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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취재|박종철 고문경관 12년 만의 회한토로

“두 번 자살 시도했죠 이름도 바꿨습니다”

  • 하종대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두 번 자살 시도했죠 이름도 바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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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문기술자 이근안씨의 자수로 불행한 시절의 고문사건들에 국민적 관심이 쏠리고 있는 가운데,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관련자 중 주범으로 몰렸던 조한경 당시 치안본부 담당반장이 사건발생 12년 만에 입을 열었다. 조씨는 이 사건이 집권 1년을 남긴 전두환 전대통령의 지시로 공안선풍이 시작되는 와중에 발생한 ‘정치적 사건’이라며 자신은 ‘역사의 희생물’이라고 주장했다.》
‘고문기술자’ 이근안씨가 잠적 11년 만에 전격적으로 검찰에 자수함으로써 과거 고문사건들에 세인의 관심이 다시 쏠리고 있다. 이 가운데도 가장 주목받은 사건은 고 박종철군(당시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고문치사사건. 당초 축소조작돼 발표됐다가 뒤늦게 진상이 밝혀지는 우여곡절을 겪은데다, 재판과정에 고문경관들의 진술이 자주 바뀌는 등 석연치 않은 대목이 많았기 때문이다.

과연 이 사건은 전모가 완전히 드러난 것일까. 당시 치안본부장이던 강민창씨는 이 사건의 최고책임자일까.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관련자는 없을까. 기자는 이런 의문을 갖고 그들을 추적했다. 그러나 대부분 잠적하거나 만나기를 거부했다. 또다시 여론의 도마 위에 올라 난도질당하고 싶지 않다는 게 당사자들의 이유였다.

그러던 차에 87년 1월 사건의 주범으로 몰려 징역 10년을 선고받은 뒤 94년 4월 형기 3분의 2를 채우고 가석방됐던 조한경씨(54)를 어렵사리 만날 수 있었다. 조씨는 당시 치안본부 대공수사2단 5과 2계 1반 반장으로 박군을 직접 조사했던 인물. 조씨는 그러나 재판과정에 “나는 조사는 했지만 고문현장엔 없었다”며 혐의사실을 부인했다. 이 주장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에게 선고된 징역 10년은 사건 관련자들이 받은 형기 가운데 가장 긴 것이었다.

99년 11월17일 오후 5시경 서울 마포구 서교동 서교호텔에서 만난 조씨의 얼굴은 수척했다. 7년 3개월간 옥살이를 하며 죄값을 치렀지만 고문치사사건은 아직도 그를 휘감고 있는 듯했다. 12년간 닫혀 있던 조씨의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억울하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이제 와서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다시 끄집어내겠느냐”는 게 조씨의 말이었다.

“국립묘지에 묻히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조씨의 입을 열 수 있을까. 대답하기 쉬운 것부터 물어보기로 했다. 김근태씨(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고문사건과 관련, 최근 조사를 받고 있는 박처원 전 치안감이 경찰간부로부터 10억원을 받아 숨기고 있었던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어봤다.

“난 정말 실망했습니다. 박씨가 경찰로부터 10억원이나 받아 숨기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동안 명절 때마다 박씨를 찾아뵈었습니다. 갈 때마다 담뱃값이나 하시라고 몇 만원씩 드리고 오곤 했지요. 그런데 10억원이나 갖고 있으면서 나를 이렇게 대했다니….”

그는 철석같이 믿었던 박씨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 분통이 터지는 듯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좀처럼 열 것 같지 않던 조씨의 말문이 트였다.

― 이근안씨 자수를 계기로 고문경관들에 대한 비난과 처벌 여론이 또다시 일고 있는데, 요즘 심경은 어떻습니까.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더 이상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지 않습니다.”

― 왜 그렇습니까.

