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9년 6월 톈안먼(天安門) 사태는 인민해방군이 대학생 시위대에 발포, 엄청난 유혈 참극을 빚은 중국 현대사상 최대 사건이다. 그러나 사망자 수를 비롯해 계엄령 선포과정 등 구체적인 상황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미국에서 톈안먼 사태 당시 중국 지도부의 동향을 세밀하게 폭로한 책 ‘톈안먼 페이퍼(The Tiananmen Papers)’가 출간돼 세계적으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이 극비문서가 공개되자 미국 언론은 “중국 지도부가 톈안먼 사태 진압과정에서 그 동안 알려진 것보다 훨씬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였다”고 앞다퉈 보도했고,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은 “사실이 왜곡된 조작문건에 불과하다”(1월9일)고 일축하는 등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신동아’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톈안먼 페이퍼’를 긴급 입수, 발췌 소개한다. <편집자>
당시 계엄령 선포와 무력 진압의 배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당시 최고 지도자인 덩샤오핑(鄧小平)의 사태 관련 발언 내용은 물론, 자오쯔양(趙紫陽·총서기) 리펑(李鵬·국무원 총리) 양상쿤(楊尙昆·국가주석) 등의 전화 통화 내용에서부터 민심 동향 비밀보고서까지 ‘톈안먼 보고서’는 1989년 봄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껴입고 있었던 그 두껍기 짝이 없는 ‘옷’을 벗겼다. 사태 당시의 관련자 몇 사람만 알고 있던 사건이 이젠 역사가 된 것이다.
장쩌민(江澤民) 국가 주석이 직접 나서서 터무니없는 자료라고 반박했다. 허위라는 것이다. 그럴 만하다. 중국 내에서만 공개됐어도 손을 써볼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톈안먼 보고서’는 미국에서 튀어나왔다. 파장이 클 수밖에 없다. 이 자료를 손에 쥔 ‘톈안먼 보고서’(출판사 : 퍼블릭 어페어스)의 편집자 앤드류 네이선 교수(컬럼비아 대학 정치학과)는 서문에 이렇게 써놓았다.
“수백 장에 달하는 사본의 일부 혹은 전체 자료로 구성된 이 기록은 공산주의 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기록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이처럼 정치에 얽힌 최고위층의 은밀한 내용이 공개되기는 중국의 전 역사에서 일찍이 그 유례가 없다.
이런 기록을 볼 수 있는 위치는 대개 고위층 지도자 40명에게 국한되고, 대부분의 문서는 이 가운데에서도 5명의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및 8명의 원로만 볼 수 있는 극히 제한적인 자료들이며, 일부 자료는 최고 지도자 한 명이나 몇몇 지도자만 볼 수 있는 것이다.”
중난하이의 원로들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이런 극비자료가, 대체 한두 장도 아닌 수천 장의 방대한 자료가 어떻게 미국인의 손에 들어왔느냐 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밝히는 것도 ‘톈안먼 보고서’ 못지않은 책 한 권을 쓰기에 충분한 충격적인 주제다. 네이선 교수가 서문에 밝힌 입수 경위를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이런 자료를 취급할 수 있는 사람은 중국인 가운데 몇 명 되지 않는다. 중국인 편찬자(가명: 張良)가 이 자료를 손에 넣었고, 톈안먼사태의 공식적인 역사 기록을 위해 자료를 공개하도록 개혁 추진세력인 동료들로부터 자료 출간을 위임받았다. 그는 중국 바깥에서 나를 만나 도움을 요청했다. 나는 마오쩌뚱(毛澤東)의 주치의였던 리즈수이(李志綏) 박사의 ‘마오쩌뚱의 사생활’ 출간과 웨이징셩(魏京生)의 감옥 편지 출간에도 관련돼 있었다.
편찬자는 처음에 중국어로 먼저 출판하기를 원했으나 생각을 바꾸었다. 우리는 세 차례에 걸쳐 자료를 골라냈다. 먼저 편찬자가 수천 장에 달하는 문서 가운데 중난하이(中南海 : 베이징 자금성 옆에 있는 원로들의 거주지로 국무원과 당 중앙 사무실이 있음-역주)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순간의 기록들을 먼저 뽑았다.
그 다음엔 중국어로 516쪽에 달하는 초고를 만들었다. 이 책 분량의 약 3배에 달하는 양이고 중국어로 출판될 예정이다. 마지막 단계로 편찬자는 책 한 권 분량의 자료만 가려 뽑고 설명을 붙이는 작업을 우리(공동 편집자 페리 링크 프린스턴 대학 중국어학과 교수)에게 맡겼다.”
‘톈안먼 보고서’는 이렇게 걸러진 1차 자료를 사건 순서에 따라 재배치했고, 책 서문에 문서 공개의 의미와 영향 등을 해석해놓았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이 출판되면서 중국에서 가장 타격받을 사람은 고위 지도자 두 명, 장쩌민과 리펑이다. 사태 당시 상하이(上海) 당비서였던 장쩌민은 5월27일 열린 원로모임에서 비합법적으로 중국 공산당 총서기로 선출됐다. 장쩌민은 2002년 10월에는 총서기직에서, 2003년 3월에는 국가주석직에서 물러난다.
리펑은 덩샤오핑과 원로들에게 시위대가 그들을 공격하려 한다는 조작된 정보를 올렸다. 또한 사태 진압 이후 정보계 및 경찰 요원들을 진보적 관리와 지식인 탄압에 활용한 사실이 이 책에서 밝혀졌다. 리펑은 1989년 사태에서 가장 능력 있고 결연한 자세를 보인 정치인이다. 그는 혼미한 사태 속에서 냉정하고 분명한 태도로 일관했다.”
