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8월호

‘삶의 질’ 높이려는 ‘우위권 투쟁’… 효율적 체제구축이 해법

  • 글: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입력2003-07-29 10: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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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무현 정권 이후 사회갈등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까닭은 무엇인가.
    • 그 양태는 예전의 그것과 어떻게 달라졌는가.
    • ‘민주주의 공고화 시기’에 접어든 한국사회가 필요로 하는 갈등해결 방법론.
    ‘삶의 질’ 높이려는 ‘우위권 투쟁’… 효율적 체제구축이 해법
    어느새 파업은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가장 상징적인 브랜드가 되었다. 인지도 측면에서만 따지자면 그 어떤 상품보다도 강력하게 국가 홍보에 이바지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그것이 부정적, 호전적인 이미지여서 외국인들에게는 경계의 대상으로 비친다는 점이다. ‘은자의 나라(Hermit Nation)’는 이제 ‘항의자의 나라’ ‘시위대의 나라’로 변모했다.

    파업과 시위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응어리진 한(恨)을 시원스레 풀어주는 소나기처럼 인식되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국운을 가로막는 먹구름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국민들의 인식수준이 파업하는 이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낮은 것은 아니지만, 파업이 일상화하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심리는 하루가 다르게 확산되고 있다.

    파업은 그것을 통해 얻게 되는 ‘만족의 수준’이 ‘국민적인 관용의 수준’을 넘을 때 정당성을 상실한다. 아무리 합법적인 파업이라고 해도 국민정서가 돌아서면 실패로 끝날 개연성은 더욱 높아진다. 파업 당사자들이 국민계몽 효과를 기대하기에는 경제적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 데다, 한국사회 자체가 그 어느 때보다도 다기화된 각양각색의 위험과 갈등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파업의 격렬성과 시위대의 주장을 관찰하다 보면 한국사회가 금세라도 침몰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오는 것이 사실이다. IMF 외환위기 사태를 겪은 후 가뜩이나 소심해진 탓이기도 하거니와, 집단충돌에서 빚어지는 손실은 결국 당사자들뿐 아니라 국민 모두가 감당해야 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시각을 달리해보면 파업과 이해충돌에 대한 불안감을 조금은 덜 수 있는 근거들이 더러 발견되기도 한다. 우선 ‘국민소득 1만달러’의 발전단계에 내포되어 있는 갈등의 수준을 따져볼 때 그렇다.



    세계 각 나라의 성장궤적을 비교분석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흥미롭게도 국민소득 2000달러와 6000달러에서 사회 전체가 요동치는 현상이 발견된다고 한다. 이것을 ‘경제성장의 정치지대’라고 한다면, 국민소득 2000달러와 6000달러는 정치와 사회영역에서 전면적인 패러다임의 변혁을 불러일으킨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이 국민소득 6000달러를 통과하던 때가 1990년대 초의 민주화 시기와 일치하고 그후 패러다임의 변화가 매우 느리게 진행되어왔음을 생각하면, 현재의 갈등은 패러다임의 변화를 완료하지 못해 치르고 있는 ‘실패의 비용’인 셈이다.

    더욱이 그후 한국사회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IMF사태를 겪지 않았던가. 경제를 파탄시킨 책임의 소재를 밝히지 않은 채 제도개혁을 통해 전국민에게 무작위로 고통분담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위기관리정책은, 결국 국민들로 하여금 자기방어와 이익관철을 위해 투쟁을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이익갈등의 조정기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사회적·구조적 재난이 자신에게 엄습해오는 것을 막을 방법은 오직 집단투쟁뿐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노무현 정권의 등장이 이런 욕구를 반영한 결과이자 ‘방어의식’을 ‘투쟁의식’으로 발전시키는 계기로도 작용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지난 대선에서 투표일 직전까지 마음을 정하지 못했던 대규모 부동층 유권자들이 가장 염려했던 바는 서로 성격이 다른 ‘대가(代價)’ 사이에 가로놓인 선택의 문제였다. 노무현 후보의 경우는 막힌 출구를 뚫는 대신 ‘지배구조의 약화’가 예상되고, 이회창 후보의 경우는 보수적 안정을 얻는 대신 새로운 출구모색의 긴 통로를 빠져나와야 하는 답답함이 놓여 있었다. 그러므로 지난 몇 개월간 겪었던 사회갈등은 사실 박빙의 승부가 이미 예고했던 당연한 귀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초기 몇 개월간 드러난 노무현 정권의 행보와 통치이념의 파격성에 비하면 파업, 시위, 갈등의 수준은 훨씬 낮고 온건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를 제대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노무현 정권의 정치적 지지기반과 그 특성을 명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노무현 정권의 주요 지지층은 386세대를 필두로 한 2030세대, 노동자와 서민층, 그리고 시민운동세력과 민간부문의 고학력 전문직업층이다. 이 가운데 우선 젊은 세대는 권위주의적 질서에 대한 강한 반감을 표명하고 나이 순으로 이루어진 위계의 전복을 원한다. 노무현 정권 초기에 단행된 대규모 정부인사에서 서열파괴가 이루어진 것도 이들의 염원을 반영한 것이다.