“저는 진실로 내가 하는 일이 대한민국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일했습니다. 우리는 북한과 정규전이라는 측면에서는 휴전중이지만, 스파이 활동 등 비정규전에서는 여전히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비정규전을 위한 법적 장치가 국가보안법 아닙니까. 당시 우리는, 정치도 썩었고 군도 썩었고 사회의 모든 분야가 썩었어도 대공 분야를 맡고 있는 우리마저 썩으면 나라가 무너진다는 심정으로 일했습니다. 나는 죽으면 국립묘지에 묻히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 처지가 어떻습니까. 역적으로 몰려 묻힐 곳조차 없어졌습니다. 그러니 대한민국에서 더 살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는 자신이 박군 고문치사사건의 주범이 돼 징역을 산 것은 나라와 조직을 위한 것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속은 것 같다고 말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또 조직과 나라도 자신의 ‘우국충정’을 몰라주는 게 억울하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 고문 당시 현장에 없었다 하더라도 어쨌든 박군을 직접 조사하고 ‘혼내주라’고 지시한 것은 박군이 숨지는데 일조한 것 아닙니까.

“종철이가 죽은 것은 분위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경찰과 보안사 안기부 등 대공 관련기관이 한꺼번에 대대적인 대공수사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만약 종철이가 죽지 않았다면 다른 누군가 희생됐을 겁니다.”

―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종철이가 숨지기 보름 전쯤인가, ‘각하 분부사항’이란 제목으로 대통령의 지시가 내부문서로 내려왔습니다. 내용은 대충 이런 것이었습니다. 조직의 배후는 강압적인 수사 없이는 캐낼 수 없다. 따라서 강압수사를 하더라도 ‘조직의 배후를 잡아들여라’. 대통령의 지시사항이 내려오자 치안본부 안기부 보안사 등이 경쟁적으로 공안사범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한 거죠.”

남영분실에 온 내무장관의 지시사항

― 대통령의 지시 때문에 대대적인 공안선풍이 불었다는 말이군요.

“각하 분부사항이 내려왔을 때만 해도 우리는 일정대로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공안수사라는 게 이렇습니다. 조직의 배후와 전모를 밝혀내려면 무조건 관련자가 있다고 해서 잡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관찰과 공작을 거쳐 증거사실을 수집하고 조직의 전모가 대충 밝혀질 수 있겠다 싶으면 한꺼번에 덮치는 겁니다. 그런데 종철이를 데려오기 하루 전 김종호 당시 내무부장관(현 자민련 국회의원)이 치안본부 남영분실에 들렀습니다. 김장관은 경감급 이상의 간부들을 모아놓고 점심을 사면서 ‘대통령 임기가 1년밖에 안 남았다. 정치일정이 있으니까 3월 개학 때까지 모든 사건을 끝내라’고 지시했다는 겁니다. 김씨가 남영분실을 격려차 방문한 날 나는 수사 때문에 바깥에 있었는데 갑자기 삐삐가 울리더라구요. 그래서 사무실로 전화했더니 오늘 저녁엔 빨리 들어오라는 겁니다. 그래서 들어갔더니 ‘지금 공작하고 있는 사건 모두 깨라’고 지시하는 겁니다. 그래서 과장과 계장에게 항의했죠. ‘내가 12명 잡아넣은 사건을 검찰에 넘긴 게 바로 엊그제다. 직원들도 사람인데 좀 쉬어야 할 것 아니냐. 또 사건이 무르익지도 않아 공작할 시간이 필요한데 어떻게 깨느냐’. 그랬더니 ‘지금 그럴 계제가 아니다. 장관 지시다. 모두 깨고 잡아들여라’는 겁니다. 박종철 사건은 그래서 터진 거죠.”

조씨는 박종철이 죽지 않았다면 엄청난 공안선풍이 일었을 것이라고 나름대로 분석했다. 물론 자신에게 전혀 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 사건이 터졌고, 따라서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은 수사실무자가 조사과정에 실수로 야기한 단순한 고문치사 사건이 아니라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정치적 일정이라는 커다란 밑그림 위에서 일어난 정치적인 사건이라는 것이다.

