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대립의 축 1997년 12월 김대중씨와 호남세력의 예기치 못한 집권과 40년간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영남에 기반을 둔 근대화 세력의 뜻하지 않은 실권이라는 결과는 한국사회에 일대 혼란을 예고했다. 영남 기반의 근대화 세력은 40년 지배의 종식에 따른 상실감과 좌절감을 어떻게든 극복해야 했다. 반대로 지난 40년 동안 정치경제적 차별과 문화적 피해의식에 한이 맺힌 호남세력은 집권과 더불어 앞뒤를 가리지 않고 한풀이에 나섰다.
한국정치의 게임 룰인 승자독식에다 누적된 ‘피해’를 단기에 만회하려다 보니 혁명 뒤에나 있음직한 보복과 일대 숙청에 비견될 만한 일들이 일어났다. 실례로김대중 정부 들어 지역편중인사 논란이 끊임없이 일어난 점을 들 수 있다.
권력행사가 이렇듯 노골적으로 전개되자 지킬 것이 더 많은 근대화 세력은 당연히 반동의 자세를 취해야 했고, 바꿀 것이 태산 정도라고 생각한 집권세력은 개혁 혹은 진보의 외피를 둘러야 했다. 당연히 무엇이 진보이고 무엇이 보수인지에 대한 이념적 혼선이 빚어졌다. ‘친DJ=진보’, ‘반DJ=보수’라는 기계적 도식이 공공연해졌다. 민주화운동의 화신이자 개발독재시대의 최대 피해자인 김대중 대통령이 하는 일은 무조건 절대선이라는 논리적 비약이 호남 출신 엘리트나 개혁세력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졌다. 여기에 이런저런 문제제기를 하거나 토를 다는 사람은 필시 수구이거나 반개혁세력이라는 반격이 가해졌다.
한때 김대중씨와 호남세력이 집권하면 호남사람들이 한을 풀고, 영호남 지역주의를 청산하는 데 큰 진전이 있을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다. 당시 김대중 후보의 호소가 바로 그랬다. 그러나 DJ집권 4년도 되지 않아 결과는 정반대로 가버렸다. 호남인들의 한은 그대로 있는 듯하고, 영남인들의 적대감은 한층 깊고 커졌다.
아마도 영호남 지역주의는 해결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이제 ‘화해와 협력’, ‘공존공영’은 남북관계의 목표를 넘어 영호남 관계의 목표인지도 모르겠다.
좌우 이념논쟁의 둘째 축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과 관련되어 있다. 지난해 평양 남북정상회담과 ‘6·15 남북공동선언’은 한반도 분단사에 분명히 한 획을 그었다. 하지만 이 역사적 사건이 남한 내 야당이나 대다수 국민의 동의나 지지없이 이루어졌기에 ‘남남갈등’의 또 다른 대립구도를 한국사회에 탄생시켰다.
사실 ‘남남갈등’이 전혀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그것은 기존의 영호남 지역대립구도와 상당부분 중첩해 있으며, 지역대립구도 혹은 ‘반DJ 대 친DJ’ 대립구도가 근간을 이루고 있다. 거기에다 중산층을 위시한 안정희구 세력도 통일이 초래할 수도 있는 대가나 혼란을 사전에 경계하면서 갈등구도에 포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김대중 정부의 최대 치적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한동안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던 대북정책이 2001년 여름 현재 남한사회 좌우 이념논쟁에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탈분단’이라는 대세에도 냉전적 분위기는 엄존하고 있으며, 권력투쟁이 노골화할수록 그 분위기는 강화될 수 있다. 한반도 분단문제의 해소는 기업간 빅딜식으로 간단하게 처리될 수 없는 구조적 문제이기에 좀더 긴 호흡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좌우 이념논쟁을 촉발시킨 결정적 계기로 여겨지는 언론사 세무사찰 역시 정치적 맥락을 무시하고서는 핵심에 도달할 수 없다는 데 사안의 복잡성이 있다. 이제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굵직한 ‘사태’들은 예외없이 차기 대권과 연계해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언론사 세무조사 파문도 그런 사안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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