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을 해본 사람이거나 지금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이런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지난해 11월 취업정보 포털 사이트 ‘잡코리아(www.jobkorea.co.kr)’가 직장생활을 해본 구직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회사생활보다 프리랜서로 일하고 싶다’는 응답자가 87%나 됐다. 또한 73%는 ‘가능하면 현재 다니는 직장에서 평생 일하고 싶지 않다’고 답해 상당수 직장인들이 현재 직장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인생이라는 게 어차피 시간으로 이뤄지는 것이라면 그 시간을 내가 지배해야 ‘내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시간을 다른 사람이 지배하거나 내가 누군가의 보조자로 지내야 한다면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정말 특별한 경우 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었던 게 지금까지의 현실이다.
삶과 일의 일치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한낱 ‘희망사항’에 머물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그것이 아무에게나 현실적으로 가능한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세상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변해버렸다. 지난해 출간된 ‘21세기 유망직업 100선(100 Best Careers for the 21st Century)’의 저자 셸리 필드는 “21세기에는 누구나 자신의 영혼을 만족시키면서 지갑도 두둑하게 만들 수 있는 직업을 갖게 될 것”이라면서 앞으로 일의 형태는 자영업(self-employed) 내지 프리랜서, 재택노동이 주류를 이룰 것이라 했다.
99년에 나온 ‘재택노동(Working from Home)’의 저자 폴 에드워드는 “80년 미국 인구 센서스에서 22만 명에 불과했던 재택노동자 수가 97년 노동인구조사에선 무려 770만 명으로 늘어났다”며 이런 추세는 갈수록 빨라질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산업구조와 함께 일의 형태와 내용이 과거와는 아주 다르게 바뀌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 이유로 들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삶과 일이 일치’하는 시대를 맞았다. 간단치 않은 다양한 욕구를 지닌 인간은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일을 떠날 수 없다. 그러므로 문제는 어떤 조건에서 그것을 해내느냐 하는 것인데, 개체들은 이제야 제 뜻에 따라 일을 기획하고 진행하며 그 결과에 책임지는, 그리하여 일의 주인이 되고 삶의 주인이 되는, 진정한 의미에서 ‘개체의 시대’를 맞은 것이다. 그것은 모두가 경영자(employer, 이 경우엔 ‘self employed’가 아니라 ‘self employer’가 돼야 할 것이다)가 될 수 있는 사회가 도래한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류문명사는 어떤 의미에선 일하는 방식의 변화사라 할 수 있는데, 삶과 일의 일치를 이루며 작은 개체들이 일의 주인이 되는 이런 상황은 역사의 진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이런 시대를 맞은 배경에는 우선 고도 산업사회로의 이행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에 따라 단순 반복작업은 거의 다 기계에 맡겨졌고 무인공장까지 등장해 인간의 손이 기계의 부속품 노릇을 하지 않게 되면서 나만의 것, 내 몸과 내 취향에 맞는 것, 내 개성을 아주 잘 드러낼 수 있는 것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섬세한 인간의 손길을 기다리는 서비스산업이 꽃핀 것이다.
과거에는 1, 2차 산업으로 분류됐던 농수산업이나 제조업도 지식·정보화가 속속 진행되면서 사실상 서비스산업의 성격을 띠게 됐으니 개체들의 활동범위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따라서 이제 굴뚝산업과 닷컴의 구분은 의미가 없어졌다. 닷컴에서 하는 일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굴뚝산업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이다.
수요의 다양화가 서비스산업의 발전을 가져왔다면 서비스산업의 융성은 소비자가 생산에 직접 참여하는 ‘생산소비자(prosumer)’라는 이름의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켰다. 생산과 소비의 융화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맞춤생산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 시대엔 개개 소비자의 취향과 특성을 파악, 자사의 제품이나 서비스에 신속하게 반영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유능한 사업가가 된다. 다시 말해 시장의 변화에 남보다 한 발 먼저 대응하는 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기업이라고 해서 여러 사람들이 모여 만든 것만 생각해선 안 된다. 1인 기업도 염두에 둬야 한다. 시장의 반응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것도 1인 기업의 특장점이다.
다음으로는 인터넷의 확산을 들 수 있다. 인터넷의 보급으로 자본과 조직이 없더라도 아이디어만 있으면 누구나 사이버 공간에 숍을 개설하고 고객과 만나 상담도 하고 거래도 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졌다. 기존 조직 역시 인터넷을 이용해 고객은 물론 무수한 프리랜서, 자영업자들과 만난다. 아웃소싱이 그 좋은 예다.
