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조조정본부장, 경영관리본부장, 기획총괄본부장, 전략경영본부장, 투자사업본부장…. 이름은 달라도 기능과 파워는 유사하다.
- 오너 패밀리를 최측근에서 보좌하며 그룹의 미래를 디자인하는 실질적 2인자가 바로 그들. 외부에 노출되기를 꺼리며 총수의 ‘그림자’를 자임하는 것도 공통점이다. 한국 재계를 대표하는 전략·기획·재무통들을 만나보자.
1976년 12월 어느날 밤. 급성간염으로 대구병원 6층 병실에 입원해 있던 이학수 제일모직 관리부장은 “불이야!” 하는 고함소리에 잠을 깼다. 순간, 며칠 전 부친이 당부하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아까 봐뒀는데, 이 병실 복도에는 비상구가 두 개더라. 오른쪽 비상구는 잠궈놨고 왼쪽 것은 열렸어. 혹시 모르니까 새겨들어라. 사람은 항상 준비를 해야 되는 기라….”
이부장은 침대 시트를 물에 적셔 뒤집어쓰고 문을 나선 뒤 무작정 왼쪽을 향해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어떻게 6층을 뛰어내려 왔는지는 몰라도 잠시 후 불길에 싸인 병동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제서야 살았다는 안도감에 무릎이 탁 풀렸다.
‘元祖 구조조정본부장’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1971년 공채 12기로 삼성그룹에 입사한 이사장은 현장 실무부터 깨칠 요량으로 아무 연고도 없는 제일모직 대구공장 경리과 근무를 지망했는데, 24시간 돌아가는 공정을 속속들이 관찰하기 위해 숙직과 일직, 야간 근무를 자청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가 입사 이듬해 국내 모방직업계 최초로 개발한 원가 분석 시스템은 최근까지도 이 분야의 기본 매뉴얼로 통했다.
몸에 밴 성실성을 인정받은 그는 1982년, 회장 비서실에 계열사 경영관리를 챙기는 운영팀이 설치되면서 운영1팀장으로 발탁됐고, 이후 20년 넘게 이병철(李秉喆)·이건희(李健熙) 부자(父子) 회장의 핵심 브레인으로 ‘간택’ 받았다. 이사장은 비서실 재무팀 이사·상무·전무를 거치며 그룹 재무 전문가로 돈줄을 쥐락펴락했다.
1992년 비서실 차장(부사장)에 오른 뒤에는 비서실 재무팀을 총괄한 것은 물론, 골칫거리로 떠오른 그룹 계열분리 실무작업을 주도하며 이건희 회장을 밀착보좌했다. 이병철-이건희, 이건희-이재용(李在鎔·삼성전자 상무) 승계 과정의 지분관리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그가 외환위기 극복과 구조조정 과정에서 이끌어낸 성과를 보면 가히 ‘원조(元祖) 구조조정본부장’이라 불릴 만했다. 1997년 말 외환위기가 터지자 이사장은 그룹의 모든 역량을 현금 흐름의 정상화에 집중시켰다. 전 계열사의 현금 흐름도를 하루 단위로 보고받으며 물샐 틈 없는 철벽수비에 골몰했다. 그 결과 삼성은 시장금리가 연 30% 가까이 치솟았을 때도 수조원의 현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건희 회장의 전폭적인 신뢰가 뒤따랐음은 불문가지. 회장실장을 겸하고 있는 이사장의 집무실은 서울 태평로 삼성 본관 최상층인 28층 이건희 회장 방과 붙어 있다.
당시 이건희 회장은 “전자와 금융업 외에는 어떤 회사를 처분해도 좋다”며 이본부장에게 구조조정 전권을 위임했다. 국내 대기업 구조조정본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삼성 구조본은 인력의 3분의 1이 재무팀에 집중돼 있다. 이는 그룹 구조조정의 최우선 기준이 재무적 판단임을 시사한다. 이사장은 ‘돈 먹는 하마’가 된 자동차와 한계 사업부문은 물론, 업종 전망이 밝지 않은 일부 수익 사업부문도 과감하게 정리, 삼성이 세전이익 15조원(2002년)의 국내 최우량 기업으로 거듭나는 기반을 닦았다.
지난해 11월, ‘만년 준우승팀’ 삼성라이온즈가 창단 21년 만에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머쥐자 이사장은 이렇듯 재무통다운 소회를 털어놨다.
“기쁘다. 그저 우리 구단이라서가 아니라 삼성이 그간 바보처럼 돈만 많이 쓰고 우승 한번 못해봤기에 정말 기쁘다….”
노무현(盧武鉉) 정부 초기부터 대기업 구조본 해체 논란이 빚어지면서 일부 기업은 실제로 구조본을 폐지하기에 이르렀지만, 삼성 구조본은 요지부동이다. 삼성 구조본 임원들은 “삼성의 힘은 회장·구조본·계열사 사장단의 삼각편대에서 나온다”고 공공연히 강조한다. 이사장 자신도 “구조조정은 일회성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조직적으로 계속되는 회사의 일상 업무가 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삼성 구조본은 재무·인사·경영진단·홍보·비서·법무·기획 등 7개 팀으로 구성돼 있다. 각 계열사에서 선발된 100여 명의 정예요원들이 최신 정보를 수집·가공하고, 계열사 경영상태를 진단해 처방전을 내놓는다. 한시적 비상기구의 성격을 훨씬 뛰어넘는 핵심 참모조직으로 뿌리내린 지 오래다. 더구나 이건희 회장을 빼면 삼성에서 이사장만한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도 없다. 삼성으로선 ‘대안부재’ 때문에라도 구조본을 계속 끌고가야 할 상황이다.
