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3년 ‘김대중 도쿄 납치사건’의 일부 진상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밀사였던 이병희 전 무임소장관을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에게 연결해준 인물의 증언으로 최근 공개됐다. 다나카 총리의 핵심 측근으로 ‘리틀 가쿠에이’라고 불렸던 기무라 히로야스씨가 그 주인공. 그는 박대통령의 밀사가 다나카 총리에게 수억 엔이 든 종이 가방을 건네는 장면을 마치 영화를 보듯이 세밀하게 설명하고 있다. ‘신동아’는 일본 시사월간지 ‘문예춘추’ 2월호에 실린 기무라 히로야스의 글을 전문 소개한다. <편집자>
하지만 그때까지 필자는 개인적으로 김대통령을 만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에 관여한 적이 있다.
1973년 8월 8일, 당시 박정희 정권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일본으로 피신한 김대중씨는 구단(九段)에 있는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서 누군가에 의해 납치당했다. 김씨가 다시 모습을 나타낸 것은 8월 13일. 장소는 서울에 있는 김씨의 자택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김대중 납치사건’이다.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정치가가 자유 의지에 의한 귀국이 아니라 납치됐다면 그 책임은 한국에 있는 것이며, 사건 발생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원상회복’, 즉 김대중의 재 도일(渡日)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일본 국내에서 높았다. 그것은 법치국가로서 당연한 주장이었다.
그러나 한국측은 가까스로 신병을 확보한 김대중씨를 또다시 해외로 내보내기를 꺼렸다. 게다가 김대중씨는 8월 16일부터 자택 연금 상태였다.
따라서 한일관계는 첨예하게 대립하게 됐다. 같은 해 11월2일, 한국의 김종필 당시 총리가 일본을 방문해 다나카 총리에게 사죄하는 ‘정치 결탁’이 이루어지기까지 공식·비공식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복잡미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한국과 일본을 부지런히 왕래했다. 여기서 소개할, 필자의 직접적인 중개 하에 전개되는 내용은 이 복잡한 교섭의 종막에 해당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정치적 결탁 직전, 메지로(目白)에 있는 다나카 수상의 관저에서 한국에서 온 밀사가 다나카 총리에게 박대통령이 보낸 친서와 수억 엔의 현금을 건네주었다. 그 중개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필자였다.
필자는 지난 27년간 이 사실을 가슴속에 비밀로 간직한 채 지내왔다. 이 사실을 입밖에 낸다면 법적으로 문제가 될 것은 물론, 정계를 뒤흔드는 대 스캔들이 될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사건으로 발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필자가 스승으로 모셨던 다나카 총리를 비롯하여 이 숨겨진 드라마의 주역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필자 또한 올해로 74세가 된다. 필자는 이 사실을 공표함으로써 야기될 파장보다도 역사의 중요한 한 장면이 어둠 속에 파묻혀 사라져버리는 것이 더 두려웠다. 이제 그런 나이가 된 것이다.
그때 납치사건을 둘러싼 한일 교섭의 키를 잘못 잡았더라면, 그 후 김대중씨가 걸어갔을 여정은 지금과는 같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필자는 김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뉴스를 접하면서 하게 됐다. 한국에서 온 손님이 두 개의 종이 가방에 넣어 건네준 수억 엔, 그 무게가 27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필자의 손에서 다시금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밀사’의 전화
1973년 가을, 필자의 자택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는 비교적 정확했지만 외국인 억양이 느껴지는 일본어였다.
“기무라 선생, 오랜만입니다. 저, 이병희입니다.”
