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보문산 기슭에 산다는 한 동양의학자를 만나러 서울에서 새마을호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그가 어떤 인물인지 자못 궁금했다.
멀리 서울까지 날아든 소문을 듣노라면 아찔한 정도로 대단하다. 그는 ‘의사 면허증 없는 신의(神醫)’요 ‘한의사들의 재야 스승’이자 ‘의성(醫聖) 허준과 이제마에 못잖은 학문적 업적을 남긴 동양의학자’라는 거다. 또 의학이나 주역의 세계에 눈 동냥, 귀 동냥 정도는 한 사람들 사이에 그의 이름 석자가 심심찮게 회자된단다.
그는 최근 의학과 주역이 한뿌리라는 의역동원(醫易同源)의 학문적 결정판인 ‘의역한담후집(醫易閒談後輯, 전2권, 동양학술원)’을 내놓음으로써 동양의학체계를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동양의학의 근본인 주역 원리로부터 바로 임상에 적용할 수 있는 처방까지 이론과 실제를 모두 담은 책인데, 그는 이 책의 발간을 끝으로 더 이상 쓸 게 없다며 붓을 놓았다 한다.
더불어 관상학과 사주학에서도 이미 일가(一家)를 이루었다는 전언이고 보면 머리가 핑 돌 정도다.
분명 기인 풍모가 물씬 풍기는 인물일 것이다. 취재 대상자가 의(醫)·도(道)·복술(卜術) 분야와 관련된 인물인 경우 그 ‘어렵고 튀는’ 정도란 일반인의 상상을 뛰어넘기가 십상이다. 그래서 대중의 상식을 바탕으로 하는 기사로 소화해내는 데 곤란할 겪을 때가 적잖다.
그런 느낌은 이미 서울에서 전화로 인터뷰를 요청할 때부터 감지됐다. “한 30분 만나면 되지 않겠소”라며 더 이상 타협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을 때부터 뭔가 심상찮았다.
서울에서 그의 제자인 김정진 씨(한의학박사·뉴코아한의원 원장)로부터 대략 주워담은 정보는 이렇다.
1943년 충북 보은의 속리산 남녘 마을에서 태어났으니 올해로 59세. 여섯 살 나던 해에 서당에 들어가 한학(漢學)을 접했고, 신동 소리를 들으면서 여러 스승 밑에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독파. 열 네 살 무렵에 문리(文理)가 트이려 하므로 그간 억지로 하던 신식학문은 중학교 중퇴로 인연을 끊어버림.
1958년 열여섯 살 무렵에 독서를 과도하게 하여 신병(身病)을 얻음. 당시 대학병원에서도 원인 모를 불치병이라 하여 손을 놓아 생사의 기로를 헤매다 천행으로 속리산 뒤쪽에 사는 한 도인을 만나 한약 한두 재를 지어 먹고 기적적으로 완쾌.
그 도인은 조선조 정조 때 명의(名醫) 이경화(李景華)의 4대 제자로 ‘계은 선생(溪隱先生)’이라 불림. 계은 선생은 이미 한문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경지에 이른 이정래에게 자신의 ‘의발(衣)’을 전수.
이후 현재의 대전 보문산으로 이거(移居). 그리고 동양의학 집대성 작업을 시작해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일월각’ 주인의 상(相)
기차가 대전역에 곧 도착한다는 알림 신호가 있자마자 재빨리 가방에 넣어둔 주역 괘(卦)풀이 책을 펼쳤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를 점쳐보기 위해 내심 설정해둔 절차다.
‘주역’은 우주와 자연과 인간에 대해 광대한 사유체계를 펼쳐놓은 철학서이자, 동시에 미래와 미지에 대한 점복 기능도 있다 하지 않는가. 게다가 주역을 연구한 도인이라 하니 도술적으로 접근하는 것도 그다지 억지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주역 괘 풀이를 위해서는 정결한 장소에서 무심의 경지로 시초(蓍草)를 뽑아 괘를 살피는 게 정석. 그러나 워낙 세상이 빨리빨리 돌아가는 시절이다 보니 점사(占辭)도 그에 맞추어 편리하게 볼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이 개발됐다. 원래 역(易)이라는 게 ‘변화’와 ‘바뀜’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그중 하나가 점을 보고자 하는 당시 상황에서 시계의 분침과 시침, 혹은 초침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보고 괘를 뽑는 ‘시계 점’이다.
그의 인물됨을 알고자 하는 욕구에 응해 나온 시계 점 괘는 풍택중부(風澤中浮) 괘. 해설하면 한 뜻에 초지일관하여 기어코 성취하고야 마는 진실함이 있는 괘다. 그는 한마디로 큰 뜻을 가진 사람으로 풀이된다. 또한 ‘내(기자)가 원하면 (상대방이) 기쁘게 화답해온다’고 괘는 부연 설명하고 있으니, 인터뷰도 당초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무난히 진행될 성싶었다.
보문산 초입 대로변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2층 양옥이 동원 이정래씨(李正來, 이하 동원 선생으로 호칭)의 거주처. ‘일월각(日月閣)’이라는 문패가 좀 낯설 뿐, 여염집과 별달라 보이지 않는다.
한복차림으로 객을 맞이한 동원 선생은 그 눈빛이 보는 사람을 압도할 정도로 형형하다. 눈매 또한 가늘고 깊게 물결치듯 뻗어가는 형상인데, 관상학에서는 이런 눈을 두고 대귀격(大貴格)으로 친다. 그러나 ‘상학진전(相學眞傳)’이라는 관상학 전문서까지 낸 고수 앞에서 아마추어의 소견은 비례(非禮)를 넘어 무례(無禮)일 듯싶다.