    다음으로 노동자와 서민은 한국의 지배층을 신뢰하지 않는다. ‘부정부패와 연줄망과 엘리트 서클의 폐쇄적 결속을 통해 지위를 유지해온 잘사는 사람들과 권력자들’은 결코 기회균등과 소득평등에 너그럽지 않다는 사실을, 노동자와 서민계층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그것은 이들의 마음 저변에 응어리로 남아 있는 한(恨)이다.

    끝으로 고학력층과 시민운동세력은, 한국 정치의 모순적인 구조에 무모하리만큼 도전장을 내밀었던, 그리고 번번이 좌절하면서도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노무현 후보의 일관성과 용기를 높이 샀다.

    이러한 지지층의 염원이 현실적 정치권력으로 실체화되자마자 전복의 요구가 터져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노무현 정권 초기 몇 개월 동안 잠재된 갈등요인들이 폭발한 것이나, 민주화 이후 집권자의 거듭된 약속에도 성취될 기회를 차단당했던 요구들이 공론장으로 한꺼번에 쏟아져나온 현상 등은 충분히 예견된 귀결이었다.

    정작 문제는 노무현 정권이 행사할 수 있는 ‘지배력(governability)’의 수준이다. 민주주의 공고화의 핵심지표인 지배력의 문제는, 비단 신생민주주의가 넘어야 할 가장 중요한 문턱일 뿐만 아니라 이미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는 선진국도 체제변화 과정에서 가장 신경 써야 할 사안이다. 지배력을 다지지 못했을 경우 치러야 할 비용은 신생민주주의 국가일수록 크고 위험하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지배력의 위기가 발생하는가? 시민사회로부터 터져 나오는 참여요구를 정치제도가 충분히 감당하지 못할 때 그렇다. 즉 집권세력이 시민사회의 참여요구를 관리할 역량을 갖지 못하고, 정치제도 역시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에 지배력의 약화 혹은 붕괴가 발생하는 것이다. 국가가 다양한 사회집단들 사이의 투쟁과 이익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채 방관할 수밖에 없는 상태, 헌팅턴은 이런 상황을 ‘경비 국가(praetorian state)’라고 부르고 정치적 불안정을 그 가장 큰 특징으로 꼽았다.

    극단적인 불안정은 결국 체제와해를 불러온다. 노무현 정권이 시민사회의 각종 참여요구를 관리하지 못한다면, 또는 그것을 관리할 제도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상황은 일종의 ‘프레토리안적 상태’로 치닫게 되고 급기야는 보수진영이 그렇게도 우려해 마지않았던 체제불안정이 가속화될 것이다. 그것은 곧 개혁의 중단과 ‘이미 지연된 민주주의 공고화의 재지연’을 불러온다. 이런 상황은 우리에게 큰 불행이다.

