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바탕 꿈이었나. YS 개혁에 환호하던 갈채는 아련히 잊혀가고 그 자리에 썰렁한 비판만 남았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절차적 정통성을 가진 문민정부에 자랑스레 참여했던 핵심인사들은 지금 어떤 생각과 느낌으로 그 시절을 돌이켜볼까. 문민 비화 마지막 회에는 김정남(교문사회)·최양부(농수산) 전 수석비서관·한승수 전 비서실장·한승주 전 외무장관·손학규 전 보건복지부 장관·김정원 전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등이 증언한다. 이 연재는 고려대학교 정경학부의 ‘대통령학’수업에서 이뤄진 ‘김영삼정부 심포지엄’에서 녹취한 내용을 같은 대학 대통령학 연구실(실장·함성득 교수)의 협조하에 발췌·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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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의 유형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많이 들어보았을 겁니다. 첫째로는 머리 좋고 부지런한 사람, 둘째는 머리는 좋은데 게으른 사람, 셋째는 머리는 나쁜데 부지런한 사람, 넷째는 머리도 나쁘고 게으른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네 가지 지도자상 중에 가장 바람직한 상은 머리 좋고 게으른 사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무엇이든 독단적으로 자기가 다 알아서 하는 사람보다 사안에 대한 이해는 빠르면서도 어느 정도 전문성을 가진 사람에게 일임하고, 그것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사람이 낫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는 머리 나쁘고 게으른 형, 머리 좋고 부지런한 형, 머리 나쁘고 부지런한 형 순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김대중 대통령은 어떤 형일까 생각해보면 무척 재미있을 것입니다.
내가 대통령의 자질과 능력에 대해 네 가지 정도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첫째는 정책 개발과 선택입니다. 대통령은 실제상황에서는 여러 가지 대안 중에서 고르는 것이 아니라 미리 방향을 잡고 정책을 선택하는 로드 맵(road map) 접근방식이 필요합니다. 크고 넓은 시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정책에 대한 우선순위도 결정하고 있어야 합니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한반도 정책에 대해서 하루에 한번이라도 생각을 할까요? 아마 기껏해야 일주일에 한번 정도, 때로는 보고를 받을 때 뿐일 겁니다. 그런데 한미정상회담에 나올 때 클린턴은 사안의 핵심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둘째, 스태프의 활용입니다. 비서실, 각료에 권한을 위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전문성을 가진 이들을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과시하고 싶어하는 개인 성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금융실명제와 같은 정책을 수립할 때도 경제수석인 박재윤씨조차 쉬쉬하면서 정책을 발표하고 ‘몰랐지?’하는 식이었습니다.
제가 대통령을 수행하고 중국에 갔을 때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워싱턴에서 일정이 있어 중국에서 바로 출국을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김대통령에게 인사를 하고 떠나려는데 저를 부르시는 거예요. 그때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4강 외교’ 대신 ‘4각 구도’라는 말을 하고 중국과의 관계개선 등에 대해서 말씀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나중에 등거리외교니 뭐니 하면서 말이 많았지만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저기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몰라. 한 장관에게만 미리 말하는 거야” 하시는 거예요. 물론 저도 그때까지 그런 사실을 몰랐지요. 이번에도 ‘몰랐지?’ 하는 식이었지요. 한편 김대중 대통령은 일반적인 정규과정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특징 때문인지 교육받은 사람이나 전문 관료를 경시하는 성향이 강한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독학에 대한 자신감 때문에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이 강한 것으로 보입니다.
YS의 ‘몰랐지?’ 스타일
셋째, 조직의 운용입니다. 조직의 운용에는 커뮤니케이션, 모티베이션, 경쟁, 평가 등이 있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은 상하 그리고 각 부처와 조직 간에 수평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일방도 쌍방도 아닌 무방입니다. 상하간에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경제에 대해서 국민들에게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위기인지 아닌지. 싱가포르의 경우는 우리와 다르더군요. 국민들과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제가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우스운 예를 하나 들면 이런 것이 있습니다. 워싱턴에 있는 우리 대사관이 우리나라 정세에 대한 자료를 얻으려고 하면 어디서 그 자료를 얻는 줄 아세요? 바로 미국 국무부에 가서 받아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미국 대사관은 국정원, 청와대, 정부부처 등에서 수집한 자료를 미국 본국에 보고하는 반면, 우리 대사관이 받아보는 본국 자료는 외무부에서 보내주는 자료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통일부는 외교부가 하는 일을 모르고, 외교부는 국정원이 하는 일을 모릅니다. 위에서 내려와야 비로소 알게 됩니다. 이렇듯 부처간에 상호 의사전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모티베이션, 즉 잘하는 사람에게는 상을, 못하는 사람에게는 벌을 적당히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맡은 일들이 보람 있는 일이라는 환상을 갖게 해야 합니다. 제가 외무부 장관 시절 국장, 과장들은 서로 일을 따내려고 안달이었습니다. 힘들지만 일을 도맡으려고 합니다. 물론 이에 따라 예산이 더 주어지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능력있는 상급자로 인정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대사관에 나가서 놀라는 일이 많습니다. 그들이 매우 헌신적으로 일하며 밤을 꼬박 새워가면서 일하기도 합니다. 제가 또 놀란 것은, 외무부 장관직에서 떠난 뒤에 대사관에 갔을 때는 그저 노는 것만 생각하고 골프를 치자고 성화여서 놀랐습니다. 물론 다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외국 주재 대사관 직원들이 하는 말 중에 가장 행복한 때가 언제냐고 물으면 “본국 대통령이나 장관이 공항을 이륙할 때”랍니다.
그 다음은 계속적인 점검(continuation)이 필요합니다. 즉, 지시를 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모니터링해야 합니다. 상기시키고 회상시켜야지 그렇지 않으면 잊어버리게 마련입니다. 외환보유고에 대한 보고도 처음에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다가 잊혀지거나 보고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쟁(competition), 즉 체크와 밸런스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책임 소재가 분명해야 합니다. 지금 정부는 책임소재가 불분명합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제가 제일 싫어하던 것이 평가(evaluation)입니다. 여러분도 장관들을 A, B, C 식으로 성적을 매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평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평가된 것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이런 평가는 신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기와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이야기인데 옛날 황희 정승이 들판에 있는 농부에게 두 마리 소 중 어떤 소가 일을 더 잘하냐고 묻자 그 농부는 황희 정승의 귀에다 속삭이듯이 “저기 누런 소가 더 잘합니다”라고 했답니다. 황희 정승이 왜 그렇게 속삭이냐고 묻자 소들에게도 ‘감’이란 게 있어서 금방 알아채 사기가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했답니다. 이렇듯 평가는 신중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대통령들의 조직과 스태프의 활용 면에서 볼 때 군 출신 대통령들은 조직과 스태프에 많이 의존했습니다. 그들은 스텝을 활용할 줄 알았고, 권한을 위임할 줄도 알았습니다. 반면에 YS나 DJ는 그렇지 못했지요.
도그마는 강해도 위임능력은 뛰어난 YS
넷째, 정치력 확보와 정책의 보호, 그리고 설득력, 믿음입니다. 사람들은 제가 김대중 정부 때 외무부장관으로 입각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겠느냐고 묻습니다. 왜냐하면 김대중 대통령과 제가 추구하는 노선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경우에는 제가 설득하면 듣습니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에는 저와 의견이 80%가 같다고 하더라도 제가 나머지 20%를 설득할 자신이 없습니다. 물론 입각 제의도 없었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정권 초기에는 교수 출신 각료들이 많이 입각하지만 정권 말기로 갈수록 관료 출신 각료들이 많이 입각한다는 것입니다. 김영삼 정부 초기에도 많은 학자들이 각료로 입각했습니다. 안기부장으로 교수 출신 김덕씨, 통일원장관에 한완상씨, 그리고 저 같은 사람들이 일했습니다. 하지만 정부 말기로 갈수록 이들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거의 관료 출신으로 채워집니다. 물론 지금 김대중정부도 관료들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관료 출신 장관들은 윗사람 입맛에 맞게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경제정책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관료들이 정책을 이끌면서 IMF를 초래했는데, 그 관료들이 개혁을 이루어낼 수 있을까요? 그런데도 관료 출신들을 계속 기용하는 것은 윗사람 마음에 들게 일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외부 인사의 입지를 약하게 하고 텃세를 부립니다.
이상과 같이 대통령의 자질과 능력을 살펴보았는데, 이를 대표하는 게 미국의 레이건과 카터 대통령입니다. 레이건 대통령은 머리는 좋지 않았지만 일을 안 하는 듯하면서도 참모들을 잘 활용한 반면, 카터는 머리도 뛰어나고 굉장히 부지런했지만 모든 것을 혼자서 처리하려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이회창 총재는 카터 대통령과 비슷한 스타일입니다. 전직을 무시할 수 없지요.
YS와 DJ를 비교해보면 공통점도 많고 차이점도 많습니다. 공통점은 과거 군사정권의 대통령들이 조직과 스태프를 잘 활용할 줄 알았던 데 반해 이들은 조직적이지 못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수십년간 야당지도자였다는 특징 때문인지 독불장군식이었습니다. 안기부에 언제 끌려갈지 모르기 때문에 메모도 깨알같이 적고, 정치자금을 누가 줬는지 아무도 알 수 없고 자기만 알 수 있게 하는 등 투명하지 못했고, 책임성도 약했습니다. 차이점은 YS는 DJ에 비해 이해가 느리고 도그마적인 측면이 강하지만 위임 능력은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네바협상 때 대통령과 갈등 겪어
시간이 없는 관계로 제가 외무부장관 시절에 했던 일들을 다 말할 수는 없고 몇 가지만 보겠습니다. 먼저, 신외교 5대 기조를 설정했습니다. 이건 외무부 직원 중 머리 좋은 사람들을 뽑아서 주말까지 고심해가면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다섯 가지로 나누는 게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과거엔 아무도 이런 기조를 설정하지 않았었습니다.
다음은 북한 핵문제입니다. 제가 장관으로 있을 때 김영삼 대통령은 일요일 11시가 되면 저에게 전화를 하는 거예요. 그 시각이 되면 항상 어김없이 전화를 했어요. 어느 날인가도 11시에 전화를 해서 “한 장관, 우리가 북한에 너무 약하게 나가는 게 아냐?” 하고 물으시는 거예요. 그 시간이면 교회가 끝나는 시간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어느 목사가 설교할 때 또 뭐라고 했습니까? 목사들 중에는 이북 출신이 많고 반공주의자들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했더니, 김영삼 대통령이 “음, 충청도 출신도 한 명 있는데…”라고 하시는 거예요.