選職의 시대가 왔다
기업의 변신도 빼놓을 수 없다. 기업은 개성과 질을 찾는 소비자들의 요구에 부응해 소품종 대량 생산체제에서 다품종 소량 생산체제로 이행해야 했고, 그 과정에 분사(分社)와 아웃소싱(外注)을 추진하는 등 변신의 의지를 보였다. 어떤 경우에는 자사의 특정부문을 독립시켜 독자 생존의 길을 걷게 하기도 했다. 제조업의 한 부문이었던 광고·홍보업무를 떼내 독립회사로 나서게 하는 것이 그런 예다.
그렇게 독립한 홍보회사는 생존을 위해 모기업의 일뿐 아니라 타사의 일감도 수주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모기업과 경쟁관계에 있는 회사의 일도 맡는다. 필요하다면 자기네 직원을 그 회사에 파견해 일하도록 한다. 가령 LG전자의 홍보팀이 독립해 나가 LG전자의 홍보관련 업무는 물론 삼성전자나 현대전자의 홍보업무까지 맡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아직 이런 사례가 흔치 않지만 미국에선 허다하다.
이럴 때 영업상 알게 된 기업의 비밀보호가 문제가 될 수 있는데, 지금까지 변호사 세무사 의사 등 일부 전문직에 적용됐던 고객정보 유출금지 의무조항을 이들에게도 적용하면 될 것이다. 이제부터는 소속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소속은 형식이고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알맹이는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은 사회·경제적 변화로 인해 직업의 종류는 날로 늘어나고 있다. 노동부 산하 중앙고용정보관리소가 최근 발표한 ‘2001 한국직업사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직업 수는 1만2306개로 나타나 최근 크게 늘어난 것으로 밝혀졌으며, 전세계적으로 본다면 20만 개에서 30만 개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중에서도 전문가들이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유망직업은 대개 서비스업에 관련된 것인데, 여기에는 개인주거 간호사, 의학 및 건강 서비스관련자, 언어치료사, 향기 치료사, 건강정보관리자, 급식전문가, 호스피스 전문 간호사, 운동처방사, 일반학교 및 특수학교 교사, 사회복지사, 법률 카운슬러, 전문비서, 자산운용 카운슬러 등과 같은 인적 서비스 관련직종과 컴퓨터 시스템분석가, 컴퓨터 엔지니어, 환경공학사, 경영 컨설턴트, 텔레마스터, 웹마스터, 선물거래중개인, 사이버 기상캐스터, 컴퓨터 바이러스 치료사, 이력서 작성 대행자, 세미나 기획가 등의 전문서비스 관련직종이 포함된다.
이런 직업들은 별다른 조직이나 설비 없이 개인 차원에서 인터넷만으로도 활동할 수 있는데, 여기에다 전통적 자영업종인 요식업, 이·미용업, 사진업, 오락업, 방송인, 예술문화인, 작가, 문구점, 슈퍼마켓, 약국 등 각종 소매업 직종까지 포함시키면 선택의 길은 얼마든지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바야흐로 ‘선직(選職)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므로 종신고용제가 붕괴했다며 한숨만 내쉴 일이 아니다. 새롭게 출발해야 할 때인 것이다. ‘인생 2모작’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남의 이야기를 할 게 아니라 세 차례나 옮겨다니며 도합 19년에 걸친 직장생활을 끝내고 꼭 5년 전 프리랜서로 나선 필자를 먼저 예로 들어보자. 내가 진정 하고 싶었던 일은 역사여행과 그에 따른 연구였는데, 회사에서 하는 일은 그것과 너무 달라 늘 고민했다. 벌어놓은 돈이라도 많으면 부담없이 하고 싶은 일에 뛰어들 수 있겠지만 역사여행을 하면서 그것으로 생계를 꾸려갈 일이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아 주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정년퇴직까지 기다리기에는 너무 늦겠다 싶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고통이 더 컸다.
