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3월호

‘국민가수’ 꿈꾸는 ‘노동자의 희망’

  • 李 相 樂

    입력2005-05-03 15: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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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아 편집실로부터 30대 중반의 여가수를 만나 세상 사는 이야기를 들어볼 의향이 있느냐는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군말 없이 좋다고 해버렸다. 상대가 가수라는 점(그것도 여자라지 않는가) 그리고 서른 중반이라면 정신 사나운 몸짓에 국적 없는 노랫말을 따발총처럼 내갈겨대는 요즘 젊은 가수들과는 달리 정서적으로 통하는 데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 등이 그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게 했다. 원고 청탁을 했던 기자는 그 여가수의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주면서 ‘아마 스케줄이 빠듯해서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스케줄이 빠듯하다는 건 활동이 왕성하다는 얘기일 터. 무명가수거나 뒷전으로 나앉은 한물간 가수가 아니라 요즘도 바쁘게 활동하는 인기가수라는 뜻이니 싫어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파업현장으로 오세요’

    그런데, 최도은(崔都恩)?

    평소 그 방면에 귀를 닫고 살아오지는 않았다고 자부해온 나였으나 이름이 생소하게 들렸다. 어쨌든 전화를 걸었는데, 건너온 대답이 또 나를 난감하게 만들었다.

    “지금 현장에서 빠져나갈 형편이 못 되니 만나고 싶으면 현장으로 오십시오.”



    현장이라면 방송국의 쇼 프로그램 녹화장이거나 콘서트 등을 하는 공연장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 나이’에 연예담당 기자들 틈바구니에서 어깨싸움을 해가면서 그를 만난다? 아무래도 그것은 내 몫의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있다는 ‘현장’이란 다름아닌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의 파업농성 현장이었다.

    노래하는 가수가 왜 자동차 공장의 파업농성 현장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하는지 등은 만나서 물어볼 일이고, 일단 나도 그 현장으로 진입해야겠는데 이 또한 간단치가 않았다.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는 ‘대우사태’를 모르는 이는 없으려니와 정리해고를 둘러싼 노사간의 첨예한 대립으로 파업사태가 계속되는 바람에, 회사측에서 외부인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는 것. 신문사의 취재기자도 여간 까다로운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정문출입이 힘들다는 터에, 신분증이라고는 주민등록증밖에 없는 처지에(“나 소설 쓰는 사람이오” 해봤자 창피만 당할 게 뻔하고) 무슨 수로 공장 내부로 진입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쯤에서 원고청탁을 되물릴까도 생각했으나 이상한 오기가 발동했다. 그리고 결국 대우자동차에 근무한 적이 있는 한 친지로부터 정문을 통과할 비책을 입수하는 데에 성공했다. 직원들이 집중적으로 정문을 통과하는 아침 출근시간에 대우자동차 직원용 유니폼(점퍼)을 착용한 채로, 출근 인파에 적당히 묻어 들어가면 별문제가 없을 것이란 얘기였다.

    2월7일 7시40분, 나는 친지로부터 빌린, 턱없이 큰 회색 점퍼를 헐렁하게 걸치고 유유히 정문을 통과했다. 옷만 빌려 입었을 뿐, 신분을 속이거나 직원을 사칭하지는 않았으니 죄가 될 만한 것은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훤칠한 키의 ‘여전사’

    얻어 들은 정보에 따르면 회사측에서는 누적된 재고를 처리하기 위해 당분간 휴업에 들어갔고, 그에 맞서서 노조에서는 출근투쟁에 돌입했다고 한다. 하필 날씨마저 이 회사가 처한 상황만큼이나 싸늘해서 귓불이 욱신거릴 지경이었는데 문제는 찬바람을 피할 만한 휴게실이 어디에 있는지 화장실은 또 어딘지를 도통 알 수 없다는 점.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한 사람이 회사 정복을 입고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화장실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위장 침투한 간첩으로 볼 게 뻔한 노릇 아닌가. 그렇다고 파업현장에서 10시에 만나기로 한 최도은이라는 가수를 미리 불러낼 수도 없는 일이고.

    그래, 스타 만나기가 어디 그리 쉽다더냐.