리펑 편에 선 3명의 정치국원 리티에잉(李鐵映), 뤄간(羅幹), 장춘윈(姜春雲)도 이 책 출간으로 타격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며, 22명의 정치국원 가운데 2명의 선임 지도자와 그들을 포함한 직계인사 3명 역시 마찬가지다.
덩샤오핑의 가장 믿음직한 동료였던 7명 원로 - 천윈(陳雲), 리셴녠(李先念), 펑전(彭眞), 덩잉차오(鄧潁超), 양상쿤, 보이보(薄一波), 왕전(王震) - 가운데 양상쿤은 중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양상쿤은 결국 조카 양바이빙(楊白)과 함께 1992년 14차 당 대회에서 실각했다.
덩샤오핑과 양상쿤 외에 나머지 6명의 원로 가운데 5명은 이미 사망했다. 이 책이 집필될 때까지 보이보가 유일한 생존자였으나 이젠 정치적인 영향력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5명 가운데 마지막 서열이었고 학생운동에는 리펑보다 더 강경했던 야오이린(姚依林)은 1996년에 사망했다. 베이징시의 두 원로인 당서기 리시밍(李錫銘)과 천시퉁(陳希同) 시장은 이미 실각한 지 오래다. 특히 천시퉁은 리펑이 정보를 조작하도록 도왔고 지도부 내에서 무력 진압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했던 사람이다.
최종결정권자는 덩샤오핑
자료 공개로 득을 보는 사람도 있다. 현재 준가택연금 상태인 자오쯔양이야말로 최대의 수혜자임에 틀림없지만 이제 정계에 복귀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다. 1989년 당시 상하이 시장이었던 현 총리 주룽지(朱鎔基)와 당시 톈진(天津) 시장이었던 리루이환(李瑞環)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주룽지는 장쩌민과 함께 사태 대처능력에서 당 중앙의 신임을 얻었고, 목수 출신인 리루이환 역시 덩샤오핑이 총서기 감으로 점찍어두고 있었다.
정치국 상무위 서열 3위였던 차오스(喬石)는 계엄령 시행과 무력 동원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원로들에 의해 차기 총서기 물망에 올랐으나 너무 약하다는 이유로 제외됐다. 5명의 정치국 상무위원 가운데 무력 동원에 반대했던 자오쯔양, 차오스, 후치리(胡啓立)는 이 책에서 ‘3명의 다수’라는 대명사로 불리고 있다.
뭐니뭐니해도 이 책이 밝혀주는 새로운 사실 가운데 가장 압권은 덩샤오핑의 절대에 가까운 권력 행사다. 그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최종 결정을 내렸다. 자오쯔양도 자기 의견을 밝히기는 했으나 덩샤오핑에게 대들지는 못했다. 공식 직위는 국가를 대표하는 자리였지만 실제로는 덩샤오핑의 최측근으로 모든 업무를 관장했던 양상쿤은 모든 중요한 정치국 회의에 하나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가장 중요한 결정은 덩샤오핑의 집에서 내려졌다. 시위를 ‘동란’으로 규정한 사람도 덩샤오핑이고, 계엄령 선포를 최종 결정한 사람도 덩샤오핑이다. 자오쯔양을 사임시키고 장쩌민을 후임자로 세운 사람 역시 그였고, 톈안먼 광장의 군 진입 명령을 내린 사람도 그였다.
그러나 덩은 그 일을 기꺼워하지 않았다. 양상쿤에게 불편한 심기를 토로하기도 했다. 당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모든 중요한 결정을 자신에게만 떠넘긴다고 불평하면서, 그렇게 되면 당이 취약해진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덩샤오핑의 권력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결정을 내리기 전에 그는 원로들의 동의를 받아냈다. 원로들은 네 번의 회의를 거쳐 네 가지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계엄령 선포, 자오쯔양 해임, 장쩌민 지명, 무력 진압 등이다. 자오쯔양의 후임으로 장쩌민을 처음 거명하는 회의에서는 원로 가운데 천윈과 리셴녠 장쩌민의 이름을 거론한다. 사전에 덩샤오핑에게 장쩌민 이야기를 먼저 꺼냈음은 물론이다.
네이선 교수는 이 자료에 비친 중국 지도부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위기의 순간을 찍은 스냅샷일 뿐이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의 내부 분파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자오쯔양과 리펑은 원로들 가운데는 물론 추종자와 차기 예비 지도자들 가운데에도 자기 사람들을 심어놓고 있었다.
정치권력이 특정 인물이 좌지우지하는 인치라고 하지만 결정을 내리는 과정의 합의제는 놀라울 정도로 틀이 잡혀 있다. 베이징의 정치가 때로는 시간 낭비로 비칠지 모르나, 덩샤오핑의 최종적인 말 한마디가 떨어지면 가차없이 행동에 옮겨진다.”
‘톈안먼 보고서’에서 밝혀진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국가안전부를 비롯한 전국의 정보망이 당 중앙에 올리는 민심동향 정보가 아주 솔직하고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듣기 좋은 말만 취합했던 마오쩌뚱 시절에는 전혀 볼 수 없는, 덩샤오핑 시대의 변화다. 인민들의 이념적 동요를 포함해 각 분야의 민심 동향이 한치의 눈속임이나 가감삭제 없이 그대로 보고되고 있다.
이번에 공개된 자료는 우선 정보 보고서의 출처 범위가 방대하다. 국가안전부, 국가공안부를 비롯해 중국 전역에서 학생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국무원 산하의 교육부 등 각급 정보기관은 물론, 베이징 시정부, 7개 군구의 정보계통, 인민해방군 정보계, 신화사통신 등 중국이 가동하고 있는 공식·비공식 정보기관이 베이징의 당 중앙에 올린 정보들을 취합한 것이다.