    해체갈등과 발전갈등

    정권 초기에 사회갈등이 매우 빈번하게, 대규모로 폭발하는 것은 비단 노무현 정권만의 특성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민주화 이후의 역사, 최장집 교수가 ‘보수적 민주화’로 불렀던 한국 민주화의 특성에서 기인한다. 어느 정권이든 과거의 부채를 물려받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을 처리하는 데에 귀중한 시간과 역량을 소비해야 하는 것이 한국의 운명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각종 갈등과 충돌은 권위주의의 비교적 긴 역사나 민주화의 짧은 역사에 모두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권위주의체제의 모순을 해소하는 작업이 민주제도를 구축하는 과정과 함께 한꺼번에 이루어져야 했던 한국 민주화의 특성이 우리 사회를 갈등에 매우 취약한 사회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민주화 이행 국가들이 겪는 사회갈등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권위주의체제 해체와 연관된 갈등(해체갈등·conflict of breakdown)과 민주주의로의 이행 및 공고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발전갈등·conflict for democratic development)이 그것이다.

    전자는 권위주의적 유산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기존 제도를 해체하고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효율적으로 제압하는 관리전략의 필연적인 결과다. 또는 권위주의체제하에서 억압되었던 사회적 요구들이 자연발생적으로 터져나오면서 전개되는 이해충돌도 여기에 포함된다.

    반면 후자는 민주주의로 이행하거나 공고화하는 과정에서 권력구조를 어떻게 재편하고 어떤 제도를 도입할 것인가에 대한 갈등이다. 즉 공정성과 합리성이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라고 할 때 그것의 구체적인 작동원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념적·가치론적 충돌이다. ‘어떤 민주주의(which democracy)’를 수립할 것인가, 그것에 따라 이해관계를 어떻게 재편할 것인가가 후자와 관련된 갈등 유형이다.

    민주화 과정에서는 흔히 이 두 가지 유형의 갈등이 중첩되어 나타난다. 해체갈등이 완결된 상태에서 발전갈등을 겪는 국가는 없다. 해체갈등이 미완결의 상태로 남아 있을수록 민주주의 이행과정은 길어지고 공고화 단계도 더불어 지연된다. 한국의 경우 민주화 이후 들어선 YS와 DJ 두 정권 동안에는 해체갈등과 발전갈등을 모두 겪었던 반면, 노무현 정권에서 일어나고 있는 갈등은 비교적 발전갈등에 가깝다.

    노무현 정권의 등장과 함께 터져나온 각종 갈등들,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겪어야 할 예고된 갈등들은 모두 민주화 과정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미완의 개혁’은 개혁완료를 추구하는 세력과 수구세력 사이의 다툼을 낳고, ‘완료된 개혁’은 그 시행과정에서 제도적 비효율성이 쌓일 경우 새로운 갈등을 낳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가 지나온 궤적을 돌이켜보면 해체갈등은 거의 소멸된 듯 보이는 반면, 발전갈등은 새로운 형태로 전개되고 있는 듯한 양상이다. 즉 오늘날의 한국사회는 민주주의의 영역 내부로 진입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다양한 체제유형 중 어느 것과 접목할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갈등을 겪고 있는 것이다.

    어떤 가치관을 지향할 것인가

    결국 노무현 정권에서 벌어지는 사회갈등은 과거 두 차례의 민주정권과 비교하면 사실상 한 단계 발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원칙과 절차의 정당성’ 문제를 둘러싼 원론적 형태의 투쟁이 아니라,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어떤 것이 더 효율적인가를 놓고 다투는 ‘우위권 투쟁’에 해당한다.

    한동안 나라를 뜨겁게 달구었던 ‘국가교육정보기반사업(NEIS)’ 관련 분쟁의 핵심은 ‘인권’이었다. 교육정보화의 필요성에는 모두 동의한 상태에서, 과연 그 안에 어떤 정보를 담을 것인가, 그것이 프라이버시 보호에 위배되느냐 여부가 분쟁의 소재였다. 결과야 어찌 되었든 효율성과 인권의 대립에서 인권이라는 훨씬 중요한 가치에 관심이 쏟아졌다는 사실만으로도 과거의 분쟁들과는 대조적이다.

    많은 비난과 우려를 동시에 촉발시켰던 화물연대, 철도노조, 조흥은행 노조 파업 등은, 노조결성을 둘러싼 과거의 원초적 분쟁과도 다르고 사업주의 부도덕한 행위·착취·노조탄압 등의 저급한 쟁점이 문제가 된 것도 아니었다. 그것들은 정당성, 공정성, 형평성 등과 같은 한층 발전된 가치들을 둘러싼 분쟁이었다. 이전의 갈등이 ‘제도’의 문제였다면 최근의 갈등은 ‘추상적 가치관’의 싸움인 것이다. 앞으로도 이런 형태의 분쟁은 지속될 전망이다.

