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세력이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국민 대다수가 위기라고 느끼면 분명히 위기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의 70% 이상이 위기라고 느끼고 있으니, 최소한 ‘70%의 위기’인 것은 분명하다. 이는 결코 조작된 여론조사가 아니라 민심의 소재를 정확히 알려주는 숫자다.
그것도 단순한 경제위기 정도가 아니라, 온 나라가 무너져 내리는 총체적 국가위기라는 것이 국민의 생각이다. 경제위기는 물론, 정치와 사회 전반에 퍼진 불안과 불신, 만연된 부정부패, 붕괴된 교육과 전도된 가치관, 남북관계와 외교·안보에 대한 불안 등이 겹치면서 많은 국민들은 나라의 근본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작년 한 해 1만5000여 가구가 이 나라를 떠나 이민길에 오른 것도 결국 자신의 인생이 위험하다고 느낀 사람들의 ‘떠나는 자유(自由)’라는 마지막 의사표시로 봐야 한다.
이런 암담한 현실에서 갑자기 김대중 대통령과 김중권 민주당 대표는 이구동성으로 ‘강한 정부, 강한 여당’을 외치고 나섰다. 진정 국민이 원했던 것은 위기 극복을 위한 국정쇄신의 해법이었는데, 이 정권이 국민에게 들려준 대답은 뜻밖에도 ‘강한 정부’였다.
원했던 대답을 시원스레 듣지 못한 국민은 지금 어리둥절하다.
“강한 정부라니, 과연 이게 무엇일꼬…. 이토록 나라가 위태롭고 정부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이렇게 큰데, 설마 제 정신을 가진 ‘국민의 정부’라면 우리의 고통과 절규를 외면하진 않겠지….”
대한민국의 보통 사람들은 대충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 강한 정부든 국정쇄신이든 우리 민초(民草)들은 그런 어려운 말씀일랑 알 바 없으니 그저 걱정없이 잘 살 수 있는 편한 세상이나 만들어 주면 좋겠다. 어디 한번 기다려 보자.”
‘초인적’ 의원 임대·임차
거짓이 난무하는 판에 거대담론(巨大談論)은 무용지물(無用之物)에 지나지 않는다.
김대중 정권의 ‘강한 정부’는 과연 우리를 구원하는 복음(福音)인가?
야당과 일부 언론은 먼저 ‘강한 정부론(論)’ 뒤에 숨겨진 위선과 가식을 지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강한 정부의 ‘첫 작품’이 연말 연초의 신문 휴식기를 틈타 국회의원 세 명을 임대 임차하는 역사적·초인적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 사건을 ‘역사적’이라고 보는 까닭은 분명히 한국정치사에 전무후무한 일로 기록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초인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평범한 인간의 두뇌와 용기로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기막힌 발명품이었기 때문이다. ‘17+3=20’. 유치원생도 다 아는 산수인데…. 이것도 생각하지 못했다니, 무릎을 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평가도 열흘 만에 ‘절반은 오류’로 판명되었는데, 예상치 못했던 ‘한 사람 더 꿔주기’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는 강한 정부라는 그림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었다. 불과 열흘 사이에 안기부자금 사건이 터졌고, 여야영수회담은 불발로 끝났다.
강한 정부는 질풍노도(疾風怒濤)와 같았다. 김대중 대통령이 연두기자회견에서 “강한 정부란 민주적인 정부로서 원칙과 법을 준수하고, 국민 여론을 최고로 두려워하는 정부”라는 유권해석을 내린 순간, 강한 정부는 갑자기 국정의 중심이념이 되어 버렸다. 여권 내부에서도 “우리 지금 잘하고 있는 거냐?”는 불안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강한 정부의 위력 앞에서 평정되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김대중 정권 전반기의 국정목표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 생산적 복지, 지식기반 경제’였다면, 집권 후반기의 국정목표는 이제 대통령 스스로 누누이 강조하는 것처럼 ‘법, 원칙, 정도를 걷는 강한 정부, 힘있는 정부, 강한 여당’이다.
아마도 지금쯤 김대중 정권의 뒤를 봐주는 지식인들은 책상에 앉아 ‘강한 정부, 강한 여당’의 철학, 논리, 역사적 사례를 찾기 위해 열심히 책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홉스(Thomas Hobbes)나 로크(John Locke)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강한 정부를 예찬하는 멋있는 문구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노력은 번지수를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것이다. 강한 정부의 철학과 정의를 두고 이른바 지식인들이 입씨름을 벌이는 것만큼 허망한 일도 없다. 필자 역시도 강한 정부라는 말을 놓고 그 누구와도 논리적으로 싸울 전의(戰意)를 느끼지 못한다. ‘말’이 더 이상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민의 대다수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란 말을 냉소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국민들은 그것을 ‘신(新)권위주의와 신(新)관치경제’로 보고 있다. 이런 참담한 상황에서 강한 정부는 무엇이고 약한 정부는 또 무엇이냐에 대해 입씨름을 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소위 ‘레토릭’(rhetoric)이 신뢰의 위기를 초래했다. 이것은 현 위기의 한 단면이다. 언어가 언어의 기능을 상실했을 때 거대담론(巨大談論)일수록 우리를 더욱 허탈하게 만든다. 지금 정치 지도자들의 말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땅에 떨어진 것도 사(思) 언(言) 행(行)이 다르기 때문이다.
국정철학, 민주주의, 시장경제와 디제이노믹스(DJnomics), 언론 자유, 안기부 자금, 대북정책 등으로 이어지는 대통령과 집권세력의 어록(語錄)을 일일이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독자의 기억을 위해 대통령의 말씀 몇 가지만 소개하겠다.
“민주적인 절차를 준수하면서 대화와 양보로 풀어가는 정치, 이것이 힘있는 정부다.”(2001년 1월 연두기자회견)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가 확립되지 못하고 관치경제와 정경유착,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우리 경제가 총체적으로 부실화되었기 때문이다.”(98년 ‘DJnomics, 국민과 함께 내일을 연다’에서 ‘외환위기의 근본적 원인’에 대하여)
“2000년 12월까지 기업과 금융의 구조조정을 완료하고 2001년 2월까지 노동과 공공부문의 구조조정을 완료하겠다.”(2000년 10월 이후 수차례 언급)
“이제 곧 윗목도 따뜻해질 것이다.”(99년 ‘국민과의 대화’)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