“아! 네, 정말 오랜만이군요”하고 필자는 대답했다. 한국의 무임소(無任所) 장관이었던 이병희와는 그 지방 유지인 한 재일교포를 통해 알게 된 사이였다. 당시 니가타 현회(縣會) 의원이었던 필자는 60년대 말경 동료 의원의 적극적인 권유로 니가타현 한일 친선협회를 만들어 부회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이 협회의 발족은 전국적으로 빠르게 진행됐고, 이때 필자가 만든 규약이 전국의 한일 친선협회의 모델이 됐다. 이 협회와 관련된 일로 이씨와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이씨는 당시 김종필 총리와 육군사관학교 동기였다. 김총리가 중앙정보부(KCIA) 부장 시절에는 서울지부장을 역임했다. 한국과 일본의 국회의원으로 결성된 한일 의원연맹의 간사장을 맡고 있기도 했으며, ‘일본담당 장관’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일본과의 교류에 열성적이었다.
그는 “잠깐 상의드릴 것이 있는데 좀 만나뵐 수 있을까요?”라며 지금 일본에 있다고 했다. 니가타현 근교에 있는 필자의 자택까지 이병희가 직접 찾아오기로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혼자서 니가타까지 찾아온 이씨의 ‘용건’은 그해 여름에 있었던 김대중 납치사건에 관한 것이었다. 그때까지 필자는 이 사건에 그렇게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필자가 관여해서 해결될 차원의 사건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김대중 사건에 대처하기 위해 저희는 실로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선생님, 뭔가 좋은 해결방법이 없겠습니까?”
이병희는 그렇게 말하며 사건 이야기를 꺼냈다. 필자는 “좋은 안(案)이나 마나 저같은 사람이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도 내심 ‘오죽하면 날 찾아 왔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역으로 “뭔가 대안이 있는 겁니까?”라고 되물었다.
이씨는 조금 뜸을 들인 후 “사실은 말이죠…”라고 말을 꺼냈다.
“선생께서는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의 동향(同鄕)이면서 가장 가까운 제자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제가 총리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 일이라면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후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필자는 일찍이 면장 시절부터 다나카 총리와 안면이 있었고, 가리와(刈羽)면의 월산회(越山會) 회장을 역임했으며, 이씨를 만나던 당시에는 이른바 그 지방의 정책 담당을 맡고 있었던 터였다.
“뭐, 그런 일이라면 어려울 것 없습니다”라고 필자는 대답했다.
“그분은 누구든지 만나줍니다.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대신 진정하러 가는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라는 점만은 감안하셔야 합니다. 메지로에 있는 수상 관저로 제가 모시고 가는 것까지는 어떻게 해볼 수 있지만, 어딘가 요정같은 곳으로 모셔오거나 하는 것은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문제가 좀 복잡해지거든요.”
우리가 보통 때 진정을 하러 드나드는 것과 같은 형태라면 다나카 총리처럼 쉽게 만날 수 있는 정치가도 아마 드물 것이다. 사전에 약속을 할 필요도 없다고 말하는 필자의 대답에 만족한 것인지 몰라도 이병희는 그날 그대로 돌아갔다.
”선물을 준비해 가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이씨는 다시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이번에는 구체적인 날짜를 정하자는 내용이었다.
납치사건으로부터 한 달 이상이 지난 때였고 한일 교섭은 이른바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다. 다나카 이소지(田中伊三次) 법무대신 등은 ‘원상회복’을 주장하고 있었는데, 한국측은 사건에 연루됐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외교관을 차례로 귀국시키면서 “조사 경과를 소상하게 보고하기 바란다”는 일본측의 요구에도 응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전 한국대사였던 가네야마(金山政英)와 한일협력위원회 회장으로 한국과 두터운 연결 파이프를 가지고 있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 등이 서울을 방문해 일본측 ‘밀사’로서 암약하고 있었다.
이병희가 다시 니가타에 온 것은 10월 어느 날이라고 기억된다. 그때는 아직 상행선 신칸센(新幹線)이 개통되기 훨씬 전이었기 때문에 필자 집까지는 도쿄에서 나가오카(長岡)까지 특급으로 네 시간을 타고 와서, 나가오카에서 다시 택시를 타고 40분이 걸렸다. 거의 한나절이 걸리는 그 일정을 한 나라의 장관이 수행원도 없이 찾아오는 것을 보고 필자는 한국 정부의 필사적인 몸부림을 감지할 수 있었다. 속수무책인 사안의 해결책을 다나카 총리를 만나는 것으로 어떻게든 타결해보려는 의지가 느껴졌던 것이다.
