장경제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혼합체제를 계승하는 덩의 후계자 지위에서 탈피해 자신의 권력기반을 공고히 함으로써 전임자들과 같은 반열에서 평가받는 지도자로 남고 싶어한다.
국익과 체면 함께 추구
마오쩌둥 사후 25년, 등소평 사후 4년 반이 지난 지금의 중국은 경이적인 경제발전, 안정된 내치, 미엔즈(面子·체면)와 국익을 동시에 추구하는 공세적이고도 실리적인 외교수완, 올 가을로 예정된 WTO 가입과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유치와 같은 국제적인 위상강화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처럼 성장을 지속할 중국의 대외정책과 안보정책이 한층 공격적이고 적극적으로 변할 것이라는 이른바 현실주의적 중국관은 급기야 ‘중국위협론’과 ‘황화론(黃禍論)’ 논쟁에 불을 붙였다.
중국은 어떤 나라인가. 중국은 어떻게 움직이는 체제인가. 중국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신중국’ 탄생 이후 52년 동안 중국은 어떻게 변화해왔으며, 또한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마오쩌둥의 중국과 덩샤오핑의 중국, 그리고 장쩌민의 중국은 과연 무엇을 추구했고 어떠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가. 이런 문제를 살펴보는 것은 향후 중국의 권력구도와 체제의 향방을 예측하는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다.
‘가난한 大國’이 될 순 없다
1976년 9월9일. 83세의 마오쩌둥이 사망했다. 대장정 와중인 1935년 1월 구이저우(貴州)성의 작은 도시 준이(逡義)에서 열린 비상확대회의에서 중국공산당과 홍군(紅軍)의 지도자로 선출되어 중국의 정치와 이데올로기, 교육, 사상,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신과 같은 존재로 군림해온 지 41년 만이었다. ‘정치우선’ ‘계급투쟁’ ‘대중동원’ ‘폭력혁명’ ‘이데올로기와 사상 제일주의’라는 이른바 ‘홍(紅)’의 시대가 마감되는 순간이었다.
마오는 사망 직전 화궈펑(華國鋒)이라는 예상치 못한 인물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다. 평생 동안 노선투쟁과 권력투쟁의 폐해를 직접 체험했던 그로서는 어느 계파에도 속하지 않은 화를 불러 유명한 후계자 지명 유언을 남겼다. “자네가 맡아줘야 내가 안심이 되겠네(辦事 我放心)”라는 그의 말은 자신의 사후에도 위대한 지도자로서 업적과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철저한 계산에서 나왔다.
그러나 마오의 기대와 희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덩샤오핑이라는 작은 거인의 존재와 능력, 그리고 그의 탁월한 전략과 영도력을 미처 계산에 넣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오의 사상과 이데올로기의 충실한 추종자였던 장칭(江靑)·왕훙원(王洪文)·장춘차오(張春橋)·야오원위안(姚文元), 이른바 4인방의 체포와 함께 덩은 국무원 부총리와 당 부주석,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자리에 올라 중국의 당·정·군에서 실질적인 파워맨으로 전면에 부상했다.
덩샤오핑의 중국은 그의 전임자였던 마오의 중국과 커다란 차이를 보였다. 마오의 시대가 정치우선주의, 사상개조, 이데올로기 중시, 혁명건설, 대중노선 등과 같은 ‘홍(紅)’을 강조한 시대였다면 덩의 중국은 경제우선주의, 전문성과 효율성, 경쟁, 자율성, 제한적인 자유의 보장과 같은 ‘전(專)’을 강조했다. 마오가 철저한 자급자족과 고립경제를 고수했다면 덩은 사회주의와 시장경제의 접목이라는 실용적인 개방정책을 추진했다.
덩의 개혁·개방정책은 그의 실사구시적 세계관과 인식론에서 출발한다. 그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은 중국이 자본주의 세계경제체제에 편입되지 않고서는 ‘가난한 대국’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실리적 인식에 기인했다. 하지만 수십 년간 중국을 지배해온 이데올로기의 굴레에서 탈피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전임자였던 마오를 비난하는 새로운 세력들을 내놓고 지지할 수도 없었다.
결국 덩은 ‘칠분론(七分論)’이라는 기막힌 논리로 마오를 평가한다. “마오쩌둥의 업적 가운데 70%는 옳고 30%는 잘못된 것”이라며 사회주의의 적으로 여기던 자본주의와 모순의 원흉으로 여기던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데 대한 논리적 반발을 무마했던 것이다.
