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은 대통령 당선 후 정권인수위원회를 구성하여 집권 준비를 했다. 정권교체의 경험이 없었던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화와 개혁의 정통성은 자신이 갖고 있다고 보고 주로 전문성을 갖춘 학자나 구여권 출신의 관료들을 중용했다. 정책의 방향도 초기에는 IMF위기 극복과 정치적 안정을 위해 구세력과의 연대 모색에 치중하다 보니 개혁 정책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은 자신이 민주화와 개혁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구태여 개혁세력을 보강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국정 경험이 없다 보니까 전문성을 보강하기 위해 구관료나 학자들을 기용하고 이들을 연결하는 일과 궂은 일을 측근들이 맡도록 한 겁니다. 개혁세력들은 이미 자기 편이니까 신경을 쓰지 않은 거죠. 당정 시스템의 중요성을 생각은 했겠지만 실제로 작동시키지는 못했어요. 그러니까 모든 결정이 대통령에게 올라가고 따라서 업무량이 과다해진거죠. 여기서 지체현상이 생기고 보고의 선후완급을 비서실장이 조절하니까 비서실장에게 권한이 몰리게 된 거죠. 이런 과정에 옷로비사건이 생긴 겁니다.”
─당시 김중권 비서실장이 대통령에 대한 언로를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옷로비 사건 때 대통령이 ‘마녀사냥’이라는 식으로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나돌았는데요.
“특정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동안 당정협의회라는 것이 있었지만 그 역할을 못했다는 겁니다. 당이 민심을 파악해서 정책기조를 결정하는 감각이 있어야 하는데 청와대비서실과 행정부가 각각 따로 가니까 중구난방이 되는 겁니다. 정책조율이 안 되니까 무능한 쪽으로 가는 거지요. 그래서 나타난 시행착오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요. 정국운영을 통합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국무총리와 당대표, 비서실장이 수시로 만나야 합니다. 필요할 때는 관계장관도 부를 수 있어야 하고요. 여기서 함께 의사결정을 해야 합니다. 세 사람이 의논해서 대통령에게 올릴 것은 올리고 조율해서 할 것은 거기에서 해야 합니다. 그래야 매사를 대통령이 책임질 필요가 없는 겁니다. 총리나 장관이, 당대표나 당간부가 책임져야죠. 그래야 시스템이 작동하는 겁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당 운영과 정치는 최고위원들이 맡아서 해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지난해 8·30 전당대회 후 대통령께 매월 1,2회 최고위원 회의를 주재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대통령께서도 그렇게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정치는 최고위원들이 책임을 지고 맡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권 내에는 정책이나 인사문제 등을 토의할 테이블이 없습니다.”
─최고위원 회의를 심의기구화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겁니까.
“그렇죠. 그런데 최고위원 회의가 토의를 제대로 해서 정치력을 발휘하려면 9명이하로 구성되는 심의기구여야 합니다. 이곳에서 정치적 사안도 토의해야 합니다.”
구조적으로 고립된 대통령
김근태 최고위원의 주장은 최고위원 회의가 정치적으로 대통령을 지원할 틀을 갖추고 당대표와 국무총리와 비서실장이 대통령을 보좌해서 정책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논의의 틀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관계기관대책회의가 그런 기능을 했지만 정치적 불신이 컸던 만큼 공식적으로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 이런 기능을 수행해야 정국을 돌파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한때 청와대 집무실을 정부종합청사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을 한 적이 있는데….
“잭 웰치 GE 회장은 ‘CEO는 보고서에 파묻혀서는 안 된다’는 지적을 했어요. CEO는 생산라인이나 소비자 한가운데서 그 사람들의 느낌과 호흡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이 야당 총재를 할 때에는 늘 현장 한가운데 있었는데 청와대에 들어가서는 집무실이 경호실에 의해 차단되고 비서실과도 거리가 떨어져 있어요. 지금의 청와대 집무실은 대통령을 고립시키는 구조입니다. 그런 환경에서는 주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체취를 느낄 수 없습니다. 논리적 정합성은 가질지 몰라도 호흡을 함께할 수는 없죠. 그래서 비서들이나 행정부 사람들이 일하는 한가운데 대통령 집무실을 둬야 한다는 주장을 했던 것입니다. 백악관은 르윈스키 사건에서 보듯이 대통령 집무실 문을 열면 바로 비서실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어요. 그러나 지금 청와대 집무실 위치는 차단되고 격리된 구조입니다.”
청와대의 이런 구조에서는 대통령과 대화할 수 있는 비서실장이나 몇몇 측근만 접근할 수 있다는 진단이다. 최근 정풍파가 주장하는 인적 쇄신의 이면을 들춰보면 대통령의 귀와 눈을 독점하는 측근들에 대한 불만이 짙게 깔려 있다. 현재 김중권 당대표가 비서실장으로 있을 때는 동교동계 사람들이 불편해했고 동교동계인 한광옥씨가 비서실장이 된 뒤에는 비동교동계들이 불만을 갖고 있다. 최근 민주당 워크숍이 끝난 후 당정쇄신을 요구하는 당발전위원회의 건의문을 전달하려는 자리에 한광옥 실장을 배제해달라고 요청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최근 초재선 의원들의 성명발표도 대통령의 언로가 막혀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봅니까.
“그런 측면을 부정할 수 없죠. 그런데 정풍파들의 요구는 옳지만 절차는 잘못됐다고 봅니다. 당대표에게 의원총회를 요구하고 자신들의 의사를 전달했어야 하는데 언론에 먼저 흘린 것은 국민들에게 직소하는 것 아닙니까. 이것은 마지막에 취해야 할 비상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장파들은 당의 지지율이 떨어지니까 국민도 두렵고 대통령에게 직접 말하는 것도 어려우니까 자신들의 입장을 언론에 던진 것으로 봅니다. 대통령도 괴로웠을 겁니다. 대통령은 젊은 피를 수혈한다는 차원에서 초재선 의원들을 발탁해 쓰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 사람들은 평소 대통령과 자주 만날 수 있었고 따라서 영향력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번 정풍 파동의 주역들은 어떻게 보면 대통령이 총애하는 사람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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