김영삼 대통령도 초기에는 강경파가 아니었습니다. 지난번 YS 강연시 당시 상황이 미국은 전쟁과 가깝고, 자신은 그렇지 않아 클린턴과 긴밀한 전화통화를 했다고 했는데,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당시 전화로 듣고 있었는데…. 핵문제 개입시 YS와 견해가 달라 많은 불화가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정부 내부나 언론, 국회, 정당 등의 반대나 북한의 끊임없는 충동질, 이를테면 대남방송을 통한 김영삼 대통령 비방방송이 제네바 합의 수용을 어렵게 했습니다.
94년 제네바협상에 갔을 때 서울시각으로 6시, 그러니까 제네바 시간으로 한밤중이었는데, 김영삼 대통령과 협상 문제로 갈등을 겪었죠. 전화로 말로 담을 수 없을 만큼의 얘기가 오갔어요. 그러고는 전화를 끊었는데 7시 반쯤에 또 전화가 왔어요. 현철이한테 물어봤는지 누군한테 물어봤는지는 모르겠는데 “한 장관이 발표할 거죠?” 하면서 협상안을 수락했어요. 협상시 우리나라에는 정당·국회 등 모두가 강경했습니다. 특히 당시 국방부장관인 권영해씨도 강경파 중에 한 명이었어요.
그런데 특이한 건 강경론자들은 대통령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 하다가 대통령이 없으면 목소리를 높이는 거예요. 당시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지만 저는 장관직을 걸고 이것만은 처리한다는 생각을 하고 회담에 임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외국인 노동자 복지 문제입니다.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부당한 대우가 끊이지 않는데, 한국에 가면 특히 알아야 할 말을 배울 때 “월급 왜 안 주세요?” “때리지 마세요” 등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을 해결하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질문) 어업협정과 같은 외교정책에서 우리나라는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매우 소극적인 외교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달라이라마 방한 문제와 같이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얽힌 사안에 대해서는 자존심 문제라기보다 서로 주고받는 식의 외교를 했습니다. 예를 들면 대만 대표부의 명칭 문제는 대만대표부를 ‘대사’라고 칭하지는 못했지만 중국의 양해를 구해서 ‘미션’이라고 부르게 했습니다. 이는 어느 나라 대표부에도 없는 명칭입니다.
중국대사를 만나 우리가 노태우정권 당시 대만에 너무 섭섭하게 했기 때문에 이렇게 했노라고 말하고 중국과 북한의 관계나 마찬가지라고 했더니 아무 소리도 못 하더군요.
이것은 제 추측인데 핵문제 때 저희는 중국에 북한을 제재할 경우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을 것을 요구했는데, 중국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을 것임을 북한에 알렸다고 합니다. 물론 저의 요구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양국간의 주고받기식의 외교가 성과를 거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렇듯 여러 이해가 걸린 사항에 대해서는 굴욕외교가 아닌 주고받기 식 외교를 했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대통령과 장관, 대통령과 수석, 장관과 수석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화가 부정적 면만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도 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이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물론 심각한 갈등은 문제가 되지만 어느 정도의 긴장은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제가 장관 재직시 수석과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나는 때때로 대통령과 얘기할 때 수석이 자리를 비켜주도록 건의하기도 했으니까요. 이것은 물론 내가 뭘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상황입니다. 하지만 경험이 있었다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겁니다. 또 다시 한다면 그렇게 하지는 않겠지요.
“총리·장차관·수석들 ‘文民’ 역사의식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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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취임사에도 나와 있지만, 저는 문민 민주정부의 탄생을 민족 중흥의 새 봄이 열리는 것으로 봤습니다. 유례없는 압축적인 산업화를 이룩한 터전 위에서 30여 년의 군사문화를 청산하고 마침내 문민정부를 우리 손으로 세울 수 있었다는 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 없었고, 산업화를 이룩한 근대화 세력과 민주화를 이룩한 도덕적 세력이 힘을 합한다면 위대한 한민족 시대를 열 수 있다는 꿈에 사로 잡혔습니다. 그런 내용을 대통령 연설문이나 담화, 그리고 제가 참여해서 기초한 취임사에 절절하게 담았습니다.
김영삼 정부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구됐던 시대적 소명이라면 군사문화의 청산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문민정부 탄생이야말로 광복 이후 정치사에서 건국에 버금가는 이슈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군사문화의 청산이 쉬웠던 건 아닙니다. 제가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가끔 들었지만, 어떤 때는 밤에 잠이 안 온다는 거예요. 예컨대 군인사를 해야 하겠는데 과연 이걸 할 건가 말 건가, 하면 어떤 결과가 올 것인가 때문에 잠이 안 오더라는 겁니다. 그렇게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아침에 조깅하면서 ‘그래도 해야지’ 이런 비장한 각오로 대변인을 불러 지시를 내렸습니다. 당시 내가 식당에서 경호실장이나 차장과 점심식사를 하면, 이런 군인사가 있을 때마다 경호실은 초긴장을 했다고 합니다. 전 직원이 밤을 새우고, 그만큼 경호 부담이 늘어났다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많은 비판이 있었지만 김영삼 정부가 군사 정치문화의 청산이라는 자기에게 주어진 역사적 소명을 성실하게 다하지 않았느냐,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바로 그 덕분에 그 후 국민의 정부도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점은 제대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 취임사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우리의 나쁜 병폐,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의 그릇된 관행과 타성, 제도와 의식, 거품과 허세, 그리고 그것 때문에 오는 좌절감 등을 일컬어서 한마디로 한국병이라고 규정하고, 한국병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변화와 개혁이 불가피하다고 역설했습니다.
이 취임사의 내용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 기초에 참여했다고 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14대 대통령 취임사는 아주 잘된 겁니다. 현실인식이 정확했고,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도 비교적 정확하게 짚고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취임사에서는 또 국민에게 고통 분담을 호소했습니다. 아마 대통령 취임사에서 국민에게 고통 분담을 요구한 경우는 일찍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YS식 개혁의 특징과 한계
이렇게 취임사에서는 장엄하게 개혁을 언급했지만, 사실 개혁이 그에 걸맞게 체계적으로 이뤄졌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대통령의 결단에 따라서 폭탄처럼, 파편적으로 전개됐습니다. 그런 점에서 문민정부 초기의 개혁은 대통령에 의한 개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통령이 개혁안을 발표할 때마다 국민은 열화 같은 성원과 지지를 보냈고, 대통령에 대한 지지는 천정부지로 올라갔습니다.
김대통령은 취임 직후 “나는 지금 이 순간부터 경제인들에게 단 10원의 정치자금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대목을 소홀하게 취급하고 있지만, 이건 엄청난 결단이었고 당시로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선언이었습니다. 그 뒤에 밝혀졌지만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이 기업들로부터 수천억 원씩 챙긴 건 보통이었고, 퇴임하는 장관이나 수석을 불러다가 수억 원씩 줬다고 해요.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이 정치자금을 안 받겠다고 선언한 뒤로는 그런 일이 모두 없어졌어요. 물러나는 사람도 대통령에게서 뭘 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대통령도 줄 생각을 하지 않고, 이렇게 공직사회의 패턴이 완전히 달라진 겁니다.
당시에 제가 재벌들을 만난 일이 있는데, 진짜 안 받느냐고 물어요. 사실이라고 대답하니까 오히려 당황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돈 주고 공사도 따내야 하는데 돈을 안 받겠다고 하니까 어떡하라는 말이냐, 이러는 거예요.
아무튼 이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선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는 확신하거니와 김영삼 대통령은 이 약속을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당신 아들이나 측근들까지 이 약속을 지키도록 철저하게 챙기지 못한 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지 적어도 대통령 자신만큼은 임기 말까지 그 약속을 지켰다고 믿습니다.
1994년 8월13일에는 금융실명제 실시를 전격 발표했습니다. 그 일주일 전쯤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올라갔더니 금융실명제를 준비하던 팀이 마련한 담화문 초안을 내게 주셔서 제가 새로 썼습니다. 아시다시피 금융실명제는 전두환 정권 때에도 하려고 했다가 워낙 반대가 심해서 못 했던 겁니다. 이것을 김영삼 대통령이 하겠다고 했을 때 나는 “이건 이 분이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담화문의 서두를 이렇게 썼습니다. “드디어 우리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합니다.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집니다”라고 썼어요. 내가 이걸 쓸 때 새 역사가 시작된다는 흥분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김영삼 대통령도 상당히 오랫동안 금융실명제야말로 개혁 중에 개혁이요 우리 시대 개혁의 중추이자 핵심이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시행했던 금융실명제가 유감스럽게도 일반 법령으로 바뀌어서 제도적으로 정착되지 못한 채 문민정부 마감과 함께 유보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매우 안타까울 뿐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문민정부 시대의 개혁은 사실 체계적이라기보다는 대통령 결단에 의해서 단발적으로 이루어졌어요. 대통령이 비밀리에 준비해 기습적으로 발표했기 때문에 그만큼 충격적 위력이 있었고, 그것이 또 개혁의 한계이기도 했습니다. 대통령중심제하에서는 대통령의 성격과 스타일, 품성에 따라 국정운영의 내용과 모습이 달라집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특징이라면 스스로 모든 걸 솔선하고, 책임도 자신이 지겠다, 이런 특징 때문에 군인사라든지, 재산공개, 금융실명제 같은 것들을 과감하게 할 수도 있었지만 개혁을 체계적으로 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닌 것도 사실입니다.
민주화운동 탄압하던 사람들 여전히 득세
문민정부가 출범할 때 저는 엄청난 개혁을 체계적이고 논리적·지속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신한국위원회와 같은 개혁 총괄기구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근대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갈등과 알력이 있는데 이걸 어떻게 조화하느냐, 또 누구를 신한국위원회의 멤버로 하느냐에 따라서 개혁의 내용과 방향이 설정되기 때문에 이걸 상당히 두려워했던 게 아닌가. 그래서 신한국위원회는 결국 구성되지 않았고, 따라서 그 이후 문민정부의 개혁이 유기적인 시스템에 의해서 전개되기보다는 대통령에 의해서 파편화된 개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부연한다면, 개혁은 도덕적인 힘으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덕적 힘이 있을 때 개혁이 가능하고, 국민의 지지와 신뢰를 받으면서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금융실명제 발표 때까지 그나마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나는 정치자금을 한 푼도 안 받겠다, 내가 먼저 재산공개를 한다”는 이런 도덕적인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대통령이 임기를 얼마 남기지 않았을 때 제가 청와대에 들어갈 일이 있었는데, 그때 마침 금융실명제를 유보하는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돼서 대통령의 결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금융실명제 담화문을 기초한 저로서도 거기에 애착이 있었고, 또 대통령이 개혁 중의 개혁이라면서 그토록 집착했던 금융실명제를 유보하는 법안에 자기 손으로 서명해야 한다는 게 참 괴롭겠다 싶어서 “그 신념에 변함이 없다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겠느냐”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은 “내가 거부권을 행사한다고 해서 국회가 들어주겠느냐” 그러면서 체념 상태였습니다. 그때는 김현철 사건이 터지고 IMF사태가 터지고, 그래서 도덕적 힘이 다 빠져버렸을 때입니다. 국회의원 수가 아무리 많아도 소용없어요.
