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리리릭…” 지난 8월1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금강빌딩 3층 노무현(盧武鉉) 민주당 상임고문의 ‘자치경영연구원’ 사무실. 모 방송국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노고문에게 이 방송국의 코미디 프로그램에 출연해달라는 것이었다. 요즘 한창 인기를 얻고 있는 ‘알까기 명인전’에 대국자로 나와달라는 요청이었다. 방송국측이 알려준 대국 상대방은 김근태(金槿泰) 민주당 최고위원.
연구원 관계자는 “녹화 예정일에는 노고문께서 지방 행사가 있어 곤란할 것 같다”며 사양했다.
이 인사는 “며칠 전 김최고위원이 알까기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는 기사가 났는데 방송국측이 그 파트너로 여러 사람을 물색하다가 노고문에게 전화를 한 것 같다. 바깥에서는 두 사람을 라이벌로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얘기는 대권주자들의 외모 문제로 돌아왔다. 일전에 한 일간지에 노고문도 ‘스타일리스트’를 고용해 외모 가꾸기에 나섰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 동안 노고문에게 변화가 있었느냐”고 묻자 연구원 관계자는 “우리는 그렇게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고 말했다. 잠시 후 김근태 최고위원의 머리 스타일이 화제에 올랐다.
“개혁연대는 위험한 논리”
“며칠 전 TV 뉴스 보셨습니까? 김최고위원은 영국의 토니 블레어를 흉내냈다고 했는데 방송뉴스에서는 고이즈미 일본 총리를 닮았다며 두 사람의 얼굴을 보여주더라구요. 그러고 보니 정말 비슷하더군요. 누구인지 몰라도 김최고위원의 스타일 전략을 잘못 짠 것 같습니다. 반일감정이 대단한 시기에 그건 중대한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같은날 오전 노고문의 사무실에서 50m 가량 떨어진 여의도 미주빌딩 2층 김근태 최고위원의 ‘한반도재단’ 사무실. 재단 관계자는 별다른 설명없이 “최근 우리의 고민거리”라며 ‘열린 연대론’이라는 제목이 적힌 A4 세 장짜리 보고서를 보여주었다.
‘열린 연대론’이란 최근 들어 김최고위원이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세력확대전략. 보고서는 지금까지의 여권 내부의 대선논의를 개괄한 데 이어 노고문의 ‘개혁연대’에 대한 평가, 그리고 이를 대신할 김최고위원의 ‘열린 연대론’에 대한 정리 등의 순으로 구성돼 있었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개혁연대에 대한 김최고위원 진영의 평가.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었다.
“7월부터 ‘개혁연대’가 새로운 대선논의로 등장하기 시작했음. 그러나 이 논의는 노고문측의 ‘개혁후보 연대’와 당내 소장파들의 ‘개혁세력 연대’라는 두 가지 다른 흐름을 지니고 있었음.
‘개혁후보연대’와 ‘개혁세력연대’는 표면적 유사성에도, 선거전략 측면에서 보면 차기 대선승리를 획득하기 위한 가동자원, 연대의 과정 및 방법, 연대의 결정시기 등에서 전혀 다른 양상을 띨 수밖에 없는 것이었음.
천정배 의원의 부산발언(노무현 고문 지지발언)은 이러한 차이를 분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즉흥적 발언으로 추측됨.
그러나 ‘개혁세력 연대’는 현상적으로 선명성과 이슈 선점성이 있으나, 한국의 정치지형에서 ‘개혁세력 대 보수세력’이라는 지형은 ‘진보세력 대 보수세력’으로 치환되어 정쟁을 폭발시킬 가능성이 높고 진보세력이 소수일 수밖에 없는 한국의 선거자원에서는 패배를 자초하는 위험성이 높은 논의임.
더욱이 ‘개혁후보 연대’는 아직 대중적인 메이저 후보가 아닌 GT(김근태 최고위원의 영문 이니셜)와 노고문의 연대를 상정하고 있어, 대중적 폭발력을 가져올 수 없고 또 개혁세력이라고 통칭되지만 젊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개혁세력의 분포도로 보아 개혁세력 자체의 견인력도 미미하다는 한계점을 갖고 있는 논의였음.”
이처럼 개혁연대, 혹은 개혁후보 연대의 문제점을 지적한 뒤 보고서는 “이런 상황에서 GT의 ‘열린연대’는 ‘개혁연대’의 위험성을 희석하고 심리적 보수층을 수용할 수 있는 정당한 논리”라고 규정했다.
같은날 오전 오후에 나눠 방문한 두 대선캠프의 분위기는 이처럼 미묘했다. 양쪽 모두 분명한 표현으로 상대방을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상대방을 마뜩치 않게 여기는 기운은 역력했다. 구체적으로 상대 조직의 문제점을 지적하는가 하면 대선전략과 관련, 의견차이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정치권에서는 경쟁관계인 두 세력 상층부의 사소한 갈등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심각한 대결양상으로 확대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두 캠프의 상대방에 대한 싸늘한 시선 역시 이런 현상의 일단일 수 있다. 당사자인 노무현·김근태 두 사람의 관계는 여전히 괜찮은데 실무자들 사이에 미묘한 경쟁이 촉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을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도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두 캠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경쟁보다는 협력 관계임을 강조하던 것이 두 캠프의 공통된 모습이었다.
“협력과 경쟁 관계라고 보면 정확할 겁니다. 경쟁보다 협력을 앞세우는 점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비록 대권도전에서는 경쟁관계에 있지만 언제라도 협력할 수 있다는 것이 맨 위부터 아래까지 두 캠프의 생각입니다.”(노무현 진영 관계자)
“굳이 설명하자면 형제 같은 관계죠. 오늘도 저쪽(노무현 캠프) 사람과 전화통화 했습니다. 협력과 경쟁 관계라는 표현은 정말 우리 사이를 잘 묘사한 표현입니다.”(김근태 진영 관계자)
시간을 좀더 거슬러 올라가 올 봄, 노무현·김근태 두 사람 사이에는 역대 어느 대선 주자 사이에서도 볼 수 없었던 대화가 오갔다. 이른바 ‘양보론’이 그것인데, 지난 4월9일 노무현 고문은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민주화 세력의 주자가 대선후보가 되지 못하는 심각한 상황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당내 대선후보 결정과정에서 민주화 세력이 단결해 단일 후보를 내야 한다. 만약 민주화 세력이 분열되는 상황이 올 경우, 여러 조건을 고려해 김근태 최고위원을 위해 양보할 수도 있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민주화 세력이 분열되는 상황’과 ‘여러 조건을 고려해’라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노고문의 발언은 당장 노고문 진영과 노고문 지지자 사이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설령 양보할 상황이 오더라도 그때 가서 결정할 문제지 미리 양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내부 비판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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