그날 정오가 지났을 무렵, 필자는 응접실에서 이씨를 맞이하여 준비해 놓은 불고기와 브랜디를 대접했다. 마침 점심 때가 되기도 했고, 그날 이야기가 시간을 요할 것으로 생각됐기 때문이다.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방에서 필자는 그가 왜 다나카 총리를 만나고 싶어하는지 물어보았다.
“‘김대중 사건’을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서는 최고위직 인사와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 과정에서 현 상황을 타개해 나갈 수 있는 실마리가 잡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원상복귀라고 하는 것은 정치적 조치로서는 당연한 것이지요. 일본 처지에서 보면 국가의 주권이 짓밟히고 있는 것입니다. 왜 김대중씨를 일본으로 돌려보내지 않는 겁니까?”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물었더니, 말꼬리를 흐리면서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다고 적당히 얼버무렸다. 사실 한국측에서도 자신들의 입장을 털어놓기 힘든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다나카 총리와 만나는 일정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병희 자신은 아무 때나 상관없다고 하기에 필자의 스케줄을 감안하여 세 가지 정도로 가능한 날짜를 정했다. 아무리 사전에 약속이 필요없다고는 하지만 한 나라의 총리로서 외유나 출장이 있을 수 있다. 총리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지금은 외유 중이지만 10월 11일에는 귀국하기 때문에 그 후 아침나절에는 자택에 계시다고 했다.
다나카 총리 관저에 진정을 하러 가는 것은 대부분 이른 아침이었다. 매일 수십 명의 사람들과 면회를 하기 때문에 이른 아침 외에는 총리를 만날 시간이 나지 않았다. 월산회 일로 면회할 때에도 보통 8시 정도에는 관저에 도착해 있었다.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이씨는 필자에게 그 전날 도쿄에서 일박하면서 자신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요청해왔다. 사실 전날 도쿄에서 숙박하지 않으면 아침 일찍 총리 관저에는 도착할 수가 없었다. 이씨는 덧붙여서 시바(芝)의 증상사(增上寺) 옆에 프린스 호텔이 있는데, 그곳에 방을 준비해 놓겠다고 했다.
일정을 대충 결정을 해놓고 나서 이씨는 느닷없이 총리에게 선물을 싶다고 했다. 필자는 아무 생각하고 없이 “그러시지요”라고 대답했다.
필자는 그 선물이 필시 김치나 선물용 과자상자 정도로 생각했고, 총리가 무엇을 선호하는지 묻기 위해 꺼낸 말이라고 생각하여 “선물로 뭘 준비하셨는데요?”하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이씨는 “글쎄, 그렇게 짐이 되지 않는 것으로 ‘대행’하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대행’이라는 익숙하지 않은 단어를 듣고 필자는 순간 자신이 얼마나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씨가 말하는 ‘선물’이라는 것은 현금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김대중 사건과 관련하여 거금이 오고간 사실이 만일 세상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큰 문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순간 필자는 그 이상 깊이 개입하면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선물을 가지고 가는 것은 상관없겠지요”라는 말로 얼버무렸다.
그랬더니 이씨는 “총리와 부인, 두 분께 준비를 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필자는 뭔지 모를 불안함을 느끼면서도 ‘어디까지나 선물을 가지고 가는 것뿐이다’ 하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한국의 현직 장관이 이런 촌구석까지 일부러 찾아와서 필자에게 부탁하는 청을 거절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불안감을 씻어주었다.
그날은 둘이서 브랜디를 한 병 비웠는데 이병희는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키가 175cm 정도 될까, 필자와 같은 세대로서는 비교적 큰 체구였고, 온화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끝까지 일관했다.