각급 정보계통이 어떤 정보들을 어떻게 취합하는지에 대한 속사정 역시 여실히 드러나 있다. 길거리의 인민을 인터뷰한 내용이 첨삭없이 당 중앙에 보고되고, 지역 군부의 정치동향까지 세밀히 기록되어 있다.
톈안먼 사태가 일어나기 3년 전인 1986년 봄, 위기의 씨앗이 잉태됐던 때의 기록부터 이 책은 시작된다. 학생운동의 전개과정은 학생민주연맹이 어느 날 어디에서 무슨 내용을 토의했는가 하는 것까지 밝혀준다.
학생시위를 ‘동란’으로 규정함으로써 평화 시위를 자극한 ‘인민일보’의 4월26일자 사설 게재 배경과 그 여파, 학생 시위대의 단식투쟁 돌입, 자오쯔양의 시각, 계엄령 선포, 장쩌민 지명과 무력진압에 이르는 주요 순간이 1차 자료로 생생한 현장감을 더한다.
덩샤오핑과 지도자들의 공식 비공식 발언, 자오쯔양 리펑 양상쿤 등 고위층의 전화 통화 및 비밀 사신, 정적에 대항하기 위한 측근끼리의 밀담 등 공산주의 중국의 가장 은밀한 기록이 바로 이 책의 핵심이다. (고딕체 글자는 편집자 네이선 교수가 붙여놓은 상황설명 가운데 주요 부분만 요약한 것이다.)
● 4월13일/후난성(湖南省) 당 위원회가 당 중앙에 보고한 사회 동향 보고
국가공안부는 1989년 1/4분기에만 총 56만 건의 범죄가 접수됐다고 보고하고 있다. 1985년 한 해의 범죄가 54만 건이었던 것에 비하면 1989년 당시 전국의 치안상태가 얼마나 문란했는지를 보여주는 수치다. 다음은 후난성의 사례다.
1989년 1/4분기에 총 14만40건의 범죄가 접수됐다. 조직을 갖춘 떼강도가 창궐한다. 1월과 2월에만 615개 갱조직의 2182명이 검거됐다. 매춘과 도박이 증가하고 있다. 지난 분기에 총 2만5000건이 보고됐다. 지난해에 비해 17%가 증가한 수치며, 이 범죄에 대해 부과한 벌금이 175만 위안으로 증가했다. 시위 건수도 늘고 있다. 일부 무력 시위대는 무장을 하고 있으며,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군 부대를 습격하기도 했다.
● 국가사법부의 2월 보고서에 따르면 신장성 타클라마칸 사막 남서쪽에 있는 한 노동농장에서만 8만2000건의 시위가 일어났다. 군부라고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총정치부가 1월 당 중앙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군부 내 이념 문제가 점차 두드러지고 있다. 대부분이 예산과 물품 부족에 관련된 것들이다.
전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와 청년동맹중앙판공실이 전국 청년층을 대상으로 조사한 의식 보고서가 1989년 3월 당 중앙과 국무원에 접수됐다. 1988년 10월에서 12월 사이에 조사된 것이다.
학생시위가 합법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59.2%가 그렇다고 대답했고 8.2%만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부패를 반대하는 청년 시위가 합법적이냐는 질문에는 57.0%가 합법적이라고 답했고, 13.3%가 불법이라고 답했다.
● 국가교육위원회의 1988년 7월19일 보고서
당과 사회의 부패상이 청년의 극단적인 감정을 쉽게 자극하고 있다. 바람직하지 못한 풍조이긴 하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현상이다. “고위층 자제가 지도급 인사가 되고, 회사를 설립해 치부한다”는 말이 비일비재하게 떠돈다. 학생들은 당 지도자와 말할 기회가 없으며, 기회가 되더라도 지도자들이 아무런 대책을 마련하지 않는다고 불평을 털어놓는다.
● 1989년 4월18일/양상쿤과 자오쯔양의 전화 통화
학생들이 중난하이의 신화문(新華門)을 포위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당 지도부 사이에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양상쿤이 자오쯔양에게 전화를 걸었다.
양상쿤 자오쯔양 동지, 지난 며칠 동안 학생들이 후야오방(胡耀邦) 동지 서거에 애도하는 것을 어떻게 보십니까?
자오쯔양 차오스 동지와 후치리 동지한테 보고를 받아 알고 있습니다. 애도 기간에 치안을 위해 학생들의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하라고 리시밍 동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가 학생들의 애국심을 지지해줘야 합니다.
● 4월19일/리펑과 리셴녠의 전화 통화
학생들이 신화문까지 들이닥쳤다는 소식을 듣고 리셴녠이 밤에 리펑에게 전화를 했다.
리셴녠 리펑 동지, 학생들이 며칠째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떻게 신화문까지 파급됐습니까? 어젯밤에도 왔는데, 오늘밤에도 또 왔답니다. 어떻게 돼가는 겁니까? 누가 뒤에서 조종하는 것 아닙니까?
● 4월20일/국가안전부의 톈안먼 광장 상황 보고서
1976년 4·5운동과 유사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톈안먼 광장에서 만난, 공무원처럼 보이는 한 중년 신사는 학생들이 길거리로 나온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첫째, 학생들은 후야오방 동지가 1987년에 부당하게 물러났다고 본다. 둘째, 정치제도 개혁과 민주주의를 추진할 기회가 오기를 원한다. 셋째, 당 중앙의 내분을 못마땅하게 본다. 넷째, 후야오방의 대중적인 스타일을 원한다. 후야오방 동지는 정직하고 개방적이며 할 말을 할 줄 알았던 사람이다.