LG그룹은 김대중(金大中) 정부 출범 직후인 1998년 3월 설립한 구조조정본부를 노무현 정부 출범 직후인 지난 3월 해체했다. 이 때문에 “(전)정부의 요구에 따라 구조본을 만들고, (현)정부의 요구에 따라 구조본을 없앴다”며 정권의 풍향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한다. “통합지주회사인 (주)LG가 출범하면서 더 이상 구조본을 운영할 필요가 없게 됐다”는 것이 LG측의 해명.
LG는 2001년에 화학지주회사(LGCI)를, 2002년에 전자지주회사를 세웠고, 올들어 두 회사를 (주)LG로 통합했다. 이로써 지주(持株)회사는 출자를 전담하고, 사업 자회사는 고유사업에만 전념하는 지주회사 체제가 국내 대기업 가운데 처음으로 궤도에 올랐다.
그렇지만 LG 구조조정본부가 없어졌다고 해서 지난 5년간 구조본을 이끈 강유식(姜庾植·55) 전 본부장의 위상이 흔들릴 것으로 보는 사람은 드물다. 오히려 그룹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입지가 더 넓혀졌다는 시각도 있다.
구조본이 해체되면서 그는 그룹 통합지주회사인 (주)LG의 대표이사 부회장에 선임됐다. 이로써 (주)LG는 LGCI와 LGEI의 합병으로 대표이사 회장 및 이사회 의장직을 자동 승계한 구본무(具本茂) 회장과 강 부회장의 2인 복수대표 체제로 운영된다. 강 부회장은 비(非)오너 패밀리로선 유일하게 (주)LG의 등기이사로 올라 있다.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 동관 30층의 구본무 회장실 바로 옆에 있는 옛 구조조정본부장 집무실도 그대로 쓰고 있다.
과거 구조본이 해오던 계열사 조정·통제 기능은 소멸됐다고 하지만, 구조본 본연의 기능이 대부분 지주회사로 흡수됐다는 것은 LG측도 부인하지 않는다. (주)LG는 CFO(최고 재무담당 임원) 등 재경부문, 신규사업 개발부문, 출자회사에 대한 경영관리부문, 계열사 경영진을 평가·육성하는 인사부문 등 그룹 중추조직을 거느리고 있다.
또한 (주)LG에 기존의 그룹 경영진단팀과 자회사 파견 인력, 회계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정도경영 태스크포스팀’을 신설, 자회사의 책임경영을 보완하기 위한 경영진단 기능을 맡긴 것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이 기구에는 구조본에 없던 감사 기능까지 부여했다.
“시민단체에서 일할 사람”
강 부회장은 지주회사 도입을 위한 밑그림을 그린 인물. 지주회사 체제는 특히 LG에겐 절묘한 아이디어가 아닐 수 없다. LG는 이를 통해 소유와 경영의 분리라는 선진 기업형 지배구조를 표방할 수 있게 됐다. 오너 패밀리인 구씨·허씨 지배주주들은 주식을 보유해 출자 관리에 주력하고, 자회사 경영은 전문경영인과 이사회에 맡긴다는 것. 이 과정에서 구씨 일가가 전자·화학·금융·통신부문을, 허씨 일가가 건설·유통·정유부문을 맡는 사실상의 계열분리도 자연스럽게 진행됐다.
구회장의 후계 문제가 매끄럽게 해결된 것도 지주회사 덕분이다. LG그룹에선 장자(長子)가 경영권을 승계하는 것이 원칙. 아들이 없는 구회장에겐 딸을 지주회사의 지배주주에 앉힘으로써 경영에 개입하지 않고도 그룹을 소유, 장자승계 전통을 지킬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서울대 상대를 수석으로 입학한 수재형인 강 부회장은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장처럼 참모조직(staff)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은 아니다. 1972년 럭키(현 LG화학)에 입사한 이래 25년간 LG전자와 LG반도체 현장을 챙겼다. 1987년 임원으로 승진한 후 LG전자에서 전략·기획부문을 담당하면서 전자와 통신부문 사업구조의 틀을 짜는 실무책임을 맡았고, LG반도체 설립의 산파 역할을 했다. 공인회계사라 금융과 재무에도 밝다.
구본무 회장은 1970년대 중반 럭키 과장으로 경영수업을 시작했을 무렵 같은 부서에서 대리로 일하던 강 부회장을 눈여겨봐뒀다고 한다. 이후 그가 핵심 계열사인 전자와 반도체 임원을 거치며 치밀한 업무처리 능력을 보이자 1997년 그룹 회장실 부사장으로 전격 발탁했고,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본부를 만들면서 그를 본부장에 앉혔다. 반도체 빅딜, LG전자·정보통신 합병, IMT-2000 동기식 사업자 선정 등 굵직굵직한 현안들이 그의 손을 거쳤다.
강 부회장은 주변에서 “참여연대나 경실련에서 일해도 될 사람”이란 말을 듣는다. 철저한 원칙주의자로 어떤 경우에도 예외를 두려 하지 않는 성향 때문. 2000년 3월 LG가 계열사인 데이콤 이사진 절반을 사외이사로 채우라는 시민단체의 요구를 받아들이자 참여연대의 한 교수는 강 부회장을 일러 “오너에 무조건 충성하지 않고 기업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행동에 옮기는 전문경영인으로서 존경심마저 갖게 한다”며 이례적으로 높이 평가했다.
강 부회장은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 과정에서도 외자유치, 외국 선진기업과의 합작, 기업공개 등 이른바 3대 원칙을 일관되게 고수해 한때 유동성 위기설까지 나돌던 LG의 재무구조를 눈에 띄게 개선했다. LG는 외환위기 이후 국내 기업 가운데 최대 규모인 65억달러의 외자를 유치했고, 필립스 등 선진기업과의 합작법인을 5개사에서 13개사로 늘렸다. 기업공개 법인도 10개사에서 국내 대기업 중 가장 많은 20개사로 늘렸다.