그로부터 열흘이 지나 총리 관저를 방문키로 예정된 이틀 전, 이씨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호텔 룸 넘버를 알려주며 모든 것을 다 조치해 놓았으니 프런트에 들르지 말고 직접 방으로 올라오라는 내용을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나카 총리와의 인연
필자와 다나카 총리와의 인연은 필자의 부친대(代)로 거슬러올라간다.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나카 가쿠에이가 ‘젊은 피의 절규’라는 캐치 프레이즈를 내걸고 중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때 가리하네 면의 면장을 하고 있던 필자의 부친이 응원차 나섰다. 당시 28세였던 다나카는 놀랍게도 당선됐다.
그 직후에 다나카 가쿠에이와 접촉을 갖게 된 것은 필자가 34세로 역시 가리와의 면장선거에 입후보했을 때였다. 엄청난 적자를 내면서 면의 재정을 위기에 빠뜨린 현직 면장과의 한판 승부였는데, 선거 1주일 전에 다나카 대의원이 사람을 시켜 “이미 승부는 결정났으니 포기하라”고 현직 면장에게 귀뜸했다.
필자는 면장으로 당선된 후 다나카 대의원을 찾아가 “의료비를 인상하면 국민들은 죽게 됩니다”라든가 자민당의 농업정책을 비판하기도 했다. 불필요한 부분까지 솔직하고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필자를 다나카 대의원은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다. 또한 예산의 절반을 빚갚는 데에 탕진하여 적자로 운영되던 면 재정을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단번에 재건해낸 필자를 지켜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면장 연임 3기 중반 정도에 다나카의 지지로 현회 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됐다. 이후 월산회에도 가입하여 지방지부의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나가타니(長谷川信), 사쿠라이(櫻井新)와 더불어 월산회 현의회의 ‘세 마리 까마귀’라고 불린 적도 있었다. 다나카가 ‘기무라는 내 후계자’라고 말했다고 누군가에게 전해들은 적도 있다. 그것이 립 서비스였다고 해도 적어도 다나카 총리의 측근에 해당하는 존재였다는 것은 자타가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1973년 10월, 이병희와 함께 메지로의 관저를 방문했을 때 필자는 44세, 다나카 총리는 55세었다. ‘결단과 실행’을 구호로 내걸고 총리에 취임한지 1년, 그 전해인 72년 9월에는 일중(日中) 교류 정상화도 성사시켜 실로 정치가로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시기라고 할 수 있었다.
드디어 그날이 다가왔다. 이병희로부터 연락을 받고 10월 하순 어느 날 오후 도쿄로 상경하여 시바의 프린스 호텔로 향했다. 통고받은 대로 프런트를 통하지 않고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미리 가르쳐준 룸 넘버는 긴 복도 거의 끝에 있었다. 지정된 방 앞을 한 남자가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그 남자는 필자를 보고 “기무라씨입니까?”라고 말을 걸어왔다. 이씨의 부탁을 받고 필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남자는 방 열쇠를 건네주고는 총총히 사라졌다.
신문지에 둘둘 싸인 사각 뭉치
저녁이 되자 이병희씨가 필자의 방에 나타났다. 저녁을 함께 하자며 필자를 이끌고 호텔을 나와 택시를 타고 긴자(銀座)로 향했다.
“여기입니다”라는 말을 듣고 내린 곳은 일반 음식점이 아니었다. 표면이 모두 크고 두꺼운 유리로 된, 당시로서는 최첨단 빌딩이 눈앞에 나타났다. 당시 제법 성공한 재일교포 금융 브로커의 건물이라고 했다. 벽에 죽 걸려 있는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샤갈과 피카소의 그림들이었다. 저녁이라 바깥에 있는 입구의 문은 닫혀 있었고 우리는 뒤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안내를 받고 6층 회장을 통과했다. 다다미 스무 장 넓이의 방에 다다미가 깔려 있었고, 한가운데에 둥근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원래 음식점이 아닌 곳을 그날 특별히 필자를 위해 연회석으로 꾸며놓은 것 같았다. 그러나 더욱 놀라웠던 것은 그곳에 한복을 입은 기생이 대여섯 명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접대 대상은 필자와 호스트인 이씨 두 사람뿐이었다. 양쪽에서 시중을 든다 해도 남아돌 판이었다.
