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와 내용.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김의원은 두 가지 모두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서명파 의원들은 절차보다 내용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현재 민주당의 모습은 절차를 따질 만큼 한가롭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해 최고위원 경선 당시 김의원을 지지했던 김성호(金成鎬) 의원도 김의원이 워크숍에서 절차의 중요성을 강조하자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절차보다 쇄신의 내용이 더 절박하다는 생각은 안 드세요.
“제가 절차의 문제를 제기했지만, 그건 발제의 특성상 그렇게 표현한 겁니다. 저는 절차를 무시하는 과정에 담겨 있는 또 하나의 본질, 즉 특정인의 사적인 목적에 대한 비판이 70% 이상이라고 생각해요. 절차는 민주주의의 본질이며, 권력누수를 예방해야 할 집권 후반기에 당의 기강 문제와 연결돼 있습니다. 국민의 요구를 받아들여 쇄신하는 것도 중대한 과제지만, 개혁을 마무리해야 할 집권당이 규율을 유지하고 대오를 지키는 것도 필요하다는 거죠.”
―김의원이 절차를 강조하면서 쇄신의 내용은 사그라지고, 절차를 문제 삼아 서명파를 공격하는 논리가 득세했습니다.
“전적으로 언론에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제 발제문은 쇄신과 절차를 같은 비중으로 담았어요. 앞에서 쇄신의 내용과 방향을 언급했고, 뒤에서 절차의 중요성을 얘기한 거죠. 또 워크숍 현장의 분위기를 보세요. 제 발제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어요. 그날의 결론은 ‘쇄신은 반드시 하되, 앞으로는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언론이 발제문과 현장의 분위기를 왜곡했다고 봐요. 동교동과 서명파의 대립? 이런 식으로 워크숍에 참석한 다수 의원들의 의견을 철저하게 왜곡했습니다.”
―어쨌든 동교동 의원들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까.
“동교동뿐만 아니라 중도적 의원들의 의견을 반영한 겁니다. 다수 의원이 공감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나왔겠습니까? 다수 의원은 ‘질서 있는 쇄신론’에 공감했어요. 물론 동교동 의원들도 거기에 공감할 수 있었겠죠. 그런데 동교동이 나섰기 때문에 동교동의 의견대로 정리됐다? 그건 동교동에 속해 있지 않은, 또는 서명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들의 의견을 왜곡하고 모독하는 겁니다.”
―아무도 나서서 얘기하기 힘든 상황에서, 개혁 성향으로 분류되는 김의원이 발언을 했기 때문에 파급 효과가 컸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가 했느냐보다 내용이 어떠했느냐를 봐야 합니다. 현장 분위기로 보면 제 의견에 공감하는 분위기가 가장 많았어요. 그런데도 동교동이 뭐 어떻게 해서 반격했다고 말하는 것은 전체적인 현상을 왜곡하는 거죠.”
서명파 의원들이 제기한 ‘시스템 쇄신론’은 갑자기 나온 얘기가 아니다. 멀게는 지난해 민주당 소장파들이 주도했던 ‘13인의 반란’이나 정동영 최고위원이 주장한 ‘권노갑(權魯甲) 퇴진론’ 등이 있었으며, 올 들어서도 ‘바른정치모임’ 소속 의원들이 꾸준히 논의해왔다. 김의원 역시 ‘바른정치모임’의 멤버로 참여해왔다. 적어도 이번 파문이 생기기 전까지 김의원과 서명파 의원들은 ‘쇄신’이라는 차원에서 같은 배를 타고 있었던 셈이다.
―서명파 의원들의 쇄신론과 김의원이 말하는 쇄신론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잘하자는 뜻의 쇄신으로 보자면, 김민석이든, 1차 서명에 참여한 의원이든, 또 서명에 참여하지 않은 대다수 의원이든 다를 게 없다고 봅니다. 국민들은 뭔가 미흡하다고 느끼고 있으며, 당이 그것을 받아들여서 뭔가 변해야 한다는 데는 차이가 있을 수 없죠.
하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 사람마다 약간씩 다를 겁니다. 심지어 서명파 의원들조차 단일한 의견을 내지 못했잖아요. 저는 솔직히 서명파의 쇄신론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요.”
―예를 들면 쇄신파는 비선라인을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거기에서 말하는 비선라인이 뭡니까? 누구를 의미하는 겁니까?”
―일단 권노갑 전최고위원을 지칭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는 권전최고위원이 현재 당의 운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보지 않는데요. 서명파 의원들도 처음엔 비선을 지칭하면서 문책을 요구했지만, ‘그쪽이 아닌 것 같다’면서 사실상 뒤로 뺀 것 아닙니까? 저는 만일 비선이 존재한다면, 그건 전체적인 시스템 속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 가운데 하나라고 봐요. 그것이 유일무이한 핵심적인 문제다? 그것이 풀리면 다 해결된다?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김의원은 권전최고위원이 당 운영이나 인사문제 등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보시는 거군요.
“‘한다’ ‘안 한다’의 문제가 아니죠. 저는 권전최고위원이 좌지우지한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지금 민주당 운영은 김중권 대표가 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당에 대표가 있고, 최고위원이 있고, 총장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권전최고위원이 다 좌지우지하고 있다면, 도대체 뭘 얘기하는 겁니까? 당의 인사를 결정한다는 겁니까? 아니면 당론을 결정하기 위해 재가를 받는다는 겁니까? 비선라인이 도대체 누구를 얘기하는 겁니까?”