● 4월20일/학생들 움직임에 대한 지도자들의 반응
4월18∼19일에 학생들이 신화문에 모이자 은퇴한 지도자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었다. 톈안먼사태 이후인 6월23일, 리펑이 13기 4차 중앙위원회에 보고한 내용이다.
펑전(천시퉁과 전화 통화) 베이징이 이렇게 혼란스러워지다가는 제2의 문화혁명에 대비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학생들 뒤에 검은 손이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발본색원해야 합니다.
왕전(덩샤오핑과 전화 통화) 덩샤오핑 동지, 이 학생들은 폭도들입니다. 신화문을 공격하지 않았습니까? 당장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덩잉차오(리펑의 방문을 받고) 학생들의 애국심은 인정해줘야 하지만, 학생들을 자극해 말썽을 부리려는 배후 인물들은 밝혀야 합니다.
왕런중(리셴녠과 전화 통화) 리셴녠 동지, 후베이성(湖北省) 당위원회에서 올라온 보고에 따르면 우한(武漢) 대학생들도 소동을 일으키고 있다고 합니다. 빨리 조처를 취하지 않으면 전국이 무정부 상태에 빠집니다.
리펑은 야오이린과 상의한 후, 학생 시위를 면밀히 관찰하기 위한 임시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심하고 자오쯔양에게 전화를 한다.
리펑 자오쯔양 동지, 베이징과 지방 도시의 시위가 악화되고 있습니다. 정치국 회의를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자오쯔양 후야오방 동지의 타계로 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학생들의 구호를 들어보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당과 이 나라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의 주류는 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할 일은 후야오방 동지의 장례식을 별탈없이 잘 치르는 것입니다.
● 4월22일/자오쯔양이 후야오방 장례식에서 덩샤오핑에게 밝힌 3대 원칙
4월22일 오전 10시, 인민대회당에서 후야오방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덩샤오핑을 비롯해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장례식이 끝난 후 원로들은 귀가했고, 차오스와 후치리는 하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빠바오샨(혁명열사들의 묘역이 있는 八寶山 - 역주)으로 갔다. 인민대회당 문을 나서면서 자오쯔양은 이튿날 북한을 방문한다고 앞서 출국인사를 하면서, 학생운동에 대처하기 위한 3가지 원칙을 정치국에 제안해놓았다고 보고한다.
자오쯔양(덩샤오핑에게) 첫째, 장례식이 끝났으니 학생들이 즉각 학교로 돌아가도록 만반의 조치를 취하라고 했습니다. 둘째, 구타, 파괴, 탈취(문화혁명 당시 홍위병들의 무자비한 폭력을 상징하는 3가지 용어가 이때까지 인용되고 있음-역주)에 가담한 자들은 법 테두리에서 강력하게 처벌하라고 했습니다. 셋째는 학생들에게는 설득으로 접근할 것이며, 여러 대화경로를 유지하도록 했습니다.
덩샤오핑 좋습니다. 자오쯔양 제가 없는 사이 리펑 동지가 당 중앙의 사무를 책임지고, 무슨 일이 생기면 리펑 동지가 저에게 보고할 것입니다.
장례식 후 정치국 위원들의 대화록
자오쯔양 덩샤오핑 동지에게 학생운동에 대처하는 3가지 방안을 상의했습니다. 덩샤오핑 동지도 제 의견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자오쯔양이 3가지 방안을 설명)
양상쿤 자오쯔양 동지의 의견에 동감합니다.
자오쯔양(리펑에게) 내가 없는 사이, 리펑 동지가 당 중앙의 일일 업무를 책임져 주시기 바랍니다.
리펑 자오쯔양 동지가 밝히신 3가지 방안에 동의합니다. 주요 사안이 발생하면 즉각 보고드리겠습니다.
● 4월24일/리펑이 소집한 정치국 회의
자오쯔양의 북한 방문중에 정치국 서열 2위인 리펑이 상무위원회를 소집했다. 베이징을 비롯한 전국의 학생운동 상황이 보고됐고, 심각한 사태로 발전한 학생시위 대처 방안을 토의한다. 후치리, 차오스 등 자오쯔양파와 이에 반대하는 리펑파의 의견 대립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후치리 학생운동의 상황은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많은 요소가 뒤얽혀 있어 분리해내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학생들 사이에 끼어 있는 불순분자들은 소수이긴 하지만, 이 소수의 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차오스 대부분 학생들의 애국심은 인정해 주어야 하지만,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자들은 뿌리뽑아야 합니다.
야오이린 불순한 목적을 지닌 자유 자본주의 분자들이 이미 학생운동을 파고들었고, 동란이라고 부를 만큼 이미 세력이 커졌습니다. 가급적 빨리 이런 사실들을 인민에게 알려야 합니다.
리펑 어제 인민대학 박사과정 학생들의 선언문을 읽어보았는데, 당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었습니다. 자본 자유주의와의 투쟁에 이미 우리가 깊숙하게 관련된 것 같습니다.
양상쿤 수도가 조용하면 전국이 평화롭습니다. 상황을 악화시키는 불순분자들을 색출하는 한편, 대다수 학생들을 단결시켜야 합니다.
● 4월25일/덩샤오핑과 양상쿤의 대화
양상쿤의 친구가 제공한 대화록과 중앙군사위원회 자료, 당 14차 대회 자료 등 3가지 출처에서 구성된 대화록
덩샤오핑 이번 학생운동은 우리의 정치사상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의 4원칙에서 이미 밝힌 바 있지만 자본 자유주의와 정신 오염은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양상쿤 정치사상 작업이 약하고 법 제도가 미흡했습니다. 불법, 부정, 부패는 예상해온 일입니다. 이번 학생운동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사회 조건 속에서 자라난 것입니다.