“일본에 이런 기생이 다 있었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이병희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아니오, 한국에서 데려왔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이거, 대단한 환대를 받게 되는군요”라고 말하며 필자는 한국정부의 위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식사 자리에서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시종 일관했다. 그 다음날 있을 일에 대해서는 서로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두 시간 정도에 걸쳐 식사를 마친 뒤 이씨는 택시로 필자를 호텔까지 전송해주었다.
방으로 돌아가 잠이 들었는데 새벽 1시 정도에 눈이 떠졌다. 문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렸던 것이다. 문쪽으로 다가가 살짝 바깥을 엿보니 양복을 입은 남자 두세 명이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나를 발견하고는 ‘앗!’ 소리를 내며 놀라는 기색이었다. 필자도 놀라 곧바로 문을 닫았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므로 보디가드를 붙인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지나치게 경계가 삼엄하다고 생각하며 침대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고 나서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어 아침까지 푹 잤다.
다음날 아침 7시가 지나자 이병희는 필자의 방으로 찾아왔다. 양손에 큰 종이 가방을 무거운 듯 들고 있었다. 가판대 등에서 파는 비닐로 코팅된 두꺼운 종이 가방이었다. 그때 필자는 ‘아, 저것이 예의 그 ‘선물’이로구나’하고 생각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식사는 하셨습니까?”
이씨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온화한 말투로 말을 건네며 필자 쪽으로 다가왔다. 식사를 마쳤다는 말을 하며 무심코 종이 가방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살짝 엿보았더니 신문지로 반듯하게 포장돼 있는 사각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예의 그 선물은 커다란 종이 가방의 손잡이 부분까지 가득 채워져서 불룩했다.
사실 필자는 1년 전쯤에 시라자키 원자력발전소의 용지 매각 대금을 전해준 적이 있었다. 그때의 금액이 약 5억 엔이었는데 그것과 거의 같은 크기였다. 종이 가방 하나에 약 2억 엔에서 2억5000만 엔 정도가 들어간다. 아무리 줄여 어림잡아도 합친 금액이 4억 엔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대단한 금액이었다.
필자는 그때 필자의 역할은 이 한국의 장관을 다나카 총리에게 소개해주는 것까지라고 생각했다. 그 후에는 다나카 총리가 이 건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이다. 그것은 필자가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나카 총리가 어떻게 나올 것인가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병희씨와 필자는 잠시 후에 호텔을 나섰다. 늦어도 8시 정도에는 총리 관저에 도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밖으로 나오니 가을 하늘이 푸르렀다. 전날부터 쾌청한 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씨는 호텔 앞에 서 있는 택시들을 유심히 살피더니 무언가를 선별하는 것 같았다.
“저 택시가 좋겠군요. 저걸 탑시다.”
이씨가 택시 한 대를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죽 늘어서 있는 택시 가운데에서도 가장 낡아빠진 차를 선택한 것처럼 필자에게는 느껴졌다. 눈에 띄지 않게 위장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씨는 종이 가방을 꼭 끌어안고 차를 탔다.
시바의 호텔에서 메지로까지는 30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우리가 도착하자 메지로의 다나카 총리 관저는 늘 그랬듯이 찾아온 내방객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내방객들이 우선 거치게 되어 있는 다다미 30장이 넘는 넓이의 대기실 중앙에는 거대한 테이블이 놓여 있었는데, 그곳에는 더 이상 앉을 공간이 없었다. 한번 둘러보니 20∼30명은 족히 될 것 같았다. 그 중에는 국회의원도 몇 명 눈에 띄었다.