1998년 부사장으로 구조조정본부장을 맡은 그는 그해 말 사장, 지난해 초 부회장에 올라 ‘본부장 재직 중 2계급 특진’이라는 드문 기록을 세웠다. 1999년 반도체 빅딜 이후 구본무 회장이 전경련 모임에 불참하자 그룹내 다른 회장, 부회장을 제쳐두고 구회장 대신 회장단 회의에 참석했다. 매주 월요일 아침에 열리는 임원회의에서 논의되지 않은 아이디어나 고민이 생기면 직접 담당임원의 방으로 내려가 의견을 묻고, 보고서도 간단한 메모 형태로 올리게 하는 등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실무형.
배임혐의로 구속돼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김창근(金昌根·53) SK(주) 사장이 그룹 구조조정본부장직을 사퇴한 직후인 지난 6월18일 SK그룹은 구조본 해체를 선언했다. 1974년 ‘경영기획실’로 출범한 SK 구조본이 30년 만에 수명을 다하는 순간이었다. 최근 구조본 임직원들과 가진 ‘쫑파티’에서 김사장은 “내 잘못으로 구조본 식구들이 뿔뿔이 헤어지게 됐다”며 시종 눈시울을 적셨다고 한다.
고(故) 최종현(崔鍾賢) SK그룹 전 회장은 창업 초기부터 자신을 보좌한 손길승(孫吉丞) SK그룹 회장을 가리켜 “그 사람은 내 부하가 아니라 사업동지”라고 했다. 손회장이나 최태원(崔泰源) SK(주) 회장에겐 김사장이 그런 사람이다.
김사장의 별명은 ‘마징가’다. 매일처럼 하루 서너 시간만 잠자며 일에 매달리는 엄청난 체력의 소유자기 때문이다. 집에도 회사 근거리 통신망(LAN)을 깔아놓고 업무를 처리한다. 일과시간을 아끼려고 이메일은 새벽에 일어나 체크한다. 그러면서도 매일 밤 조깅을 빠뜨리지 않으며, 주말에는 골프와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건강을 다진다.
1974년 입사 이후 SK케미칼 외환과장·자금부장·재무담당 상무를 거쳤고, 1997년에는 그룹 구조본 재무팀장을 맡는 등 줄곧 자금파트에서 근무하며 SK를 대표하는 재무전문가로 성장했다. 재무담당 임원 시절 기자들이 환율 전망을 묻곤 했을 정도로 숫자에 밝다. 1989년 나이 마흔에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 MBA 코스를 밟을 당시 실명위기에 이를 만큼 공부에 파고들어 2년 과정을 1년 만에 마치고 돌아왔다.
그는 외환위기 이후 상호지분 해소와 부채비율 축소 계획을 입안·실행하는 데 주력했고, 주거래은행과의 재무구조 개선약정을 무리없이 추진하는 등 그룹 전체의 자금 흐름을 안정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 지난해 8월에는 미국발 금융위기론으로 국제금융시장이 불안했음에도 불구하고 SK텔레콤의 해외증권을 발행, 2조원 규모의 외자유치에 성공했다. 팍스넷 지분 인수, SK텔레콤과 KT의 지분 맞교환 등도 그의 작품이다.
김사장은 동갑인 유승렬(劉承烈) 전 SK(주) 사장(현 벤처솔류선스 사장)과 그룹내 양대 실세로 꼽혔다. 유 전 사장은 기획통, 김사장은 재무통으로 활약하며 ‘좌승렬 우창근’으로 불렸다. 승진은 유 전 사장이 한 발씩 앞섰다. 1998년 유 전 사장이 손길승 회장의 뒤를 이어 구조조정본부장(전무)에 올랐을 때 김사장은 구조본 재무팀장(상무)이었다. 김사장은 2000년 12월 SK(주) 사장으로 승진한 유 전 사장에 이어 구조조정본부장에 올랐고, 지난해 2월 유 전사장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SK를 떠나자 SK(주) 사장 자리도 물려받았다. ‘양대 실세’에서 ‘유일 실세’가 된 것.
오너 지분확대 시도하다 무리수
최태원 회장 형제들은 선친인 최종현 전 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지분이 얼마 되지 않는다. 최 전 회장 자신이 많은 지분을 보유하지 않았던 데다, 그는 폐암선고를 받고 나서도 자식들에 대한 지분상속을 서두르지 않았다. 1998년 8월 최 전 회장이 타계하자 최씨 일가는 가족회의를 열어 최태원 회장에게 지분을 몰아주기로 했지만, 그룹을 확고하게 지배할 수 있는 수준은 못됐다. 최회장은 취약한 지배력 때문에 줄곧 적대적 M&A에 등에 대비한 경영권 방어에 신경을 써야 했다. 무엇보다도 그룹의 지주회사이자 주력 계열사인 SK(주) 지분율을 높이는 게 관건이었다.
지난해 3월, 마침내 최회장과 SK 구조본은 ‘특공작전’을 감행했다. 최회장이 보유한 워커힐호텔 주식을 시세보다 높게 평가해 최회장의 개인회사나 다를 바 없는 SKC&C에 팔아넘기고, 그 매각대금으로 SK(주) 주식을 시세보다 싼 값에 사들여 그룹 지배권을 장악하려 시도한 것. 그 결과 최회장은 SK(주)의 최대주주로 올라서는 데 성공했지만, 이 때문에 올 초 김창근 사장과 함께 업무상 배임혐의로 구속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SK글로벌의 분식회계 파문까지 불거져 재계 서열 3위의 SK그룹은 지금껏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도 김사장의 그룹내 영향력은 위축되지 않을 듯하다. “그룹 구석구석을 손금 보듯 꿰뚫는 그가 없으면 SK글로벌 회생 등 산적한 현안을 해결할 길이 막막하다”는 게 SK 관계자의 말이다. SK측이 최회장보다 김사장의 보석을 먼저 신청한 것도 이런 사정 때문. 김사장은 보석으로 풀려난 후 일부 경영진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렵사리 SK글로벌에 대한 지원안을 입안했으며, 이를 승인받기 위해 사외이사들을 맨투맨으로 설득하는 등 온몸으로 뛰고 있다.