그러던 어느 날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곧 우리나라 문화재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순간, ‘그렇다면 사람들은 세계문화유산이 도대체 뭔지, 다른 나라에선 어떤 것들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지 궁금해할 것 아닌가. 그걸 현지에서 취재해 신문에 기고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관련자료를 조사하고 내가 정말 그 일을 할 수 있을지 냉정하게 점검해봤더니 웬만큼 자신감이 생겼다. 곧바로 취재계획서를 만들어 신문사로 달려가 뜻을 전하자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다니던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1년 동안 세계문화유산 탐방을 떠났다. 또 그걸 발판으로 삼아 신문 잡지 등에 기고하고 책도 낸다면 프리랜서로 나서도 가능성이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아직은 어려운 점이 많지만 날이 갈수록 사정이 나아질 것이라 믿기에 희망을 갖고 이 일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란 필자처럼 글 쓰는 사람만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특정 조직에 매이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이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해결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에 해당할 것이다. 전통적인 의미의 예술가는 대부분 프리랜서라 할 수 있고, 전문분야라 할 수 있는 방송 번역 통역 만화 사진 바둑 스포츠 분야도 이에 포함되며, 이제 와서는 인터넷의 발달로 ‘소호(SOHO·Small Business Home Business)’와도 구별하기 어려워 그 영역이 크게 넓어졌다. 사이버 공간을 이용해 전자상거래, 정보수집 및 교류, 상담, 과외지도 등의 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이런 자영업자와 별다른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장사에 남다른 소질을 발휘, 젊은 나이에 큰돈을 벌기도 했던 필자의 대학 친구는 ‘원단(wondan),’ ‘양말(yangmal)’, ‘감자(gamja)’ 등 많은 도메인을 갖고 있는데, 시장 규모가 엄청난 이런 품목에 관련된 모든 정보를 인터넷에서 주고받으며 세계를 무대로 사업을 벌일 계획을 갖고 있다. 그는 “지금과 같은 세상에 막대한 자본과 시설을 투자해 사업하는 것은 자원 낭비”라며 “사업은 모든 것을 손에 쥐어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고 한다.
공간과 시간의 벽을 허무는 인터넷이 있기에 사업의 성패는 기업의 규모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어떤 면에서는 순발력 있는 개인이 성공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한다. 이는 개체들의 ‘커리어 창업시대’가 열렸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니아의 경쟁력
어릴 때부터 나비에 관심이 많은 내 선배의 친구는 지금 미국에서 살고 있는데, 10년 넘게 찍어 모은 나비 사진 가운데 특이한 나비 문양을 기본 디자인으로 삼아 넥타이를 만들어 팔고 있다. 그런가 하면 뜨개질 취미를 살려 인터넷에 손뜨개 가게를 연 주부도 있고, 과일을 아주 좋아하는 어떤 이는 과일을 그냥 파는 것이 아니라 서울 신촌에 카페 같은 공간을 만들고 차 대신 껍질 깐 과일을 팔고 있다. 상호도 그럴듯하게 ‘과일까게’로 내세웠다. 이곳에선 카페에서 커피를 리필해주듯 과일을 리필해준다.
대학에서 언어학을 공부한 정회선씨는 순수학문인 언어학이 돈벌이와는 거리가 멀다는 상식을 깨겠다며 자신의 전공을 인터넷과 연결, ‘언어과학’과 ‘스톡캐스터’란 회사를 차렸다. 자신의 취미를 살려 어린이를 대상으로 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들은 자신의 취미나 기호, 특기를 틈이 나면 즐기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을 아예 직업으로 삼은 사람들이다. 그러니 얼마나 경쟁력이 높겠는가.
마니아(mania)의 강점이자 특징은 이렇듯 높은 경쟁력에 있다. 일을 놀이처럼 즐기는 것은 물론이고 잠을 자면서도 그 일에 관한 꿈을 꾸는데 누가 그를 앞설 수 있겠는가. 미국의 ‘포천’지도 최근호에서 미국 기업들이 갖고 있는 경쟁력의 원천은 마니아, 즉 어떤 일에 미치는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고 지적했다. 오늘의 미국을 만든 힘도 이런 모험정신과 도전정신일 것이다.