그는 또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후야오방(胡耀邦)을 당 총서기에, 그리고 자오쯔양(趙紫陽)을 국무원 총리로 임명, 이른바 ‘덩-후-자오 삼두체제’를 출범시켰다.
그의 개혁·개방 노정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과감한 경제개혁, 조심스러운 정치개혁’이라는 그의 개혁·개방 원칙은 당 안팎에서 심각한 도전과 반발에 직면했고, 1997년 2월19일 그가 사망하는 날까지도 그는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시장경제·계획경제의 이중구조
1978년 11월 제11기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은 “사상해방, 실사구시, 일치단결로 미래를 바라보자”는 개혁·개방의 대원칙을 천명하면서, 한편으로는 “사회주의노선, 공산당지배, 마르크스·레닌주의·마오쩌둥사상, 무산계급독재의 견지”라는 ‘4항 기본원칙’을 강조했다. 중국의 발전을 위해 과감한 경제개혁과 개방을 추진하겠지만 체제를 위협할지도 모르는 정치개혁은 제도의 정비와 기구개편과 같은 제한적인 개혁에 국한하겠다는 의미였다.
덩은 개혁을 위해 당내 원로들을 대거 퇴진시켰다. 중국정치의 특성이었던 ‘노인정치(gerontocracy)’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이른바 ‘4화(化)’, 즉 연경화(年輕化)·지식화·혁명화·전업화(專業化)를 추진했다. 이데올로기적 인간형보다는 사회주의를 견지할 수 있는 전문관료집단이 더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마오에 비해 상대적으로 카리스마가 취약했던 덩은 개인적 영향력에 의존한 마오와는 달리 조직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지배와 통치 형태도 마오의 1인 지배체제가 아닌 집단지도체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덩의 지위는 ‘동배 중의 맏형(primus inter pares)’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는 개혁·개방의 노정에서 당내 정적과 반대세력들로부터 무수한 도전과 비판을 받았고 결국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던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을 실각시킬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초 덩-후-자오 삼두체제가 정권을 장악하고 추진한 것은 당과 국가의 기본노선과 정책의 변화에 걸맞은 체제개혁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공산당 당장(黨章)과 신헌법 제정이 필요했다.
이들은 우선 개인숭배와 1인 독재체제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당 주석제를 폐지하고 국가주석제를 부활시켰다. 또 지방정부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고 지방정부와 지방인민대표대회를 다시 살렸다. 인민공사의 폐지와 함께 향(鄕)이 최하 행정단위로 되살아났고, 각급 지방정부는 성장·시장·현장 등의 책임제로 운영하게 했다.
경제개혁 측면의 변화도 혁명적이었다. 1979년부터 시작된 제1단계 경제개혁은 우선 농촌에서의 책임제 실시로 급속히 확대됐다. 과거에는 작물 선택, 노동력 투입, 농기구 사용, 판매 등에 있어 농민들은 단지 국가의 계획과 명령, 지시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센티브라는 물질적 이익을 보장하는 새로운 조치는 농민이 스스로 원하는 작물을 선택하거나 계약에 따라 생산, 잉여생산물은 자유시장에서 임의로 처분해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획기적인 농업혁명이었다.
농업뿐 아니라 자전거 수리점, 사진인화점, 미장원, 식당 등의 자영업도 빠르게 생겨나 시장경제화의 초기 단계인 자유경쟁과 자유가격이 싹트기 시작했다. 아울러 개인의 이익추구나 사유지 개념이 도입됨으로써 중국의 경제체제에는 시장과 계획이라는 이중구조가 자리잡아 갔다.
1984년 10월 중국 공산당 제12기 3중전회에서는 ‘경제개혁에 관한 결정’을 채택하고 2단계로 도시 부문에서 전면적 경제개혁을 추진했다. 국가와 당이 기업에 대한 간섭과 지배를 최소화하는 ‘당정(黨政)분리, 정기(政企)분리, 당기(黨企)분리’를 명시함으로써 당은 사상 및 정치분야 활동 이외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기업 경영에 대한 간섭을 최소화하는 대신 공장장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했다. 소유제 형태도 국유기업, 집체기업, 사영기업, 향진기업 등과 같이 다양해졌고, 일정한 부분을 세금으로 납부하고 남은 이윤은 기업이 임의로 사용할 수 있게 한 것도 획기적인 조치였다.