더욱이 지난 7월1일 SK(주)에 신설된 ‘투자관리실’이 구조본의 핵심 업무였던 자회사에 대한 재무·인사관리 업무를 맡게 될 것으로 알려져 김사장의 행보에 시선이 쏠리고 있다.
후계자의 태사(太師)
현대·기아자동차그룹에는 구조조정본부가 없는 대신 ‘기획총괄본부’라는 기구가 있다. 현대차측은 기획총괄본부의 의미를 애써 축소하려 든다. “자동차 전문그룹이라 계열사들이 자동차 관련 업종들로만 이뤄져 있기 때문에 다른 그룹처럼 업종이 상이한 계열사 업무를 종합적으로 조정하는 기능이 필요없다”는 것. 다만 현대차와 기아차 생산라인 등의 중복 투자를 예방하고, 자동차산업의 중장기적 전략을 연구·기획하기 위해 기획총괄본부를 가동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정순원(鄭淳元·51) 사장이 이끄는 기획총괄본부가 실질적인 그룹 구조조정본부이자 ‘싱크탱크’ 역할을 한다는 것은 현대차에서 상식에 속한다. 기획총괄본부는 대관(對官)업무 및 정보수집·분석을 담당하는 전략기획실과 계열사의 자금 흐름을 관리하는 재무팀을 비롯해 경영기획팀, 사업전략팀, 기획지원팀 등으로 구성돼 있다. 지난해 말 4개팀에서 6개팀으로 늘린 데 이어 올 들어서는 다시 1실 7개팀으로 확대 개편했다. 근무인원은 지난해 30여 명 수준에서 60여 명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임원들의 직급도 높아져 본부장은 부사장에서 사장으로, 부본부장은 전무에서 부사장으로 격상됐다.
기획총괄본부는 서울 양재동 현대차 본사 20층에 있다. 바로 위층인 21층에 정몽구(鄭夢九) 회장과 김동진(金東晉) 사장의 방이 있는 것을 보면 이 조직의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또 하나 주목할 사실은 정몽구 회장의 장남인 정의선(鄭義宣·33) 현대차 부사장이 기획총괄본부 부본부장으로 본부장인 정순원 사장 밑에서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는 것. 정사장으로선 ‘태사(太師)’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정사장은 정몽구 회장의 ‘경제교사’이기도 했다. 정사장은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온 후 미국 인디애나대에서 경제학 석·박사학위를 받은 경제전문가. 1986년 현대경제사회연구원 경제연구개발본부장으로 현대그룹에 입사해 경영진에게 경제·경영분야 조언을 해왔는데, 정회장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정사장은 1998년 정회장이 기아차를 인수할 때도 핵심 브레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인연으로 정회장은 1999년, 경복고 후배인 정사장을 현대·기아차 기획조정실장(부사장)으로 발탁했다. 정사장은 이후 현대차 계열분리, 다임러크라이슬러 외자유치 등을 주도하며 정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정사장은 정회장의 대변인 역을 자임해왔다. 2000년 봄 정회장과 동생인 정몽헌(鄭夢憲) 회장이 그룹 경영권을 놓고 이른바 ‘왕자의 난’을 벌였을 때 정순원 당시 현대차 부사장은 경복고 동문인 이계안(李啓安) 현대차 사장 등과 함께 ‘장자승계 대세론’을 내걸고 전면에 나서 김윤규 현대건설 사장·김재수 현대 구조조정본부장·이익치 현대증권 회장 등 몽헌 회장측 가신들에 맞서 싸웠다.
이듬해 3월 정주영(鄭周永) 전 명예회장이 사망하자 몽구 회장측은 장자의 위상을 대내외적으로 부각시킬 수 있는 가족장을 주장했고, 몽헌 회장측은 회사장이나 사회장을 바랐다. 결국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졌는데, 당시 정사장은 공식대변인으로 장례식을 진두지휘하며 정회장의 의중을 관철시켰다.
또한 지난해 정몽준(鄭夢準) 의원이 대통령선거에 출마, 형인 몽구 회장의 처지가 미묘해지자 정사장은 그룹을 대표해 기자회견을 갖고 “현대차는 일체의 정치적 활동에 개입하지 않고 기업경영에만 전념하겠다”며 정경분리원칙을 천명, 정회장의 어깨를 가볍게 했다.
정사장은 2001년 3월 기획총괄본부장에서 갑작스레 현대모비스 부품사업총괄 부사장으로 발령, 현대차의 ‘성골’격인 현대정공 출신 인맥에게 밀려난 게 아니냐는 추측을 낳았지만, 다섯 달 만인 그해 8월 기획총괄본부장으로 복귀했다. 이 때문에 “현장실무를 익히게 한 뒤 보다 큰 역할을 맡기기 위한 정회장의 심모원려(深謀遠慮)였다”는 정반대의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한진은 지난 4월 그룹 구조조정위원회를 ‘구조조정실’로 축소하고, 책임자의 직급도 사장에서 상무로 낮췄다. 한진 관계자는 “구조조정위원회의 본업인 계열사간 코디네이션이 이제 웬만큼 이뤄졌고, 현재 진행중인 계열분리 작업은 상무급이 총괄해도 된다는 판단에 따라 이뤄진 조치”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구조조정위원장을 맡아온 김종선(金鍾善·62) 사장은 겸임하던 정석기업 사장직만 맡게 됐다. 김사장은 1984년부터 그룹 경영조정실과 구조조정위원회에서 기획·조정업무를 전담한 구조조정 전문가. 한진건설·한진중공업 합병, 도시가스사업 매각 등을 통해 그룹 부채비율을 900%대에서 200%대로 낮추는 데 기여했다.