특히 당시 조씨의 계획대로 공작을 거쳐 증거를 충분히 수집한 뒤 3월경 관련자를 검거했더라면 이런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조씨에 따르면 엿장수로 위장한 부하직원을 한 달간 잠복시킨 결과 관련자들의 움직임을 이미 포착하고 있었고 증거수집을 위한 공작단계만 남아 있었다.

― 당시 공안수사에 투입된 수사팀 규모는 어느 정도였습니까.

“치안본부뿐만 아니라 보안사 안기부 등이 모두 동원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공안수사팀은 치안본부에 2개단이 있었고 안기부와 보안사에 각각 2개와 1개씩 있었습니다. 치안본부만 해도 단장 밑에 3개과씩 있었는데 1,2,3과는 1단에 속했고 4,5,6과는 2단에 속했습니다. 또 과 밑엔 2개의 계, 계마다 4개반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치안본부만 해도 40여개 반 전체가 공안사범 소탕작전에 일제히 투입된 것입니다. 전체적으로는 100여개의 수사반이 투입됐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고문은 기 죽이기 위한 통과의례

― 그래서 종철이를 갑자기 잡아들이게 된 겁니까.

“종철이는 원래 참고인에 불과했어요.물론 불법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수배돼 있긴 했지만 우리가 정작 잡으려 한 학생은 서울대 민중민주화투위 사건으로 수배중인 박종운이었습니다. 당시 깃발사건이라고 굉장히 큰 사건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사건관련자가 대부분 붙잡혔는데 박종운만 끝까지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박종운을 종철이가 하숙집에서 재워준 적이 있다는 첩보를 다른 관련자로부터 입수하고 종철이를 데려온 거죠.”

― 박종운의 소재를 대라고 종철이를 고문한 거로군요.

“종철이는 사실 고문다운 고문도 받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데려오는데 길이 막혔거든요. 그래서 오자마자 아침식사를 시켰고, 막 수사를 시작하려는데 사건이 터진 거예요. 잠시 자리를 뜬 사이 ‘큰일 났습니다’라며 허둥지둥 보고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야, 빨리 데리고 나와’ 했더니 이미 다리가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들은 걱정하지 마라. 내가 다 책임질 테니까’라며 애들을 다독거리고 나서 의사를 부르러 보내고 종철이를 병원으로 데려가고 정신없이 뛰어다녔습니다.”

조씨에 따르면 당시 종철이가 받은 물고문은 사실 고문이랄 수도 없었다는 것. 피의자를 데려오면 일단 기를 죽이기 위해 으레 한 번씩 하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라는 얘기다.

“일반적으로 수사관이 피의자를 고문하는 이유는 짧은 시간 안에 선(線)조직을 파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선조직이란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오늘 어디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의 전화번호부 몇 쪽을 보면 전화번호가 있는데 그것을 분석하면 점조직원들이 만나는 장소와 시간이 나옵니다. 그런데 만약 거기서 만나지 못했다면 빨리 다른 장소로 옮기고, 그것이 실패하게 되면 조직은 끊어지는 것입니다. 운동권은 점선조직으로 돼 있기 때문에 한 사람이 잡히면 선조직을 끊게 됩니다. 선을 끊기 전에 선조직을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고문을 하게 되는 겁니다. 수배자를 검거한 뒤 2시간이 지나면 사실 선조직은 깨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쫓는 사람이 치열하게 추적하면 할수록 도망가는 사람도 혼신의 힘을 다해 도망하기 때문이죠.”

따라서 선조직이 깨지기 이전에 정보를 빼내지 못하면 고문은 하나마나라는 것이다.

조씨는 ‘고문을 잘 하는 사람은 절대로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는다’고 얘기한다. 이근안씨가 고문기술자로 이름을 날리게 된 것도 바로 사람을 상하지 않게 고문할 줄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씨에 따르면 이씨는 고문하기 이전에 문제가 생기지 않게 상대방의 몸을 모두 체크한 뒤 고문을 했다는 것.

이씨가 도피중 침술법에 관련된 책을 저술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인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게 조씨의 분석. 사실 박종철이 죽게 된 것도 고문의 ‘고’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겁을 주려다 ‘오버액션’을 해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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