제3단계는 대외개방조치였다. 자급자족적 경제에서 탈피해 적극적인 대외개방경제를 추진하고, 세계경제체제에 참여하기 위해 동남부해안에 5개 경제특구(深, 珠海, 汕頭, 厦門, 海南島)를 설치하고 14개 도시를 개방도시로 지정했다. 중국 지도부가 경제 낙후의 원인이 폐쇄와 고립에 있다고 인식한 결과였다.
이렇게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한 지 20여 년. 그 짧은 동안 중국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급속하고 지속적으로 발전·성장했다.
중국의 GNP는 구매력 수준으로 계산할 경우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에 올라 있고, 세계은행은 구매력 수준으로 볼 때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이미 3000달러를 넘어섰다고 발표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은 유엔 안보이사회 상임이사국,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회의)과 ASEM(아시아유럽정상회의) 회원국으로서 지역 내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유고주재 중국대사관 오폭사건, 하이난다오에 불시착한 미국 첩보기 송환문제 등을 해결하는 과정에 중국이 보인 태도는 이제는 과거의 중국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구소련 해체 후 미국에 대해 ‘노’라고 단호히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강대국으로서 중국이 가공할 모습으로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시장과 계획의 결합이라는 혼합경제를 추진하는 중국은 과연 ‘중국위협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우려처럼 문제투성이일까. 중국은 정치개혁과 경제개혁 와중에 급격한 체제개혁과 변동을 경험한 동아시아국가들과는 달리 ‘과감한 경제개혁, 조심스러운 정치개혁’의 틀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사회주의 국가로서는 최초로 개혁·개방을 추진한 중국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점과 부작용을 살펴보자.
새장 속의 새
중국에서는 ‘삼하(三下·싼샤)’가 중국인을 병들게 했다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싼샤’란 ‘샤팡(下放·마오쩌둥 시대에 지식인, 간부, 학생들을 지방으로 축출한 것)’ ‘샤하이(下海·덩샤오핑 시대 관리들의 이직과 개인사업 열기)’ ‘샤깡(下岡·장쩌민 시대의 정리해고)’을 일컫는 말이다. 이처럼 마오쩌둥뿐만 아니라 덩샤오핑과 장쩌민도 인민들로부터 비판을 받는 것은 개혁·개방에 대한 인민의 시선과 평가가 그리 긍정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뜻한다.
1980년대 중반, 개혁·개방에 대해 비판적이던 당내 보수세력은 덩샤오핑의 개혁정책을 비난하고 나섰다. 핵심인물은 덩의 오랜 친구이자 당내 경제 이데올로그였던 천윈(陳雲)이었다. 그는 덩의 개혁·개방이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어 사회주의 계획경제 기반을 위협한다고 비난하면서 이른바 ‘새장(鳥籠) 경제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마치 새장 속의 새처럼 국가의 통제와 계획의 틀 속에서 성장해야 하며, 새장 문을 너무 많이 열면(지나치게 개방되면) 새가 날아가고 말 것이라는 논리였다. 시장경제가 주가 되고 계획경제는 보조적인 수단(市場爲主 計劃爲補)이 돼야 한다는 덩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내용이었다.
천윈을 위시한 보수세력은 지나친 개혁·개방은 서구의 정치체제와 의식, 이데올로기, 문화, 가치관을 유입시켜 중국 공산당의 권위와 합법성을 뒤흔들고, 나아가서는 중국의 체제를 위협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도시지역에서 개혁·개방이 추진된 1984년 이후 중국 도시에는 그 전까지 금지됐던 서양 음악과 영화, 소설 같은 예술작품뿐 아니라 혼전관계, 귀고리, 짧은 머리와 화려한 의상 등이 급속하게 유행을 탔다.
일부 지식인들과 당·정의 관료들 사이에도 서구의 정치체제와 민주주의에 관한 관심과 요구가 증폭됐고, 마르크스주의가 중국에서 적절성과 효용성이 있는가에 대한 논의도 시작됐다.
보수세력의 비판과 반격에 대해 덩샤오핑은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폐해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방 안이 더워 창문을 열면(개방), 시원한 바람(경제성장)이 해충(부작용)과 함께 들어온다”고 비유했다. 하지만 덩의 예상과는 달리 중국이 직면한 문제는 매우 심각했다.
우선 정치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개혁·개방의 속도와 범위에 대해 여전히 당과 지도층 내부에 갈등과 분열이 존재했다. 실제로 중국은 1984년부터 심각한 이데올로기 혼란을 겪어왔다. 마르크스주의의 효용성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지식인들과 당내 급진 개혁파를 중심으로 서구 민주주의가 중국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조심스럽게 싹텄다.