신임 구조조정실장은 재무통인 원종승(元鍾承·51) 대한항공 상무.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가진 원상무는 한국은행에서 자금감독 업무를 하다 1985년 한진그룹에 입사했고, 최근까지 구조조정위원회 재무팀장으로 신규사업 인수 및 매각, 계열 금융사 관리, 외자유치 등을 담당했다.
한진 구조조정실은 조직의 격도 낮거니와 계열사 인사에도 관여하지 않아 다른 대기업 구조본들처럼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진 않는다. 원상무 또한 그룹 2인자로 통하는 몇몇 대기업 구조조정본부장들과 수평비교하긴 어렵다.
하지만 그룹을 항공·중공업·해운·금융 등 4개 부문으로 계열분리하는 초미의 현안을 주도하고 있어 구조조정실 주변엔 늘 긴장이 감돈다.
계열분리 후 4개 부문은 조양호(趙亮鎬) 대한항공 회장, 조남호(趙南鎬) 한진중공업 회장, 조수호(趙秀鎬) 한진해운 회장, 조정호(趙正鎬) 메리츠증권 회장 등 오너 4형제가 각각 관할할 전망. 원상무는 계열사간 상호지분 정리와 금융기관 지급보증 해소를 통해 계열분리의 연착륙을 도모하는 데 골몰해 있다.
‘통합 롯데카드’의 꿈
롯데그룹엔 회장 비서실이나 그룹 구조조정본부, 경영기획실 같은 기구가 없다. 사장단 회의가 열리지 않을 만큼 계열사별 독립경영체제가 확고하게 자리잡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30여 개 계열사들의 재무·인사·감사·기획·홍보·신규사업 현황 등을 꿰뚫어보며 드러나지 않게 조정기능을 하는 곳이 있다. 그룹 기획조정실격인 호텔롯데 경영관리본부가 바로 그곳. 이곳에 소속된 3명의 사장들은 10년 넘게 함께 호흡을 맞추며 신격호(辛格浩) 회장·신동빈(辛東彬) 부회장 부자를 보좌하고 있다.
그중 한 사람인 김병일(金炳一·60) 사장은 1973년 호텔롯데 경리부장으로 입사해 1981년 그룹 기조실 이사로 발령받은 후 20년 이상 기조실을 지켜온 사실상의 기조실장. 짧은 스포츠형 머리와 짙은 눈썹이 무인풍(武人風)이지만, 그룹에서 첫 손가락에 드는 재무전문가답게 철두철미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대학(영남대)에서 경영학을, 대학원에선 회계학을 공부했다. 회계장부를 줄줄 외며 그룹의 전반적인 살림살이를 챙기지만, 자기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놓기보다는 신회장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해 그의 지시가 계열사에서 제대로 실행되도록 조정하는 데 주력한다.
경영관리본부에서 김사장은 재무, 신동인(辛東仁·57) 사장은 기획, 장잠태(張潛台·68) 사장은 감사로 역할을 분담해 경영관리본부를 꾸려간다.
요즘 롯데 경영관리본부가 머리를 싸매고 있는 최대 현안은 롯데백화점 카드의 신용카드화. 지난해 말 롯데는 아메리칸 엑스프레스 카드를 발급하는 동양카드를 인수, 사명을 ‘롯데카드’로 바꾸고 신용카드 사업에 뛰어들었다.
‘유통왕국’ 롯데가 신용카드 사업을 본격화하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 주력업종이 백화점, 호텔, 대형 할인점 등 신용카드를 많이 쓰는 소비업종이기 때문이다. 특히 600만명에 이르는 롯데백화점 카드 회원들을 일반 신용카드인 롯데카드 회원으로 흡수할 경우 롯데카드는 단기간에 시장점유율을 급상승시킬 수 있다.
이런 사정 때문에 롯데는 오는 연말을 목표로 롯데카드와 롯데백화점 카드의 통합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다양한 방안이 검토되고 있는데, 롯데백화점 카드부문을 분리시킨 후 롯데카드가 이를 인수하는 방안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밖으로는 자율적인 업계 구조조정으로 비치고, 내부적으로는 다수 우량 고객을 확보해 경쟁력을 키울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 아닐 수 없다.
지난 5월 롯데카드 오무영(吳武英) 사장이 함경북도 도지사에 임명돼 사직하는 ‘비상사태’가 발생하자 그룹 최고 경영진은 부랴부랴 경영관리본부 김병일 사장을 롯데카드 사장으로 겸임 발령했다. 통합작업이 한시라도 지연되면 안 된다고 우려했기 때문. 결국 김사장은 삼성카드 전무 출신의 이병구(李炳九) 사장을 영입할 때까지 한 달 동안 소방수 노릇을 했다.
깐깐한 ‘숫자 귀신’
지난해 12월 한화그룹 구조조정본부장에 취임한 최상순(崔尙淳·57) 사장은 외환위기 이후 한화의 2세대 구조조정 사령탑이라 할 수 있다. 1세대 사령탑은 박종석(朴鍾奭·67) 한화증권 회장, 박원배(朴源培·65) 한화석유화학 고문, 김연배(金然培·59) 한화증권 부회장. 외환위기 이후 박회장과 박고문은 구조본 부회장으로, 김부회장은 구조본 사장으로 고강도 구조조정을 밀어붙였다. 비수익 사업은 말할 것도 없고, 한화바스프우레탄·한화기계 베어링 부문 등 알짜 사업과 그룹 모체인 한화에너지까지 매각한 끝에 1997년 1200%에 육박하던 부채비율을 2000년 말에는 130%로 낮춰 숙원이던 대한생명 인수의 길을 텄다.