저는 공보수석은 아니었지만 가끔 대통령의 부름을 받아서 이런저런 연설문을 쓰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제가 의도했던 것은, 문민정부의 정통성을 민족·민주 위에 확실하게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93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 닷새쯤 전에 대통령이 이에 관한 담화를 발표했는데, 거기서 저는 “문민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 있는 민주정부”라고 썼습니다. 또 그 해 8월에 박은식 선생을 비롯해서 임정요인들의 유해가 상해에서 봉환되어 국립묘지에 묻혔는데, 그때에도 저는 “문민정부는 임시정부의 법통, 문민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고 담화에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국민의 정부나 문민정부나 마찬가지인데, 국민의 정부는 확고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민주화의 대의를 분명하게 세우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지, 저는 이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물론 김영삼 정부의 한계는 3당 합당입니다. 그러나 3당 합당을 통해서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해도 그 원칙은 세워야 하했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근대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원칙 없는 야합이 아니라, 정의와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한 진정한 화해의 장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지금도 아쉽고 후회스러운 것 중에 하나입니다.
화해는 야합이 아니라 반성과 통회, 용서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새롭게 출발하는 악수여야 합니다. 두 세력이 힘을 합치더라도 도덕적 힘을 가진 민주화 세력이 주체가 되고, 전문가 집단이라 할 근대화 세력이 전문성을 펼치도록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원칙이 확립되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지금도 똑같지만 민주화운동 시절에 탄압하던 사람들이 여전히 득세하고 있고, 민주화가 됐는데도 반성하거나 자신의 죄를 고백한 일이 없어요. 그때도 어물쩡 넘어가는 식이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이게 과연 옳은 일이냐는 겁니다. 그래서 당시에도 어떻게 하면 이런 것을 바로 세울 수 있을까 많은 고뇌를 했지만, 벽이 워낙 두꺼웠고 저희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통령과 교감하는 것에 그쳤을 뿐 이걸 체계적으로 확립하지 못한 것이 지금도 아쉽고 후회스럽습니다.
YS만이 할 수 있는 일
저는 재임하는 동안 이른바 보수진영으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렸는데, 저를 공격한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런 사람들의 역사성을 보면 대체로 반민족·반민주·반통일이라는 동질성을 가지고 있어요. 민주화세력이 중심이 되어서 정국이 운영되거나 역사가 나아간다면 자기네가 받을지 모르는 불이익, 피해, 자기네가 저지른 범죄에 극히 민감했고, 그래서 저를 공격한 수법이라는 게 아주 모략적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어느 날 갑자기 밑도끝도없이 아무개는 빨갱이다, 그러니까 빨갱이가 아니라는 걸 입증할 책임은 너에게 있다, 이러는 겁니다. 어떤 때에는 어떻게 대응해볼 수도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상 문민정부가 민족·민주라는 역사의식이 투철하지 못했던 데에 기인합니다. 제 생각을 솔직하게 말한다면, 문민정부 아래서 총리, 장·차관, 수석을 했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문민정부의 역사적 성격과 소명이 무엇인지 철저하게 깨닫고 있던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대통령도 마찬가집니다. 문민정부가 어떤 성격을 가진 정권이냐에 대해서 확실한 소명의식이나 철학·인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말만 문민정부였지 문민적 성격이라는 것이 실질적으로 있는지, ‘이게 문민이다’라고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게 없었다는 얘깁니다.
앞에서 단편적으로 얘기했지만 문민정부가 12·12와 5·18 진상을 규명하고, 거기에 관여했던 사람들을 법정에 세워 단죄한 것은 아마 김영삼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하지 못했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국민의 정부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제가 단언하거니와, 못합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못하는 일입니다.
94년 8월경 민정수석실에서 12·12와 5·18의 공소시효가 94년 8월13일에 끝난다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전두환 정권이나 노태우 정권 때에는 누가 이 문제를 제기할 수 없지 않았느냐, 그 기간을 빼고 공소시효를 결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 이 때 5·18 관련자와 유가족들이 공소시효 산정이 잘못돼 있으니 새로 산정해달라는 소송을 헌법재판소에 제기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헌법재판소 판결로 94년 8월이 아니라 95년으로 1년쯤 더 연장됐습니다. 그 무렵에 허삼수, 허화평 등 5·18 핵심세력이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5·18, 12·12를 규명하자는 사람도 없었고, 그런 의식도 없었어요.
그런데 공소시효 만기는 되어 가고, 그래서 제가 어느 날 대통령을 찾아가서 “이거 기소합시다”고 말했어요. 대통령 말씀이 “민주당에 국회의원들도 있는데,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할 거냐” 이러세요. 제가 “헌법에는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올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되기 때문에 굳이 구속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조사는 철저하게 하자. 그래서 법정에 세워서 단죄하자. 95년이 광복 50주년 아닙니까? 우리는 이제까지 미움과 갈등의 50년을 살아왔다. 그러나 앞으로는 화해와 협력의 시대로 나아가자고 제안하면서 대통령께서 대규모 일반사면권을 발동하면 진실도 규명하고 화합도 이룰 수 있지 않으냐” 대충 이런 말씀을 드렸어요.
그때 전반적인 분위기는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기껏해야 ‘미흡한 부분은 훗날 역사에 맡기자’는 정도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유가족들이 광주민주화운동에 관련된 신군부 쪽 사람 58명을 고발했는데, 검찰이 조사한 뒤에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해괴한 결론을 내린 일이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게 어떻게 해서 단죄가 됐느냐, 엉뚱하게도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터지고 전두환 비자금도 있다는 얘기가 돌면서 국민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 올라갔고, 이에 따라 특별법을 제정해서 처리됐습니다. 제가 대통령께 제안했을 때 했더라면 특별법을 제정할 필요도 없었어요. 그때는 공소시효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검찰이 기소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사실 정치보복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소급입법은 가급적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특별법을 제정해서 5·18과 12·12사태의 진상규명을 한 것은 잘한 일이지만, 정도에 따라서 처리한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공소시효를 훨씬 넘긴 뒤에 특별법 제정이라는 방식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정치가 공자 말씀처럼 대의명분을 실현하는 것이라면 문민정부가 그런 대의명분에 입각해서 확실하게 일을 처리하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눈물 핑 돈 대통령
자칫 제 자랑이 되겠습니다만 교문사회 수석비서관으로서 제가 한 일을 몇 가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문(文)에 해당되는 분야는 거의 제가 담당했습니다. 교육·문화·체육·보건·사회·환경·여성·사회 일반을 담당했는데, 그러니까 경제와 안보를 제외한 전 영역입니다. 부처로는 6개쯤 됩니다.
저에게 주어진 첫 과제는 교육재정을 GNP 대비 5%로 확충하는 일이었는데, 이게 대통령 공약사항이었어요. 경제부처라는 게 굉장히 인색하고, 경제적 이해에서 벗어나는 것은 모두 비효율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과 싸우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니에요. 그러나 저는 그때 역사상 처음으로 GNP 대비 교육 5%의 예산을 확보했습니다. 최근 들어서 교육예산이 다시 줄었다고 해서 저는 불만인데, 그만큼 긴장감을 가지고 경제부처 사람들과 싸우지 않으면 예산확보가 참 어렵습니다.
다음으로 1만5000명에 달하는 전교조 해직교사들을 복직시켰습니다. 이건 대통령 공약사항이 아니었지만, 김대통령이 당선자 시절에 제가 대통령을 한번 만난 기회에 해직 교사들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실직 교사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듣고 대통령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데 눈물이 비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수석비서관이 된 뒤에 대통령이 해직교사 복직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고, 실제로 그 일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해직교사들 거의가 복직됐습니다.
사실 정부 내부에서는 ‘전교조는 사상적으로 의심스럽고 거칠다’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었습니다. 전교조 쪽에서도 어느 정도 양보할 것은 양보해야 하는데 대부분은 그렇게 못합니다. 조직 내부의 지도력이랄까 이런 것 때문에 경쟁적으로 강경해지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 사람들도 압니다. 자기네가 조금만 양보하면 정부 안에서 우리 같은 사람들 입지가 강화되어서 더 많은 사람이 복직될 수 있다는 것을. 노동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동운동 지도자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잘 압니다. 그런데 조직 내의 지도력 때문에 본의 아니게 강경론을 들고 나오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아무튼 그러다 보니까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죽을 지경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정부나 이런 세력이 올바른 길로 가려면 진정한 사쿠라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가 잘 되려면 그런 용기있고 건강한 사쿠라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지금 많은 지탄을 받지만, 저는 그분이 대통령으로서 장점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김영삼 대통령은 자기 자신에게 대단히 엄격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 같지만, 가령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아침에 조깅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기 책임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사과문을 제가 썼어요. 사실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은 ‘빨리빨리’가 흐름이었던 전 정권시절에 지어진 불가피한 산물이지 엄밀하게 보면 문민정부가 책임질 일은 아닙니다.
그런 문제가 터질 때마다 김대통령은 우리가 잘못한 일이니까 사과성명을 쓰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상당히 솔직하고 담대한 분입니다.
군사문화의 죄악 중 첫번째는…
나는 김영삼 대통령이 지도자로서 훌륭한 자질과 좋은 덕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민이 한때나마 그렇게 환호했던 것도 그런 자질과 덕목이 발휘됐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지금은 대부분 사람들이 잘못 뽑았다고 하는데, 적어도 제가 보기에 그때는 잘못 뽑은 게 아니었습니다.
