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이재명 ‘25만 원 민생회복지원금’? 국가 타락시키는 일!

[노정태의 뷰파인더] 극도의 평등 정신은 ‘독재’로 이어진다

  •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jeongtaeroh@ries.or.kr

    입력2024-05-12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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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명, 왜 그토록 ‘지역화폐 현금 지급’ 집착하나

    • 복지 탈 쓴 ‘현금 살포’, 민주주의 부패케 해

    • 몽테스키외 “완전한 평등, 국고 파탄으로 이어져”

    • “인민에게 많은 것 주려면 인민에게 더 빼앗아야”

    • 진정한 평등 = 법 앞의 평등

    • 법치주의 없인 민주주의도 없다

    3월 24일 서울 송파구 새마을전통시장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전 국민 대상 ‘25만 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 제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뉴스1]

    3월 24일 서울 송파구 새마을전통시장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전 국민 대상 ‘25만 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 제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뉴스1]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 주길 부탁드립니다.”

    4월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만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한 말이다. 윤 대통령 취임 2년 만에 성사된 자리인 만큼 이 대표는 할 말이 많았다. 여러 의제를 동시에 쏟아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25만 원 민생회복지원금’을 절대 빼놓지 않았다. 이러한 요청에 대해 윤 대통령은 묵묵부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표는 경기지사 시절 지역화폐를 역점 사업으로 추진한 바 있다. 그런데 1월 감사원이 공개한 ‘경기도 정기감사 보고서’에 따르면 지역화폐 운용사 코나아이는 받은 충전금을 자사 계좌로 보냈는데 이 가운데 일부가 각종 회사채 투자 등에 사용됐다. 이 대표가 왜 이렇게 민생회복지원금을 강조하는지, ‘지역화폐로 지급’에 집착하는지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을 논외로 하더라도 경제학적 관점, 아니 상식을 놓고 볼 때 이 대표의 25만 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은 어불성설이다. 현재 국민이 경제적 고충을 겪고 있는 근본적 원인을 외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부추기는 결과를 낳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현금 살포, 고물가 심화‧민주공화국 부패 초래

    5월 1일(현지 시간)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이 기준금리 동결 발표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날 파월 의장은 “다음 행보가 금리 인상은 아닐 것”이라며 금리 인상설을 일축했지만 “금리 인하에 확신을 얻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AP 뉴시스]

    5월 1일(현지 시간)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이 기준금리 동결 발표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날 파월 의장은 “다음 행보가 금리 인상은 아닐 것”이라며 금리 인상설을 일축했지만 “금리 인하에 확신을 얻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AP 뉴시스]

    우리가 고물가에 시달리는 것은 근본적으로 원-달러 환율이 고공 행진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5월 초까지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기준금리를 6연속 동결하고 있다. 현재 미국의 기준금리는 5.25~5.50%. 한국의 기준금리보다 높은, 이른바 ‘금리 역전’ 상태다. 얼마 전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원-달러 환율이 1400원을 돌파했고, 5월 8일 기준 1360원대를 오가고 있다.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난의 큰 부분은 바로 이 구조적 요인에서 비롯한다. 달러의 가격이 비싸졌다. 원자재의 대부분을 수입해야 하는 우리 경제의 구조상 심각한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문재인 정권 당시 급격하게 최저임금을 인상했고, 코로나 대응을 위해 다양한 명목의 지원금이 뿌려진 것 또한 간과할 수 없다.

    한마디로 요약해 보자. 달러가 비싸지면서 한국 돈이 너무 싸졌다. 한국 돈에 의지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대다수 한국인은 같은 액수의 돈으로 적은 물건을 구입 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이것이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고물가의 본질이다.

    이 시점에 국민 1인당 25만 원의 민생회복지원금을 뿌린다면 어떻게 될까. 당장 수중에 25만 원이라는 ‘꽁돈’이 생기니 기분은 좋을 수 있다. 하지만 시중에 더 많은 유동성이 풀리는 것이므로 한국 돈의 가치는 더욱 낮아진다. 이는 외환시장에도 영향을 미쳐 달러 값은 더 비싸진다. 고환율로 인한 물가 상승은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다. 언 발에 오줌을 누면 그 오줌이 얼어서 동상이 더 심각해지는 것과 같은 원리다.

    복지의 탈을 쓴 현금 살포의 위험성은 그뿐만이 아니다. 보다 더 근본적이고 심각한 위험을 안고 있다. 국민에게 국고로 직접 돈을 주는 행위는 민주공화국을 부패하게 한다. 결국 누군가 한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1인 전제정, 즉 독재로 향하게 된다. 그렇게 취약해진 나라는 다른 나라에 흡수 병합되는 결말을 맞이한다. 민주주의 정치사상사에서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고전, 몽테스키외(1689~1755)의 ‘법의 정신’을 펼쳐볼 때다.