한화가 대한생명 인수에 성공한 만큼, 최상순 사장에게 주어진 역할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핵심사업, 다시 말해 증권·투신·보험을 아우르는 금융부문에 경영역량을 집중하기 위해 비핵심 사업에 대한 과감한 구조조정을 지속하는 게 그것이다. 다른 계열사들의 불요불급한 투자를 최소화해 대한생명 정상화에 전력투구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하나같이 최사장의 깐깐한 성미에 걸맞은 임무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최사장은 한국은행 출신으로 1982년 한화그룹 경영기획실에 특채됐다. 이후 14년간 재무·경영전략·경영기획 부서에서 근무하다 1996년 한화유통 사장, 1999년 한화정보통신 사장으로 CEO 체험을 했다. 재무통 아니랄까봐 ‘숫자 귀신’이어서, 결재서류에 가득한 숫자를 잠깐 훑어보고는 “합계가 좀 틀리네” 하며 소숫점 이하 숫자 몇 개 잘못된 것까지 정확하게 집어낸다.
만년 적자기업이던 한화유통을 사장 재임 3년 만에 흑자로 반전시키고, 역시 적자를 면치 못하던 한화정보통신도 구조조정을 통해 정비하는 등 위기관리능력이 뛰어나다는 점도 구조조정본부장에 적격인 자질로 꼽힌다.
한화 관계자는 “최사장에겐 유통이나 정보통신이 전혀 생소한 분야인데도 사장으로 간 지 불과 몇 달 만에 관련업무를 숙지해 그 바닥에서 20년씩 근무한 간부들을 아연케 했다”고 한다. 모르는 내용이 있으면 사내는 물론, 회사 밖의 전문가들에게까지 수시로 자문해 이해를 넓혔다는 것. 이런 사정도 모른 채 최사장을 만만히 보고 어설프게 보고했다가 ‘박살’이 난 임직원들이 더러 있다고 한다.
금호타이어 매각 凱歌
금호그룹 오남수(吳南洙·55) 전략경영본부장(사장)은 박삼구(朴三求) 회장의 심중을 가장 잘 읽어내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1970년대 말 금호실업 근무 시절부터 지근 거리에서 박회장을 보좌했고, ‘수치(數値) 경영’을 강조하는 박회장이 1990년대 10년간 아시아나항공 사장으로 있을 때는 줄곧 아시아나항공 재무담당 임원으로 ‘숫자’를 챙겼다.
2000년 1월부터는 그룹 비전경영실장으로 계열사 재무·인사관리를 총괄했다. 박회장은 매일 아침 오사장의 보고를 받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며, 오너 형제 경영인들이 모여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가족회의에도 오사장을 배석시키곤 한다.
회장 부속실에서 출발한 비전경영실은 지난해 박정구(朴定求) 전 회장이 타계하고 박삼구 당시 부회장이 회장에 오르면서 전략경영본부로 이름을 바꿨다. 본부장은 부사장에서 사장급으로 격상됐다. 성격은 구조조정본부와 유사하다. 전략경영본부는 지난 4월 그룹 최대 현안이던 금호산업 타이어사업부 매각협상을 비교적 좋은 조건에 마무리함으로써 그간 끈질기게 따라붙던 그룹 유동성 위기설을 진화했다. 금호타이어는 매각대금이 1조4300억원에 달해 매각이 순조롭게 이뤄지면 그룹 전체 부채비율이 지난해 말 350%대에서 올 연말에는 200% 이하로 떨어지고, 이에 따라 아시아나항공 등 주력사들의 주가도 오를 가능성이 많다.
오사장은 서울은행에 근무하다 1978년 금호로 옮겼다. (주)금호에서는 외환업무와 해외지점 근무를 통해 국제금융 감각을 익혔고, 아시아나항공에서 재무분야를 담당할 때는 초기 투자가 많은 항공사의 어려운 자금형편을 치밀한 관리로 헤쳐나갔다.
재무통은 대개 ‘샌님형’이기 쉽지만, 그는 처음 만난 사람과도 끈끈한 연을 맺는 친화력을 갖춰 ‘마당발’로 통한다. 오너 가족회의에 배석했다가 단단히 욕 먹을 각오를 하고 “그룹이 자금난에서 벗어나려면 알짜배기인 금호타이어부터 팔아야 한다”고 소신을 펴 매각의 물꼬를 텄다.
1996년부터 3년간 아시아나 컨트리클럽 사장으로 있을 때는 직접 고객들을 일일이 맞아주고 식사와 술자리까지 돌아보며 불편한 점을 묻는 바지런한 현장경영으로 화제를 모았다. 오사장은 LG증권 사장을 지낸 오호수(吳浩洙) 한국증권업협회장의 친동생.
한국중공업 인수 제의
(주)두산 이재경(李在慶·53) 전략기획본부장(사장)은 1978년 두산건설 입사 이후 두산식품, 두산음료, 오비맥주 등 주요 계열사를 두루 거쳤다. 1998년 1월 전략기획본부 전신인 기획조정실 근무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박용만(朴容晩) 두산 총괄사장을 도와 그룹 구조조정 실무를 총괄해왔다.
특히 두산그룹을 컨설팅한 매킨지와 오너 간의 가교 역할을 충실히 수행, 컨설팅 결과가 구조조정 현장에 무리없이 적용되게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울대 경영학과 4년 후배인 박용만 사장과 1988년 두산식품 부장 시절부터 두산음료 상무 때까지 6년 동안 같은 회사에 근무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두산은 외환위기 이전인 1996년부터 일찌감치 구조조정에 착수해 한국3M, 한국코닥, 코카콜라, 한국네슬레, 두산씨그램 등 돈이 될 만한 회사는 가리지 않고 내다팔았다. 창업주의 유업(遺業)이나 다름없는 오비맥주 지분까지 매각했다. 이 같은 ‘무차별 구조조정’을 주도한 인물이 박사장이고, 그를 보좌한 이가 이사장이다. 그렇게 확보된 자금으로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을 인수한 것도 이사장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일 욕심 많기로 소문난 이사장은 성격도 급하다. 업무를 지시하면 바로 피드백이 돼야 한다. 밥도 빨리 먹고 술도 급하게 마신다. 그래서 직원들과 회식을 가지면 아무리 배부르게 먹고 취하도록 마셔도 밤 10시 이전에 파장(罷場)을 본다. 이정우(李廷雨) 청와대 정책실장과 경북고 동기생.
