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 현명, 정대라는 교훈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 동안 숙명여대가 갖고 있던 이미지는 ‘조용하고 단아한 여자대학’이었다. ‘티없이 맑고 순결함, 백설의 정기, 예지, 고고, 지조’ 등 육각형 교표(校標)에 담겨 있는 의미를 들춰봐도 숙명여대는 다른 여자대학보다 좀더 조신(操身)한 이미지가 짙게 배어 있었다.
여성만의 공간을 상징하듯 서울 용산구 청파동의 야트막한 언덕배기 위에 홀로 둥지를 틀고 있는 숙명여대는 입구 - 교문이라고 하기에는 어색한 - 바로 옆에 널따란 잔디가 있었고 본관을 향해 줄지어선 은행나무가 샛노란 잎을 떨굴 때면 앳된 여대생들이 깔깔거리며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던, 어찌 보면 참한 색시감을 고르기 좋은 그런 이미지의 대학이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숙명여대를 둘러본 사람이라면 그 변화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다. 고등학교 교문 같던 철제 대문은 세련된 현대식 교문으로 바뀌었고, 스무 개의 건물 중 최근 5년간 증축·신축한 건물만 10여 개에 이른다. 정면에 자리잡은 본관엔 가로 6.4m, 세로 4m의 초대형 전광판이 하루 15시간 동안 학내·외의 각종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학생서비스센터는 ‘원스톱 학사행정’ 체제를 갖췄다.
교내 전역에 무선 LAN 망이 구축돼 무선 LAN 카드가 설치된 컴퓨터만 있으면 강의실, 연구실뿐만 아니라 학내 어느 곳에서도 인터넷 이용이 가능하다. 학교측에선 200여 대의 노트북을 구비해 학생들에게 대여해 주고 있다. 학내에서 노트북을 펴놓고 리포트를 작성하거나 인터넷을 즐기는 학생들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사회교육관 1∼3층에 위치한 국제영어교육원은 링구어익스프레스(Lingua Express)로 불린다. 이곳은 일종의 ‘영어나라(EOC ; English Only Community)’로 일단 이 건물에 들어서면 모든 대화는 영어로만 해야 한다.
휴대폰과 모니터가 쭉 늘어선 다른 대학의 어학실들과 달리 이곳엔 오디오, 비디오, 인터넷 시설이 갖춰진 멀티미디어 도서관과 함께 휴게실, 테마 카페 등이 있다. 쉴 때도 영어로 대화해야 하고, 카페에서 음료를 주문할 때도 영어를 써야 한다.
대형스크린을 통해 하루 종일 미국방송이 흘러나오고, 각 강의실은 사무실, 법정, 국제 회의장 등으로 꾸며져 테마별로 상황에 맞는 영어를 배울 수 있다. 자연스럽게 영어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별천지’인 것이다.
짧게 몇 가지만 소개했지만 이 밖에도 숙명여대의 변화된 모습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숙명여대 85학번으로 현재 모교 국문학과 강사로 출강하고 있는 조연숙씨(35)는 “나무와 잔디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건물이 들어서면서 다소 삭막해진 느낌도 있지만 80년대와 비교할 때 지금의 숙명은 ‘정말 우리 학교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달라졌다”고 말한다.
이런 외견상의 변화는 돈 많은 사립대학이라면 어느 대학이나 가능한 일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숙명여대의 탄생과 성장과정을 살펴보면 최근 숙명여대의 변화가 단순히 돈 많은 사립대학의 외형적 몸집 불리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숙명여대는 운이 별로 없는 학교다. 1906년 고종 황제의 부인인 엄귀비가 세운 숙명여대는 당시 황실로부터 황해도 지방에 있는 토지를 재원(財源)으로 할애받았다. 그런데 가장 큰 밑천이던 이 농경지들을 남북 분단으로 잃어버렸고 현재 위치한 청파동 땅마저 국유지에 편입됐다. 결국 반세기 동안 숙명여대는 국가 소유의 땅을 임대해 사용해온 셈이고 학교 건물들 역시 법적으로는 불법이었다.
이경숙 총장은 “취임식 후 총장실에 올라와 보니 책상 위에 놓인 축하봉투는 8억 원에 이르는 세금과 벌금을 납부하라는 고지서 뭉치였다”고 1994년 3월 취임 당시를 회고한다.
1950년대 숙명여대는 서울시 응암동에 15만평의 대지를 소유한 적도 있었다. 캠퍼스를 이전하려고 준비한 부지였는데, 이곳에 큰 태풍으로 이재민들이 몰려들면서 천막촌이 형성돼 이전 계획을 포기해야만 했다. 대신 서울시로부터 남현동 토지를 환지받았지만 이곳 역시 1968년 ‘김신조 사건’으로 수도방위사령부가 설치되면서 느닷없이 국방부에 수용된다. 토지에 관한 한 숙명여대는 지지리도 운이 없었다.
수도방위사령부가 철수하면서 옛 땅을 찾을 수 있게 됐지만, 이번엔 이 부지가 공원용지로 묶여 매입할 수 없었다. 결국 숙명여대는 학교를 일으켜 세울 토지를 확보하는 것부터 다시 시작하게 된다. 말 그대로 ‘제2의 창학(創學)’이었다.