그런데 프런티어 정신은 서부 개척이라는 현실적 영토 위에서나 존재했던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첨단과학의 산물이자 가상세계인 사이버 영토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 대표적 인물로 인터넷 서점 ‘아마존(Amazon)’을 창업한 제프 베조스를 꼽을 수 있다. 그가 95년, 시애틀에 있는 차고에 컴퓨터 3대를 놓고 창업하려 했을 때 그의 성공을 예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부모도 아들의 정신상태를 의심했을 정도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 길로 나갔고, 그로부터 5년이 지나지 않은 99년에 시사주간지 ‘타임’은 그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수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큰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안정감을 줄지는 몰라도 계속 같은 일을 하면서 관료주의와 싸우는 것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벌이는 데서 인생의 즐거움을 찾겠다”며 새로운 분야에 과감히 뛰어들곤 한다. 실리콘 밸리에서 성공한 과학자나 사업가들의 인터뷰를 보면 그들은 대부분 아주 적은 자본, 거의 무일푼으로 일을 시작했다. 오로지 창의성과 용기, 도전정신으로 자신의 일에 뛰어들어 성공을 거둔 것이다.
벤처 열풍이 꺾이기가 무섭게 벤처를 악용한 이들까지 가세하면서 급기야 우리 사회에 벤처 무용론까지 일긴 했지만, 우리가 기댈 마지막 언덕은 벤처뿐이다. 무늬만 벤처가 아닌, 모험정신으로 무장한 이들이 창의력이 꿈틀대는 아이디어를 펼치기 위해 밤을 낮처럼 밝히며 일하는, 명실상부한 그런 벤처 말이다.
그런 곳에서는 적어도 밑도끝도 없는 보고서를 쓰느라 소중한 시간을 흘려보내지도 않고, 관련부서와 협의하느라 진을 다 빼고 정작 할 일은 소홀히 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시간과 에너지를 가능한 한 할 일에만 집중한다. 따라서 벤처야말로 질을 높이고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최적의 기업조직이라 부를 수 있다. 진정한 마니아가 아니라면 벤처의 역군이 되기가 쉽지 않다.
마니아들의 행동 특징에 ‘창조적 경쟁(creative competition)’이란 말을 붙이고 싶다. 흔히 경쟁이라면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제로섬 게임을 연상하기 쉽지만, 개체 시대의 경쟁은 너도 살고 나도 사는, 다시 말해 모두가 윈-윈(win-win)할 수 있는 상생(相生)의 경쟁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하고, 너는 네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하기에 서로 부딪칠 이유가 없는데다, 사회에도 보탬(+)을 주는 것이 절대 바람직한 일이기에 그러하다.
지금은 디지털 시대다. 디지털은 문화적으로 해석하면 오직 ‘알짜’만 원하는 특이한 괴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분명하지 못한 것, 시원찮은 것, 세상에 도움을 못 주는 것들은 다 버린다. 그 동안 우리를 알게 모르게 옥죄던, 허울은 그럴듯하나 알맹이가 부실했던 많은 것들은 이제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여기에선 국적도, 인종도, 성별도, 직위도, 나이도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오직 알맹이만이 의미를 갖는다.
그런 알짜를 우리 사회에 선사할 수 있는 유일한 부류가 바로 마니아들이다. 그들이 창조적 경쟁을 통해 그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우선 가식이 없다. 스스로 좋아서 하는 일인데다, 그 일을 평생에 걸쳐 해야 하기에 그렇다. 또한 순수하지 못하다면 처음부터 아예 그 길로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남을 해칠 리도 없다. 그들은 창의력과 열정, 책임감으로 자신이 맡은 일에 임한다. 만약 우리가 그런 그들에게서 알짜를 구하지 못한다면 달리 그것을 얻을 길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이 개체의 시대에 떳떳한 주인공이 되려 한다면 당신의 목소리에, 어깨에, 행동에, 그리고 생각에 구태의연하게 쓸데없는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만약 그러하다면 먼저 그것부터 없애야 한다. 그것도 지금 당장, 아주 말끔하게. 알짜는 의식과 행동이 합쳐질 때 나오는 것이다.
평소에 지하철을 잘 타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사람과, 틈만 나면 지하철로 달려가 타고 어딘가를 향해 떠나기를 밥 먹듯하면서 역사(驛舍)의 구조, 안내판과 승차권의 디자인, 검표방식, 승객의 태도, 심지어 차량 사이를 오가며 그때그때 들려오는 소리를 통해 어디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아보는 게 취미인 사람에게 지하철 광고 일을 맡겨 맞대결을 시키면 어느 쪽에 더 승산이 있을까.