    나는 지나가는 젊은 사원들이 멋모르고 건네는 “안녕하세요?”라는 인사에 어색한 대꾸를 하면서 한 시간여를 떨며 헤매다가 드디어 노동조합 사무실이 있는 ‘복지회관’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노래 부르는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최도은씨를 만나러 왔습니다. 아, 이 옷은 빌려 입고 온 겁니다. 난 대우 사람이 아닙니다.”

    꾸부정한 자세로 그렇게 얼버무리자니 ‘이거 정말 스타일 구기는 날이군’이라는 탄식이 절로 새어나왔다. 놀라운 것은 노조 사무실 안팎에 있던 노조원들 사이에서 내가 만나러 갔던 가수 최도은이 ‘도은이 누나’ 혹은 ‘최도은 동지’로 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누나이자 동지인 최도은이 검은색 바지에 가죽 점퍼를 받쳐 입은 차림새로 내 앞에 나타났다. 170cm가 넘어 뵈는 훤칠한 키에 당당한 체구를 한 ‘여전사’였다. 노조원들은 지금 자신들이 벌이고 있는 파업을 ‘게릴라식 파업’이라 했다. 나는 마치 밀림 속 요새에 자리한 제3세계 국가의 게릴라 투쟁본부에 잠입하여 여성 혁명투사를 접견하는 것처럼 그를 만났다. 최도은이 회색 점퍼를 입은 내 행색을 훑어보더니 “이 선배님, 고생시켜드려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고는 엷게 웃었다. 선배라니? 난 그의 ‘이 선배’라는 호칭을 적당히 경계(?)하면서 파업집회가 예정된 조립1공장으로 함께 갔다. 거기서부터는 관리직 중견간부 같아 보이는 나를 향해 노조원들이 보내는 의심의 눈초리를 그가 해결해 줬다.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벌써 짐작했겠지만, 그러니까 최도은은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 나오는 그런 가수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파업현장에서 그들의 ‘투쟁의지’를 ‘선동’하는 노래 운동가다. 민중을 대상으로 노래하지 않는 가수가 없을진대 어쨌든 사람들은 그를 ‘민중가수’라 부른다.

    1980년대, 닫힌 사회를 열어 젖히기 위한 민주화 투쟁 전선에서 ‘노래 운동가들’이 끼친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노래는 압제체제와 권력자들을 비판, 풍자하는 한편, 거기 맞서 싸우는 민중에게는 든든한 응원가가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과거의 그런 투쟁가가 필요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고 있다. 당시 대중의 명성을 얻고 있던 상태에서 ‘운동’에 참여했던 가수들은 다시 본업으로 돌아가 ‘사랑’과 ‘서정’을 노래하고 있고, 투쟁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전개됐던 아마추어 노래패들의 열정 역시 그 깃발을 내린 지 오래다. 이런 터에 노동운동의 현장을 제 발로 쫓아다니며 창칼 부딪는 ‘쇳소리’를 드높이고 있는 가수라니!

    단숨에 말하는 대우사태

    집회가 예정돼 있는 조립1공장으로 향하는 중에도 많은 노조원이 그에게 알은체를 했고, 간간이 멈춰 서서 노조 간부들과 곧 열릴 행사에 대해 뭔지 모를 얘기들을 주고받기도 했다.

    공장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멈춰버린 거대한 자동차 조립 라인이 한눈에 들어왔다. ‘라노스’를 조립하는 라인이었다. 우리는 부속이 덜 갖춰진 채로 눈높이에 매달려 있는 승용차 밑을 요리조리 피해 들어가 침침한 간이 휴게실에서 마주앉았다.

    ―대우사태의 본질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습니까?

    노래하는 가수에겐 걸맞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무턱대고 그런 질문부터 던졌던 것인데, 잠시의 주저도 없이 그 나름의 대답이 쏟아져 나왔다.

    “김우중 전 회장이 불법적으로 조성해서 횡령했던 비자금이 25조원입니다. 노조원 1만 명에게 노나 준다면 1인당 25억이에요. 그 돈이면 대우자동차 같은 회사를 30개나 살 수 있습니다. 결국 오늘의 대우사태는 노동자들의 땀과 국민의 혈세가 잘못된 자본가들의 놀음에 휘둘린 결과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생긴 부실을 정리해고와 외국자본에 헐값으로 팔아 넘기는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되죠. 기아 자동차에서도 1만 명을 해고하지 않았습니까. 사람의 삶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본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결론이 나온 것입니다. 순전히 자본논리에 의해서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는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백수가 돼버리는 게 현실입니다. 일터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아십니까.”