덩샤오핑 학생운동은 반자유주의 운동이 철저하지 못했고, 정신 오염을 뿌리째 뽑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했어요. 반자본 자유주의 작업이 제대로 마무리되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정신 오염 제거 작업마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습니다.
● 5월6일/자오쯔양과 양상쿤의 대화 5월6일 오후, 자오쯔양이 양상쿤을 방문
자오쯔양 북한에서 돌아와 상황을 파악 해보려고 했습니다. 차오스, 후치리 동지 등과 상의도 했고, 리펑 동지와 의견도 나누었습니다. 제가 보는 사태는 개략적으로 이런 것입니다. 전반적인 흐름은, 당과 개혁을 지지하는 것으로 긍정적입니다. 젊은 학생들은 더 빨리 개혁되고, 한 단계 높은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어요. 민주주의와 법을 통해 이 시위를 가라앉힐 수 있다고 봅니다.
양상쿤 완강한 자유주의자들과, 홍콩과 타이완에서 흘러든 반공산주의 분자 등 일부 외부 세력이 학생들에게 자유사상을 고취시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학생 운동의 주된 흐름은 긍정적입니다.
자오쯔양 잘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혁 추진에 도움이 될 겁니다.
● 5월11일/덩샤오핑과 양상쿤의 대화
덩샤오핑과 양상쿤은 같은 쓰촨성(四川省) 출신이고, 1930년대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1950년대에 함께 베이징의 당 고위간부가 됐고, 문화혁명 때는 같이 숙청을 당하기도 했다.
양상쿤은 어느 정치국 상무위원보다도 오쯔양과 가까운 사이. 둘 다 광둥성(廣東省)에서 근무했고, 여러 모로 정치성향이나 의견이 비슷하다. 학생시위에 대한 민감한 사안을 놓고 양상쿤은 덩샤오핑과 자오쯔양 사이에서 아주 중요한 다리 노릇을 한다.
신분을 밝히지 않은 양상쿤의 친구가 제공한 대화 비망록에서 발췌한 덩샤오핑과 나눈 대화록
양상쿤 1년 전 학생시위와 많은 점이 다릅니다. 이번에는 교사, 언론인, 심지어 공무원까지 많은 이들이 학생들을 지지합니다. 서방세계의 반중국 세력도 끼어들었고, 홍콩과 타이완의 반혁명 조직도 영향을 주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덩샤오핑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소수의 불순분자들이 학생과 인민 사이에 침투해 반부패 구호를 외치고 있습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습니다. 학생들이 무력을 불러들이고 있어요. 걱정됩니다. 인민이 부패를 반대하는 것이면 우리는 당연히 동의합니다.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반부패를 외치는 자들이 섞여 있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그들의 목소리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연막을 치고 있다는 걸 잘 압니다. 진짜 목적은 공산당을 넘어뜨리고 사회주의 체제를 붕괴시키려는 것입니다.
덩샤오핑 동지가 아시아은행에서 연설한 것을 두고 리셴녠 동지가 저에게 전화를 해서 중앙위원회의 목소리가 둘로 갈라졌다고 말했습니다. 천윈 동지도 자오쯔양 동지의 연설문을 보라고 저에게 쪽지를 보냈습니다. 자오쯔양 동지의 연설이 설득력이 있고 감동적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며칠 동안 이 문제를 놓고 생각해봤어요.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까?
양상쿤 며칠 전에 자오쯔양 동지를 만났습니다. 덩샤오핑 동지께 자신의 의견을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4월26일자 사설의 단어 선택(학생 시위를 ‘동란’으로 규정한 것 - 역주)이 너무 가혹했다는 것입니다. 며칠만 있으면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옵니다. 정상회담이 잘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덩샤오핑 고프바초프가 올 때까지는 톈안먼 광장의 질서를 찾아야 합니다. 국제적인 체면이 걸려 있습니다. 광장이 아수라장이면 우리가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양상쿤 톈진이 상황 통제를 아주 잘 하고 있습니다. 리루이환이 분명한 주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대화는 한다, 그러나 법을 어기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학생들의 행진은 용인하지만 사회 질서를 깨뜨리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했습니다. 인민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겠다면서 사실에 입각해 진리를 찾아보자고 설득하고 있습니다. 톈진이 대처를 잘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리루이환은 아주 사려가 깊습니다.
덩샤오핑 그 사람은 철학을 알고 변증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목수 출신이라고 얕잡아봐서는 안 됩니다.
양상쿤 저 개인적으로는 장쩌민 동지의 상하이가 전술적으로 더 대처를 잘 하는 것 같습니다.
덩샤오핑 천윈 동지는 우리가 장쩌민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장쩌민 식으로 학생시위에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리셴녠 동지도 “장쩌민은 4대 원칙을 견지하면서도 동시에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도 옳고, 당에 대한 충성심도 강하며 큰 그림을 볼 줄 안다”는 겁니다. 리셴녠 동지는 장쩌민의 방법론에 전적으로 동의를 표했어요.
양상쿤 장쩌민은 시위에 대처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입니다. 지난번 교통대학에서 장쩌민이 연설하는 걸 봤는데, 마르크스의 어록을 영어로 인용하더군요. 리셴녠 동지께서 아주 감동을 받고, 당 사무위원회에 중앙정부의 모든 부서가 장쩌민의 연설 비디오테이프를 보도록 지시했습니다. 저도 아주 놀랐습니다.