1986년 안후이(安徽)성 허페이(合肥)에서 시작된 유산계급 자유화운동은 순식간에 상하이와 베이징을 위시한 대도시로 파급됐고, 당중앙은 급기야 그 책임을 물어 덩의 후계자였던 후야오방 당 총서기를 해임하고 자오쯔양 당시 국무원 총리를 당 총서기에 임명했다. 후야오방은 덩의 정치개혁을 미온적·제한적인 것으로 보고 광범위하고 급진적인 정치개혁을 요구해왔고, 이는 반체제 인사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
이러한 이데올로기 갈등은 개혁·개방에 대한 저항과 비판세력을 등장시켰다. 당중앙은 학생시위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했고 정치원칙상 중대한 과오를 범했다는 이유로 후야오방을 실각시키고,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을 지지했던 팡리즈(方勵之) 당시 허페이공대 부총장, 언론인 류빈옌(劉賓雁) 등 당내 진보적 지식인들을 제명했다. 하지만 급진세력을 제거한 것이 개혁·개방정책에 대한 비판을 잠재우지는 못했으며 오히려 당과 정부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강화시켰다.
공룡으로 변한 ‘해충’
새로이 당 총서기로 임명된 자오쯔양은 개혁·개방을 전면적으로 추진하고 생산력 발전이 최대의 목표가 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정치적 개혁의 가속화만이 이러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1989년 4월15일 후야오방 전 총서기의 사망을 추도하기 위해 톈안먼광장에 모인 시민과 학생들은 당과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인민의 자유와 인권보장을 촉구하는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 6월4일, 인민해방군은 시위대를 유혈 진압했고, 결국 자오쯔양도 그의 전임자 후야오방처럼 ‘난동’의 책임을 지고 당 총서기에서 물러나면서 장쩌민이 그 뒤를 이었다. 하지만 탄압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에 대한 인민의 욕구는 사라지지 않았고 언제든 다시 폭발할 위험을 안고 있다.
둘째 문제는 극심한 경제적 격차. 연안지역을 먼저 부강하게 만든 다음 내륙지역을 발전시키려 했던 ‘선부론(先富論)’은 중국인들을 황금만능주의에 빠져들게 했다. ‘미래를 바라보자(向前看)’는 개혁·개방의 대원칙은 ‘돈을 바라보자(向錢看)’로 바뀌었고, ‘인민을 위해 일하자(爲人民服務)’는 구호는 ‘인민폐를 위해 일하자(爲人民幣服務)’로 전락했다.
상하이나 베이징 같은 대도시 주민들은 1년에 평균 3만805위안과 1만9803위안을 벌지만(1999년 기준), 낙후지역인 구이저우(貴州), 간쑤(甘肅), 산시(陝西)성 주민들의 연수입은 각각 2463위안, 3595위안, 4101위안에 지나지 않는다.
도농간의 수입격차도 크다. 1984년까지는 농민 수입이 연간 14.5%씩 증가, 도시 주민의 8.5%를 앞질러 농촌과 도시주민 1인당 소득비율이 1978년의 1:2.4에서 1984년에는 1:1.7로 축소됐다. 그러나 1999년 통계에 따르면 도시 주민의 연평균 소비액은 6651원인 데 비해 농촌 주민들의 소비수준은 그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격차는 갈수록 더 벌어지는 추세다.
셋째 문제는 당과 정부 관료들 사이에 만연한 부패. 공무원과 당료들의 불법행위는 중앙정부의 단호한 부패척결 의지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근절되지 않고 있다. 중국의 부패와 금권유착은 중국인의 전통적 인간관계인 ‘시(關係·연줄)’와 ‘미엔즈(面子·체면)’에 기인한다. 혈연 지연 학연뿐 아니라 직장동료, 군대 동기, 상사와 부하로 맺어진 인연, 연수교육 동기생 등 수직적·수평적으로 연결된 관계망에 따라 ‘서로 돌봐주기(互相照顧)’가 이뤄지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관계는 서로 체면을 손상해서는 안 된다는 전통적 사고, 법치가 아닌 인치에 따라 움직이는 법률경시 현상으로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넷째 문제는 급속한 사회변화다. 덩샤오핑이 경시한 ‘해충’들이 실제로는 공룡이 되어 중국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서구의 퇴폐적인 행위와 문화의 유입이 중국의 문화와 가치관을 변모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체제를 위협하게 되리라고 믿었던 중국의 지도자들은 이를 정신오염으로 보고 경계해왔다.