물론 김영삼 대통령도 반성할 점은 반성해야 합니다. 대통령에서 물러나기 얼마 전에 제가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퇴임하면 아마 대통령께서 상상하지도 못하는, 인간사회라는 게 이런 거라는 걸 느끼시게 될 거다. 당신 손으로 임명한 사람들이 당신에게 등을 돌리고 어떻게 얘기하고 다닐 것인지, 그런 걸 지금 준비하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IMF니 뭐니 했을 때 YS를 변호하고 나선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지금은 철저하게 외로워지는 게 당신의 업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는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뵐 때마다 어른답게 처신해 주시기를 간곡하게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언론과 국민도 너무 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 손으로 뽑은 대통령인데, 그 대통령을 모멸하면 자기를 부정하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어쨌든 이 땅에 문민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대통령이고, 유일하게 정통성을 가진 정부의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리고 법적으로도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하자 없이 예우를 받아야 할 대통령입니다.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의 경우에는 실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에 법률상 대통령 예우를 받을 수 없게 됐습니다. 그런 것까지 따지지는 않더라도 법원의 확정판결로 나온 추징금을 내지 않으려고 비굴하게 아첨하는, 그런 대통령들과는 구별해서 김영삼 대통령을 봐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질문) 오랫동안 재야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국정에 참여한 분으로서, 나에게 이런 게 부족하구나 하고 느낀 게 있었습니까?
“많지요. 나는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과 군사 정치문화가 저지른 죄악 중에서도 가장 큰 것으로, 민족의 발전과 인류 문화의 증대에 기여할 수 있는 수많은 인력을 반독재 투쟁으로 소진시킨 데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사실 국정을 맡으면서 우리의 경륜과 시야가 너무 좁다는 것, 자만일지 모르지만 저는 다른 사람에 비해서 국정에 그렇게 어두운 편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일반적으로 재야 출신 국회의원들은 시야가 좁습니다. 우리 공동체가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안 했다는 겁니다. 우선 가장 급한 것이 반독재 투쟁이었으니까. 그런 사람들 논리는 단순합니다.
가령 농민운동을 한 사람은 농지를 전용하거나 담보로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농촌이 잘되려면 농촌에 도시 자본이 들어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농민운동을 한 사람들은 농촌에 도시자본이 들어가면 농민을 잡아먹는 걸로 생각합니다. 그런 편협한 고집 같은 게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더 넓은 세계를 향해서 더 높은 꿈을 가지고 공부해야 합니다.”
“YS 5년과 박정희 18년 단순비교는 곤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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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서울대 농대에서 농업경제학을 공부하고 77년에 미국에서 농업경제학 학위를 받고 돌아와 농촌경제연구원에 줄곧 있다가, 1993년 12월23일 청와대 농수산 수석으로 들어갔습니다. 농정 분야의 연구에 20여 년간 종사하다가 처음으로 직장을 옮긴 곳이 청와대가 된 겁니다. 제가 자리를 옮길 당시에 청와대에는 그런 직제가 없었습니다. 대통령 비서실 역사상 전무후무한 경우인데, 농수산 수석비서라는 자리가 신설돼 최초의 수석 비서관으로서 대통령 임기가 끝날 때 함께 청와대를 나왔습니다.
대통령을 모시고 국정의 권부에서 4년2개월을 생활한 것은 독특한 경험이었고, 저한테는 대단히 소중한 자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동시에 대통령의 참모로서 괴로운 시간이었고, 나와서도 그렇습니다. 특히 97년 외환위기를 맞은 것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역사 앞에서 사죄하면서 죄송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고, 최측근에서 대통령을 모셨던 수석으로서 책임과 소임을 다 했는가, 좀더 잘할 수 없었는가 반성할 부분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 경험을 오늘 여러분과 솔직하게 나눠보고 싶습니다.
대통령·장관·수석의 3각관계
먼저 대통령의 참모로서 수석 비서관은 실질적으로 어떤 일을 하느냐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첫째로, 대통령의 정책을 보좌하는 기능입니다. 해당 분야의 정책에 대해서 지금 어떻게 추진하고 있고, 무엇을 할 것이며, 앞으로 예상되는 문제가 무엇이며, 주변 이해 당사자들은 뭐라고 얘기하고 있고, 여론이 어떻고, 이런 정책을 둘러싼 모든 동향을 평가해서 보고하는 일입니다.
둘째는 대안을 제시하는 기능입니다. 대안은 원래 장관이 검토하는 것이지만, 수석이 대통령에게 이런 저런 건의를 함으로써 대통령이 장관에게 지시하도록 하는 역할을 뒤에서 하는 겁니다. 말하자면 정책을 기획하고 건의하고, 정책개발에서도 중요한 기능을 합니다. 그러나 수석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전혀 없고, 대통령이나 장관의 이름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컨대 대통령-장관-수석의 3각관계를 군대개념으로 본다면 대통령은 총사령관, 장관은 야전군 사령관, 수석은 참모본부에서 총사령관을 보좌하는 작전참모장입니다.
그런데 이런 정책보좌 기능으로 인해서 미묘한 문제가 발생하곤 합니다. 장관과 수석의 관계가 삐그덕거리기 시작하면 대통령과 장관의 관계, 대통령과 수석의 관계가 불편해지고, 그것이 국정에 큰 혼란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셋째로는 대통령의 비서 기능이 있습니다. 대통령은 각종 행사를 열고, 사람을 만나고, 외국에 나가면 연설문을 읽고, 기자회견을 해야 하고, 각료에게 지시를 해야 하고, 이런 일체의 활동과 관련해서 대통령의 발언을 집필하는 사람이 수석입니다. 한마디로 대통령의 머리와 입 노릇을 한다고 보면 됩니다.
다음으로, 부처간 갈등이 일어날 때 수석의 정책조정 기능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청와대가 정책갈등을 조정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데는 없습니다. 또 어떤 정책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점검하고 문제점을 확인하고, 다른 부처의 협조를 구하는 일을 합니다. 예컨대 대통령이 아무리 문화정책을 강조해도 기획예산처에서 예산을 잘라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럴 때 청와대가 개입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양한 이해당사자 그룹을 만나서 대통령의 뜻을 전달하고, 그들의 불만을 경청해서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가교 구실을 합니다. 국정수행에서 윤활유 같은 구실을 하는 것이지요.
이건 개인적인 얘기인데, 청와대 생활을 하면 몸무게가 늘 수밖에 없습니다. 운동은 못 하는데 아침, 점심, 저녁에 사람을 만나서 식사를 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이 평생에 한 번 수석과 만날 약속을 해서 의사를 전달하고 로비를 합니다. 그 사람들은 평생에 한 번이지만 저야 매일 하는 일이잖아요. 그것을 소홀히 할 수도 없으니까 좋은 음식점에서 만나게 되고, 그러면 좋은 음식을 먹게 되고, 그래서 체력관리를 안 하면 비만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생활이 불규칙해요. 사실 사람들 만나는 일처럼 피곤한 일이 없습니다. 만나서 우는 소리도 들어야 하고, 부탁이 있고, 청탁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비협조적인 사람을 윽박지르기도 하고, 그렇게 해나갑니다.
제 생각에 청와대 참모들이 가져야 할 제1의 자질은 대통령과의 의사소통 능력이라고 봅니다. 대통령은 5분, 15분, 20분 단위로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고 회의를 주재해야 합니다. 공식 일정에서 수석과의 면담시간은 잡혀 있지 않아요. 그러면 수석이 대통령을 만나서 보고하는 일은 공식일정을 비집고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보고 시간이 1, 2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사안에 따라서는 여유있게 보고하는 일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짧은 시간 안에 보고하고 대통령의 결심을 얻어내려면 의사소통능력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수석은 또 담당 정책 분야의 최신 정보를 갖고 있어야 하고, 그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해야 합니다. 대통령에게 들어가는 정보채널은 해당 수석뿐만 아니라 국정원, 민정, 다른 수석실, 민간 등등 여러 경로에서 고급 정보가 들어갑니다. 따라서 가장 최신의 고급정보를 장악해서 보고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임명장 받고 곧바로 데모에 참가
저는 1993년 12월23일에 임명장을 받았습니다. 당시 우루과이 라운드가 그 며칠 전인 12월15일에 타결됐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쌀은 대단히 민감한 정치재거든요. 대통령은 선거공약에서 당신의 직을 걸고라도 쌀시장 개방을 막겠다고 했는데, 이제 그게 엄청난 부담이 돼버린 겁니다. 김영삼 대통령으로서는 당시 UR 정국을 수습해야 하는데 주변에 전문가도 없고, 그래서 청와대에 사상 초유의 농수산 수석비서관 자리가 생겨나게 된 겁니다.
이제 제가 담당했던 몇 가지 사례를 들어서 대통령과 수석의 관계, 수석과 수석의 관계, 장관과 수석의 관계가 어떻게 갈등을 일으키고, 어떻게 풀어가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청와대에 들어간 뒤 UR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서 대통령 직속의 농어촌발전위원회를 구성해서 농정 쇄신방안을 마련한다는 것이 결정됐습니다. 거기에 따라 94년 2월1일 위원회를 발족시키기로 돼 있었는데, 1월28일 대통령이 저를 부르셨습니다.
이번에 구성되는 농어촌발전위원회 위원장으로 이 사람이 좋겠다면서 이력서를 꺼내주시는 겁니다. 이력서를 보니 제가 잘 아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제가 “이분은 적격자가 아닙니다”라고 그 자리에서 거절했어요. 제가 직업 공무원이었다면 그런 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검토해보겠습니다’ 그랬겠지요. 그런데 저는 그 자리에서 거절했습니다.
대통령도 황당하셨던지 한참 동안 말씀을 안 하시다가, 이유가 뭐냐고 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대통령께서 “그러면 수석이 책임지고 사람을 골라라” 이렇게 됐습니다. 그게 제가 수석으로 2개월쯤 됐을 때 일입니다. 아무튼 우여곡절을 거쳐서 제가 추천한 사람으로 인사가 무난하게 마무리됐는데, 인사 문제에서 대통령과 갈등이 있을 때 전문가가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에 대한 하나의 사례라고 봅니다.
그 다음, 농촌발전위원회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저는 과거 정부에서 탄압받던 재야 농민단체들, 언필칭 좌익으로 분류됐던 사람들을 위원으로 위촉했습니다. 지금까지 대통령 직속으로 많은 자문기구가 있었지만 30명 전원이 민간인으로만 구성된 위원회는 농촌발전위원회가 유일할 겁니다. 순수 민간인으로만 구성하고 정부 관료를 배제함으로써 저와 정부부처 사이에 갈등이 대단했습니다. 그렇게 2월1일에 임명장을 수여했습니다.
그런데 위원으로 위촉된 농민단체 대표들이 임명장을 받고 나서 그 길로 UR 재협상을 요구하는 데모에 나갔다가 경찰에 잡혀가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이것이 청와대로 보고가 들어오고, 대통령이 UR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서 위원회를 구성했는데 그 위원들이 난리를 치는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더구나 위원회를 구성하는 과정에 정부 안대로 원만하게 타협했으면 좀 나았을 텐데 말입니다.