덩샤오핑 군의 정신사상 작업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양상쿤 학생운동이 시작된 다음부터 총정치국에서 주요 군구의 장교와 사병의 정치사상 작업을 위한 지침을 내려보냈습니다. 7개 군구(베이징, 선양 등 중국의 7개 지역 군구 - 역주)와 3부 사령부(총참모부, 총정치부, 총후군부 - 역주)의 지휘부는 정신교육이 잘 되어 있습니다. 불화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덩샤오핑 저와 양상쿤 동지와 자오쯔양 동지, 이렇게 셋이 좋은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 5월13일/덩샤오핑, 자오쯔양, 양상쿤의 3자 대화
5월13일 아침, 자오쯔양과 양상쿤이 덩샤오핑 집을 찾아가 최근 진행된 상황을 보고한다. 자오쯔양이 덩샤오핑을 면담하는 것은 후야오방 장례식 이후 처음이다. 덩샤오핑은 이틀 전 양상쿤과의 대화에서 자오쯔양의 견해를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으나, 자오쯔양은 여전히 4월26일자 사설에 대한 덩샤오핑의 생각을 분명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덩샤오핑 처음부터 소수가 다수를 움직이게 만든 것이 분명합니다. 다수의 감정을 부채질했어요.
자오쯔양 그게 바로 제가 말썽을 일으키려고 학생운동을 이용하는 소수를, 대다수의 학생과 지지자들에게서 분리시켜야 한다고 생각한 이유입니다. 빨리 진정시키려 했다가는 불상사가 생길 것입니다.
덩샤오핑 대화는 좋습니다. 그러나 요점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겁니다. 학생운동이 너무 오래가고 있습니다. 한 달이 다 되어가지 않습니까? 원로들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단호해야 합니다. 나는 경제발전을 하려면 안정이 필요하다고 여러 번 강조를 했습니다. 사태가 이 지경인데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자오쯔양 고르바초프 환영식은 제 시간에 제 장소에서 거행될 것입니다. 대다수의 학생들도 이 점을 잘 인식하고 있으며, 큰 그림을 보고 있습니다. 환영행사를 방해하지는 않을 겁니다. 오늘 오후 언론에 고르바초프 방문의 중요성을 한번 더 강조하겠습니다.
덩샤오핑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이번 사태의 원인이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일반 인민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자오쯔양 시위가 확산되고 있지만, 대학이 있는 일부 시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시골에까지 영향을 끼치지는 않습니다. 농민들은 유순하고 조용합니다.
덩샤오핑 부패 현안을 먼저 치고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최소 10건이나 20건의 사례를 잡아 아주 투명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이 기회에 부패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도대체 이 문제를 풀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지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내가 내린 결론은, 너무 많은 고위 관리와 가족들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몇 년을 두고 얘기를 해오고 있지만, 부패 척결에 진척이 없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인 것 같습니다. 더 놔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번 시위에서 개혁이나 개방을 반대하는 구호는 없단 말입니다.
● 5월16일/정치국 상무위원회 비상회의
5월13일 학생 시위대가 단식 투쟁을 선언했다. 5월16일 저녁,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들(자오쯔양, 리펑, 차오스, 후치리, 야오이린)이 비상회의를 가졌다. 당 원로인 양상쿤과 보이보도 참석했다. 학생들의 단식투쟁 돌입은 사회에 미치는 여파가 컸고, 당 지도부는 해결책 모색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몰렸다. 당 중앙비서실 기록에서 발췌한 대화록이다.
자오쯔양 학생들의 단식 투쟁이 나흘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학생 대표와 대화를 했고 그들의 얘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단식을 중단할 것만 요구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광장은 인산인해입니다. 학생 대표들도 통제할 수가 없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양상쿤 최근 며칠 베이징은 무정부 상태나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학교의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일부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나왔으며 교통조차 통제가 안 됩니다. 무정부 상태나 마찬가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고르바초프 환영식을 공항에서 치러야 할지도 모릅니다.
자오쯔양 북한에서 돌아왔을 때, 4월26일자 논설이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걸 알았습니다. 학생운동이 동란이냐 아니냐 하는 민감하기 짝이 없는 문제는, 민주주의와 법 질서를 통해 점차 일이 가라앉기를 바라면서 우회해가는 것이 최선책이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5월13일 학생들이 단식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주요 요구 항 가운데 하나가 바로 4월26일자 ‘인민일보’ 사설의 공식 견해를 뒤집으라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4월26일자 사설을 개정하고 우리와 학생 사이의 갈등을 해소시켜 사태를 가능한 한 빨리 진정시켜야 합니다.
리펑 자오쯔양 동지, 그건 사실과 다릅니다. 4월26일자 사설의 공식 견해가 대다수 학생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젊은 학생들의 감정을 부추기고 우리의 일부 문제점을 파고들어 학생운동을 이용하려는 소수분자들이 그 사설을 문제삼고 있는 것입니다.
공산당과 사회주의 시스템에 반대하는 정치적 갈등을 부추기고, 이 갈등을 베이징에서 전국으로 확산시켜 국가적 동란을 획책하려는 것입니다.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많은 학생 시위자들이 설사 그 사설을 오해하고 있더라도, 그 사설은 이런 사실들을 드러내 보이는 데 부합하는 것입니다.
자오쯔양 학생들이 여전히 시위대에 가담하고 있는 것은, 학생운동을 ‘동란’으로 규정한 사설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과 정부가 이 운동을 좀더 나은 방향에서 성격을 규정하고 다른 자세를 보여달라는 것이 학생들의 요구입니다. 나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고 봅니다.
리펑 자오쯔양 동지, 4월26일자 사설의 주요 문안은 덩샤오핑 동지가 25일에 말씀하신 것에서 그 핵심 문구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번 시위는 조직적인 계획’으로 이루어진 ‘동란’으로, ‘이것이 진정 노리는 것은 중국 공산당과 사회주의 시스템을 배격하기 위한 것’이며, ‘당 전체와 국가가 심각한 정치적 갈등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 덩샤오핑 동지가 직접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바뀔 수 없습니다.
