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여대 한국사학과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임혜련씨(28)는 대학원에 진학한 뒤 아직까지 후배를 받지 못했다. 장래가 불투명한 한국사 분야의 대학원 진학을 학부 후배들이 꺼리기 때문. 설상가상으로 학부제가 본격적으로 실시된 뒤로는 학과의 존립을 걱정할 정도로 한국사 전공자 수도 현저히 줄었다.
임씨는 “시장이 대학을 점령해 버렸다”면서 “인문학을 고사시키는 쪽의 문교정책과 학교의 근시안적인 정책이 지속된다면 학과 자체가 없어질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 대학 한국사학과 전공과목은 수강인원을 채우지 못해 폐강되기 일쑤다. 학부제를 시행하고 있는 타 학교 사학과도 비슷한 실정.
한국사 학위를 받기 위한 전공 이수 학점도 36학점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학생이 다른 학문 분야를 복수전공하고 있기 때문. ‘부득불(不得不)’ 한국사를 전공하게 된 학생들은 복수전공 과목이나 영어, 컴퓨터 등 취직에 도움되는 공부에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한다.
“2중 전공제도는 비인기 학과의 정원을 채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정도 학점을 이수하고 학사 학위를 받는다는 것은 난센스죠.”
임씨는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가슴에 품었던 꿈을 접은 지 오래다. 전공 교수가 정년 퇴임을 해 결원이 생겨도 신임 교수를 채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인문학 분야에서, 교수가 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5월28일 서울 K대 도서관. 열람실 책상을 각종 고시용 수험서가 점령하고 있었다. 소위 문(文), 사(史), 철(哲)을 공부하는 사람은 한 손에 꼽을 정도. 대학 도서관이 ‘거대한 고시원’으로 변한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벼랑 끝에 선 기초학문
고시를 준비하는 수험생은 관련 학과 학생에 한정되지 않는다. 취업이 어려운 기초학문 전공자의 상당수가 사법고시, 공인회계사 자격시험 등에 뛰어들고 있다.
“전공 공부는 졸업을 하기 위해 시험 때나 잠깐 하는 정도죠. 저 같은 문학 전공자들은 두 부류로 나뉘어요. 고시에 승부를 걸든가, 아니면 취업을 위해 미치도록 영어공부에 매달리든가. 전공을 살려 대학원에 진학하겠다는 사람은 ‘정신나간 놈’으로 취급당하기 십상이에요.”
공인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는 김모씨(27)는 “기초학문이 학생들에게 버림을 받은 이유는 ‘밥그릇’을 만들어 주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취직이 잘 되는 법대나 경영대에 다녔다면 고시에 청춘을 걸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갓 입학한 대학생 중에는 아예 재수를 선택하는 이도 적지 않다. 올해 서울대 비인기학부에 입학한 김모씨(20)는 중간고사를 마치고 아예 재수를 결심한 경우.
“‘그런 학문을 공부해서 뭐에 써먹을 거냐’는 주변의 얘기도 있었고 무엇보다 스스로 만족할 수 없었어요. 이번 입시에 실패하면 학교로 되돌아가야 하겠지만 그렇게 되더라도 전공에 미래를 걸 생각은 없어요.”
그는 지난해 입시에서 복수 지원했다 낙방한 사립대 법대에 진학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처럼 기초학문이 벼랑 끝에 섰다. 대학에 불어닥친 거센 시장논리가 기초학문을 퇴출 대상 1호로 전락시켜 버렸다. 취업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기초학문을 외면하는 학생들과, 모집단위 광역화(학부제)·BK(두뇌한국)21사업으로 대표되는 정부의 기능성·실용성 중심 교육정책이 가뜩이나 ‘기초체력’이 약해진 기초학문 분야의 입지를 더욱 좁히고 있는 것이다.
준비 안된 학부제가 主犯
기초학문의 위축현상은 대학 교양과정에서도 심각하게 드러난다. 대학 교양과정이 시장논리에 따라 재편됐고 대학생들의 ‘학문편식’ 현상이 심각해져 모든 학문의 기본이 되는 교양과정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각 대학은 1995년부터 학사운영에 대한 자율성이 증대돼 교양과목 학점배점기준, 졸업소요학점, 학기당 취득학점 등을 대학이 자율적으로 지정할 수 있게 되자 영어회화, 컴퓨터 등의 강의를 강화하고 한국사, 철학개론 등을 교양필수에서 제외했다. 심지어 교양국어를 가르치지 않는 대학도 생겨났다.
또 학점을 따기 쉬운 실용과목엔 수백 명이 몰리는 반면, 그나마 개설돼 있는 철학·문학·수학 등 진지한 성찰을 요구하는 교양과목은 수강신청자가 적어 폐강되거나 여러 단과대학 학생들을 모아 대형 강의로 진행하기 일쑤다. 경희대 2학년 김지영씨(22)는 이렇게 말한다
“원하는 전공학과에 들어가려면 교양학부 학점이 좋아야 하는데 어려운 과목을 수강하면 결과는 뻔하죠. ‘무엇을 배우고 싶으냐’가 아니라 ‘어느 교수가 학점을 잘 주고 얼마나 공부하기 쉬우냐’가 수강과목을 선택하는 기준입니다.”
그러나 기초학문에 대한 ‘찬밥 대우’는 대학생들의 지적 수준을 하락시킨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수학과 물리학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컴퓨터 지식을 쌓아봐야 기형적인 지식이 될 뿐이에요. 대학생들의 학력 수준이 매년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지적 수준을 보면 한심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아요.”
고려대 김인환 교수의 이야기다. 기초학문을 전공하는 교수들은 한결같이 “교양과정에서 모든 학문의 뿌리인 ‘기초학’이 소외되는 것은 국가의 미래와 관련된 중요한 문제”라고 주장하며 기초학이 튼튼해야 나라가 산다는 논리를 펼친다.
교육 전문가들은 기초학문 붕괴의 ‘주범’으로 학부제(모집단위 광역화)를 지목한다. 1995년부터 각 대학이 도입하기 시작한 이 제도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전공 분야를 접하게 하고, 기존의 학문 분야를 아우를 수 있는 통합인재를 육성하겠다는 것이 그 근본 취지.
그러나 명분과 실제는 다르다. 각 대학들이 교수와 학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준비 안된’ 학부제를 받아들인 것은 정부로부터 BK 21 지원금을 받아내기 위해서라는 게 대학사회의 상식이다. “철저한 준비 없이 학부제가 시행되면 기초학문이 고사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는 “지원금을 포기할 것이냐”는 실리론에 묻혀버린 것.
“모집단위 광역화는 처음부터 잘못됐습니다. 미국식 제도를 아무런 준비 없이 도입한 교육당국의 책임이 가장 크고 무분별하게 적용한 각 대학도 책임이 있어요. 미국은 학부에서 기초학문에 대한 지식을 쌓은 뒤 전문대학원에 진학해 응용학문을 익힙니다. 학부제를 시행하기 이전에 전문대학원을 만들었어야 해요.”
서울대 기초학문협의회 의장 유평근 교수의 주장이다. 유교수는 또 “준비 안 된 학부제도를 도입한 이후 부작용이 곳곳에서 속출하고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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