2월5일에 대통령 수석비서관 회의석상에서 민정수석과 행정수석이 이 문제를 거론하면서 “이거 큰일났다. 농발위가 잘못 구성되어서 이런 문제가 생겼는데 이걸 앞으로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걱정스럽다”는 보고를 대통령에게 했습니다. 제 앞에서.
이게 수석과 수석 간의 문제가 어떻게 처리되느냐, 갈등이 일어나느냐 이런 건데, 대통령 앞에서 그런 논쟁이 붙게 된다는 얘깁니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 농정분야가 가장 어려움을 겪었는데 농민들을 대변하는 단체의 대표자를 포함시키지 않는 대통령 농정자문기구라는 것은 과거와 똑같은 관변단체를 또 하나 만드는 것일 뿐이므로 문민정부의 원래 취지에 맞지 않는다고 본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위원으로 임명한 것이고, 나는 그것이 정당하다고 본다” 이렇게 대통령 앞에서 수석들끼리 충돌이 일어난 겁니다.
이걸 수습할 사람은 대통령밖에 없습니다. 결국 대통령이 누구 손을 들어주느냐 하는 겁니다. “이 부분은 농정수석 말이 옳으니까 더 이상 위원회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말라”는 한마디로 시끄럽던 이야기가 조용해졌습니다. 만약 그때 대통령이 그런 판결을 내리지 않고 제가 꺾였다면 바로 그만뒀겠지요.
민정수석이 사전에 저한테 귀띔이라도 해줬더라면 좀 나았을 텐데, 상상도 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불시에 논쟁이 벌어진 겁니다. 각 수석들이 대통령에게 어떤 내용을 보고할지는 수석들 재량입니다. 또 수석들간에도 서열이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민정수석의 파워가 가장 셉니다.
쌀값 잣대론
제가 대통령 앞에서 다른 수석과 정면으로 충돌한 또 다른 사례로 쌀값 문제가 있습니다. 과거 우리 나라에서는 물가안정을 위해서 쌀값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게 버릇처럼 돼 있었습니다. 제 신념은 그건 시장경제 원리에 정면으로 위배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는데, 50∼60년대에는 우리 경제에서 쌀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컸기 때문에 정부가 쌀값을 통제하는 게 습관이 됐습니다. 그런데 경제수석은 UR 이후에도 여전히 그렇게 하겠다는 것에 대해서 제가 정면으로 제동을 건 겁니다.
제가 그때 논리를 펴면서 쓴 용어가 ‘쌀값잣대론’이라는 겁니다. “50∼60년대는 쌀값이 노동자 임금을 결정하는 잣대였다. 과거 기록을 보면 임금협상의 가장 중요한 논거 중 하나가 쌀값이 올랐으니 임금을 올리라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어떤 노동자라도 하루 노동을 나가면 3만∼5만원을 받게 되고, 3만5000원만 받으면 3인 가족 한 달분 쌀을 살 수 있다. 그러면 더 이상 시장경제에서 쌀값은 임금을 결정하는 잣대 구실을 할 수 없지 않으냐. 그렇다면 이제는 더 이상 쌀값을 잣대로 써서는 안 된다” 이런 이론논쟁이 붙었습니다.
결국 대통령이 경제수석에게 “이제는 쌀 문제에 신축적으로 대응했으면 좋겠다, 옛날처럼 통제하는 정책을 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려 제 손을 들어줬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 나라 쌀의 경쟁체제가 가능해지고 각종 브랜드가 나오게 된 배경입니다. 지금 쌀값이 어떻게 되는지 걱정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지역별로 더 좋은 쌀을 만들기 위해서 경쟁하고, 소포장으로 팔고, 지금 우리 농산물 중에 쌀처럼 시장자유경쟁 체제로 전환한 상품이 없습니다. 그 전기가 거기서 마련된 겁니다.
기술 참모들은 담당 사안을 대통령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끔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경우에는 수요가 어떻고 하는 얘기는 필요없고, 쌀값 잣대론이라는 얘기로 다 설명이 된 거지요. 그런 점에서 다시 말하지만 수석에게는 의사소통능력, 대통령에게 복잡한 얘기를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쌀 문제와 관련해서 대통령께서 굉장히 고민했다는 건 여러분이 잘 아실 거예요. 쌀시장개방을 도저히 막을 길이 없다는 걸 아셨기 때문에 이걸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결국 대통령이 나설 수밖에 없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우리 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 사이에 대화가 필요하다, 이 건의를 제가 청와대 수석이 되기 전인 농경연 부원장 시절에 국무총리 자문에 응하는 형식으로 제기했는데, 이 얘기가 쌀전략 수립에 중요한 기초가 됐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이 쌀시장 개방 협상과정에 직접 개입함으로써 제네바 협상장에서는 ‘한국이 협상을 가장 잘했다, 가장 유리한 조건으로 쌀시장 개방을 협상했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당시 한국의 쌀시장 개방조건이 발표된 뒤에 일본이 기겁을 해서 당시 하시모토 외무장관이 제네바까지 와서 가트 사무총장에게 항의하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이건 클린턴과 김대통령 사이에 합의된 일이니까 재론할 수 없다, 이렇게 해서 한국이 쌀시장 개방에서 가장 유리한 조건을 얻는 데 대통령께서 역할을 하신 겁니다.
몇 가지 사안을 말씀드렸지만, 대통령이 각 분야별로 수석과 참모를 둔다는 것은 전문가들을 둔다는 뜻이고, 이는 다시 말해 고도의 전문적인 판단을 요하는 분야에서는 수석들이 대통령의 이름으로 사안을 주도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특정 전문 분야에서 일일이 대통령에게 ‘어찌하오리까’ ‘결심해 주십시오’ 한다면, 이건 수석이 대통령을 잘못 모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경우에 따라서는 수석이 ‘이렇게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십시오’ ‘이렇게 해주셔야 합니다’라고 건의를 합니다. 그런 건의를 올릴 때는 내일이라도 그 자리를 그만둔다는 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작은 청와대’ 주장은 난센스
수석은 매우 힘든 자리입니다. 끊임없이 감시를 당해요.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모시기 때문에 경호실에서 도청하고, 어디서 누구를 만나고 다니는지 끊임없이 추적당합니다.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면, 차지철씨가 어떻게 청와대를 장악하게 됐느냐, 어느 날 갑자기 비서실에서 대통령께 보고하는 모든 문서는 경호실을 경유하라고 한 겁니다. 문서에 혹시 독가루가 묻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사전에 점검하겠다, 이렇게 경호상 이유로 모든 문서를 검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면서 모든 정보를 장악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건 대통령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일이기 때문에 막을 방법이 없어요.
다음으로 지적할 것은 대통령 참모들의 자리가 안정되지 않는 데에서 오는 문제입니다. 장관, 비서실장, 수석들이 수시로 바뀌는 문젭니다. 대체로 수명이 1년 정도니까 그 1년 안에 장관으로서 족적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는 겁니다. 대통령의 국정 5년을 관리하는 일원이 아닌 그 1년만 생각하고 앞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얘기지요. 그러다 보니 원칙이 무너지고 일관성이 없어집니다. 사실 임기 5년인 대통령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5년 내내 대통령과 함께 원칙과 철학, 비전을 공유하면서 한 팀이 되어서 일하는 사람이 없다는 점입니다. 5년 동안 대통령과 책임을 공유한다는 의식을 가진 사람이 구조적으로 존재하지 않아요.
예컨대 제가 청와대에 있으면서 경제 수석이 자주 바뀌었습니다. 그때 제가 한 일 중 하나가 신임 경제수석이 부임하면 정권 출범 당시에 만들었던 신경제 5개년 계획을 챙겨주고, 그래서 지금 하는 일과 초기에 천명했던 내용에 일관성이 있는지 따져보라고 권유한 일입니다. 또 새로 임명된 장관을 만나면 그때까지 대통령이 농정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 연설문, 어록 자료를 챙겨주는 일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책임 있는 국정을 위해서는 대통령 참모에 대한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고 봐요. 장관을 지금처럼 자주 교체하는 전통은 박정희 시대에 생겨났는데, 장기 독재체제에서 참모는 대통령과 임기를 함께하는 팀이 아니라 정치적인 소모품입니다. 데모가 일어나고 무슨 일이 생기면 장관을 교체함으로써 국정을 수습하고 쇄신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무슨 문제가 생기면 당장 장관 바꾸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물론 장관들은 야전군 사령관이니까 소모품의 기능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정도가 지나쳐요.
제가 자주 쓰는 말로 ‘비교의 오류’라는 게 있는데, 민주주의에서 임기 5년의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임기도 없는 박정희 독재정부의 18년 업적과 단순 비교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비교할 수 없는 대상을 비교해서 고려대 신문에서 발표했어요. 가장 복제하고 싶은 인간은 박정희, 복제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YS, 이게 비교의 오류입니다. 비교하려면 예컨대 박정희 정권 초기 5년을 YS 5년과 비교하든지 해야 하는데, 18년과 5년을 어떻게 비교합니까?
더욱이 박정희는 모든 국가조직을 완벽하게 장악해서 수족으로 썼습니다. 그러나 제가 청와대에 들어가봤더니 그때까지 컴퓨터를 286급으로 쓰고 있었어요. 사실 독재정권하에서 청와대는 지시만 내리고 보고만 받으면 되니까 자기가 직접 움직여서 무엇을 만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산이 필요없고, 사람을 만나도 조사 비용도 필요없고, 인건비가 필요없어요.
그런데 이제는 정부 산하조직이 옛날처럼 대통령의 수족 기능을 하지 못한다 이겁니다. 옛날에는 대통령 예산을 각 부처의 기획예산 파트에서 담당했습니다. 대통령 관련 행사는 그 부처에서 집행했으니까 청와대 자체 예산은 필요없었어요. 그러나 이제는 모든 기획과 비용을 청와대에서 부담해주지 않으면 관계 부처가 싫어합니다.
예컨대 대통령이 지방 행사에 나가서 금일봉을 주는데, 옛날에는 그 예산이 각 부처에서 나갔지만 지금은 청와대에서 줄 돈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YS는 주는 게 없다는 얘기가 나왔던 겁니다. 바로 이런 예산구조부터 달라져야 하고, 민주체제에서 새로운 비서실을 구축해야 하는데, 아직도 사람들은 작은 비서실, 작은 청와대, 이런 얘기들을 합니다. 그건 제가 보기에 난센스예요.
“YS는 무식한 대통령 아니다”
김영삼 정부의 농정을 흔히 실패했다고 하지만, 사실 그 때 농정의 패러다임이 전반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런 부분은 훗날 역사가 다시 평가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정책의 효과라는 것은 시차를 갖고 나타나기 때문에 재임기간에는 나타나는 게 거의 없습니다. 그렇지만 YS시절에 농업 관련 법 70여 가지가 다 고쳐지고 새로운 법이 도입되는 등 정책의 기본틀이 재정립되는 시점이었습니다. 예컨대 농민 연금제를 95년에 도입했는데, 5년이 지나서 2000년부터 농민들이 그 혜택을 받게 됐으니까 당시로서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현 정부의 공으로 평가되는 거지요.