언젠가 KBS TV의 ‘제3지대’란 프로그램에서 지하철에 관한 것이라면 모르는 게 없는 이런 마니아들을 보면서 자동차에 미쳤다가 결국 세계적인 렌터카 체인을 일군 존 헤르츠를 떠올렸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에도 저런 친구들이 있으니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주위를 살펴보면 우리 젊은이들 중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한 가지 일에 몸과 마음을 온통 바치는 마니아가 참으로 많다.
그들은 평생을 걸 테마를 이미 갖고 있다. 테마란 일생의 업(業), 바로 그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일시적으로 대드는 단순한 일거리가 아니다. 개체의 시대란 자기 나름대로 일생의 테마를 가진 이런 인간들이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시대다.
나만의 테마를 갖고 산다
이제 평생직장은 사라지고 대신 평생의 일만 남았다. 자신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되, 그때그때 상대를 바꿔가면서 그 일을 평생 하며 살아가는 시대가 온 것이다. 조직도 그렇게 변하고 있다. 그러므로 개체의 시대를 사는 제1의 조건은 자신만의 테마를 갖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기초해서 자신의 라이프 플랜을 세우는 것이다.
테마를 갖고 평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 세상 돌아가는 것을 바라볼 수 있는 나름의 안목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인간에 대한 배려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지금과 같은 서비스시대,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성찰이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왜 그걸 원하는지, 그가 가슴 아파하는 문제는 무엇인지를 모르고선 그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가 없다.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는 아직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우리는 삶의 질과는 너무 먼 거리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라도 우리 사회에는 테마를 가진 인간이 많아야 한다.
한때는 이런 안목이나 창의성, 열정, 전문성보다는 인간 됨됨이,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회사의 지시와 명령에 군말 없이 따를 수 있는 인간인지, 아니면 회사에 등을 돌릴 인물인지를 먼저 따진 적이 있었다. 어떤 대기업은 신입사원을 뽑는 면접장에 회장이 직접 용하다는 관상쟁이를 데리고 나왔다는 얘기도 있지 않은가. 그때 기업은 직원이 평균적인 능력만 가졌으면 괜찮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더욱이 회사와 직원은 평생을 함께 하는 운명공동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기에 그런 시각이 가치를 지닐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업은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처지에 있다. 회사가 아예 없어질 수도 있고 다른 회사에 합병될 수도 있으며, 일부 부서가 모기업에서 빠져나가 독립할 수도 있다. 기업의 변화가 이 정도라면 그 내부 구성원들의 처지는 어떠하겠는가.
따라서 기업이 직원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때그때 일의 성격에 맞춰 사람을 뽑게 되는 것이다. 조직에 대한 충성도나 사교성은 고려의 우선순위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점을 미리 간파한 미국의 기업들은 오래 전부터 직원에게 맡길 과업을 먼저 정한 다음 그에 필요한 자격요건과 선발방법을 마련해 적격자를 선발해왔다.
우리 기업들 역시 최근 들어 발 빠른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동안은 신입사원을 일괄 채용, 단체연수를 통해 ‘삼성맨’ ‘현대맨’ ‘LG맨’ 등으로 교육시켰는데, 요즘은 특화된 인재를 필요할 때마다 수시 채용하는 방식으로 인사전략을 바꿨다. 공채자를 우대하는 ‘순혈(純血)주의’로는 기술다변화 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이런 경우 채용의 포인트는 대개 문제해결 능력에 두게 된다. 그래야만 곧바로 현장에 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누가 그 일에 마니아라고 한다면 더 볼 것도 없이 그를 선택할 것이다. 이렇듯 마니아는 자영업뿐 아니라 조직의 일원으로 선발될 가능성에서도 경쟁력을 갖는다.
자신의 테마를 가진 마니아들은 일을 하는 데 시간과 비용을 철저하게 따지지 않는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다 그 일을 하면서 얻는 경험은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쌓이기에 언젠가는 그것이 현실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조급하게 비용대비 효과를 따지지 않기 때문에 코스트 개념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다.
이를 당신의 경우와 비교해 보라. 회사 일을 위해 당신 개인의 돈과 시간을 얼마나 투자했고, 그에 대한 보상을 얼마나 기대했으며, 상사나 주위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주지 않았을 때 얼마나 섭섭했는지를.