    따라서 노무현 정권은, 법과 제도의 공정한 운영에도 신경을 써야겠지만 추상성이 높은 가치관들을 어떻게 정의하고 선택해나갈 것인가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공정한 법과 제도가 과거 두 차례의 민주정권에서 어느 정도 이룩됐다고 생각할 때, 이제는 이념과 가치의 혼란을 아우를 수 있는 통치양식을 구축하는 게 더욱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노사갈등을 예로 들어보자. 1990년대 중반 이후 몇 차례의 노동법 개정과 노사정위원회의 운영경험 등을 통해 법과 제도는 이미 어느 정도 정비된 상태다. 이제 문제는 노사갈등의 쟁점들을 통치이념 속에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노사교섭의 관행을 어떻게 정착시킬 것인가에 있다. 그동안 노사관계를 주도해온 비교적 경쟁력이 높은 노동조합의 전략적 행위가 어떤 경제적 효과를 만들어내는지, 비정규직과 저임금노동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인식하게 만드는 노력이 노사갈등의 해결에 더 중요하고 효과적인 상황이 되었다는 뜻이다.

    문제가 다르면 답도 다르다. 이제부터는 법보다는 관행과 문화의 구축으로 전환해야 한다. 최근 나타나는 노사갈등에는 이념과 가치관의 문제가 개재되어 있으므로, 노사 당사자들만의 노력으로는 단기적인 효과밖에 거두기 어렵다. 대신 공론을 통해 사회 전체의 합의를 만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것이 노무현 정권이 겪고 있는 사회갈등의 주요한 특징이다.

    사회적 합의기반의 구축은 특히 이해집단이 얽혀 있는 개혁사안일수록 더욱 중요하다. 과거 두 민주정권 기간에 사회갈등을 촉발했던 개혁조치들을 살펴보면, 국민적 합의와 지지를 쉽게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대체로 성공했고 사회 갈등도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었다. 이런 사안의 경우에는 특별한 해결기제 없이도 국가기구의 합리적인 운영과 법치주의의 집행만으로 충분히 성공적이었다. 대통령의 개인적 통치력 발휘로 사회 갈등이 해결될 수 있는 개혁조치들이 상당수 존재했다.

    그러나 이해집단이 개재된 개혁조치들은 쉽사리 풀리지 않아 정책부작용이 커졌으며 그에 따라 사회 갈등도 증폭되는 양상을 보였다. 대통령의 개인적 통치력에 한계가 드러난 것도 대부분 이러한 영역에서였다. 김영삼 정권이 미완으로 남겨둔 교육개혁, 사법개혁, 복지개혁이 대표적인 사례이고, 김대중 정권 시기에는 의약분업, 교육개혁, 연금개혁, 노동개혁, 기업구조개혁 등이 이러한 예에 속한다. 김대중 정부가 가장 역점을 두었던 남북관계 개선은 초기에는 국민적 합의를 얻을 수 있었으나, 인사문제 등의 영역에서 정책실패가 자주 반복되면서 지역감정이 되살아나고 이를 보수-수구세력이 정치적 전략으로 활용하면서 원래의 취지가 퇴색되기도 했다.