특히 톈안먼사태 이후에는 체제옹호에 대한 중국 지도부의 의지와 정책이 더욱 확고해졌다. 이들이 흔히 쓰는 ‘화평연변(和平演變)’이라는 말은 서방 국가들이 문화와 같은 비군사적 요소를 앞세워 중국사회에 침투, 중국의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기도라는 의미다.
“메스를 쥔 의사보다 식도를 든 주방장이 더 많이 번다”든가 “원자탄 만드는 과학자보다 자전거 수리공이 더 낫다”는 황금만능주의, 법률경시 풍조, 국유기업의 비효율, 티베트와 신장(新疆) 소수민족의 분리독립 움직임 등도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중국은 지금 정부와 지도자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예상치 못한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의 당명 개정, 사영 기업인에 대한 공산당 문호개방, 사유재산제 보장 등과 같은 조치는 중국과 중국공산당이 변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과연 중국의 정치·경제는 어떤 길로 나아가게 될까.
덩샤오핑의 중병설과 사망설이 나돌던 1996년 10월6일, 홍콩의 권위 있는 국제문제 연구기관인 정치경제위험도 관리연구소는 당시 당·정·군의 수장인 장쩌민의 지위가 덩 사망 후 2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 연구소는 대중(對中) 투자가들을 위한 보고서 ‘중국정세 단기예측’에서 장쩌민의 군사기반 취약성과 지방권력 장악 실패 등을 그 근거로 들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5년이 흐른 지금 장쩌민은 여전히 중국 공산당 총서기(黨), 국가주석(政), 중앙군사위원회 주석(軍)이라는 중국 정치의 3대 핵심 포스트를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다. 원로들의 반발, 리펑을 중심으로 한 베이징방(北京幇)과의 갈등과 권력투쟁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으로 예측됐던 그는 이미 자신의 측근세력인 상하이방(上海幇)을 곳곳에 포진시켜 자신이 은퇴한 후에도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고 있다.
이처럼 미래에 대한 예측에는 상당한 위험부담이 따른다. 특히 정책결정과정의 투명성이 낮고 제도화 수준이 낮은 중국은 더욱 그러하다. 지금껏 미국 국무부와 일본의 유수 연구기관, 서방의 정보기관 등에서 내놓은 중국의 미래에 관한 보고서들도 중국의 미래를 정확히 진단하는 데 실패했다. 중국의 폐쇄적인 체제와 정보 접근의 어려움, 반체제인사나 망명인사들과의 인터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자료의 불확실성 등이 그 이유다.
따라서 중국의 정치·경제를 분석하거나 예측하려면 지금까지 나온 데이터와 자료, 문건을 종합한 객관적 요소에다 필자 나름의 주관적 요소를 가미할 수밖에 없다.
구조적·제도적 일관성과 투명성이 낮은 나라이지만, 중국은 규모나 지정학적인 위치로 볼 때 아시아에 이해관계를 가진 나라들에게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21세기에는 이러한 영향력이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위험부담을 안고도 중국의 미래를 내다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국의 정치·경제와 사회현상을 예측하는 데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소를 고려할 수 있다.
첫째는 덩샤오핑 사후 장쩌민을 중심으로 중국정치를 이끌어가는 핵심 지도자들의 권력구조상 변동과 내부 갈등의 종류와 강도, 둘째는 체제 내부의 통합 정도와 장쩌민을 중심으로 한 지도자들의 통합능력, 셋째는 경제적 요인이다. 이러한 요소들을 고려할 경우 향후 중국 정국에 대한 네 가지 시나리오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단지 중국정치 변화의 시발점일뿐, 결코 최종적인 결과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현상유지 가능성 50%
첫째 시나리오는 현상유지 모델이다. 장쩌민을 중심으로 한 집단지도부가 단결하고 인민해방군과 공안, 무장경찰 등의 치안조직도 지도부를 지지하는 상황이다. 특히 현지도부가 체제유지를 중시, 특정세력이나 집단이 체제에 도전하거나 세력화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고, 경제성장도 꾸준히 추진하며, 사회안정을 위한 당과 국가의 노력도 성공을 거둔다는 시나리오다.