현관을 들어가면 곧바로 우측에 층계가 있고, 그 밑에 빈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 종이 가방을 놓기로 했다. 커다란 종이 가방을 두 개나 들고 있으면 오히려 의심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종이 가방 위에 필자가 입고 있던 코트를 올려놓았다. 그런 곳에서 물건을 집어갈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필자는 대기실 구석에서 마치 목욕탕 카운터처럼 된 곳에 앉아 있는 야마다(山田泰) 비서관에게 인사를 하고 이병희와 다음 칸에 들어가서 순서를 기다렸다.
매일 아침 넘쳐나는 내방객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관저에서는 독특한 시스템이 운영되고 있었다. 우선 내방객은 접수를 받는 야마다 비서에게 방문 내용을 전한다. 그러면 야마다 비서는 그것을 작은 종이에 써나간다. 이 리스트를 위한 전용 종이도 따로 주문 제작한다. 내방객이 많은 날은 이 종이가 몇 장이 되기도 한다. 드디어 다나카 총리가 자택에서 게다(下馱)를 신고 면회하는 응접실에 들어갔다.
야마다 비서가 전하는 내방객 리스트를 보면서 다나카 총리는 독특한 걸걸한 목소리로 “어이∼, ○○씨!” 하며 차례로 호명을 한다. 특별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면회시간은 매우 짧다. 마치 컨베이어 벨트가 지나가는 것처럼 다나카 총리는 매일 진정이나 부탁을 하러 오는 몇십 명의 사람들과 만나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소변을 보러 간 이씨가 얼굴을 감추다시피하며 돌아왔다. 이유를 물었더니 “후네다(船田中) 의장(실제로는 이미 중의원을 물러났지만)이 와 있다면서 허겁지겁 신문으로 얼굴을 감추었다.
필자가 “후네다 선생을 잘 아십니까?”하고 묻자, 이씨는 “한일 친선협회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한일 의원연합회의 간사 일을 맡고 있는 이씨는 일본 국회의원 중에 아는 얼굴이 꽤 있었다.
한 시간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슬슬 이름을 불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던 차에 야마다 비서가 우리 쪽으로 날 듯 달려왔다. “기무라씨, 잠깐 좀 봅시다”라며 필자를 별실로 데리고 갔다.
“기무라씨가 한국의 고관을 데리고 왔습니까?”
별실에 들어서자마자 야마다 비서는 이렇게 물었다. 비서는 이어 “사실은 공안부와 외무성으로부터 지금 총리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이쪽에 한국의 고관이 와 있는 것으로 아는데 정식 루트를 거치지 않는 외교는 삼가주기 바란다고 주의를 주는 내용이었습니다.”
필자는 공안부의 정보수집 능력에 혀를 내두름과 동시에 입장이 난처하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필자는 “아니, 한일 친선협회의 간사장을 모시고 온 것뿐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오히라에게도 줘야겠지‥”
필자가 니가타현의 한일 친선협회 부회장이라는 사실은 야마다 비서나, 다나카 총리도 알고 있을 터였다. 니가타 현의 협회 간사장을 모시고 왔다고 말해주기를 기대한 것이었다. 필자에게도 한국의 현직 장관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이상 체면이라는 것이 있었다. 회견의 결말이야 어떻게 되든 간에 그를 다나카 총리와 만나게 해주는 것까지는 필자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타의는 없습니다. 만나게만 해주시면 그것으로 족합니다.”라고 거듭 부탁하자 야마다 비서는 “흠, 그래요. 그렇다면 다시 한 번 각하께 여쭈어보지요”라며 되돌아갔다. 필자는 그대로 별실에서 그를 기다렸다. 야마다 비서는 곧바로 돌아왔다.