―(질문) 김대중 정부에 들어와서 농림해양 수석이 없어진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DJ 정부가 출범하면서 작은 정부를 표방했습니다. 그래서 농림해양 수석뿐만이 아니라 민정수석실도 없애는 등 아주 단촐하게 출범했는데, 시간이 가면서 그게 아니라고 판단해서 다시 조정을 하게 된 겁니다.
우리 현실에서 농정 분야가 독립적인 수석실로 존재하는 데는 이견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YS 시절에는 UR 정국이 형성되는 등 몇 년 동안 농정문제가 국정의 주요 과제로 떠오른 시기였기 때문에 YS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DJ정부는 이걸 존치시킬 수도 있고, 없앨 수도 있겠지요. 다만 농림해양 수석을 계속 존치시켰더라면 한일 어업문제에서 흐트러진 부분, 축·농협 통폐합 문제 등 농정에서 좀더 나은 접근이 가능했을 거라고 봐요.
예컨대 제가 전문가로서 볼 때 지금 대통령이 농정에 대해서 몇 가지 잘못된 시각을 갖고 있는데, 그것이 교정되지도 않았고, 장관들이 대통령의 그런 시각을 뛰어넘지도 못하고 있거든요. 아닌 건 아니라고 얘기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면서 문제가 커지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장관이나 수석이 이런 문제에 대해서 대통령과 원활한 의사소통이 안 되고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전문성이 필요한 분야에서 능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고, 김대중 대통령은 참모들의 얘기를 듣지 않고 독자적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대통령에게는 어떤 능력이 중요하다고 보십니까?
현대사회에서 온갖 복잡한 문제를 대통령이 어떻게 다 판단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전문가들을 데려다 놓고, 그들이 일을 챙기도록 하고 대통령은 그들이 제대로 일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겁니다. 대통령은 인간관계 속에서 사람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생각하기에 대통령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원칙과 판단력이라고 봅니다. 흔히 YS가 무식한 대통령이라고들 얘기하지만, 제가 모셔본 바로는 그건 틀린 말입니다.
“개혁과 대통령 인기는 반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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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비서실장의 기능과 소임에 대해서는 내가 생각하기에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매니저, 관리인으로서의 기능입니다. 청와대에 비서가 500∼600명 정도 됩니다. 문민정부 이전에는 이들이 거의 공무원 출신이어서 동질성이 있었는데, 문민 정부가 시작되면서 정치를 하던 사람도 들어와 섞이는 바람에 조직 운영이 굉장히 힘들었어요. 이들을 잘 관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둘째는 게이트키퍼, 즉 문지기 노릇입니다. 대통령한테 가는 서류, 만나는 사람, 일정 등을 의전수석과 의논해서 국정 운영에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는 일입니다.
셋째는 정책 자문입니다. 정책은 각 수석들이 대통령께 직접 보고하지만 그중 수석들간에 갈등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대통령에게 올라가기 전에 비서실장이 조정해주는 일이 많습니다.
넷째는 장관을 비롯한 주요 직책의 충원에 대해 대통령께 자문을 하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대통령의 방패 구실입니다. 대통령이 욕먹을 것을 비서실장이 대신 받아줘야 할 경우가 많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장관이 갑자기 해임됐다면 자기 잘못 이전에 굉장히 기분 나쁩니다. 내가 비서실장을 맡고부터는 대통령이 장관을 해임할 때 반드시 사전에 알려줘야 한다고 해서 주로 비서실장이 맡아서 통보했어요. 해임통보하는 일이 유쾌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일을 비서실장이 했습니다. 이렇게 대충 다섯 가지가 대통령 비서실장이 하는 일인데, 대통령 비서실장의 소임이나 적합성은 무엇보다 대통령과의 관계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역대 대통령의 스타일
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 여덟 분의 대통령이 나왔습니다. 그중 이승만 대통령과 윤보선 대통령은 차치하고, 최규하 대통령은 임기가 너무 짧았기 때문에 제외한다면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 이렇게 다섯 분이 남습니다. 대체로 보면 YS와 DJ처럼 평생 정치만 한 정치형과 군인 출신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군인 출신 대통령들은 조직 운영, 소위 거버넌스(governance)를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대통령들은 최종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 합의형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어요. 반면에 정치인 출신 대통령들은 특정 목표를 위해서 정치력을 동원하는 독단형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비서실장이 된 뒤에 내가 처음 선언한 것은 “청와대는 비서들의 집단이다. 비서들은 눈과 귀는 있어도 입은 없다. 그러니까 수석 비서관이나 비서관들이 개인 의견이나 정책에 대한 견해를 밖에 나가서 함부로 밝히지 말라. 대중강연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비서실장을 하던 1년 동안에는 수석 비서관이나 비서관 중에 밖에서 강연한 사람이 없었어요. 신문에 인터뷰한 사람도 없었어요.
내가 그렇게 한 이유는 내부적으로 갈등이 조정되지 않은 채 밖으로 나가면 청와대가 분열된 것처럼 보일 수 있고, 또 청와대는 정책 입안에는 관여할 수는 있지만 정책 추진은 내각이 하는 것인데 내각기능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청와대는 내각이 제 기능을 하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청와대 비서와 내각의 관계를 말하려는 건데, 청와대는 항상 대통령 곁에 있는 반면 장관들은 대통령을 자주 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청와대에서 대통령의 뜻이 아닌 것을 마치 대통령의 뜻인 양 오해할 수 있는 지시를 내리는 경우도 생겨요. 만약 장관의 견해와는 다른 내용을 수석 비서관이 발표했다면 장관도 기분이 나쁘지만 그 부처의 공무원들도 기분 나쁘기는 마찬가집니다. 일을 안 하게 되지요. 그래서 청와대는 내각이 하는 일을 도와야 한다, 청와대가 힘있다는 것을 굳이 내보일 이유가 전혀 없다, 이렇게 지침을 내렸습니다.
문민 정권이 출범하면서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이전 정권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현상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우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을 잇는 정권은 근대화와 산업발전이 중심이 됐던 데 반해서 문민정부에는 민주화와 정치발전이 중요한 가치가 되면서 소위 근대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대치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YS에서 DJ까지의 과정에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향수가 나타난 이유는 정치발전, 민주화가 반드시 경제발전과 연계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이 서서히 이해하게 되면서 근대화 시대에 대한 회귀심리가 커졌기 때문입니다. 특히 정권을 잡은 민주화세력이 경제발전과 국가전략의 확고한 청사진을 마련하지 못할수록 더 그래요.
다음으로는 패러독스 현상인데, 문민정부나 국민의 정부나 개혁을 하면 할수록 지지도가 점점 하락하는 모순현상이 나타납니다. 얼마 전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의 지지가 10%가 되더라도 개혁은 해야 한다는 얘기를 했는데, 자칫하면 실제로 10%가 될 가능성도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합적인 국가운영전략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개혁을 해도 이 개혁 뒤에는 무엇이 오고, 그 다음은 무엇이다, 이런 종합적인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도 개혁에 일관성이 없는 것 같으니까 국민들이 불안해합니다. 사회 분야, 노동 분야, 공공 분야, 경제 분야의 개혁이란 게 국가라는 하나의 시스템에서 서로 연계되는데, 이것들이 각자 따로 노는 것 같으니까 국민들이 불안해 합니다.
비서실 권한남용 자제해야
개혁이라고 해서 모두 올바른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마치 변화가 개혁이요, 개혁은 다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변화가 개혁이 아닐 수도 있고, 개혁이라고 해도 좋은 개혁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럴 경우 누가 책임을 지느냐는 문제가 나올 수 있어요.
예를 들면 금융 구조조정이 대표적입니다. 지주회사를 만들고 은행을 대형화해서 국제경쟁력에 대비한다, 부실은행은 빼더라도 좋은 은행 몇 개를 합치자고 하는데, 내가 얼마 전에 미국에 가서 “우리 나라 사정이 이런데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느냐”고 물었더니 “대형화하지 마십시오, 차라리 작은 은행을 많이 만드십시오” 이러더라고요. 왜냐, 한국의 은행을 모두 모아서 하나로 만들어도 미국의 큰 은행 하나도 당해내지 못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나라에서 좋은 은행만 골라서 합병해놓아도 국제경쟁의 단위로서는 여전히 작다는 겁니다.
그래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거예요. 마치 은행을 대형화하면 곧바로 경쟁력이 생길 것 같지만, 우리 재벌들은 지금 경쟁력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은행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대형화를 지향하는 금융개혁이라는 게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인데, 금융개혁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개혁에서도 반드시 좋은 성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닐 경우가 많으니 조심하자는 겁니다.
다음으로는 대통령의 임기와 개혁 강도 간의 상관관계인데, 내가 보기에 이 두 가지는 정(正)의 함수관계에 있어야 합니다. 예컨대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가는데 개혁의 강도를 자꾸 높인다면 개혁은 반드시 실패하고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있어요. 취임 초기에는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강도를 줄여가야 합니다. 그런데 문민정부도 그랬고, 지금 정부도 거꾸로 가는 듯해요. 마치 개혁을 더 해야 지지를 더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인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에 그것은 올바른 방향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정치적 합의를 얻을 수 있다면 개혁 강도를 높여도 무방하겠지요.
예를 들면 문민정부 말기에 노동법을 개혁하려다가 실패한 적이 있습니다. 노동법 개정안이 96년 12월에 국회에서 통과됐지만 당시 야당들이 반대해서 결국 다시 하게 됐지요.
그런데 당시 야당이 차기 정권을 잡는다는 걸 알았다면 아마 찬성하지 않았을까요? 이게 일종의 부메랑 효과예요. 자기네가 차기 정권을 잡지 못할 줄 알고 기존 정권을 어떻게든 못살게 굴려고 하다가 보니까 그렇게 됐다는 겁니다. 이건 현재 야당에게도 좋은 교훈입니다.
(학생 질문에 대한 답변 중에서)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을 때에는 하나같이 청와대 비서조직을 약화시키고 내각에 힘을 실어주겠다고 하지만, 실제로 집권해서 국정을 운영하다가 보면 그게 안 됩니다. 계속 점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와대 비서로는 자신을 다듬을 줄 아는 사람들이 들어가야 한다고 봅니다. 스스로 규율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들어가면 큰 일을 저지를 수 있는 곳이 바로 청와대입니다.
