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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은 내맘, 그린은 화장실”

캐디 눈에 비친 골퍼 천태만상

  • 박은경 < 자유기고가 > siren52@hanmail.net

“규칙은 내맘, 그린은 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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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홀 한 라운드를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개 5∼6시간. 그 사이에 ‘경기보조원’은 쉴새없이 바쁘게 몸을 놀려야 한다. 무거운 카트를 끌고 언덕을 오르내리며 골프채를 챙기랴, 공이 날아갈 방향과 홀의 거리를 측정해주랴, 팬 잔디를 보수하랴 정신없이 뛰고 나면 김씨의 온몸은 금방 땀으로 흠뻑 젖는다.

라운드를 끝내고 스코어카드를 작성할 때 걸핏하면 쏟아지는 손님들의 불평이나 욕설은 그저 못 들은 척 웃는 얼굴로 넘기는 게 최선이다. 옳으니 그르니 따졌다가 손님이 회사에 항의라도 하는 날이면 그날로 일자리가 날아갈지 모른다.

반말이라도 “언니, 왜 이렇게 점수가 짜냐. 나 정말 서운해” “인심 좀 써라, 일등상 한번 받아보게” 하며 투정을 부리는 손님은 애교스럽다. 하지만 “내가 언제 더블 보기를 했단 말이야? 계산 똑바로 해!” “스코어도 못 보는 주제에 네가 무슨 캐디야” 하며 막무가내로 목소리를 높이는 손님은 정말 참아내기 어렵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며 스코어카드를 쓰고 골프채와 소지품을 점검해 관리카드에 서명한 다음 골프가방을 손님의 차량까지 운반하고 나면 김씨 입에선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온다. 다시 대기실로 돌아와 냉수 한 잔을 벌컥벌컥 들이킨 뒤에야 비로소 햇볕에 달아오른 몸과 손님에게서 받은 열이 좀 가라앉는 것 같다. 샤워로 땀투성이 몸을 씻고 골프장을 나서는 시각은 대개 오후 8시경이다.

초보자 팀을 만나는 날이면 한 라운드를 도는 데 12시간이 걸릴 때도 있다. 끔찍한 일이지만, 회사가 정해준 캐디 순번에 따라 팀이 정해지기 때문에 피해갈 수도 없다. 하지만 대여섯 시간 동안 대기하고도 손님을 못 받아 허탕치는 날에 비하면 이마저 고마운 노릇이다. 평소보다 두 배는 고생하겠지만 손님이 주는 캐디피는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홀까지의 거리를 측정해주고, 바람의 방향에 따라 알맞은 클럽을 골라주며, 손님이 긴장을 풀고 편안한 샷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동반자’가 되기 위해 한 달 가량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현장에 투입되는 캐디. 그리고 여전히 캐디를 짐꾼 부리듯 하는 골프장 고객들. 각양각색의 손님을 상대하는 캐디 눈에 비친 골프장 매너 얘기를 들어보면 캐디와 골퍼 간의 인식 차이가 너무도 크다는 것을 알게 된다.

캐디들이 싫어하는 ‘꼴불견 골퍼’로는 경기규칙도 점수도 자기 마음대로 정하는 ‘황제형 골퍼’, 그린을 재떨이나 화장실로 아는 ‘공중도덕 불감증 골퍼’, 잘하면 내 탓이요 못하면 캐디 탓이라는 ‘책임전가형 골퍼’, 골프보다 연애에 더 열중하는 ‘닭살 커플형 골퍼’, 저속한 음담패설로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성희롱형 골퍼’ 등 그 유형도 다양하다. 뿐만 아니라 거친 욕설을 퍼붓는 것도 모자라 골프채까지 휘두르며 언어·신체적 폭행을 저지르는 부류도 있다.

성희롱하고도 생트집

캐디 권미진(35)씨가 최근 그린에서 겪은 장면. 손님이 다짜고짜 “야!” 하고 그를 불러세웠다.

“야! 저기까지 퍼트거리가 얼마나 될 것 같냐?”

“네, 80m 정도입니다.”

권씨의 말을 듣고 샷을 날린 고객의 공은 플레이 금지구역인 OB지역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손님의 얼굴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욕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씨×, 뭐 80메다? 야, 너 똑바로 해. 개×도 모르는 게 캐디 한다고 설치고 있어.”

“손님, 좋은 말로 하세요.”

“뭐? 너 잘 만났다. 오늘 내가 너 죽여버린다. 나 오늘 골프 안 칠거니까 사장 나오라고 해!”

욕설을 퍼붓고도 분을 삭이지 못해 골프채를 휘두르는 바람에 캐디가 부상을 당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 한 캐디는 “현역 국회의원 중에도 몇 년 전 홧김에 골프채를 휘둘러 캐디를 다치게 한 사람이 있다”고 귀띔하면서 “그래도 밥줄 끊길 각오를 하지 않는 이상 손님에게 항의해 문제를 일으키긴 어렵다”고 털어놓았다.

