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외국의 한 시각장애인이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꿈을 잃지 않고 산다는 것의 중요성이 새삼 화제가 됐다. 그러나 그 인간 승리의 한 켠에는 등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가 너무 욕심을 부린다고 우려의 눈길을 보냈던 주위 사람들의 얘기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의 등정은 그가 가졌던 희망의 결과인가 아니면 욕심의 부산물인가.
쿠데타나 혁명의 차이가 그런 것처럼 ‘희망’과 ‘욕심’도 다분히 결과 지향적인 개념을 내포하는 단어다. ‘희망’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을 이루고자 또 그걸 얻고자 바라는 것”이다. 반면 ‘욕심’은 “분수에 지나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사전적으로는 이렇듯 명확하게 뜻을 구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어떤가. “나는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주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욕심이 없어”라고 말하며 질박하게 미소짓는 중산층 주부가 있다. 말 그대로 소박한 ‘희망’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망 없는 암으로 투병하고 있는 아이를 둔 또 다른 주부에게는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 주었으면 하는’ 희망은 세상에서 가장 사치한 욕심일 것이다.
20대의 한 젊은이는 희망과 욕심에 관해 이런 갈등을 토로한다.
“욕심과 희망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누구에게 피해가 가면 욕심이고 아무에게도 피해가 없으면 희망인가. 그냥 생각해볼 때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이 욕심이라면 불행해졌을 때 가져야 할 게 희망일 것이다. 잠시 욕심을 버린다고 생각하고 희망을 버린 적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욕심이 아니라 그냥 정당한… 내 삶의 희망인 것 같았다.”
확실히 희망과 욕심은 동전의 양면처럼 한 줄기에서 뻗어나간 두 개의 잎사귀다. 희망이라고 여겼지만 욕심이었던 일은 없었는지, 혹은 욕심이라고 생각해 너무 쉽게 포기해 버린 희망은 없었는지 곰곰이 따져볼 일이다. 그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내는 일은 온전히 당사자의 몫이다.
그런 관점에서 이화여대 이인화 교수와 민주당 김근태 최고위원을 살펴보려고 한다. 얼핏 비슷한 것 같지만 명백한 차이가 있는 ‘희망과 욕심’처럼, 이인화 교수와 김근태 최고위원의 삶은 어떻게 다른가.
먼저 이인화 교수에 대해서 살펴보자.
“흔히 이인화씨는 보수 우파라고 해서 무서우리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만나보니 동안(童顔)이라서 놀랐어요… 주변 사람들이 이인화씨를 보고 그래요. 그 사람은 나이도 젊은데 머리에 든 것이 어찌 그리도 많은가 하고요. 이인화씨는 머리가 복잡하겠어요.”
강경한 보수 우파 & 방대한 지식
1999년 7월 방송인 배유정씨가 이인화와의 대담 중에 한 말인데, 두 가지 점에서 흥미롭다. 하나는 이제 겨우 30대 중반인 이인화를 무서우리만큼 강경한 ‘보수 우파’로 보는 시각이며 또 하나는 사람을 주눅들게 할 만큼 방대한 지식을 가진 그의 지적 능력에 대한 찬탄이다. 이인화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그 두 가지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듯하다.
이인화는 소설가이자 평론가이며 현재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중인 ‘유명한’ 지식인이다. 1995년 만 29세에 만장일치로 명문대학 교수에 임용 추천돼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인화를 독특한 시각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기억한다.
1988년 평론가로 문단에 데뷔한 이인화는 그동안 모두 네 편의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그중 100만부가 넘게 팔린 ‘영원한 제국’이 그를 스타급 작가 반열에 끌어올렸다면, 박정희 전대통령을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이유로 지식인 사회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인간의 길’은 그를 ‘극우 보수’ 성향의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하는 결정적 단초가 되었다. 확실히 그의 특이한 문학관과 동안에 어울리지 않는 과격하고 보수적인 지식인관은 남다르다.
이인화는 “소설은 문단에서나 통하는 나긋나긋한 문학이어서는 안되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생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좋으냐를 가르쳐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일생에 걸쳐 딱 한 편만 쓰고 싶다는 ‘국민소설’의 궁극적 지향점을 시사해주는 말이기도 하다. 현재까지는 그 국민소설의 한 모델이 1부 3권까지 출간된 ‘인간의 길’이다.
한 문학평론가는 이인화의 문학관에 강력히 반론을 제기한다. 소설은 작가가 준엄하게 꾸짖거나 작가의 독백을 듣는 장르가 아님에도, 이인화의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전부가 이인화의 이념을 대변하는 메가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작가 자신의 관념이 소설속 인물보다 더 설치는 경향이 있다고까지 진단한다.
그러나 소설을 자신과 같은 지식인의 계몽적 도구로 인식하는 이인화의 의지는 강경하고 확고하다. 그의 이런 문학관은 종종 1970년에 자위대 궐기를 외치며 할복자살을 한, 일본 우익 진영의 상징적 존재인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에 비교될 정도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익 지식인으로서 이인화의 사명감이나 과격함도 그에 못지않다. 언론개혁 문제로 지식인들 사이에 논쟁이 한창 가열되고 있던 지난 7월 초, 이인화는 “반공이데올로기가 득세하던 때에는 좌파 지식인들이 발언을 못했는데, 요즘은 거꾸로 우파 지식인들이 말을 못한다”며 분통을 터뜨린다. 주로 그와 반대편에 서 있는 지식인을 가리키는 것이겠지만, 그는 우리나라 지식인 사회에 대해 혐오와 증오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1987년 대선이 끝난 후 입으로만 민주화를 떠든 사람들에게 실망했는데, 줏대도 없고 주변도 없고 시류와 유행에 편승하는 그런 지식인들은 ‘인간 쓰레기’라는 생각을 많이 했단다. 그런 인간 쓰레기들에 비하면 박정희는 너무나 훌륭한 사람이란다. 자신은 박정희가 한 일은 쿠데타와 유신을 포함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옳았다고 얘기하고 싶지만 지식인으로서의 외적 조건이 그런 솔직함을 계속 막는다고 고민을 털어놓는다.
이인화는 “어떤 천재성을 지닌 개인이 길을 제시하고 모범을 보이면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선택하고 비주체적으로 그 뒤를 따르는 것”이 곧 인간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의 영웅숭배는 비단 박정희에 국한되지 않고 동서고금을 넘나든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마오쩌둥, 세종대왕 등 그의 숭배 대상은 적지 않다.
소설가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절대로 일방적인 ‘예스’나 일방적인 ‘노’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역설하는 그가 ‘주의’라는 말이 붙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맹목적으로 영웅숭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런 정신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일반 대중에게 강요하는 그의 부적절한 용맹성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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