사람들은 그것이 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비용대비 효과를 따지지만, 제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것도 자신이 미쳐 있는 일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특별한 보상이 없어도 열을 내서 밤을 지새우곤 한다.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와 자료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그것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나려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니아는 가공할 만한 폭발력을 지닌다. 이와 관련해 프리랜서 광고인 박흥준씨는 ‘네 안의 가능성을 찾아라’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근원은 미치는 것이다. 콜라 광고를 만들기 위해 자료조사를 하라고 하면 그때서야 음식점을 물어물어 찾아다닌다. 그렇게 하면 삼류 광고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전문가란 자신의 취미나 특기 등으로 행동반경을 좁혀 특정 분야에 에너지가 집중된 사람을 말한다.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연극배우 이름을 줄줄 외고, 그 사람의 사생활도 꿰고, 그 사람이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 다 알고, 연극을 통해 어떤 인간관계를 맺는지도 알아야 한다. 극장의 위치는 물론, 그곳으로 가는 교통편까지 그림을 그려내듯 해야 한다.”
그래서 이들에겐 남다른 고집도 있고, 그 아무도 따라갈 수 없는 일에 대한 강한 열정도 있다. 이것이야말로 조직문화가 도저히 이뤄낼 수 없는 이들만의 자랑이고 힘이다. 한때 프랑스 문인들 사이에 ‘엘랑 비탈(럏an vital)’이란 말이 유행됐던 적이 있다. 이는 ‘생명력’이란 뜻으로 주로 철학나 예술 분야에서 쓰인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엘랑 비탈이 ‘일’이라는 경제분야, 아니 보통사람들의 일상에까지 침투해 가치를 발휘하고 있다. 바로 이 마니아들에 의해서. 일이 예술화하고 있다는 의미다. 일이 단지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혼과 분리될 수 없는 삶이 되어버린 것이다.
학교에서 배우거나 전문가에게서 얻는 지식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도 열정 앞에서는 눈 녹듯 풀린다. 그들이 아무리 어려운 난관에 부딪힌다 해도 그것은 단지 그들의 용기나 의지를 시험해 보는 것일 뿐 그들을 쓰러뜨리는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열정은 이런 것이다.
오픈 칼라(Open Collar)
그러나 ‘나인 투 파이브’가 적용되는 회사에서는 이러기가 쉽지 않다. 모든 일은 프로젝트별로 진행되기 십상이어서 일을 늘 그런 마니아에게 맡길 수가 없다. 비전문가들이 일을 하기에 비용은 많이 드는데도 질은 떨어지기 일쑤다. 따라서 원가는 상승한다. 그러다 보니 이제 기업도 마니아들에게 일을 맡기는 게 질과 비용 면에서 모두 유리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웃소싱 개념이 나온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프리랜서나 자영업자가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이 되어준다. “개체의 시대라면 개인만을 위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사회의 궂은일은 누가 할 것인가” 하는 우려의 눈으로 ‘개체의 시대’를 바라보는 사람들도 이 대목만은 쉽게 수긍할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앞다투어 벌어지는 구조조정이란 것도 과거의 조직 중심 시스템이 근원적으로 안고 있는 고비용 구조를 저비용 구조로 바꾸는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마니아들을 육성하고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마니아들이 주축인 프리랜서나 소호 자영업자는 주로 자신의 집을 터전으로 삼고 활동한다. 그래서 ‘재택노동’ 혹은 ‘재택사업(Home-based Business)’이라고 말하는데, 그래서 이들에게는 출·퇴근이 없고 복장도 자유롭다. 일찍이 “2차세계대전 이후 30여 년간 노동자들이 향유했던 평생직장 같은 것은 앞으로 두 번 다시 누릴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던 로버트 라이시 교수(전 미국 노동장관)는 이들을 화이트 칼라로도 블루칼라로도 딱 잘라 분류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재택노동’의 저자 폴 에드워드는 이들에게 화이트 칼라도 블루 칼라도 아닌 ‘오픈 칼라(Open Collar)’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줬다. 그것은 자유와 자율, 그리고 융통성을 상징하는 자유복장을 뜻했다. 재택 노동자는 하얀 셔츠에 넥타이를 맬 필요도, 스커트를 걸치고 하이힐을 신을 필요도 없다.