나중에 확인해본 바에 따르면 중국 대륙 전체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명의인 사해주(謝海州·중국중의연구원 교수)는 동원 선생을 보고 “의용(儀容)의 대방(大方)함이 동방학자로서 학문을 아주 많이 품고 있는 선비상”이라 평했다 한다.
각설하고 최근 출간한 ‘의역한담’부터 말머리를 텄다. ‘한담(閒談)’의 사전적 정의는 ‘심심풀이로 하는 이야기’라는 뜻. 그러나 책을 들춰보면 웬만한 역학자나 한의학자들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전문서적이다 보니 혹시 ‘독자 꾀기’용 제목은 아닐는지.
“그건 아니구요. 요즘 사람들은 물욕(物慾) 명예욕(名譽慾)을 좇느라 늘 바쁩니다. 그걸 버릴 때만이 한가해져요. 또 사람은 한가할 때 참말을 할 수 있어요. 그러니 한가한 가운데 역(易)을 관(觀)하고 의(醫)의 금고(今古)를 담설(談說)한다는 뜻으로 ‘의역한담’이라고 한 거요.”
충청도 특유의 억양이지만 말은 충청인답지 않게 빠른 편이다.
원래 ‘의역한담’은 99년에 500여만 자의 고한어(한문)로 집필돼 출간됐는데, 자신들도 읽게 해달라는 한의사 제자들의 간청에 따라 해설서 겸 침구학 등을 새로 추가해 ‘의역한담후집’이란 이름으로 올해 발간한 것이라 한다.
이 책은 그의 처녀작인 ‘동양의약원리’(1977년) ‘태한한학전집’(전3권·1989년) ‘동의요체진전’(전3권·1992년) ‘의역동원’(전2권·1993년)으로 이어지는, 동양의학 체계화 시리즈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저자 자신도 의역학(醫易學)에 대해 “이제 더 쓸 것도 없고 여력도 없다”고 말한다.
중국의사들도 놀란 고한어 저서들
이 책과 저자에 쏟아지는 찬사는 멀리 국외에서도 눈부시다. 옛 동양의학서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고한문으로 구사된 이 책을 보고 누구보다 놀란 사람들은 중국 의학자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이 백화문(白話文) 정책을 편 이후 중국 대륙 전체에서 고한문으로, 그것도 전문 의학서를 저술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상황에서 한국에서 그런 인물이 나왔으니 말이다.
이 책을 보고 사해주 중국중의연구원 교수는 “의도유(醫道儒) 3가(家)를 합한 절세의 학문”이라 평했고, 중국중의연구원 원장 부세원(傅世垣) 교수는 “의도(醫道)에 숙달하고 역리(易理)에 깊이 관통한 책”이라 했다.
또 중경국의대학(仲景國醫大學) 총장 조청리(趙淸理) 교수는 “의학과 역학은 서로 통한다는 옛말을 실제로 증명한 책이며, 저자 동원 선생은 동양 삼국에서 의역학(醫易學)의 일인자이자 옛적에 끊어진 의역일관(醫易一貫)적 중경학설(중국 후한시기의 명의 장중경이 남긴 의학체계)을 처음으로 밝힌 종사(宗師)”라고 극찬했다. 그는 80대 원로급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나이 어린 동원 선생에게 “국경을 초월하여 선생님으로 생각한다”고 존경을 표시하였다.
그가 중국까지 널리 알려진 것은 이미 90년대 초의 일. 93년에 역시 고한어로 지은 ‘의역동원’이란 책을 통해서다. 이 책을 읽어본 뒤 베이징의 중국중의연구원측에서 그를 초청해 특강을 부탁했던 것. 중국측 원로급 의사 300∼400명이 참석한 자리에서 ‘의역일원적 동양의학’이라는 제목으로 강의한 후 그의 명성은 중국 전역으로 번져 나갔다.
특히 그는 94년에 중경국의대학(하남성 정주시 소재)에서 중의학박사 학위와 명예교수직을 받기도 했다. 이 대학은 중국에서 의성(醫聖)으로 추앙받는 장중경 의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곳인데, 외국인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한 것은 동원 선생이 처음이라 한다. 이에는 까닭이 있다.
“주역에서 비롯되는 동양의학의 계보는 대략 이래요. 역 철학을 의학 쪽으로 끌어당긴 ‘황제내경(黃帝內經)’에서 시작해, 이를 구체적으로 응용한 본격 의학서인 중경의 ‘상한론(傷寒論)’과 ‘금궤요략(金要略)’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다시 금(金)과 원(元)나라 시대의 ‘후세방’으로 맥을 이어가지요.”
계속되는 동원 선생의 설명.
“후세방은 금원(金元)시대 명의 4명(금원 4대가)이 공부는 하지 않고 전해지는 처방전만 달달 외어 약을 짓는 선배의사들의 행태에 분개해 ‘고전으로 돌아가자’며 문예부흥을 부르짖고 만든 것이에요. 그런데 요즘도 적지 않은 국내 한의사들이 뜻은 모르고 기술만 알면서 사람 몸을 다루는 실정입니다. 이 점은 중국도 마찬가지예요. 자신들의 의학적 뿌리에 대해 이해하는 사람들이 드문데, 제가 내경에서 금원 4대가까지 의역일원적 의학체계를 갖춰 내놓으니 공감했던 것이지요.”
아무튼 그의 모든 저서는 중국중의연구원에 소장돼 있을 정도로 귀하게 대접받고 있음은 분명하다.
요즘도 동원 선생은 국내에서도 고한문으로 강의자료를 준비한다. 동양의학의 모든 의서가 고한문으로 돼 있고, 한문법 자체에 억양(抑揚)이 있는 뜻글이므로 심오하고 함축된 의미를 표현하기에 용이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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