건설에서 반도체까지
동부그룹에는 구조조정본부라는 조직도 없고, 따라서 구조조정본부장이라는 직위도 없다. 그러나 한신혁(韓信赫·58) 그룹 제조부문 부회장은 이미 오래 전부터 ‘동부그룹 구조조정본부장’으로 일컬어졌다.
동부그룹의 사업영역은 제조부문(동부건설·동부제강·동부한농화학·동부아남반도체 등)과 금융부문(동부화재·동부생명·동부증권 등)으로 나뉜다. 제조부문은 한 부회장이, 금융부문은 장기제(張基濟·59) 부회장이 경영을 총괄하고 관련업무를 조정한다. 이들 두 개 사업부문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그룹의 경영혁신 및 컨설팅사업을 전담하는 (주)동부는 이명환(李明煥·59) 부회장이 이끈다. 동부그룹은 구조조정본부가 없는 대신 이처럼 사업영역과 업무성격에 따라 역할과 임무를 달리하는 3명의 부회장이 각자 김준기(金俊起) 회장을 보좌하는 독특한 의사결정구조를 갖고 있다. 세 부회장은 나이도 거의 같고, 같은 해에 서울대를 졸업했다(한 부회장은 경영학과, 장 부회장은 경제학과, 이 부회장은 무역학과).
그런데도 한 부회장이 동부 안팎에서 구조조정본부장으로 불리는 것은 그가 1997년까지 가동됐던 그룹 종합조정실장을 10년간 맡은 바 있고, 지금도 전경련 및 대(對)정부 창구 등의 대외업무에서 편의상 동부그룹 구조조정본부장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장 부회장이 1997년, 이 부회장이 2001년에 동부그룹에 입사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 부회장은 약 30년 동안 김회장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며 호흡을 맞춰왔다.
한 부회장은 1969년 산업은행에 입행해 근무하다 1974년 동부건설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는 1969년 김준기 회장이 만 24세의 나이에 동부건설(당시는 미륭건설)을 창업한 이래 수년간 국내 건설시장에서 거둔 성과를 바탕으로 해외건설·관광·운송·금융부문으로 사업을 확대, 창업기를 지나 막 ‘그룹 규모’로 발전해 나가던 시기였다. 그 무렵 김회장은 자신을 도와 미래의 동부그룹을 함께 설계해갈 인재를 찾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한 부회장이 눈에 띈 것.
한 부회장은 입사 직후인 1975년부터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공사현장에 파견된 것을 시작으로 두 차례에 걸쳐 10여 년간 중동 건설현장에서 모래바람과 맞섰다. 당시 동부건설이 사우디에서 수주한 4500만달러짜리 공사는 그때껏 국내 건설업체가 해외에서 수주한 공사로는 최대 규모. 김회장은 직접 현지 건설본부장을 맡아 공사를 진두지휘했고, 한 부회장은 기획부장으로서 기획, 조정, 관리업무에 이르기까지 실무 전반을 꼼꼼히 챙겼다. 그 결과 1975년 34세의 나이에 최연소 이사로 승진하는 등 김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됐다.
한 부회장은 1986년 귀국 후 동부산업으로 옮겨갔고, 1989년 부사장 승진과 더불어 그룹 종합조정실장에 임명돼 신규사업 기획과 구조조정 등 그룹의 주요 현안을 총괄했다. 그는 한농 인수, 정보통신사업 진출, 동부제강 아산만 공장 건설, 반도체사업 진출 등 주요 현안이 생길 때마다 김회장의 구상을 실행에 옮기는 역할을 도맡았다. “그룹 현안에 대해 알고 싶으면 한 부회장에게 물어보라”는 말이 나온 것도 이 때문.
특히 1990년대 초부터 숙원사업이었던 반도체사업 준비를 총괄했으며, 1995년 반도체사업 태스크포스 팀장을 거쳐 1997년에는 동부전자 사장으로 취임, 마침내 동부전자의 비(非)메모리 파운드리사업 진출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제조부문 부회장으로 승진, 그룹 핵심 CEO로 자리잡았다.
‘효성의 잭 웰치’
지난해 초 효성그룹은 그룹 2인자인 ‘최고운영책임자(COO·Chief Operating Officer)’직을 신설, 이상운(李相雲·51) 당시 전략본부장 전무를 사장으로 2단계 승진시켜 초대 COO에 앉히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COO는 그룹 업무 전반을 총괄하며 조석래(趙錫來) 회장의 업무를 직접 보좌하는 자리. 회장이 해외출장 등으로 자리를 비울 경우 회장을 대신해 경영권을 행사한다. 조회장은 이상운 사장을 잭 웰치 전 GE 회장에 비유하며 향후 효성을 이끌어갈 전문경영인으로 꼽았다고 한다.
서울대 섬유공학과 출신인 이사장은 1976년 효성물산에 입사, 섬유산업의 본고장인 이탈리아 밀라노 지점장과 호주 시드니 지점장 등을 지내면서 국제 섬유업계 동향을 익혔고, 기획 및 해외시장 개척을 담당하며 시장 경험을 쌓았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효성물산이 자금난에 빠져들자 남들이 기피하는 재무담당 임원을 자청, 발이 닳도록 은행문을 들락거린 끝에 금융권의 지원을 이끌어내 회사를 정상화시켰다.