이들에게는 조직에서 으레 있기 마련인 상하관계의 딱딱한 위계질서 같은 것도 없다. 늘어지게 늦잠을 잘 수도 있고 공원을 한 차례 산보한 다음, 느긋하게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일을 시작할 수도 있다. 몰입이야말로 이들의 생산성을 높이는 최대 무기다. 자신의 아이디어로 일을 기획하고 진행하며 그 결과로 소비자(주문자)로부터 직접 평가받고 보상받을 뿐이다. 그런 만큼 성취감도 크다. 대개 소비자와 직접 연결돼 있기 때문에 시장의 변화를 직접 체감, 앞으로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사교성이 부족한 사람이나 용모와 신체에 핸디캡을 갖고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주위의 시선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기에 더욱 좋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어려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감독자가 없기 때문에 자기 관리를 엄격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늘어지게 잘 수 있다고 해서 마냥 늦잠을 잘 수도 없다. 컨디션 조절에 실패해 시간만 보내서도 안 된다. 몸이 아파서도 안 된다. 회사라면 유급 병가를 얻을 수도 있고, 연월차 휴가를 이용할 수도 있겠지만 오픈 칼라에겐 그런 것이 없다.
집안에 대소사가 생겨도 곤란하다. 쉴 수는 있으되 소득의 감소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승진·승급도 없으며, 일자리를 잃게 돼도 실업수당을 받을 수 없으며 퇴직금도 당연히 없다. 출장을 가야 할 때도 남이 경비를 대주지 않는다. 모든 것을 자기 책임으로 해나가야 한다. 기획능력과 마케팅 능력까지 갖춰야 하며, 홀로 있음으로써 생겨나는 고독감도 이겨내야 한다. 철저하게 ‘자율·자급형 인간’이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능력있고 건강하다면 정년을 모르고 일할 수 있다.
오픈 칼라가 향유하는 재택노동이 인터넷의 발달로 가능해졌다고 해서 그것을 현대적인 발명품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산업혁명과 그에 따른 산업화가 사회를 온통 지배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그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집을 근거지로 일해왔다. 인류의 역사에서 본다면 집과 일터가 공간적으로 분리된 산업화 시대의 풍경은 오히려 예외라고 할 수 있다. 시간적으로도 기껏해야 300년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의 경우는 그나마 40년 남짓밖에 되지 않으니 한 세대가 겨우 지난 셈이다. 그 시대에도 동네 약국이나 미용실, 슈퍼마켓을 경영하는 이들이나 예술가들은 삶터와 일터를 일치시키고 살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무실 공장 광산 시장 공사현장 등으로 달려가야 했기에 집과 일터는 분리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사무실이 밀집된 도심은 밤이면 텅텅 비는 공동화(空洞化) 현상이 일어났고 그와는 반대로 아파트 밀집지역은 밤에 잠만 자는 ‘베드타운’으로 전락했다. 그래서 우리는 일터라면 으레 직장을 떠올렸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출퇴근과 연결됐다. 그것은 한 인간이 깨어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이 아닌 일터에서 보내게 만듦으로써 가족간에 시간적·공간적 거리감을 조성하는 데 한몫했다.
한편 산업화는 시장경제체제와 맞물려 노동은 시장에서 거래가 가능한 임금노동만이 경제적 가치를 가질 뿐 가정과 가족을 위해 행해지는 비화폐적 노동은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삶의 향상이란 측면에서 보면 가사노동이 아주 중요한 것인데도 그랬다. 그리하여 산업화의 진전은 맞벌이 부부의 대량 탄생을 불렀고, 그 결과 어린 자녀들을 어떻게 돌보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됐다. 탁아소 놀이방 유아원 등이 생겨났지만 그것만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여성의 직장 갖기가 여성해방의 한 상징처럼 되면서 가정의 공동화는 가속화됐다.