그는 지금 한일 관계가 매우 미묘할 때이므로 총리께서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아 한다는 말을 전하며 내방객이 모두 돌아갈 때까지 기다릴 수 없겠느냐고 의향을 물어왔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기다리겠다고 했다. 총리도 난처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까지 아직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잠시 후 “어이∼, 기무라씨!” 하는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방에는 내방객이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조금 전까지의 북적거림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진 대기실을 지나서 다나카 총리가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로 향했다.
필자는 이병희씨를 먼저 총리가 기다리는 응접실에 들어가게 한 후 층계 밑에 놓았던 종이 가방을 가지러 갔다. 들어올린 종이 가방은 꽤 무거웠다. 종이 가방 하나에 분명 2억 엔은 들어 있음직했다. 필자는 응접실의 미닫이문을 열고 방에 들어가서 종이 가방을 입구 바로 옆에 내려놓았다.
감색 양복 차림의 다나카 총리는 고개를 숙인 채 당일의 내방객 리스트에 펜으로 무언가를 써넣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고개를 들어 이병희씨를 알아보고는 “아! 자넨가?” 라고 알은채 했다.
“자, 앉아요.”
평소와 다름없는 친근한 태도였다. 물론 총리가 이씨를 알고 있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이병희씨를 이미 알고 계시는 것 같아 잘되었네요. 제가 새삼 소개할 필요가 없겠는데요”하고 말했더니 “그럼, 그럼, 알고 있고 말고” 했다.
“오늘은 잠시 상의드릴 것이 있다고 해서 함께 왔습니다.”
필자가 이렇게 말하자 총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필자의 ‘임무’는 그것으로 끝났다. 이야기가 복잡해질 것 같아서 자리를 피하려고 물어보자 다나카 총리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아니, 괜찮아. 거기 그대로 앉아 있게“ 라며 필자를 방에 그대로 머무르도록 명령했다.
그때까지 침묵하고 있던 이병희씨는 방의 입구에 있던 종이 가방을 가리키며 “선물입니다. 하나는 부인께 전해주십시오”라며 말을 꺼냈다. 다나카 총리는 “그래, 그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씨는 천천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박대통령의 친서입니다.”
봉투에서 나온 것은 일본 고유의 새하얀 와시(和紙)에 쓴 편지였다. 총리는 양 손으로 편지를 열어보고는 “흠, 흠, 흠…” 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편지를 읽어 나갔다. 내용은 엿볼 수 없었지만 일본어로 쓰여 있는 것 같았다. 총리가 편지를 다 읽을 때까지는 1분도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마지막까지 읽고 난 총리는 얼굴을 들더니 “박대통령께서는 안녕하신가?”라고 물으며 지체없이 “색지(色紙)에 쓸까?”라고 말했다. 절묘한 순간이었다.
그 말을 듣고 직감적으로 ‘수령증 대신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편지를 잘 받았다, 선물도 잘 받았다는 의미의 색지인 것이다. 이 사람은 돈만 있으면 나라도 팔아먹을 사람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필자는 그 순간 어찌할 수 없는 전율로 몸을 떨었다.
이병희는 “아니오, 색지는 괜찮습니다”라고 손을 저으며 사양했다. 나중에 증거물로 남을 일은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 잠시 동안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눈 것 같은데, 그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씨는 오래 머무를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라고 인사한 뒤 얼른 일어났다. 다나카와 이씨의 대면은 시간으로는 5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필자는 총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잠시 남아있기로 했다. 그러자 총리는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선물’ 쪽을 흘깃 쳐다보고는 “오히라에게도 하나 줘야겠지”라고 중얼거렸다. 오히라는 말할 필요도 없이 당시의 외무부 장관으로서 다나카 총리와 맹우(盟友)지간이었던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를 말한다. 필자는 ‘부인’이라고 지칭한 사람이 바로 정치상의 파트너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다나카 총리가 왜 필자에게 그 말을 흘렸는지는 지금도 알 길이 없다. 다나카는 선거 때가 되면 “1000만 엔 가져가게“라고 하면서 고무 밴드로 묶은 지폐다발을 아무렇게나 싸서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한국으로부터 받은 그 돈도 총리 개인 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은연중에 시사한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그저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그 후 이 돈이 실제로 오히라에게 전달됐는지에 대해서는 들은 바 없다.