이를 계기로 조석래 회장의 눈에 띄어 1999년 전무 승진과 함께 회장 비서실장으로 발탁됐고, 2001년에는 전략본부장을 맡아 구조조정 등 그룹 현안을 총괄하기에 이른다. 전략본부에서는 조현준(趙顯俊·35) 부사장, 조현문(趙顯文·34) 전무, 조현상(趙顯相·32) 상무 등 조회장의 세 아들이 이사장으로부터 경영수업을 받고 있어 이사장에 거는 조회장의 기대를 짐작케 한다.
이사장은 주관이 뚜렷하고 회장에게도 직언을 서슴지 않는 소신파로, 일 처리에 빈틈이 없고 추진력이 강해 일단 일을 추진하면 아랫사람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몰아치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부지런하고 성실하기로 정평이 나 있고, 전날 아무리 늦게까지 술을 마셔도 아침 8시 이전에 깔끔한 모습으로 출근할 만큼 자기관리에 철저하다. 패션감각도 뛰어나 섬유그룹인 효성에서도 베스트 드레서로 통한다.
동양메이저 추연우(秋淵雨·44) 투자사업본부장(전무)은 동양그룹의 최연소 경영진.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와 미국 미시간주립대에서 MBA를 받았다. 1985년 동양에 입사, 2001년 1월 상무로 승진한 지 10개월 만인 그해 11월 전무로 초고속 승진하며 그룹 사업지주회사인 동양메이저 투자사업본부장에 보임됐다. 투자사업본부는 그룹 장기 전략 수립과 구조조정, 자금운용, 계열사 지원 및 계열사간 이견 조율 등을 총괄하는 사실상의 구조조정본부. 추전무는 젊은데다 얼굴도 동안(童顔)이라 30대 그룹 구조조정본부장 회의에 참석하면 경제부총리가 대리 출석자인 줄 알고 질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추전무는 그룹내 제조업과 금융업 부문의 전략·기획·재무파트와 해외법인까지 두루 거쳐 아이디어가 풍부하다. 지난해 초에는 동양메이저와 프랑스 라파즈그룹의 전략적 제휴를 통해 대규모 외자를 유치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동양메이저는 시멘트·건설·상사부문을 거느리고 있는데, 불경기로 건설과 상사부문의 경영난이 지속되면서 막대한 부채를 짊어졌다. 이 때문에 세계적인 시멘트 전문그룹인 라파즈와 제휴하려 했으나, 라파즈측은 건설과 상사부문의 부실을 문제삼아 투자에 난색을 표했다. 그러자 추전무는 동양메이저에서 시멘트부문을 떼어내 단일 법인화하는 방안을 제시, 라파즈그룹과의 제휴를 성사시켰다.
그후 동양시멘트는 라파즈그룹 등과 함께 9600억달러의 신디케이트 론을 조성, 동양메이저의 부채를 갚아줬다. 동양시멘트를 분리시키면서 동양메이저는 1조원대의 생산설비와 광산 등을 동양시멘트에 무상 출자한 셈이 되어 동양시멘트가 이를 갚아야 했기 때문. 동양메이저는 부채비율이 높아 조달금리가 연 12%대에 이르지만, 클린 컴퍼니로 거듭난데다 세계 유수 그룹과 제휴한 동양시멘트의 경우 연 7∼8%에 자금을 조달할 수 있어 막대한 이자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부장급 비서실장
코오롱 김주성(金周成·56) 구조조정본부장(사장)은 이동찬(李東燦)·이웅열(李雄烈) 2대 회장에게 모두 중용됐다. 1973년 코오롱에 입사한 김사장은 1978년부터 회장 비서실에서 근무하면서 이동찬 당시 회장의 마음에 들었다. “정직하고, 꾀 부릴 줄 모르고, 원칙을 중시한다”는 게 그에 대한 이동찬 회장의 인물평이었다.
1983년에는 부장 신분으로 그 전까지 부회장이 맡던 비서실장이 됐고, 36세가 된 이듬해 코오롱의 최연소 이사에 올랐다. 그후 비서실이 기획조정실로 바뀌면서 기획조정실장이 됐고, 이회장이 명예회장으로 물러난 1995년 말까지 12년간 이회장을 보좌했다. 이동찬 회장이 1982년부터 14년간 경총 회장을 역임하면서 코오롱이 민주노총의 타깃이 되어 강성 노조가 들어섰지만, 이를 잘 다독여 무분규를 유도하는 수완도 보여줬다.
1996년 이웅열 회장이 취임한 후에는 코오롱 구미공장장(전무), 코오롱개발 및 코오롱호텔 사장 등 잠시 라인(line)에서 활동하다 1998년 11월 구조조정본부장을 맡아 이웅열 회장을 측근에서 보좌하게 된다. 신세기통신과 메트라이프 지분 매각, 편의점 사업 양도, 코오롱상사 분할, 서울 무교동 사옥 매각 등 굵직한 구조조정 업무를 매끄럽게 진행하고 80여 개 사업의 포트폴리오를 재편하면서 성과 중심의 경영풍토를 정착시킨 것으로 평가받는다.
무선통신사업에 기대가 컸던 이웅열 회장은 신세기통신 매각에 부정적이었지만, 부채비율 축소와 자금조달에 최우선 순위를 둔 김사장은 “현재가 없으면 미래도 없다”는 논리로 설득을 거듭한 끝에 뜻을 관철했다. 이처럼 직언을 서슴지 않기 때문에 오너로부터 “사심이 없는 사람” “절대 코오롱을 망하게 하지 않을 사람”으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철학(연세대)을 전공해서인지 논리가 워낙 정연해 그의 설득에 넘어가지 않기란 쉽지 않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