    해결의 원칙과 로드맵

    사회갈등이 자주,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것에 대해 국민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경우 사회적 이타심, 도덕성, 준법성, 양보와 희생,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관습이 취약해 작은 분쟁의 씨앗이 커다란 갈등과 혼란을 자초한다는 비판적 반성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기는 사회 각 영역이 대폭적인 수정을 요하는 ‘개혁의 시대’인 만큼, 사회갈등의 발생, 전개, 해결 등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국민성보다는 통치양식이 더 중요하다. 노무현 정권이 이같이 한 차원 발전된 형태의 사회갈등을 원만하게 해결하고 정권의 성패를 가를 아킬레스건인 지배력의 취약성을 보완해나가려면, 다음과 같은 부분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첫째, 국민의 기대를 너무 부풀리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돌이켜보면 격렬했던 사회갈등은 대체로 정권교체 초기에 한껏 부풀려진 ‘기대 인플레’와 직결돼 있다. 정권을 잡기 위해 남발했던 정치적 약속 때문에 통치자와 집권당 스스로 과부하에 걸리고, 정치력을 능가하는 그 약속들에 포획되어 지지기반이 약화되는 부작용이 자주 발생했던 것이다. 기대 인플레는 집권 초기 인기유지에는 좋겠지만 결국 정권의 정책역량을 넘는 무리한 행보를 낳아 실정(失政)의 계곡으로 빠져들기 십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무현 정부가 애초에 제시했던 몇 가지 중요한 약속은 하루빨리 수정, 폐기해야 할 것이다. ‘7% 경제성장, 선진국형 복지’ 등이 그렇다.

    둘째, 같은 맥락에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리스트를 만들고 그에 대해 국민의 이해를 구하는 일이 필요하다. ‘할 수 있는 것’은 현재의 통치력, 지배력의 수준에 맞춰야 한다. 지배력은 개혁의 업적 및 성취도에 비례하고 개혁실패와 좌절에는 반비례한다. 거듭된 실패는 곧 통치력의 와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회갈등이 일어나도 정부로서는 속수무책인 상태, 앞에서 지적한 ‘경비 국가’의 상황이 닥칠 것이다. 현재의 통치력에 맞춰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모색하고 그것이 아무리 작더라도 국민의 이해를 구해야 한다.

    셋째, 5년 동안 할 일이 정해지면 그 해결단계와 시간대를 정하고 국민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 이는 곧 ‘통치일정’이자 ‘개혁 일정표’다. 사회갈등과 집단갈등은 대체로 원하는 것이 일시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조급함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정부가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언제 시행할 것인가에 대한 정보가 없으면 국민들은 향후의 발전방향과 행보에 대해 당연히 의아해한다. 정보의 공유, 개혁정책의 이해기반 확대, 가치관의 공감대 확대 등등의 작업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넷째, 사회변화의 방향과 지배적 가치관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그에 따라 적절한 정책과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한번 판단을 내린 후에는 설사 사회집단의 저항이 거세더라도 후퇴하거나 방향을 틀어서는 곤란하다. 지배적 가치와 이념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집권세력 내에 국한되면 상관 없겠지만, 반드시 사회집단간 분쟁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경계할 일이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갈등의 해결기제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과거의 의약분업, 사법개혁, 공기업 민영화 논쟁 등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정책방향이 있다 해도 그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이해갈등을 해결할 책임은 거의 전적으로 관료에 전가되어왔다. 노사정위원회만 해도 어렵게 합의를 이룬 사안이 국회와 행정부에서 폐기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해결기제를 만들어놓고도 그것의 기능과 위상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국회와 행정부의 거부권은 필수적 요소이지만, 기득권 유지와 예산할당 등 이런저런 명분으로 합의가 폐기되는 과정이 반복되면 ‘동의의 정치기제’는 단지 집담회(集談會)로 전락해 무용지물이 된다.

    법과 제도 차원 넘는 ‘문화’ 필요

    정치권의 책임회피도 문제다. 특정 정책사안에 대해 누가, 어느 정도로 책임을 질 것인지 경계를 명확히 그어야 한다. 사령탑이 없는 개혁조치들은 집단갈등 앞에 속수무책으로 변한다. 한국에서는 어떤 정책이든 궁극적인 사령탑은 대통령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모든 이해 당사자들이 대통령과의 직접면담을 원하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개혁조치마다 그에 걸맞은 사령탑을 세우고 책임과 권한의 선을 분명히 그어주어야 한다. 사회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자주 거론되는 ‘효율적인 체제구축’이 절실하다.



    갈등이 없는 사회는 발전도 없다. 한국사회에서 사회갈등이 자주,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것도 국민들이 갖고 있는 발전열망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관리하고 조율할 것인가의 문제, 즉 ‘협치(協治)’의 성공여부는 이제 법과 제도를 정비하는 차원을 한 단계 넘어서 관행, 문화, 의식, 행위양식을 어떻게 만들어가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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