지난 7월25일 열린 베이다이허(北戴河) 회의에서 장쩌민이 내년에 은퇴하지 않고 장쩌민 총서기, 리펑 국가주석, 주룽지 총리 등 3세대 지도자들이 계속해서 중국의 정치를 이끌어가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바 있다. 사실 장쩌민이 국가주석을 리펑에게, 당 총서기를 현국가부주석 겸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후진타오(胡錦濤)에게 물려줄 것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장쩌민은 계속 군을 장악, 막후에서 당과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이 당 총서기와 국무원 총리, 국가주석을 후야오방, 자오쯔양, 장쩌민에게 물려주면서도 마지막까지 손에서 놓지 않은 것이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시나리오에 따르면 향후 중국은 장쩌민을 중심으로 하는 현재의 지도체제를 지속시키면서 덩샤오핑이 주창한 4개 현대화와 사회주의 현대화를 추진하되 정치개혁은 소극적으로 추진한다는 것이다. 장쩌민은 당 안팎에서 높은 지지를 받고 있으며, 당내에 갈등이나 도전세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국에 변화를 초래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군은 안정적인 개혁·개방정책을 보증하는 기능을 맡게 된다.
이처럼 지도부의 안정으로 중앙정부의 통합능력이 강화되면서 지역주의는 그다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정치·사회적 갈등이 상존해 언제라도 재폭발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중국 공산당 정권의 권위나 체제를 위협하는 대규모 사회적 동란으로 발전하지는 않으리라는 것.
또한 정권의 정통성을 강화하고 민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대규모 반부패운동을 추진, 사회의 공정성이 점차 증대되고, 정권의 합법성도 강화되어 사회가 안정될 것이다. 국내외에서 인권문제와 민주화 인사에 대한 석방, 6·4 민주화운동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할 수도 있지만, 민주화세력이나 체제위협세력에 대한 지도부의 확고한 의지와 태도로 미뤄볼 때 장쩌민체제에 대한 반대세력으로 성장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이 시나리오는 가장 이상적이고 안정적인 체제이자 구조라 할 수 있다. 개혁·개방정책과 반부패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민주화·인권·자유 등의 현대 정치이념을 제한적으로 수용하는 현상황을 고려해볼 때 이런 모델이 실현될 가능성은 50% 정도로 상당히 높다고 할 수 있다.
민주화냐, 분열이냐
둘째 시나리오는 중국이 민주화의 길로 간다는 것이다. 정치적·사회적 갈등이 심화되어 당내 급진 개혁세력과 시민세력이 연대해 보수 세력들을 축출함으로써 민주화의 길로 접어든다는 시나리오다.
지방세력의 영향력이 커지고 관료들의 부패도 근절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산당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해소되지 않으면 시민세력이 가세해 사회와 체제의 변화를 강력하게 요구하게 된다. 이러한 가정은 동유럽과 구소련의 체제변화와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다.
이 시나리오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중국이 체제변화를 언제까지나 연기할 수도, 회피할 수도 없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경제발전은 중국 인민이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희구하는 촉매제로 작용할 것이며, 공산당은 인민의 욕구를 충분히 수용하지 못해 제2의 톈안먼사태가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최근 공산당의 당명 개정과 기업가에 대한 입당허용 조치, 파룬궁(法輪功) 탄압 등도 시민사회의 힘을 의식한 조치라는 것.
현재 중국에는 당과 국가의 정책과 원칙에 맞서 민주화를 강력하게 추진할 지도자가 눈에 띄지 않는다. 반정부운동을 결집해 체제에 도전할 정치력을 지닌 정치인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의 경제발전과 시민의식의 증대, WTO 가입과 2008년 올림픽 개최로 서구의 가치관과 민주의식은 더욱 급속히 유입되어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다양한 방면에서 광범위하게 사회를 변화시킬 것이며, 마침내 톈안먼 민주화운동에 대한 재평가와 복권이 이뤄질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시민세력의 힘이 미약하고 중앙정부의 통제가 약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현상황에서 개혁세력과 시민세력의 연합으로 정권이 교체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이 시나리오가 실현될 가능성은 30% 정도라고 본다.
셋째는 분열 시나리오다. 당내 주류파가 장쩌민을 중심으로 뭉치고 있지만 다양한 정책노선과 정치적 기반을 지닌 인사들이 점차 권력구조의 핵심으로 유입되어 장의 리더십이 약화되고 궁극적으로는 내부 갈등이 증폭된다는 가정이다.
