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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좌익인가, 우익인가

서양사에서 본 左와 右, 상극·상생의 파노라마

  • 안병직 < 서울대 교수·서양사학 >

서양사에서 본 左와 右, 상극·상생의 파노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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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부적인 편차에도 우익에 비하면 좌익이 상대적으로 평등주의자라는 사실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아울러 선천적인 불평등은 제외하더라도 적어도 인위적 성격의 불평등, 즉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만큼은 개선해야 한다는 열망은 좌익 이념과 운동의 본질적인 요소라 할 것이다. 그렇다 해도 평등의 이념을 완전히 좌파의 전유물로 보는 것은 다소 문제가 있다. 우익세력 가운데에서도 이념상으로는 평등주의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경우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극우주의 운동으로서 나치즘이 그러했다. 나치즘의 핵심 이데올로기인 민족공동체 이념은 독일사회 내 계급과 신분에 따른 불평등을 타파하고, 성취능력에 따라 평등한 기회가 보장되는 민족국가를 이상(理想)으로 한 것이었다.

자유이념을 우익의 전유물로 파악하는 것은 평등이념을 좌익의 전유물로 여기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익의 보수주의자들이 자유의지와 그에 따른 도덕적 책임을 강조하며, 국가나 사회로부터 침해받지 않는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우익세력이 다 자유의 가치를 소중히 여겼던 것은 결코 아니다. 그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권력의 독점과 독재체제의 수립을 목표로 했던 파시스트 극우세력의 존재를 상기하면 될 것이다.

다른 한편 자유는 우익에 못지않게 좌익에게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녔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독재권력에 저항했던 좌익운동의 역사적 사례는 흔하다. 동시에 좌익의 폭압적인 권력이 철저히 자유를 유린했던 사례 역시 드물지 않다. 자코뱅의 공포정치, 스탈린의 공산주의 독재, 캄보디아의 폴 포트 정권 등은 테러와 인종학살이 극우세력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결국 자유의 가치에 대한 태도는 좌익·우익을 나누는 기준이 아니라, 오히려 좌익과 우익 내에서 온건한 중도세력과 과격한 극단주의 세력을 구분하는 잣대라고 할 수 있다. 즉 극우와 극좌 세력은 반(反)자유, 반(反)민주 세력으로서 서로 공통점을 지니며, 좌우의 온건세력은 비록 이념상 대립적이지만 민주정치의 규칙과 절차를 존중한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갖는다. 그리하여 바이마르시대 나치세력과 독일 공산당세력이 좌우의 중도세력으로 구성된 정권을 공격하는 데 연합했고,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히틀러와 스탈린이 비밀협약을 맺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보수와 진보, 성(聖)과 속(俗), 자유와 평등 외에도 좌·우익을 가르는 기준으로서 개인과 공동체, 권력에 대한 태도 등을 거론하는 경우도 있다. 우익은 개인을, 좌익은 공동체를 앞세운다거나, 우익은 권력의 부재를, 좌익은 권력의 남용을 경계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이 일면적임을 지적하기는 어렵지 않다. 사회를 유기체적 공동체로 파악하고, 공동체의 질서유지에 우선적인 가치를 두었던 것은 전적으로 우익 보수주의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미 언급했듯이, 극단적인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고 남용한 것은 우익뿐 아니라 좌익에도 똑같이 해당되는 부정적인 역사적 경험이었다.



좌익·우익의 구분과 관련해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다른 주장을 검토할 수 있다. 예컨대 우익은 권위와 복종, 좌익은 참여와 해방을 이념적 특징으로 한다거나, 우익은 특권과 기득권을 옹호하는 반면, 좌익은 이를 비판한다거나, 또 우익은 폐쇄적인 데 비해 좌익은 개방적이라든가, 우익에는 안정과 질서가, 좌익에는 폭력과 무질서의 요소가 두드러진다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를 언급하는 것은 그 타당성 여부를 따져야 할 필요성 때문이 아니다. 좌익·우익에 대한 그러한 규정은, 좌익과 우익이라는 용어가 이제는 가치중립적인 의미, 즉 단지 분석적이고 기술적인 개념으로만 사용될 수 없으며, 좌익과 우익에 대한 가치평가와 긴밀하게 결부됨을 일깨워준다.

