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바라보고 희망을 거는 후포, 울진, 경북 그리고 영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한 정치인이 결실을 보기 위해선 태어나고 자란 지역주민의 뒷받침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지난 2월9일, 민주당 김중권(金重權) 대표는 고향인 경북 울진을 방문해 후포지역 선주협회가 주최한 초청간담회에서 연설하는 듯한 어조로 ‘큰 정치인’을 향한 포부를 공개했다. “후포, 울진, 경북, 영남….” 김대표는 점증법(漸增法)식 화법으로 영남의 대표주자로 성장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김대표의 고향방문 사흘 전, 민주당 이인제(李仁濟) 최고위원도 지역민심잡기 이벤트를 벌였다. 이최고위원은 지난 2월6일 충남 당진군 정미면 수당리를 방문, 농민들과 함께 비닐하우스 복구 작업을 벌였다.
이최고위원이 당진을 방문한 날 오전에는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총재의 국회 대표연설이 있었는데 이최고위원은, 불가피하게 중앙무대를 맴돌 수밖에 없는 경쟁자 이총재의 연설이 끝나자마자 지방행 차편에 몸을 실었다. 이최고위원의 당진 방문에는 최근 자민련으로 당적을 옮긴 당진 출신의 송영진 의원을 비롯, 민주당 원유철·문석호·전용학·정장선·이희규 의원 등이 수행해 세(勢)를 과시하기도 했다.
이최고위원은 허름한 농가에서 민박을 하고 이튿날 한보철강을 방문했다. 현장 노동자들과 아침식사를 함께 하며 격려한 뒤 한참을 망설인 끝에 방명록에 이런 글을 남겼다. ‘힘찬 재기의 한해가 되기를… 이인제’. 쓰러져 가는 한보철강은 물론 이최고위원 자신을 향한 채찍질도 담은 듯한 글을 남기고는 곧장 서울로 달려왔다.
정상정복의 관문 대선캠프
민생현장을 누비는 이최고위원에 뒤질세라 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총재도 지난 2월11일 환경미화원 60여 명과 아침식사를 하며 애로사항을 들었다. 이총재측은 이런 현장 좌담회를 수시로 마련하고 조만간 전국을 돌며 민심듣기에 나설 계획이다.
아직 본격적인 대선정국이라 할 수는 없다. 내년 5월 말부터 치러질 월드컵대회 때문에 여야 각당의 대권후보를 뽑는 전당대회는 2002년 중반 이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을 포함, 올해도 정치권의 신경망을 자극하는 민감한 이슈는 얼마든지 널려 있다.
그러나 이런 거창한 정치적·국가적 이벤트와 상관없이 대권을 노리는 주자들의 발걸음은 바쁘기만 하다.
아직 본선경쟁은 시작되지 않았지만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차기를 꿈꾸는 정치인들은 너도나도 대권경쟁을 위한 ‘베이스캠프’ 구축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베이스캠프’는 원래 등산 용어다. ‘정상 정복을 위한 전진기지’. 정상 등정을 위한 베이스캠프를 어디에 설치할 것인가는 등산의 성패를 가름할 가장 중요한 전략적 선택사항이다. 정상 정복을 꿈꾸는 대권주자들은 어디에, 어떤 인물들로 채운 베이스캠프를 설치고 있을까.
집권여당의 1인자는 현직 대통령이다. 집권당의 다음 대권후보는 일단 2인자 그룹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그 때문에 여당에는 언제나 자천타천 대권주자들이 넘쳐날 수밖에 없다.
앞에 말한 김중권 대표와 이인제 최고위원 외에 김근태(金槿泰) 박상천(朴相千) 한화갑(韓和甲) 정동영(鄭東泳) 최고위원 등이 민주당내의 경쟁자들이다. 이들 외에도 노무현(盧武鉉) 해양수산부장관과 고건(高建) 서울시장도 차기 대권후보를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들이다. 자민련의 이한동(李漢東) 국무총리도 DJP 공조 복원 이후, 무난한 대인관계와 경륜을 근거로 급부상하는 인물이다.