또한 개혁·개방과 국내 및 외교 문제로 인해 평화적인 정책이 추진됨으로써 군의 위상이 약화되고 지나치게 개혁적인 정책을 추진할 경우 장쩌민에 대한 군부의 지지가 약화돼 보수성향의 군부가 민주화를 추구하는 지도부를 떠나 새로운 보수세력을 지지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더욱 민족주의적인 지도자가 옹립될 수 있다. 새로 정권을 장악한 보수적 지도부는 개혁·개방의 폭과 속도를 조정하고 외교와 안보정책에서도 강경노선을 걷게 될 가능성이 있으며, 중화민족주의를 강조하고 민족통일과 실지(失地)회복을 국가정책 목표의 최우선에 놓고 반서구·반미감정을 고조시켜 중국의 명예와 위상을 높이려는 성향을 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나리오가 실현될 가능성은 25% 정도에 불과하다.
넷째는 체제붕괴 시나리오다. 최악의 가정이라 할 수 있는 이 시나리오는 중앙의 통제력이 급속히 약화되면서 군부가 분열되고, 각 지방과 성도 중앙의 권력과 통제를 인정하지 않는 무정부 상태로 치닫는 상황을 상정한다. 개혁·개방의 혜택에서 소외됐거나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농민과 노동자들이 이에 가세하고 지식인·학생들도 대규모 반정부시위를 전개한다.
특히 중국이 2015년경 GDP 2조달러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면 지금까지처럼 연평균 8%대의 경제성장률을 지속하기 어려우며, 이에 따라 새로운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법칙과 틀 속에서 경제적 실패를 경험하게 될 수도 있다. 그 결과 정책결정자와 핵심지도부를 규탄하는 세력이 대두되며, 농업의 위축, 국유기업의 개혁실패, 급속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로 인한 노동자들의 불만 고조, 인구유동과 실업급증, 수입감소, 통화팽창, 물가폭등, 인민폐 하락 등이 잇따르게 된다.
이런 상황이 당내의 노선 및 이데올로기 투쟁을 촉발하고 공산당의 통합능력을 소멸시켜 궁극적으로 체제붕괴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혁명적 상황에 군이 다시 개입할 경우 누가 마지막 승리자가 될 것인지는 전적으로 군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군부의 전통적인 보수성향으로 미뤄볼 때 중국은 보수로 돌아갈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국제 정치·경제와 인접국의 안보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이 최악의 시나리오가 발생할 가능성은 15% 정도로 본다.
이 밖에 지역분리, 러시아형 지방국가 연합체의 형성이나 강력한 독재자의 출현과 같은 시나리오도 있으나 실현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지난 3월에 열린 제4차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는 내년 10월에 있을 제16차 당대회를 겨냥한 대규모 세대교체와 후계자 구도에 관한 내용이 논의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초부터 시작된 인사의 첫째 특징은 ‘연경화(年輕化)’다. 이는 1세대 마오쩌둥, 2세대 덩샤오핑, 3세대 장쩌민에서 4세대로 배턴을 넘겨주는 것을 뜻한다.
4세대의 선두주자는 단연 후진타오(胡錦濤·59) 국가부주석 겸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임이다. 다롄(大連)시장에서 랴오닝(遼寧)성장으로 승진한 보시라이(薄熙來·50)에 이어 후베이(湖北)성장과 구이저우성장 및 당 서기도 50대 관료들이다.
둘째 특징은 ‘전업화(專業化)’다. 미국 유학파들이 대거 등용된 것이 그 예. 장쩌민의 아들인 중국과학원 부원장 장멘헝(江錦恒), 증권감독관리위원회 부주임도 미국 유학파다.
셋째 특징은 ‘단파(團派)’의 등장이다. 이는 후진타오의 세력기반인 공산청년단 출신들을 일컫는다. 사법부장 장푸선(張福森), 인사부장 장쉐쭝(張學忠), 푸젠성장 쏭더푸(宋德福), 통일선전공작부 부부장 류옌둥(劉延東), 장쑤(江蘇)성 당 부서기 리위안차오(李源潮), 대외우호협회 부회장 천하오쑤(陳昊蘇) 등도 후진타오와 칭화대 동창이거나 과거 공청단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다.
장쩌민의 고민
장쩌민은 내년 16차 당대회에서 예상과 달리 국가주석직을 리펑이나 후진타오에게 물려주는 대신 중앙군사위원회 주석과 당 총서기직은 그대로 유지할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주룽지 총리의 유임설이 나도는 것도 개혁·개방의 마무리와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정권안정과 체제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계산 때문이다. 원자바오(溫家寶) 부총리와 쩡칭훙(曾慶紅) 당 조직부장을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발탁해 당무와 인사를 맡긴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쩡칭훙은 장쩌민을 덩샤오핑과 같은 ‘태상황(太上皇)’으로 옹위하려는 구상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는데, 전인대 개최기간에 마오, 덩과 함께 장의 초상화가 대량으로 뿌려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비록 ‘연경화’를 주장해온 장쩌민이지만 중앙군사위원회의 주석과 정치국 상무위원직을 계속 보유함으로써 당에 대한 영향력을 잃지 않으려는 게 그의 속셈이다.