    프랑스 철학자 몽테스키외의 저서 법의 정신. [나남]

    프랑스 철학자 몽테스키외의 저서 법의 정신. [나남]

    “게으르고 사치하는 인민의 목적은 오직 國庫”

    몽테스키외는 사상 최초로 입법, 사법, 행정의 분리인 ‘3권 분립’을 주장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법의 정신’은 3권 분립으로 요약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당시 몽테스키외가 구할 수 있었던 모든 자료와 지식을 총동원해,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다양한 정치 체제를 검토하고 최선의 정치란 무엇인지 탐구한 고전이다.

    몽테스키외는 인류의 정치 체제를 크게 민주정, 귀족정, 군주정으로 구분했다. 민주정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주의 체제다. 귀족정은 소수의 귀족 가문이 다스리는 방식이다. 군주정은 한 사람의 임금이 통치하는 것이다.

    ‘법의 정신’은 귀족정과 군주정에 비해 민주정이 지니는 우월성을 논하는 책이다. 하지만 몽테스키외는 민주정에 대한 단순한 예찬에 머물지 않고, 민주정이 빠질 수 있는 위험에 대해 다각도로 고찰했다. ‘법의 정신’ 제1부 중 제8편, ‘세 정체의 원리의 부패’로 들어가 보자. (이 글에서 필자는 ‘법의 정신’ 한국어 완역판을 인용한다. 서지사항은 다음과 같다. ‘법의 정신 1’, 몽테스키외, 진인혜 옮김, 나남, 2023).

    “각 정체의 부패는 거의 언제나 원리의 부패로부터 시작된다.”(203쪽)

    여기서 몽테스키외가 말하는 ‘원리’란 ‘작동 방식’과 유사한 의미다. 정치 체제가 부패하고 그로 인해 국가가 몰락하는 것은 특정한 사람이나 외부 요인만의 탓이 아니다. 그러한 요소가 원인이 돼 정치 체제의 작동 방식 자체가 망가지면 그것이 바로 ‘원리의 부패’이며, 그 결과 정치 체제가 부패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작동 방식은 어떻게 망가질까. 이에 대해 몽테스키외는 이렇게 썼다.

    “민주정체 원리는 평등의 정신을 잃어버릴 때뿐 아니라 사람들이 극도의 평등 정신을 가지게 돼 각자 자신을 통솔하기 위해 선택한 사람들과 평등하기를 원할 때도 부패한다.”(203쪽)

    민주정체, 즉 민주공화국의 작동 방식이 평등의 정신 상실로 인해 부패한다는 말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국민의 상당수, 혹은 대다수가 ‘우리보다 더 위대한 분’을 알아서 모실 때 민주주의는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20세기 파시즘을 통해 우리는 그러한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마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나치의 독재로 넘어갈 때 독일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주권자인 국민은 ‘자발적’으로 자신들보다 우월한 누군가에게 절대 권력을 위임하게 된다. 민주주의가 민주적인 방법으로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평등 정신이 ‘극단화’돼 민주주의를 타락시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귀족이나 왕족이 없는 민주정이라 해도 모든 사람의 재산이나 신분, 사회적 역할이 완전히 동일하거나 동등하지는 않다. 어느 정도 차이는 자연적으로 존재하고 발생할 수밖에 없다. 대의민주주의를 운영한다면 더 부유한 사람, 더 많이 배운 사람, 더 영향력 있는 사람이 아무래도 정치를 하게 될 가능성이 더 높다.

    민주정을 구성하는 평범한 사람들, 즉 인민(프랑스어로 peuple)이 이런 현실적 제약을 거부하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인민은 자신을 통솔하기 위해 그들이 선택한 사람과 지금 당장 완전한 평등을 원한다. 몽테스키외의 설명은 이렇다.

    “자신이 위임한 권력마저 허용할 수가 없어서 모든 것을 직접 하려고 한다. 원로원을 대신해 심의하고, 행정관을 대신해 집행하고, 모든 재판관을 없애고자 한다.”(203쪽)

    얼핏 보면 이는 나쁜 상황이 아닌 것 같다.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 받는 자가 동일한 것은 민주주의의 근본정신이며 입법부‧사법부‧행정부도 없이, 인민이 그들의 정치적 사안을 스스로 해결하는 것은 이른바 ‘직접민주주의’의 이상 아니던가.

    몽테스키외가 볼 때 이는 민주주의의 타락이다. 공화국에 ‘정치적 덕성’이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정치적, 사회적 질서는 허물어지고 공경과 자애의 마음이 사라진다.