―예를 들어 이번 법무부 장관 인사의 경우 비선라인에서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올라와서….
“이번 인사가 그렇게 됐다는 결론이 나왔습니까? 지금 근거 없이 주장하는 거 아닙니까? 저는 전체적인 시각에서 이른바 비선라인이 과도하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면, 극복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게 첫째 주장입니다. 둘째, 근거 없이 권전최고위원이 다 했다고 단정하고 그것만 해결하면 다 풀린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과 다를 뿐만 아니라 옳지 않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김의원이 보기에는 비선라인이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비선라인이야 있을 수 있죠. 공선이 아니면 다 비선 아닙니까? 현재 정부와 청와대와 당에서 공적인 관계에 있지 않은 사람은 전부 사적 관계입니다. 그것을 정치적으로 표현하면 비선이죠. 다만 그것이 조직적인 임무를 가지고 당과 정부에 항상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면, 그걸 비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그 동안 사적인 영향력을 가진 권노갑 전최고위원이 있었다? 이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조직적 형태로 당이든 정부든 모든 공식 라인을 무력화하는 형태로 존재한다? 이건 아니라고 봅니다. 어떤 대목에서 지나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지적하는 건 있을 수 있겠죠. 그런데 근거 없이 비선이 모든 국정혼란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건 균형 잡힌 사고가 아니죠.”
권 전최고위원은 착한 분
정치권에서 김의원이 권전최고위원과 가깝다는 소문이 오래 전부터 나돌았다. 지난해 4·13총선 때는 386세대 정치인들이 김의원을 통해 권전최고위원과 접촉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주목받는 차세대 정치인으로 꼽히는 김의원과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오랜 정치적 동지이자 동교동계의 수장인 권전최고위원. 도무지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두 사람을 두고 끊임없이 유착설이 나도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권노갑 전최고위원을 자주 만나십니까.
“회의 때 보는 것말고는 드물어요. 명절 때 인사 가서 보는 정도겠죠. 제가 그 양반하고 정치 토론할 군번도 아니잖아요. 회의 빼고 나면 같이 밥 먹는 거 포함해서 기껏해야 1년에 두세 번이나 볼까요. 작년에는 정최고위원과 함께 식사한 적도 있어요.”
―권노갑 전최고위원을 정치인으로서 어떻게 평가하세요.
“하하하. 제가 그 선배를 어떻게 평가하겠습니까. 어쨌든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을 갖고 걸어온 분이라고 봐요. 인간적으로는 남들한테 잘해주는 착한 분이고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많이 찾아가겠죠. 마포사무실에도 그렇게 사람이 많다면서요.”
김의원은 시중에 나도는 권전최고위원과의 관계를 전면 부인했다. 그는 “원칙이 아니면 절대 따르지 않는다”는 말도 했다.
이쯤에서 기자는 김의원의 속마음을 엿보고 싶었다. 김의원은 절차의 정당성에서 한발짝도 더 나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정가에서 김의원의 말을 그대로 믿기 보다는 막연하게나마 뭔가는 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그중 하나가 김의원과 동교동계의 ‘예사롭지 않은’ 관계일 것이다. 김의원은 “동교동계가 아니다”고 주장하지만, 정치권에서는 이미 그를 ‘친동교동계’의 범주에 넣고 있다.
―발제문에 ‘중도통합’ 얘기가 나오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첫째, 우리 당은 중도개혁주의 정당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중도개혁 노선이라는 겁니다. 극단적으로 무능하거나 문제가 있는 사람을 제외한 중도개혁적인 주류가 최대한 통합해서 당을 끌고 가야 한다는 거죠. 예를 들어 ‘동교동은 다 빠져라’ 이런 시각은 잘못됐다고 봅니다. 지금 역량을 총동원해서 정권을 재창출해야 할 우리가 차 떼고 포 떼면 뭐가 남겠습니까.”
―그런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할 때 동교동은 어떻게 됩니까.
“저는 포괄적인 의미에서 우리 당이 잘 가려면 동교동의 지원이 절대 필요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동교동은 우리 당의 뿌리고 정권창출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잖아요. 동교동은 앞으로도 당의 중심이 돼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개혁을 추진하고 정권 재창출을 하는 과정에 지원 역할을 했으면 좋겠어요.”
―김의원은 앞으로 동교동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실 계획입니까.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요. 다 동지니까. 원칙적으로 이건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한 모든 분들과 협력해야죠. 다만 어떤 특정 세력에 얹혀가는 일은 없을 거예요.”
―동교동계가 앞으로 간판으로 내세울 정치인이 없다, 그래서 김의원이 장기 포석으로 총대를 멨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세요.
“동교동 간판이요? 뭐하러 그럽니까. 하하하. 뭐하러 그러냐고요. 내가 동교동 사람도 아니고, 동교동계 할 생각도 없고. 저는 그런 거 안 해도 우리 당 젊은 사람 중 괜찮은 사람의 하나로 끼어요. 내가 뭐 아쉬워서 스스로 좁혀가면서 동교동 간판으로 갑니까. 그건 진짜 웃기는 얘기 아닙니까. 제가 동교동의 지원을 받으면서 세력을 키울 수 있겠어요. 그렇게는 안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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