좌익과 우익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가치론적이라 할 수 있다. 이분법적 틀 내에서 상호 대립관계에 있는 두 존재와 관련하여 어느 한쪽에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하면, 필연적으로 다른 한 존재에 대해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좌익·우익은 개념의 기원에서부터 가치론적 의미를 내포한다.

삼부회에서 성직자와 귀족 대표가 오른쪽에 착석했던 것은, 오른쪽이 공간적으로 ‘명예로운 장소’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왼쪽은 라틴어와 프랑스어의 용례에 경멸의 의미가 있듯이 오른쪽에 비해 정통성이 떨어지며, 또 초자연적이거나 사회적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것과 결부되었다. 예컨대 ‘벤드 시니스터(bend sinister)’, 즉 위에서 아래를 향해 왼쪽으로 비스듬히 굵은 사선이 들어간 귀족의 문장(紋章)은, 그가 서출(庶出)임을 표시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역사적 존재로서 좌익과 우익에 대하여 전적으로 타당한 의미 규정을 찾기는 어렵다. 그리고 좌익과 우익의 의미는 본질적으로 가치론적인 요소를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인가? 좌·우익에 대한 구분이 사실상 무의미하며, 좌익과 우익의 용어는 공허한 수사에 지나지 않으므로 포기해야 한다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물론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운위하며 좌익과 우익의 구분에 대하여 근본적인 회의가 제기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특히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몰락 이후에는 자유민주주의가 최종적으로 승리함으로써 역사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까지 등장했다. 실제로 1980년대 이후 보수 우익이 세(勢)를 얻으면서 위축되었던 좌익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더불어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상실하고 존립을 위협받는 상황에 처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주의의 몰락은 좌익 일반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특정한 시기, 특정한 좌익운동의 몰락을 의미할 뿐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보면 좌익뿐 아니라 우익도 심각한 위기상황에 당면한 적이 있음을 상기할 필요도 있다. 즉 파시즘의 몰락 이후 우익은 경계와 불신, 배척의 대상이 되면서 정치적으로 생존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서유럽 우익 정당들의 발전이 보여주듯이, 우익은 이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다.

한편 좌익과 우익의 이분법에 대한 문제제기 가운데는 충분히 고려할 만한 것도 있다. 정치현실의 변화에 대한 지적이 그것이다. 점점 더 다양한 이익집단과 압력집단이 등장하고, 정치집단 사이의 관계가 다원화되고 복잡해지는 상황에서 좌익과 우익의 이분법은 더 이상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너무 단순한 구분이라는 것이다. 특히 환경, 생명과학, 낙태 등 좌익·우익의 전통적인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새로운 문제들이 제기되면서 좌익과 우익의 대립은 점차 의미를 잃고 소멸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은 옳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정치는 속성상 대립적인 것이고, 정치세계에서 독자적인 존립을 모색하는 세력은 스스로 차별화해야 한다. 상대방과의 차별성을 창출하지 못하는 세력은 존재 이유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여러 정치세력이 정치적 이념과 활동에서 차별화하고 상호 대립하는 한, 좌익과 우익은 사라지지 않으며, 그 개념은 여전히 유효하다.

물론 좌익과 우익의 의미는 상대적이며 역사적 맥락에 따라 변한다. 하지만 좌익과 우익의 개념이 의미론상으로 명확하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무의미하며, 공허한 수사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좌와 우라는 수평적인 공간개념은 비록 설명적 가치는 미흡하지만, 전체적으로 하나의 스펙트럼을 이루는, 다양한 정치세력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고 그 차별성을 규정하는 데는 유용하다.

좌익과 우익은 가치론적인 개념이다. 좌익과 우익은 가치평가와 가치선택을 전제로 성립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양자의 관계가 가치론적으로 반드시 상호 배제적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좌익과 우익의 이분법적 구분에서 좌익과 우익은 서로 대립하지만, 동시에 서로 지지한다. 우익이 없으면 좌익이 존재할 수 없고, 좌익이 없다면 우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좌익과 우익은 각각 타자의 존재에서 자신의 존재이유를 발견하는 것이다. 좌익과 우익의 존재이유가 상대에게 있다면, 그것은 상극(相剋)이 아니라 상보(相補)의 관계다. 그 점에서 좌익과 우익을 수레의 두 바퀴에 비유하는 것은 적절하다. 수레는 어느 한쪽 바퀴라도 없으면 움직일 수 없다. 그것이 좌익과 우익이 언제나 상생(相生)을 모색해야 할 이유다.

신동아 2001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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