미국의 사회학자 알리 호크스차일드가 97년에 펴낸 ‘시간의 속박(The Time Band)’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미국 중서부에 있는 어느 대기업의 홍보실 직원 그웬은 직장 일은 즐겁지만 세살배기 딸 캐시를 아침 7시부터 탁아소에 맡겨야 하는 것이 늘 마음에 걸린다. 하루 일을 끝내고 아이를 찾아온다 해도 딸과 지낼 수 있는 시간은 고작 30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집에 돌아오면 이내 지쳐 쓰러지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가정생활이 지금처럼 바쁘고 불만스럽지만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저자는 그래서 등장한 것이 ‘시간의 질(quality time)’이라는 개념이라고 했다. 이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캘리포니아 대학의 클라크 스튜어트 교수인데, 그녀는 미국의 어머니들이 아이들에게 속삭여주고 시선을 맞춤으로써 관심을 쏟아주면 아이의 인식능력과 사회성 발달에 효과가 있다며 그 용어를 사용했다. 그녀는 그런 질적 시간을 얻기 위해서는 양적인 투자가 선행돼야 한다는 점을 놓치지 않고 지적했다. 직장과 가정생활을 동시에 꾸려가며 아슬아슬한 곡예를 벌이는 미국의 어머니들에게 ‘시간의 질’은 위안거리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완전한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삶터와 일터의 분리가 가져온 불행한 사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부부간의 애정에도 심대한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산업화의 이행속도가 빠른 나라일수록 이혼율이 덩달아 올라갔던 것이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재빨리 오픈 칼라 시대가 열려 재택노동이 가능해짐으로써 부모와 자녀, 부부끼리도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을 늘릴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이에 따라 가정은 물론 지역공동체의 모습도 분명 달라질 것이다. 오픈 칼라 시대의 둘째 특징은 일터와 삶터의 일치현상이다.
일과 휴식의 융화
서비스시대를 맞게 되면 여성의 일이 크게 늘어난다. 서비스란 그 본질상 지적, 감성적, 미적 능력을 요구하므로 남성보다는 여성이 더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일이 커지는 만큼 그들의 발언권도 강화될 것이다.
오픈 칼라 시대의 셋째 특징으로는 일과 휴식의 융화를 들 수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나 잘할 수 있는 특기가 자신의 일이 돼버렸다면 굳이 휴식이 필요없을 것이다. 개인의 취미나 기호, 특기와는 상관없이, 그것도 기계처럼 일을 해내야 하는 산업사회에선 휴식과 휴일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때의 휴식이라는 것도 개인의 삶을 충실하게 만들기보다는 노동력의 재창출이란 의미가 더 컸다. 인간은 철저하게 도구화됐던 것이다.
그 시절 노동은 고역과 착취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래서 ‘노동해방’이 나름의 설득력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에드워드 파머 톰슨이 산업혁명기의 영국 노동자들이 험악한 환경에서 얼마나 고된 노동을 강요받았는지를 기록한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1963)을 읽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노동을 압박과 설움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가능한 한 거기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런 모순을 타파하자고 목소리를 높인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사람들을 울릴 수밖에 없었고 노동조합은 하나의 대안이 됐다.
그러나 제레미 리프킨이 ‘노동의 종말’에서 지적한 것처럼 고전적인 노동도, 노동운동도 서서히 우리 앞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이제는 자본의 대립어로서 노동이 아니라 삶을 지탱하는 근거인 일만 존재하게 됐기 때문이다. 아니, 일과 휴식이 멋지게 어울린 새로운 차원의 일이 우리 앞에 다가오는 것이다. 이제 인간은 무언가를 위한 도구가 아니다. 삶의 온전한 주인이 됐기에 인간 소외란 말은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
좋아서 그 일을 하는 프리랜서나 소호 자영업자에게 휴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일 속에서 휴식을 얻는데 말이다. 또한 그들은 조직이 싫어 조직을 만들지 않는 사람들인데, 노동조합 같은 것을 만들 이유도 없다. 그야말로 ‘노동의 종말’인 것이다. 지난해 컨텐츠 프로덕션 ‘놀다(Nolda)’를 연 문화평론가 김지룡씨는 한 인터뷰에서 “놀면서 일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무작정 노는 것은 아니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한다면 그건 즐겁게 노는 일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일만 해도 이익이 난다면 그건 일이 아니라 놀면서 돈버는 거라고 본다.”
그러면서 그는 ‘놀다’ 사업에 관여하는 작가들이 모두 ‘제 일에 미친 젊은이들’이라고 했다. 여행을 좋아하는 내 경우만 해도 그렇다. 온종일 힘들게 이리저리 다녔다 해도 피곤한 줄 모르고 다음날이면 또 나서곤 하니 말이다. 흥이 나는 일이라면 따로 휴식이 필요없는 것이다.
오픈 칼라 시대는 틀에 박히지 않은 개체가 주축이 되고 그 동안 선 굵은 남성들에 의해 뼈대만 그려졌던 인류의 삶에 섬세한 손길이 더해짐으로써 제대로 된 삶을 향유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될 것이기에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했던 산업사회의 모습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게 될 것이다. 다가오는 사회는 분명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해줄 것이므로 희망을 갖고 맞을 수 있다. 물론 우리에게 준비가 되어 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