내가 청와대 비서실장 다음으로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을 했습니다. 그런 나에게까지도 청와대 비서실에서 대통령에게 보고하지도 않고서 “이것 하시오” 그런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건 내일 대통령께 직접 곤란하다고 보고하겠소” 이랬더니, 그러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청와대에서 내각으로 내려가는 지시 가운데 상당수는 대통령의 뜻과는 상관없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이런 걸 비서실 스스로 자제해야 해요.
앞으로는 정치인 중에서도 행정능력을 가진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비서실장도 행정능력을 가진 사람이 맡아서 국가 운영을 효율적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대통령은 국민들 인기를 참 좋아하거든요. 문민정부에서도 매달 대통령 인기조사를 하고, 국민의 정부에서도 발표는 안 하지만 아마 하고 있을 겁니다.
이러다 보면 인기 있는 정책을 자꾸 선택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국민들이 좋아하는 정책이 반드시 효율적인 것은 아니라는 데에 문제가 있어요. 예컨대 남미 경제가 왜 저러냐, 두 가지 중요한 요인이 있는데, 부정부패와 노동조합입니다. 노동조합 세력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정부가 노동조합의 기분에 맞춰주는 정책을 자꾸 폈습니다. 그중 하나가 고환율 유지정책인데, 이렇게 되면 수입품이 싸지고 도시 근로자들에게 유리합니다. 그렇지만 고환율이 유지되면서 수출산업은 망하고, 결국 경제 전체가 엉망이 돼버렸습니다. 이런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거예요.
“정부부처 가보니 인사가 개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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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나름의 장관론, 그리고 YS 정부에서 제가 경험했던 보건복지부 장관의 역할을 중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96년 8월 말에 보건복지부 장관에 취임했는데, 취임사에서 “저는 결코 장관으로서 내 업적이나 실적을 남기는데 급급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이 나중에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제가 장관에 취임할 때는 YS 정부가 4년 가까이 지난 집권 후반기였습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당시 YS 정부가 내건 개혁의 기치는 지금 김대중 정부가 내건 개혁보다 더 화려했고 목소리도 컸습니다. 그런데 3년 반을 지켜본 YS 정부의 개혁에서 나타난 문제점이 저로 하여금 “나는 실적에 연연하지 않겠다. 업적을 남기려고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제가 속했던 정부이니까 이렇게 비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YS 정부가 의욕은 강했지만 동시에 개혁의 실적을 남기려고 집착한 것을 보면서 저래선 안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김대중 정부에서 당장 가시적인 실적에 급급해 개혁에 실패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제가 장관에 취임했을 때 YS 정부 이래 줄곧 우리 사회를 들끓게 했던 것이 한약분쟁입니다. 한약조제권을 약사들이 계속 갖느냐 못 갖느냐는 문제를 놓고 약사와 한의사 사이에 벌어진 갈등입니다. 이게 사회적 불안을 계속 야기하고 있었는데 제가 장관으로 갔을 때까지도 아직 해결되지 않고 다들 지쳐 있었어요.
업적에 연연하면 실패하기 십상
제 전임 장관이 안경사협회에서 부인이 뇌물을 받는 바람에 장관직을 그만뒀습니다. 그 전 장관 세 분도 한약분쟁으로 그만뒀지요. 보건복지부가 한편에선 한약분쟁에 치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지탄을 받으니까 사기가 완전히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제 첫 과제는 보건복지부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장관에 취임하기 바로 전에 사회보장기본법이 국회에서 통과됐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회보장이라는 개념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 바로 YS 정부 때입니다. 부처 이름도 보건사회부에서 보건복지부로 바꾸고, 복지정책을 새 개념으로 받아들인 겁니다. 국민연금제도에 농어촌 주민을 1단계로 포함시키고, 점차 모든 국민을 포용하는 틀을 그때 만들었습니다.
지금 문제되는 의약분업의 기본틀도 당시 연구대상이었습니다. 조금 미세한 얘기지만 기초 의약품, 소화제나 아스피린, 붕대, 반창고 같은 것들은 일반 소매점에서도 살 수 있게 하는 제도에 대한 논의도 그때 했습니다.
앞에서 국민연금 얘기를 했지만 제가 9월에 행정부에 들어가 봤더니 다음해 초에 국민연금을 실시한다는 계획이 서 있었습니다. 준비가 됐느냐고 했더니 됐다는 거예요. 그런데 내용을 보니까 돼 있는 게 없어요. 그래서 일단 7월로 연기해놓고, 국민연금 연구기획단을 만들어서 하나하나 다져 갔습니다. 별도 사무실을 만들고, 과장급을 팀장으로 연금보험공단, 각 병원, 의료보험공단 등에서 사람들을 차출해서 기획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실제로 검토해보니까 당장 시행될 수가 없는 겁니다. 국민들이 지금 내고 있는 연금만으로 그대로 시행하면 30년 후에는 재정이 완전 고갈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는 데도 시행한다는 겁니다. 지금도 그대로 가고 있습니다. 왜냐, 내가 집권했을 때, 내가 장관이었을 때 국민연금을 만들었다, 이런 얘기를 듣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그런 일들은 의료보험 통합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장관으로 들어갔을 때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의 농촌지역 국회의원들이 우선 농어촌과 도시지역 의료보험을 통합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저도 농촌의 의료보험 재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아니까 검토를 해봤어요. 그런데 당장 통합하면 둘 다 망하게 돼 있었어요. 직장 의료보험 조합 중에 예컨대 대기업들에는 의료보험 적립금이 많이 쌓여 있습니다. 농어촌은 적자였고, 도시 지역의보는 보통 수준이었습니다. 이것들을 한꺼번에 합쳐봤자 결국 생기는 것은 도덕적 해이밖에 없다는 겁니다.
인사 바로잡는 게 장관의 일
아무튼 이런 여러 가지 일을 해나가는데 있어서 사실 장관으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조그마한 것에 불과합니다. 공무원들이 나서지 않으면 장관 혼자서 아무리 뛰어봤자 소용이 없어요. 그게 사람을 제대로 활용해야 한다는 얘기인데, 제가 장관에 취임하면서부터 매일 저녁 사무관급 이상 인사기록철 다섯 권을 차에 싣고 다니면서 봤습니다.
연말이면 정기인사가 있습니다. 공무원 교육원 같은 데에 파견됐다가 들어오는 사람들, 외국에서 들어온 사람들 등등 이때 인사 수요가 가장 많습니다. 물론 인사는 빨리 하는 게 좋지만 제게 확신이 서기 전까지는 인사를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여기에 부모나 친척이 공무원인 분들이 있겠지만, 속되게 얘기해서 공무원은 계급과 보직이 그 사람의 전부입니다. 그 외에 다른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말은 좀 조심스럽지만, 정부부처에 가서 보니까 인사가 개판이었습니다. 유능한 사람이 로비 능력이 없어서 외곽에 처져 있었어요. 중앙부처 국장, 과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세요? 중앙부처의 과장은 대한민국의 법을 하나 쥐고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보건복지부의 노인복지과장이라면 노인법, 경로연금법이 그 사람에 의해서 입안되고 통제됩니다. 장관이 법을 고치려고 해도 과장이 실무로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요컨대 본부에 그런 법을 쥐고 있는 자리에 합당한 능력이나 자질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꽤 앉아 있더라 이겁니다. 이걸 바로 잡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2∼3번 인사를 했더니 자리가 잡혔습니다.
또 보건복지부가 행정부처 중에 힘이 좀 없습니다. 돈을 쓰는 곳이기 때문에 항상 재경부에 가서 구걸하고, 행정자치부에 가서 아쉬운 소리 하고, 총무처에 가서 직제개편에 대해서 어려운 소리 하고, 이런 곳이 보건복지부입니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우리가 OECD에 가입하면서 공무원을 23명인가 파견하게 돼 있었습니다. OECD라는 게 선진국 클럽입니다. 이런 곳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복지, 환경, 노동 분야에서 선진국 사례를 배우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다른 부처는 다 들어갔는데 보건복지부가 빠졌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외무부장관과 언성을 높여가면서 OECD 파견 과장급 자리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제 자랑은 이 정도로 하고, 제가 갖고 있는 장관론에 대한 생각을 나름대로 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앞서 얘기한 대로 자기 업적에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업적에 연연하다가 실패한 장관들이 얼마나 많아요? 대표적인 예로 교육부 장관이 바뀌면 교육정책, 입시제도를 다시 만들려고 합니다. 그게 얼마나 많은 혼란을 가져왔어요?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기반을 다진다는 생각을 가져야지 내가 과실을 따먹겠다고 하면 100% 실패합니다.
인사청문회 도입해야
둘째는 내가 나서지 않고 직원들이 일하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인력을 적재적소에 공정하게 배치하는 겁니다. 장관이 인사에서 청탁을 받기 시작하면 그건 끝입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충고하기를, 장관 되면 엄청나게 많은 인사청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 조회에 전 직원들을 모아놓고 엄포를 놔라, 이거예요. 앞으로 내게 인사청탁을 하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오히려 불이익을 주겠다, 그러면 인사청탁이 줄어들 거라고 해요.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이건 안 되겠더라고요. 인사청탁을 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저도 국회의원으로서 가끔 인사청탁을 합니다. 대신 제 청탁을 들어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못 들어주면 못 들어줄 이유가 있는 거고, 들어주면 들어줄 만한 사유가 있는 겁니다. 공무원이라는 게 승진과 보직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인데, 인사청탁 자체를 갖고 불이익을 준다는 건 인간적이지 않습니다.
셋째는 소신입니다. 장관이 배짱없이 위나 쳐다보고, 여론에 신경 쓰려면 장관을 하지 말아야 해요. 사실 우리나라 장관의 가장 큰 병폐가 이 문제입니다. 이런 생각을 한번 해보세요. 클린턴이 성추문 사건으로 특별검사에 조사를 받은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특별검사를 법무장관이 임명합니다. 클린턴은 법무장관에게 특별검사를 임명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법무장관은 특별검사를 임명해서 결국 탄핵소추까지 갔습니다.
왜 미국의 장관은 소신껏 움직이고, 우리 나라는 그렇지 못한가. 미국은 주요 직책에 대해서 의회에서 인사청문회를 거쳐서 인준합니다. 그 자체가 선거로 당선된 것과 마찬가지 효과를 갖고 독립적인 위치를 부여받는 겁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인사청문회나 인준제도를 갖추자고 저같은 사람들이 주장해왔지만, 정부나 여당이 무시하고, 우리 당에서도 무시됩니다. 그런 제도를 도입하면 그 사람이 독립적인 위치를 갖기 때문에 못하는 겁니다.