고객의 폭행으로 다쳤는데 자기 돈으로 치료비를 감당한 캐디들도 있다. 해고당하지는 않겠지만 일단 고객과 문제를 빚은 캐디는 책임소재와 상관없이 회사측으로부터 ‘벌땅’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벌땅’은 ‘백 대기’, 즉 새벽 4∼5시경에 출근해 수백 개의 골프가방을 주차장부터 마스터실까지 운반해 분류하는 일을 말한다. 그런 중노동을 하고도 보수는 한푼도 받지 못한다. 캐디의 이런 약점을 잘 알고 있는 고객 중에는 캐디를 성희롱해서 말썽을 일으키고는 엉뚱한 트집을 잡아 “캐디가 불친절하다”고 항의하는 철면피도 있다.

캐디가 당하는 성희롱 사례는 여러 가지다. 우스개 수준의 야한 농담을 즐기고 골프채를 건네줄 때 손을 지그시 잡는 정도는 그래도 점잖은 축에 속한다. 슬쩍슬쩍 엉덩이를 건드리며 노골적으로 추근대거나 지난 밤에 술집 접대부와 질펀하게 놀아난 얘기를 일부러 들으란 듯 떠들어대는 이들은 캐디들을 모멸감에 젖게 한다.

그렇다고 불쾌한 기색을 보이면 “골프장에 와서나 이런 얘기를 마음놓고 하지 어디 가서 하느냐”며 핀잔을 주기도 한다. 경력 5년의 한 20대 캐디는 “할아버지뻘 되는 손님이 ‘아파트 사줄 테니 사귀자’고 추근댈 때는 정말 따귀라도 올려붙이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한다.

“너 오늘 생리하냐?”

캐디 경력 20년째인 김모(40)씨는 신참 시절에 당한 수모를 지금까지 잊지 못한다.

“다리를 모은 채 홀컵의 핀을 잡고 있었는데 퍼팅하려던 손님이 왼쪽 다리를 조금 벌리라고 해요. 영문을 몰라 시키는 대로 하니까 내 다리 사이로 퍼팅을 하더군요. 제 기분이 어땠겠어요?”

그러나 이런 광경은 요즘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홀컵을 여성의 성기에 빗대 “이 구멍이 나를 거부하네”라느니 “이건 너무 헤프게 잘 준다니까. 할머니 거시기인 모양이야” 하는 표현을 서슴지 않는다. 그런 말을 들은 캐디는 난감할 수밖에 없다. 모른 척하고 있으면 “어이 미스 김, 알아들은 거야?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어?” 하며 음흉한 눈빛을 보낸다. 심지어 캐디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보란 듯이 속옷을 추스르는 사람도 있다.

규칙을 무시하고 멋대로 점수를 계산하는 ‘황제형 골퍼’, 경기가 안 풀리면 전부 캐디 탓으로 돌리며 화풀이하는 ‘책임전가형 골퍼’는 점수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접대골프나 내기골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이다.

황제형 골퍼들은 “공이 조금밖에 안 굴렀으니 다시 쳐야 돼” “무슨 더블 보기야? 그냥 보기라니까” “치기 좋게 공 앞에 (벙커)모래 좀 치워”라며 생떼를 써댄다. 책임전가형 골퍼는 캐디를 가장 짜증나게 하는 유형으로 꼽힌다. 생각대로 공이 맞지 않으면 캐디에게 “너 오늘 생리하냐?”면서 화풀이하는 골퍼도 있다.

인터넷 골프제트(www.golfz.co.kr) 사이트의 캐디광장 게시판에 ‘shredfox’라는 ID로 글을 올린 캐디는 책임전가형 골퍼를 향해 따끔한 충고를 던진다.

“저는 내기손님들과 늘 트러블을 빚습니다. 어쩌다 볼이 산 속으로 들어가 못 찾으면 ‘캐디가 볼도 못 보고 뭘 했느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릅니다. 퍼팅라인 못 본다고 잔소리하고, 경기 진행이 늦어서 홀아웃한 손님을 먼저 모시고 다음 홀로 이동하면 남은 손님은 ‘캐디가 손님 볼 치는데 깃대도 안 꽂고 그냥 간다’며 코스가 떠나가라고 고함이죠. 이런 분들에겐 절대로 거리나 퍼팅라인 제대로 안 봐줍니다. 캐디도 인간인데 자기를 무시하고 얕보는 손님에게 잘해줄 리가 없죠.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

경기가 잘 안 풀려 내기골프에서 지고 있거나 부부싸움이라도 하고서 골프장을 찾은 손님과 동반하게 됐을 때 캐디는 라운드 내내 긴장을 풀 수 없다. 언제 어디서 고함을 내지를지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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