    “풍속도 질서에 대한 사랑도 없어질 것이고, 마침내 덕성도 없어질 것이다.”(204쪽)

    공공선을 달성하기 위해 사적 이익을 조율하는 정치 본연의 기능은 마비되고, 국민들은 자신들의 손에 쥐어진 한 표를 무기로 공직자에게 요구하기 시작한다. ‘우리에게 돈을 달라. 당장 돈을 주지 않으면 도편추방 투표를 해서 쫓아내 버리겠다’는 식으로.

    민주공화국의 공직자는 이런 상황을 견뎌낼 수 없다. 권력을 잃지 않고 안위를 지키기 위해 투표를 돈 잔치로 만들어 버린다. 나라 살림이 제대로 돌아갈 리 만무하다. 돈을 뿌려야만 권력을 지킬 수 있는 정치가, 그런 정치가로부터 당장 돈을 얻어내기 위해 투표하는 국민이 결합하면서 국가 재정은 순식간에 파탄에 이르고 만다.

    “부패는 부패시키는 자들 사이에서 더 증가할 것이고, 이미 부패된 자들 사이에서도 증가할 것이다. 인민은 모든 국고를 서로 분배할 것이다. 그리고 게으르면서도 나랏일을 관리하는 것처럼, 가난하면서도 사치를 즐기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게으르고 사치하는 인민에게 목적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국고(國庫)밖에 없다.”(205쪽)

    평등 의식 극단화 → 포퓰리즘 함정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인민의 위탁을 받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부패를 감추려고 인민을 부패시키고자 할 때 인민은 그러한 불행에 빠진다.”(205쪽)

    나랏돈을 노리고 달려드는 도둑정치인이 국민과 장물을 나누어 공범이 되고자 할 때, 그런 유혹에 국민 스스로가 넘어가버릴 때, 민주정의 작동 원리가 부패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선거가 돈 뿌리기 잔치로 전락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돈 때문에 투표하는 것을 보게 돼도 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205쪽)

    국고가 화수분처럼 솟아난다면 이런 식의 정치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 속의 재화는 엄연히 한정되어 있다. 인민에게 나누어주는 것은 결국 인민 스스로의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인민에게 많은 것을 줄 수 있으려면, 인민에게서 훨씬 더 많이 빼앗아야”(205쪽) 하는 역설이 발생한다.

    그 결과 민주정의 인민은 서서히 자유를 잃게 된다. 인민이 자유로부터 이익을 얻는 것처럼 보이면 보일수록 자유를 잃을 수밖에 없는 순간에 더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국민들이 가지고 있던 자유는 점점 소수의 권력자에게, 결국에는 단 한 명의 독재자에게 넘어간다.

    “단 한 사람의 폭군이 나타나고, 인민은 부패하여 얻은 이익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을 잃게 된다.”(205쪽)

    2018년 8월 14일 경제난으로 베네수엘라를 탈출한 베네수엘라 국민들이 에콰도르에 들어가기 위해 루미차카 다리 앞에서 입국 수속을 기다리고 있다. [동아DB]

    2018년 8월 14일 경제난으로 베네수엘라를 탈출한 베네수엘라 국민들이 에콰도르에 들어가기 위해 루미차카 다리 앞에서 입국 수속을 기다리고 있다. [동아DB]

    민주주의가 타락하는 두 번째 방식을 간파하고 그 원리를 명쾌하게 서술하는 이 대목에서 우리는 몽테스키외의 빛나는 천재성을 목격할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 베네수엘라 등 포퓰리즘이 판치는 국가의 패턴과 정확히 동일하다.

    포퓰리즘이 나라를 망치는 방식을 떠올려 보자. 부패한 권력은 국고를 거덜내면서 국민에게 돈을 나눠준다. 수렁에 빠진 경제가 정상 작동하지 않는 탓에, 점점 더 많은 국민이 포퓰리즘 정권의 푼돈에 의존해 생계를 유지하지 않을 수 없다. 포퓰리즘이 경제를 망치고, 망가진 경제로 인해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리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이렇듯 평등한 사람들의 정치 체제인 민주주의 원리는 평등의식의 부재뿐 아니라 ‘극도의 평등 의식’으로 인해서도 타락할 수 있다. 평등의식을 잃어버린 민주주의는 20세기적 파시즘으로 향한다. 평등의식이 극단화, 과격화되면 21세기의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포퓰리즘의 함정으로 굴러떨어진다.