한나라당에서는 이회창(李會昌) 총재가 당내 1순위 후보로 거론되고, 김덕룡(金德龍) 의원과 박근혜(朴槿惠) 부총재가 그 뒤를 추격하고 있다. 이 밖에도 무소속 정몽준(鄭夢準) 의원이 만만찮은 지지율로 여론조사마다 얼굴을 내밀고 있다.
이들 여야의 대권주자들 가운데 현재 참모진을 갖춘 베이스캠프를 공개적으로 운영하는 이는 이인제 노무현 김근태 김덕룡 의원 정도이고 박상천 정동영 의원처럼 후원회사무실을 겸하거나 아예 별도의 사무실이 없는 정치인도 적지 않다.
김중권 대표와 이회창 총재 등 여야의 수장(首長)들은 공조직을 대표하는 까닭에 참모기능 대부분을 당내에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개인사무실은 후원회나 사조직 관리 등으로 그 기능을 대폭 축소한 상태에서 자신들을 돕는 두뇌집단을 당내, 혹은 당과 가까운 거리에 배치해 당 대표로서의 ‘프리미엄’을 한껏 즐기고 있다.
‘소리없는 점령자’ 김중권 대표
김중권 대표의 개인사무실이 있는 서대문구 미근동 임광빌딩. 임광토건의 본사사옥이기도 한 이 건물에 들어서면 정면 안내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이색 간판이 눈에 띈다. ‘변호사 법학박사 정치학박사 김중권 10층’. 다른 후보들이 ‘○○연구회’ 등 거창한 이름을 사용하는 것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소박하다.
이에 대해 김대표측은 “변호사사무실로 쓰던 것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변호사들이 ‘변호사 아무개’라는 간판을 쓰는데 김대표는 여기에다 ‘법학박사, 정치학박사’라는 학력을 덧붙였을 뿐이라는 얘기다.
전신이 변호사 사무실이었던 탓에 변호사 업무를 중단한 요즘, 사무실은 썰렁하다. 50평이 넘는 사무실에 근무자는 여직원을 포함해 2∼3명. 이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이헌태 공보보좌역은 “공조직인 정당의 대표인만큼 모든 일을 당 중심으로 처리한다는 게 김대표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임광빌딩 사무실은 당이 미처 소화하지 못하는 일, 즉 언론인터뷰 등 일부 업무만 처리하고 있을 뿐 김대표의 머리를 채울 정책 아이디어 등은 민주당 정책위원회 등에서 맡고 있다는 것이다. 이보좌역은 “집권당 대표로서 잘하는 것이 대권주자로도 성공하는 길이라고 믿는다”며 “현재로선 그 이상의 전략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런 김대표의 마음가짐 탓인지 임광빌딩 사무실은 캠프라기보다는 한적한 사랑방 같은 느낌이다. 임광빌딩 사무실의 김대표 집무실도 여느 변호사사무실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 방 한가운데 책상이 있고 맞은편 책장에는 각종 법률서적이 가지런히 꽂혀 있다. 김대표는 요즘도 가끔 이곳에 들러 손님들을 만나거나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당 대표를 맡기 이전부터 김대표를 도와온 측근 참모로는 조은희 수석보좌역과 이헌태 공보보좌역, 황태순·이형록 대표비서실 차장 등을 꼽을 수 있다. 조은희 수석보좌역은 영남일보, 경향신문 등에서 기자생활을 했으며 현정권 초기 청와대 문화관광비서관(2급)으로 근무한 커리어우먼. 조보좌역은 임광빌딩 사무실에 상근하지는 않지만 각계 각층의 사람들을 만나 김대표의 대권도전 전략을 구하기도 하고 원군(援軍)을 확보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다.
이헌태 보좌역은 지난해까지 매일신문 청와대출입기자를 지낸 언론인 출신. 이 보좌역은 연세대를 졸업했는데 고려대를 나와 후배들을 유난히 아낀다는 김대표로부터 “같이 일하자”는 제의를 받고는 “연세대 출신인데 괜찮겠습니까?”라고 되묻고는 함께 일하기로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김대표가 당대표가 되면서 민주당사 대표비서실로 자리를 옮긴 황태순, 이형록 차장은 각각 김대표의 발언 자료와 수행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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