우리 나라와 미국의 장관이 다른 또 한 가지 이유는 일종의 사회보장 구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장관을 역임했으면, 그가 그때 무슨 일을 했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저 장관 한 번 한 걸로 “그 사람 장관 했대” 합니다. 실패하고 나라를 망친 장관도 마찬가집니다. 장관직을 잘못 수행했거나 소신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회적인 제재를 가할 수 있는 풍토나 보상구조가 없기 때문입니다.
“문화외교 씨앗, YS가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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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 김영삼 정권의 외교문제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위해서 이 자리에 왔습니다. ‘외교’라고 하면 범위가 무척 광범위합니다. 그중에서 저는 ‘문화외교’의 측면에 중점을 두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북한 문제를 둘러싼 4강 외교는 다른 분들이 많이 언급했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사실 문화외교는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간과했던 부분으로, 김영삼 대통령 시기에 본격적인 서막이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대통령은 여타 정권에 비해 상당히 유리한 입장에서 외교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민주적·합법적인 방법으로 선출된 민간 출신 대통령으로서 전임자들과는 달리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외교를 이용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김대통령은 대미관계에서도 당당했습니다. 역대 대통령들은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취임 직후 미국을 찾아가곤 했지만, 김영삼 대통령의 경우는 클린턴 대통령이 도쿄에서 개최된 G-7 정상회의에 참석하고 난 다음 실무방문 형식으로 한국을 먼저 방문한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이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추진된 문화외교는 주로 외국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쉽게 보이지 않지만, 김대통령의 외교성과 중에서 가장 평가받을 수 있는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국가들은 공적인 외교 수단 이외에도 자국의 토착문화를 타 국민에게 전파하는 민간 수준의 문화 외교활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습니다. 특히 냉전 이후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문화 침투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서방 선진국들은 1, 2차 세계 대전 이후 자국의 문화외교를 실행하는 조직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영국의 ‘브리티시 카운슬’이나 독일의 ‘괴테 인스티튜트’, 프랑스의 ‘알리앙스 프랑셰즈’, 미국의 ‘USIS’, 일본의 ‘저팬 파운데이션’ 등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이런 기관들처럼 한국문화의 공식적인 PR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국제교류재단(Korea Foun-dation)은 바로 김영삼 대통령 시기에 떠오른 신성(新星)이었습니다.
한국국제교류재단과 문화외교의 시작
한국국제교류재단의 태동은 1991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국제교류재단법 통과 이후 첫해인 1992년은 조직 정비와 여러 가지 사업계획 등으로 분주한 시기였고,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부터 본격적인 사업이 진행됐습니다.
저는 정권 초기에는 외무부 본부대사로, 대통령 특사로 아시아지역을 순회했고, 1996년에 국제교류재단 이사장에 취임했습니다. 이후 5대양 6대주를 누비면서 한국을 세계의 대학과 박물관, 연구소에 소개하고 인식시키는 현장에 있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외국 순방을 떠나기 전에 저를 청와대로 불러서 “이번에 어느 나라를 가는데 문화외교를 효과적으로 하려면 어떤 주제를 다루는 것이 좋겠느냐”고 묻곤 했습니다. 저는 민간차원의 포럼이라든가, 박물관 문제 등을 건의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현지에 가면 그런 내용을 반드시 제안하셔서 그 뒷수습을 하느라 분주하게 쫓아다녔습니다.
재단의 재원은 국민들이 여권을 발급받을 때 내는 4만5000원 중 1만5000원이 국제교류기금 명목으로 재단에 지원됩니다. 이와는 별도로 김대통령 재임기에는 정부 예산에서 연간 100억, 50억 원씩 지원받았습니다. 이 밖에 기업의 기부금 등을 포함해서 93년에 162억 원이던 예산이 97년에는 1033억원으로 증가했습니다.
국제교류재단은 이 재원을 바탕으로 먼저 주요 국가의 엘리트들이 모여 있는 우수 대학을 두드렸습니다. 해외에서 한국을 연구하는 학자들을 지원하고, 외국 학생들에게 한국을 더 많이 알리고 연구하게 했습니다.
미국, 영국, 일본, 중국, 러시아, 프랑스의 명문대학 15곳에 한국학 교수직을 마련해주고 석·박사 과정 학생들에게 한국을 연구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지원해주었습니다. 이외에도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폴란드, 일본, 중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28개국 90여 개 대학과 학회, 연구소에 한국학 프로그램을 지원했습니다.
이러한 한국학 지원 과정에서 미국의 브루킹스 연구소, AEI, 헤리티지재단 등 유수의 싱크탱크들과 확고한 인연을 맺은 것도 적지 않은 성과입니다. 미국의 정치시스템을 보면 정당들이 이들 연구소를 통해 국가정책을 연구하고 정책에 반영하기 때문에 이들을 관리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우리나라는 미국의 민주당이 집권하면 민주당 쪽에만 매달리다가 정권이 바뀌면 또 인맥을 얻지 못해 허둥지둥하던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러다가 국제교류재단 채널을 통해 민주당, 공화당 할 것 없이 자연스럽게 사귀고, 한국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게 된 겁니다. 미국의 대한정책에 간접적인 영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코리아 소사이어티 역시 재단의 전폭적인 지원을 통해 설립된 단체입니다. 코리아 소사이어티는 한국대사를 지낸 도널드 그레그 대사가 책임을 맡고 있지만, 글자 그대로 미국 내에서 한국을 위해 일하는 민간 단체입니다.
예를 들면 프랑스의 어느 여배우가 한국인을 개고기를 먹는 미개한 사람들이라고 폄했을 때, 우리가 아무리 설명해도 먹혀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레그 회장 같은 사람이 한국문화와 개고기 문화를 옹호하면 의외로 잘 이해시킬 수 있습니다.
코리아 소사이어티에는 미국 월가의 금융재정가, 전직 외교관, 학자, 문화예술인들이 가입되어 있습니다. 만약 이 사람들을 개인 자격으로 만나자고 하면 글쎄요, 선뜻 만나주지 않겠지만, 코리아 소사이어티가 초청한 만찬에서 만났던 누구라고 하면 아마도 서슴없이 만나줄 것입니다. 지난번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 방문을 했을 때도 코리아 소사이어티가 나서서 미국 내 저명인사들을 초청해서 사교모임을 만들고 한국 무드를 주도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투자한 문화외교의 기반을 다음 대통령이 만끽한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재단이 역점을 둔 또 하나의 프로그램은 해외 한국학 연구자들을 초청하여 현장에서 배우고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줌으로써, 장래의 한국학 정예요원으로 양성시켜 나가는 펠로십 제도입니다. 97년까지 5년 동안 세계 50여 개국에서 온 한국연구 펠로 351명, 한국어연구 펠로 379명이 다녀갔습니다.
부러움 토로한 멕시코 외무장관
무엇보다 재단이 중점을 기울인 것은 해외 박물관 지원사업이었습니다. 예전에는 한국인들이 해외여행을 하면서 외국 박물관에 가보면, 한국실은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복도에 한국도자기 한 점 전시된 경우가 태반이었습니다. 해마다 700만 명 이상이 방문한다는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나 영국의 대영박물관,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에 한국실이 없다는 것은 한국 문화가 세계인들에게 소개되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정부도 박물관의 중요성을 깨닫고 70년대부터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접촉을 시도했지만, 이런 박물관들은 워낙 콧대가 높아서 일을 성사시키지 쉽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국제교류재단이 끈질기게 세계 3대 박물관을 비롯한 유수의 박물관들과 접촉하고 지원한 결과 가시적인 성과가 드러났습니다. 1997년 대영박물관에 임시한국실이 개관을 했고, 1998년 6월에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그리고 얼마 전에 대영박물관에 한국실이 문을 연 것입니다. 루브르 박물관의 동양관인 기메박물관에도 한국실이 개관할 예정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국민들이 피부로 쉽게 느낄 수 있는 주제는 아니지만 해외에서 소리없이 일어난 문화외교는 김영삼 정권의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이른바 세계화외교의 첨병이자 진수가 바로 한국국제교류재단과 국제협력단, 재외동포재단과 같은 조직입니다.
‘김영삼 정권의 성공과 실패’라는 이 강의의 주제에 맞추어 먼저 성공적인 측면을 살펴보면 첫째, 문화외교의 확고한 토대를 마련하고 국제사회에 한국을 심을 수 있는 전진기지를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멕시코 외무부 장관은 ‘한국국제교류재단과 같은 국가 홍보조직을 가지고 있고, 이런 문화외교를 대통령이 전폭 지지해주는 한국 풍토가 부럽다’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그는 한국국제교류재단 같은 기관을 멕시코에도 만들고 싶으니 협조를 부탁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둘째, 신생아와 다름없는 한국국제교류재단을 국제사회에 한국을 심는 선교사로 만들기까지 법적·제도적·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현 김대중 정권은 1998년부터 정부가 지원하던 국제교류재단의 정부출연금을 전면 중단했고, 여권수입을 통해 확보해왔던 국제교류기금마저 정지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고 있다고 합니다.
(기획예산처는 2000년 12월 국제교류기금을 준조세로 분류하여 문예진흥기금과 함께 2002년 1월부터 폐지하겠다고 결정했습니다.)
국제교류재단이 사용하는 연간 예산은 영국 브리티시 카운슬의 2%, 저팬 파운데이션의 6%에 지나지 않습니다. 국가의 경제규모와 여건을 감안하더라도 정부가 한국국제교류재단에 대한 지원을 중단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힘들게 구축해온 사업을 단절하고 문화외교의 젖줄을 스스로 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셋째, 전세계 주요 박물관에 항구적인 한국실을 마련하고, 각 대학에 한국학과와 한국어 프로그램을 만듦으로서 한국을 이해할 수 있는 창을 열어주고, 각종 펠로십이나, 인사교류 사업을 통해서 한국의 친구들을 만들어왔다는 점입니다.
넷째, 가난, 전쟁이라는 단어를 연상하던 한국의 이미지를 새롭게 바꾸려 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아쉬웠점 점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국제교류재단에 대한 대국민 홍보가 부족해 국민 지지를 받으며 문화외교가 전개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일본과는 달리 국제교류재단에 대한 민간인의 기부가 매우 부족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또 외무부 산하기관으로 분류돼 있기 때문에 정치논리에 따라 국제교류재단의 사업이 좌우되는 경우가 발생하곤 했습니다. 꼭 필요한 사업을 추진하지 못하거나, 불필요한 사업을 추진해야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문화외교는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단절되어서는 안될 국가와 민족의 기간사업입니다. 이런 일들은 돈으로는 따질 수 없는 유무형의 가치와 혜택을 우리 자손들에게 돌려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