자오쯔양 덩샤오핑 동지에게 학생운동의 진짜 성격과 학생운동에 대한 공식 견해를 변경할 필요성을 설명해야 합니다.
● 5월17일/정치국 상무위원들의 덩샤오핑 자택회의
자오쯔양 단식을 하는 학생들은 지금 주목을 받고 있기 때문에 양보하기가 힘듭니다. 일이 아주 어려워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학생들의 단식과 요구 사항을 분리해 광장에서 철수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문제가 심각합니다.
양상쿤 아직도 국가와 사회 안전에 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게 동란이 아닙니까? 저는 여기에 있는 사람 중에 이걸 동란으로 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개혁 개방으로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봅니다.
리펑 제가 보기에는 자오쯔양 동지가 사태를 통제하기 힘들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학생운동을 확대시킨 주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봅니다. 자오쯔양 동지가 북한에 가 있을 때 정치국이 자오쯔양 동지의 의견을 물었고, 자오쯔양 동지는 “덩샤오핑 동지의 계획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회신을 보내왔습니다. 4월30일에 귀국한 다음의 정치국 회의에서도 자오쯔양 동지는 4월26일자 사설에 ‘동란’이라는 표현은 물론 덩샤오핑 동지의 언급에 대해서도 지지하는 견해를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런데 불과 며칠 후인 5월4일 오후, 상무위원회의 아무와도 상의하지 않은 채 아시아 개발은행 회의에서 상무위원회의 결정, 덩샤오핑 동지의 말씀, 4월26일자 사설을 무시해버리는 연설을 했습니다.
첫째, 동란의 와중에도 그는 여전히 “중국은 어떤 동란도 용납하겠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둘째, 동란의 목적이 공산당을 파괴하고 사회주의 구조를 붕괴시키려는 것이 분명하며, 그 증거가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고 있는데도, 그는 아직도 시위가 “우리의 근본적 구조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업의 잘못된 점을 제거하기 위한 요구”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셋째, 여러 사실을 살펴볼 때 소수 분자들이 학생운동을 선동하는 것이 명백한데도, 그는 단지 “언제든 선동하는 자들은 있게 마련”이라고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 중앙의 견해에도 위배됩니다.
야오이린 자오쯔양 동지가 어제 왜 고르바초프에게 덩샤오핑 동지에 대해 언급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주어진 상황으로 살펴본다면, 모든 책임을 덩샤오핑 동지에게 떠넘기고 학생들의 목표가 되게 하려는 의도라고밖에는 해석할 길이 없습니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셈입니다.
자오쯔양 그 두 가지에 대해 말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아시아개발은행 연차회의에서 내가 말한 기본적인 의도는, 학생운동을 가라앉히고, 중국에 대한 해외 투자자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내 연설에 대해 모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양상쿤 차오스 후치리 동지들도 모두 좋은 연설이었다는 반응을 보여주었습니다. 리펑 동지도 좋은 연설이라고 했고, 아시아개발은행 대표단을 만났을 때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고르바초프에게 한 말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른 나라의 지도자들을 만날 때에도 나는 당 위원회가 덩샤오핑 동지의 의사결정 역할을 결정했으며, 이는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왔습니다. 덩샤오핑 동지가 은퇴하시기는 했지만 여전히 우리 당에서 힘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세계에 분명히 이해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덩샤오핑 자오쯔양 동지, 5월4일 아시아개발은행 회의에서의 연설은 전환점을 마련해 준 것이었습니다. 그 연설 이후 학생운동이 더 악화되었어요. 우리는 물론 사회민주주의를 원합니다. 그러나 서둘러서는 안 되고, 아직 서구식을 다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만약 우리 10억 인민이 다당 체제의 선거에 돌입하게 될 경우, 문화혁명 때 겪었던 ‘전면적인 내전’ 같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여러분 사이에 이견이 있다는 걸 압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문제는 이견을 어떻게 조종하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뒤로 물러서느냐 아니냐를 결정해야 합니다. 뒤로 물러서면 저들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이고, 물러서지 않겠다면 4월26일자 사설을 우리가 계속 지지하겠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베이징을 이대로 놔둘 수는 없습니다. 원로들이 모두 걱정하고 있습니다. 먼저 베이징의 안정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지역에서도 손을 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철로에 드러눕고, 구타와 파괴, 탈취가 횡행하는데 이게 동란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사태가 계속 진행되면 우리는 집에 갇힐 수밖에 없습니다.
오래 심사숙고한 결과, 인민해방군을 부르고 베이징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계엄령을 선포하는 이유는, 동란을 진압한 후 빠른 시일 안에 정상을 회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건 당과 정부의 회피할 수 없는 의무입니다. 오늘 저는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이 안건을 진지하게 제안하면서, 상의해 주기를 바랍니다.
자오쯔양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않는 것보다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 항상 좋습니다. 그러나 덩샤오핑 동지, 저는 이 계획을 시행하기가 어렵습니다. 난감합니다.
덩샤오핑 소수는 다수에 양보해야 합니다!
자오쯔양 당의 원칙에 따르겠습니다. 소수가 다수에 양보하는 것입니다.
● 5월17일/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 속개
저녁 8시, 중난하이로 돌아온 정치국 상무위는 회의를 속개했다.
자오쯔양 오늘 저녁 회의의 안건은 계엄령입니다.
리펑 자오쯔양 동지, 계엄령 선포는 덩샤오핑 동지가 오늘 아침 회의에서 이미 결정을 내린 사안입니다. 저는 덩샤오핑 동지의 견해를 지지합니다. 이 회의의 주제는 계엄령을 선포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가 아니라, 다음 단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야오이린 덩샤오핑 동지의 계엄령 선포 제안을 강력하게 지지합니다.