필자가 응접실을 나와 구두를 신고 있을 때 누군가를 부르는 다나카 총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금고담당 비서인 에노모토를 부르는 소리였다. 그에게 돈이라도 세게 하려는 것일까, 라는 생각은 했지만 뒤돌아서 확인은 하지 않았다. 다나카 총리는 필자가 있을 때는 종이 가방을 만지기는커녕 내용물을 확인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해 8월부터 다음해 3월에 걸쳐 에노모토 비서는 록히드 사로부터 받은 뇌물 5억 엔을 옮기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병희씨는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필자가 “차를 부를까요?”하고 물었더니 “아니, 택시를 타겠습니다”라고 했다. 필자는 이씨를 배웅하고 다나카 총리 관저로 되돌아왔다. 이미 다나카 총리는 자리를 뜨고 없었다. 야마다 비서와 한 시간 가량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뒤에 필자도 그곳을 나왔다. 이어지는 토·일요일을 도쿄에서 보낼까 생각하다가 그대로 우에노(上野) 역으로 향했다. 이것이 그날 아침에 일어난 일의 전모다.
김대중씨가 서울의 자택에서 연금상태로부터 해방된 것은 며칠 후인 10월26일의 일이었다. 그리고 다음달인 11월2일, 김종필 국무총리가 일본을 방문하여 다나카 총리를 만나서 정식으로 김대중 사건에 대해 사죄했다. 그 때 김종필 국무총리를 수행한 일행 중에 이병희 장관도 있었다. 12월3일, 사건의 책임을 지는 형태로 김종필 내각이 총사임한 뒤에도 이병희씨는 무임소장관 자리에 1975년까지 머물러 있었지만, 필자는 그날 이후 이병희씨와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다나카 총리와도 그 후로는 이 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기회가 한 번도 없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한국으로부터 거액의 돈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받은 다나카 총리를 필자는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날부터 27년이 지난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지게 됐다. 다나카 총리가 그때 이병희씨를 거절했더라면 김대중씨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다나카 총리는 ‘선물’에만 연연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일 양국의 목을 조이고 있던 사슬을 제거하려면 그 방법 외에는 없다는 것을 알고 한일 정상끼리 호흡을 맞추어 정치 결탁을 위해 손을 잡았던 것이다. 그 마지막 장면이 필자가 목격한 박대통령의 친서와 ‘선물’을 건네주는 장면이 아니었을까. 단호한 결단력과 금권 정치가, 다나카의 두 얼굴이 동시에 나타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 정치 결탁의 거의 1년 후인 1974년 11월, 금맥(金脈) 문제를 추궁당한 다나카 총리는 부득이 내각 총사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76년에 록히드 사건이 발각된 것이다.
필자의 운명도 암전되었다. 1977년, 필자의 중재로 농협과 거래를 시작한 금융업자의 사기사건에 휘말리게 되어 공범으로 체포된 것이다. 당시 록히드 사건의 재판을 받고 있던 다나카 전 총리는 필자에게 록히드 사건의 주임 변호사이기도 했던 하라나가(原長榮) 변호사를 보내주었다. 필자는 두 번을 역임했던 현회 의원을 그만두고 월산회에서도 손을 뗐다.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가 세상을 떠난 지 7년이 됐다. 김대중씨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노벨상을 수상하고 김종필씨는 아이러니하게도 연립 여당의 일원으로 김대중 정권을 지탱하고 있다. 이 사건의 ‘그림자 주역’이었던 이병희씨는 1997년 1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