◇ 성공비결 1 - 과감히 바꿔라
1995년 2월22일 힐튼호텔 컨벤션센터엔 오후부터 ‘아줌마 부대’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머리가 하얀 할머니부터 이제 갓 결혼한 새댁까지. 이들을 하나로 묶어 모이게 한 이 날 행사의 명칭은 ‘숙명 제2창학 선언 발기인 대회’. 제2창학을 이루자는 뜻에서 2월22일을 대회 날짜로 잡았고 100주년이 되는 2006년까지 그 목표를 달성하자는 뜻에서 2006명의 행사 참여인원을 모집할 예정이었다.
이날 펼쳐진 이색 이벤트는 ‘등록금 한 번 더 내기 운동’. 그러나 대부분이 가정주부로 집안 살림 챙기기도 빠듯한 형편에 이미 졸업한 대학에 등록금을 다시 납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위에선 ‘2억원만 모금돼도 기적일 것’이라는 냉소적인 예측이 많았다.
“유사한 형태의 대학발전기금 모금 행사를 한 다른 대학의 경우 참석인원이 1000명을 넘지 못했다”며 “더욱이 여대(女大)고 졸업인원도 4만 명 정도에 불과한데 2006명의 발기인은 너무 허황된 목표”라는 주장도 있었다. 참석자들을 위한 도시락을 주문할 때도 주문 수량을 줄여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그러나 이런 우려는 행사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눈 녹듯 사라졌다. 너무 많은 동문이 몰려와 경찰이 나와 교통정리를 해야 할 형편이었던 것. 결국 2500여 명이 참석해 이중 2005명이 ‘5학년 1학기 등록금’을 납부했고 62억원의 약정액이 접수됐다.
이경숙 총장은 이 자리에서 “창학 100주년을 맞는 2006년까지 교육환경 개선, 교육의 질 향상을 통해 제2창학을 이뤄내 세계적인 명문대학으로 발돋움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제2창학 선언 이후 변화된 것이 별로 없다”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홍보를 통해 대외 이미지가 개선됐다는 점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최근 숙명여대가 만들어낸 ‘전국 1호(號)’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대표적인 것이 ‘혁신적인 대학 마케팅’이다. 그 동안 대학들이 학교 홍보를 위해 만든 팸플릿, 포스터는 아름다운 사계(四季)를 담은 캠퍼스 풍경, 연구하는 교수와 학생, 첨단 수업시설 등을 보여주는 것 정도가 고작이었다. 거기에 사법시험 합격자 몇 명, 무슨 평가에서 전국 몇 위 등을 나열하는 정도.
숙명여대는 ‘정숙’이 상징하는 고루한 인상을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이미지로 바꿔야 했다. 홍보실이 새로 구성되고 박천일 교수(언론정보학부)가 홍보 사령탑을 맡으면서 숙명여대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광고 전략을 짜게 된다.
대학 홍보에 필요한 예산이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고안한 방법이 재학생을 모델로 기용하는 것. ‘왜 안돼!’라는 문구를 내건 재학생 광고모델 모집 포스터를 보고 80여 명의 학생이 몰려들었다. 숙명여대의 광고모델 공개모집은 학교 홍보모델로 재학생을 활용하는 효시가 됐다.
그 다음은 도발적인 문구로 소비자의 이목을 끄는 것. 그래서 나온 것이 ‘울어라, 암탉아’ ‘뛰어라, 청개구리’ 같은 다소 엉뚱한 문구였다.
“처음에 이런 광고문구를 내건다고 했을 때 원로 교수님들의 질책이 많았습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이 있는데 꼭 이런 식으로 할 필요가 있느냐’ ‘청개구리는 반항적인 이미지가 강한데 숙명여대 학생 모두를 외곬로 보이게 하려느냐’는 의견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박교수는 이총장으로부터 “민족과 여성만 빼고는 모두 바꿔도 좋다”는 주문을 받았다고 한다. 예쁜 여학생의 웃고 있는 얼굴 위에 크게 쓰인 청개구리와 암탉은 주요 일간지를 타고 전국으로 배달됐고 결과는 즉각 나타났다. 말 그대로 ‘대박’이었다.
미스 콜럼버스, 미스 빌 게이츠, 미스 광개토대왕, 나와라 여자 대통령, 디지털은 숙명, 그리고 총장이 직접 모델로 등장한 광고에 이르기까지 숙명여대 홍보실은 대학 이미지 마케팅에 새 장을 열었다. 폐쇄적이고 침체적인 이미지로 평가됐던 숙명여대가 98년 이후 점차 진보적, 미래 지향적인 이미지를 얻게 된 것.
1997년 0.29 대 1에 불과했던 특차모집 경쟁률이 1999년에는 2.3 대 1로 크게 올랐다. 또 학교 홍보 광고로 숙명여대는 98년 대한민국광고대상 신문부문 은상과 한국광고연구원에서 수여하는 ‘THE BEST AD’ 본상을 수상했다. 대학광고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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