    “그러므로 민주정체는 불평등 정신과 극도의 평등 정신이라는 두 가지 극단을 피해야 한다. 불평등 정신은 민주정체를 귀족정체 혹은 일인 통치로 이끌고, 극도의 평등 정신은 일인 전제정체로 이끈다. 결국 정복으로 끝이 나는 일인 전제정체 말이다.”(205쪽)

    몽테스키외는 절대왕정 시기의 프랑스 사람이다. 역사책에 적혀 있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를 제외하면 단 한 곳의 민주공화국도 없던 18세기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역사적 사례를 검토한 끝에 내린 결론은 놀랍게도 20세기뿐 아니라 21세기의 민주주의가 빠질 수 있고, 빠져들었던 오류를 냉철하게 지적하고 있다.

    “인간은 오직 법에 의해 평등한 존재가 된다”

    이 논의가 불편하게 느껴질 사람도 있을 듯하다. 우리는 대의민주주의를 ‘불완전한 민주주의’로, 직접민주주의를 ‘현실적으로는 어렵지만 도달해야 할 이상’으로 배웠다. 그런데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중요한 책을 쓴 몽테스키외는 직접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타락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몽테스키외는 민주주의자가 맞는 것이긴 한지 궁금해질 수 있다.

    사실 이런 비판은 몽테스키외가 살아있을 때부터도 제기됐다. 몽테스키외가 말하는 민주공화국은 사실상 귀족정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아냥거림도 흔히 뒤따랐다. 그런 비판을 예상이라도 한 듯, 몽테스키외는 “진정한 평등 정신과 극도의 평등 정신은 하늘과 땅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멀다”(207쪽)며 ‘진정한 평등 정신’과 ‘극도의 평등 정신’에 대해 부연하는 내용을 덧붙였다.

    몽테스키외에 따르면 진정한 평등 정신은 동등한 사람에게 복종하고 동등한 사람에게 명령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우리는 이 논의를 시작할 때, 대의민주주의의 현실 속에서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 받는 자의 현실적 차이를 감안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떻게 이번에는 다시 ‘인간의 평등’을 주장할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법치주의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평등한 존재로 태어난다. 그러나 인간은 계속 평등한 존재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사회가 평등을 잃어버리게 만드는데, 인간은 오직 법에 의해 다시 평등한 존재가 된다.”(307쪽)

    몽테스키외가 바라본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의 평등만을 앞세우는 정치 체제가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다양한 차이를 인정하되, 그들 모두가 지키고 따라야 할 법을 통해 평등을 이룩하는 현실적 구상을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몽테스키외 하면 다들 떠올리는 3권 분립은 바로 이 맥락에서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법으로 통치하되 그 법을 만드는 입법부와 집행하는 행정부, 판결하는 사법부를 서로 분리하고 견제하게 해야 법의 공정성을 유지할 수 있고 민주공화국의 구성원인 인민의 평등과 자유를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지금, 大韓民國 법의 정신은 과연 무엇인가

    18세기의 고전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첫째, 국민에게 돈을 뿌리는 포퓰리즘의 위험성은 일찌감치 예견돼 있던 것이다. 돈을 뿌리면 물가가 폭등해 국민이 오히려 도탄에 빠지는 경제학적 논리 이전에, 돈을 뿌리면 정치가 타락해 민주공화국이 무너지고 1인 독재가 되고 만다는 정치학적 통찰과 우려가 제기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사례는 현실에서 이미 숱하게 발견된다.

    둘째, 법치주의가 확립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현실 속에서 완벽하게 평등한 상황을 만들 수는 없고, 그런 목적을 추구하면 민주주의는 포퓰리즘의 함정에서 타락하고 만다. 따라서 어느 정도는 현실적 차이를 인정해야 하는데, 그 경우에도 법만큼은 모든 이에게 동등하게 적용돼야 한다. 우리의 헌법에도 명문화돼 있는 ‘법 앞의 평등’은 바로 이런 개념인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현실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이재명 대표와 더불어민주당,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와 조국혁신당 등 22대 총선에서 180석가량을 차지하게 된 소위 ‘민주화 세력’은 몽테스키외적 권력 분립과 대의민주주의의 이상을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 대의민주주의란 직접민주주의를 할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택하는 차선 내지는 차악으로 여기는 것이다. 몽테스키외라면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법 앞의 평등’이라는 대전제도 위협받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대표는 여러 건의 재판을 받는 형사피의자다. 심지어 조 대표는 법원에서 2심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법정구속을 피한 채 총선에 나와 당선된 사람이다. 유사한 혐의로 재판을 받아 수감된 이들과 비교해 볼 때 이재명, 조국 대표는 ‘법 앞의 평등’을 넘어 ‘법 위의 평등’을 만끽하고 있는 것 아닐까. 2024년 지금, 대한민국의 ‘법의 정신’이 과연 무엇인지 묻고 싶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칩 워’ ‘인간의 본질’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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