15차 당대회에서처럼 70세 이상의 원로들을 퇴진시킨다면 내년에 76세가 되는 장쩌민, 74세인 리펑과 주룽지, 71세인 웨이젠싱(尉建行), 리란칭(李嵐淸)도 정치국 상무위원직에서 물러나야 하며, 이 경우 리루이환(李瑞環)과 후진타오만 남게 되지만 이렇게 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최근 이러한 후계구상이 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으며 당내에서 세대교체에 대한 반발과 갈등 조짐이 보이기 때문이다.
장쩌민에게 또 한 사람의 견제세력은 리루이환이다. 정치협상회의 주석인 그는 장쩌민의 퇴진 압력에 반발하면서 장의 독재와 정책노선에 제동을 걸어왔다. 리루이환은 장쩌민이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들고 나온 ‘삼강(三講·講政治, 講學習, 講正氣)’을 빗대 ‘신삼강(新三講·講質量, 講協助, 講效益)’을 주장하는 등 후야오방 전총서기의 맥을 잇는 개혁파의 상징적 존재. 그는 화려한 경력과 청렴성으로 두터운 지지층을 확보, 장쩌민의 등을 겨누고 있는 ‘비수’에 비유되기도 한다.
중국 개혁·개방정책의 최대 걸림돌은 현재의 정치체제를 유지한 채 경제성장을 이루려는 것이다. 중국 지도부는 이 원칙이 흔들리면 정치적으로는 물론 사회적·경제적인 압력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으며 체제의 정통성이나 당의 권위도 도전받게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중국에서 공산당 1당 독재와 이데올로기로서의 공산주의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에 대해 세계적인 중국전문가 데이비드 램프턴 박사는 이렇게 답한다.
“이데올로기로서의 공산주의, 즉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라는 붉은 이데올로기는 이미 중국에서 죽었다. 중국에서 공산주의는 단지 1당 국가의 존재를 의미한다.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정치구조 측면에 공산주의가 있을 뿐이다. 문제는 공산당이 언제까지 1당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느냐는 점인데, 서방의 일반적인 관측보다는 더 오래 지속될 것이다. 우선 공산당 내에서 점진적 변화와 다원주의화가 진행될 것이고, 1당 체제는 상당 시간이 흘러야 극복될 것이다.”
집단지도체제 지속될 듯
WTO 가입과 세계화, 정보혁명의 발전은 중국에게 새로운 법칙을 따르고 게임에 참가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게임은 중국이 지금까지 유지해온 사고와 제도로부터 완전히 탈각(脫殼)할 것을 요구한다. 변화하지 않으면 사회적·경제적 균열이 초래될 것이 자명하다. 권력이 4세대로 순조롭게 이양될 경우 내년의 16차 당대회에서는 합리적이고 개혁적인 지도자들이 등장해 이러한 변화를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중국에선 장쩌민이 물러난 뒤에도 개인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 한 사람에 의한 지배체제보다는 서로 다른 정치적 노선이나 정책적 선호도를 지닌 지도자들 사이에 합의와 조정이 이뤄지는 집단지도체제가 지속될 것이다.
권력구조의 변화도 점진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단시간 내에 과감한 정치적 개혁을 추진하거나 경제개혁 노선을 변경 혹은 취소할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체제 변동은 도래하겠지만 단기적으로 중국이 구소련이나 동유럽의 예처럼 급격한 체제 변동을 경험하거나 붕괴에 이를 가능성은 크지 않다.
미래에 어떤 시나리오가 펼쳐진다 해도 중국의 내일은 오늘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일 것이다. 중국에 관한 예측 가운데 분명한 것은 후계자와 권력이양, 정권교체 등에 관한 명문화한 규정없이 베이다이허와 중난하이(中南海)의 밀실에서 후계자가 결정되는 흑막정치, 밀실정치, 정책결정의 불투명성은 점차 감소될 것이라는 점, 그리고 지금까지 경제발전을 위해 저자세로 일관하던 것과는 달리 훨씬 더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강력한 모습을 보일 것이라는 점이다.
정치·경제·군사 강대국이 될 중국을 이웃으로 둔 우리로서는 중국의 미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 우려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