자오쯔양 저는 베이징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학생들의 감정이 격앙된 상태에서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은 사태를 진정시키고 일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사태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대립 상태를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후치리 신중히 생각해본 결과, 저도 베이징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에는 반대하기로 했습니다.
차오스 제 의견을 먼저 말씀드렸으면 합니다. 학생에게 더 이상 양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태 해결을 위한 적절한 방법을 여전히 찾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따라서 계엄령 선포에 대해서는, 지지냐 반대냐의 의견을 피력하기가 어렵습니다.
보이보 이 자리는 상무위원회 회의 자리고 양상쿤 동지와 저는 참관자일 뿐입니다. 우리는 투표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덩샤오핑 동지의 계엄령 제안을 지지합니다. 그리고 구두로 ‘예’ ‘아니오’ ‘기권’ 투표를 해서 의견을 한층 분명히 해야 하리라고 봅니다. 이것은 중요한 원칙 문제가 제기됐을 때 우리 당이 전통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방법입니다.
리펑과 야오이린은 찬성, 자오쯔양과 후치리는 반대, 차오스는 기권이었다.
양상쿤 당은 다른 의견도 허용합니다. 오늘 저녁 투표 결과를 덩샤오핑 동지와 당 원로들에게 보고하고 빠른 시일 내에 결의안을 내도록 해야겠습니다.
자오쯔양 제 업무는 오늘 여기서 끝내야 할 것 같습니다. 계속 집무할 수가 없습니다. 학생운동을 보는 제 시각이 덩샤오핑 동지 및 여기 계신 동지들의 의견과 다릅니다. 생각이 다른데 어떻게 총서기직을 계속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또 업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면 여기 계신 상무위의 다른 위원들도 어려워집니다. 따라서 사임을 원합니다.
보이보 자오쯔양 동지, 그 문제는 거론하지 맙시다. 자오쯔양 동지는 오늘 아침 회의에서 소수가 다수에 양보를 한다는 데 동의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무 결정을 내리지 않는 것보다는 어떤 결정이든 내리는 것이 좋다는 말씀도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제 그만 고집을 굽히시지요.
자오쯔양 건강이 좋지 않습니다. 지난 며칠 동안 어지럼증이 있었습니다. 혈압도 낮구요.
보이보 어쨌든 상무위가 합의를 보지 못했으니, 덩샤오핑 동지에게 이 문제를 가져가 해결을 보아야겠습니다.
● 5월18일, 자오쯔양은 학생들을 만나고 집무실로 돌아온 직후 사임서를 작성한다. 서신 작성 후 자오쯔양은 그 편지를 먼저 ‘화급’이라고 써서 양상쿤에게 보낸다. 자오쯔양은 양상쿤이 그 편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내기 전에 양상쿤을 만나길 원했다. 양상쿤은 편지를 읽자마자 자오쯔양에게 전화를 걸었다.
양상쿤 자오쯔양 동지, 이러시면 안 됩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생각해보셨습니까?
자오쯔양 더 이상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양상쿤 당을 곤경에 빠뜨려서는 안 됩니다. 사임하면 사회가 극단화되는 결과를 빚게 됩니다. 더구나 덩샤오핑 동지에게 뭐라 말씀하시겠습니까? 덩샤오핑 동지의 위신을 지켜드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늘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덩샤오핑 동지의 말씀에, 자오쯔양 동지는 동의를 했습니다.
자오쯔양은 덩샤오핑에게도 사임 편지를 썼으나 양상쿤의 만류로 발송을 포기한다. 5월18일 오전 8시30분, 덩샤오핑을 포함한 원로 8명은 정치국 상무위원들과 만나 계엄령 선포를 결정한다.
리펑 자오쯔양 동지가 오늘 참석하지 않은 것은 계엄령을 반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학생들의 시위를 고무시켰습니다.
● 5월19일, 덩샤오핑의 지시에 따라 중앙군사위 부주석 양상쿤은 계엄령하에 베이징에 군대를 배치시킬 것을 하달한다.
양상쿤 말씀하신 대로 중앙군사위의 회의를 마치고 왔습니다. 중앙군사위가 병력 동원의 최종 책임을 맡을 것입니다.
덩샤오핑 베이징에 병력이 얼마나 배치됩니까?
양상쿤 무장경찰 병력 18만 명입니다.
양상쿤은 베이징 병력 배치에 대한 중앙군사위의 보고서를 덩샤오핑에게 전달했고, 최종 명령은 덩샤오핑의 이름으로 내려졌다. 계엄령 선포에도 불구하고 학생 시위는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까지 톈안먼으로 몰려들었고, 사태는 악화일로였다. 덩샤오핑은 지도부와 계엄령 선포 이후의 사태를 논의했으나, 결론은 나지 않았다.
● 6월2일 오전, 당 원로들은 톈안먼의 시위대 무력 진압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고, 6월3일 오후 4시, 양상쿤 리펑 차오스 야오이린은 비상회의를 소집하고 무력 진압을 결정한다. 다음은 5개 결정문 가운데 일부다.
계엄군은 6월4일 오전 1시 광장에 도착, 오전 6시까지 광장의 시위대를 해산시킨다. 계엄군은 작전에 따라 단호하게 임무를 수행하며, 절대 임무를 지연시켜서는 안 된다.
계엄군은 이 명령대로 움직였고, 1989년 베이징의 봄은 결국 피로 물들고 말았다. 그리고 11년 후, 톈안먼 광장을 물들였던 그 젊은 피의 붉은 역사는 ‘톈안먼 보고서’로 비로소 중국 현대사에 자리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