    그가 언급한 내용의 근거와 정당성을 따지기 이전에, 이쯤 되면 그는 노조 집행부의 홍보부장쯤은 되는 사람이지 파업현장에서 노래나 몇 곡 불러주고 떠나는 가수가 아니다.

    ―대우자동차 노조의 전속가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그렇게 이 회사의 상황을 잘 아십니까?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이곳 노조와 인연을 맺어왔습니다. 노조 안에 ‘참소리’라는 노래모임이 있었는데 88년 그 모임의 지도 강사를 맡아 스물세 살 풋풋하던 나이에 드나들기 시작해서 13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하다 보니 이제는 여기 와도 외부의 방문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물론 그가 얘기한 13년은 다만 대우자동차 노조와 관계해온 기간만이 아니라, 노래를 무기로 노동현장들을 누벼온 ‘가수’로서의 활동기간이기도 하다.

    최도은은 올해 서른 다섯으로 숙명여대 음대 성악과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교내 합창단 단원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럽게 음악대학에 진학했으며, 그때까지는 음악 이외의 바깥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모범생’이었다.

    84년 5월, ‘80년 광주’를 기리는 행사장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나 ‘5월의 노래’ 등을 접하면서 자신이 하고 있는 성악곡보다 더 중요한 노래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노래를 큰 소리로 부를 수 없는 사회상황 등에 눈뜨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성악 전공자로서의 노력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88년부터 현장활동을 시작했다는데, 대우자동차 노조의 노래패를 지도하는 일 이외에 주로 어떤 현장을 찾아다녔습니까?

    “영세 업체들이었어요. 6월항쟁 이후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에 눈뜨기 시작하면서 작은 사업장에서도 노조를 결성하기 시작했는데, 당시만 해도 노조가 생겼다 하면 사장이 공장 문을 닫아버릴 정도였어요. 그렇게 되니 자연 농성장이 형성될 것 아닙니까. 그곳에 찾아가서 농성 프로그램을 짜주기도 하고 구호 외치는 법을 가르치기도 하고,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 지도도 해줬지요.”

    ―당시에는 3자 개입 금지 조항을 내세워서 외부인의 개입을 엄하게 다스렸는데, 그런 혐의로 처벌받은 적은 없었나요?

    “노동자들의 피땀을 갈취해오던 영세업체 사장들이 회사를 팔거나 도산시키고 도망쳐버린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몇 번 위협은 있었지만 처벌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89년도에 부평3공단에 가서 조합원 15명과 함께 구사대에 맞서 싸우다가 얻어 맞을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노조원들이 담 너머 옆 회사로 도피시켜주었는데 그 회사 경비원에게 발각돼 혼쭐이 나기도 했어요.”

    ―현장에서는 어떤 노래들을 부릅니까?

    “초기에는 ‘집시의 여인’이나 ‘아빠의 청춘’ ‘한 많은 미아리 고개’ 같은 대중가요의 가사를 바꾼 노래나 대학가에서 부르던 노래들을 주로 불렀는데 지금은 제가 직접 만든 곡들도 함께 부릅니다.”

    그는 ‘눈물꽃’과 ‘돌아가자’를 자신의 대표곡으로 꼽는다. ‘청춘이 시들은(시든) 나의 가슴에/ 지나간 일들이 스쳐 지나고/가진 자 오만의 끝은 먼데/ 혼자서만 더 가지려 비굴하진 말자…’로 시작되는 ‘눈물꽃’이나, ‘돌아가자 내 자라온 공단으로/짓누름과 멸시만이 가득한 그 곳에/돌아가자 내 꿈과 사랑을 키워온 곳…’으로 시작되는 ‘돌아가자’의 내용 모두 젊은 시절 노동자로 살아온 삶을 비장하게 되돌아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형식이야 어떻든 그가 직접 지은 노랫말들은 대부분 은유나 상징 따위의 치장을 벗어던지고 하고싶은 말들을 직설적으로 쏘아댄다. ‘십만의 불법체류 노동자/하루 노동 13시간…’(‘꿈의 나라’)처럼 말이다. 노래의 대상과 목적이 분명한 만큼 메시지 전달 방식 또한 그러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그였다.

    최도은은 지난 1월 세종대와 인하대 강당에서 두 차례 콘서트를 가졌다. 그는 콘서트라는 말 대신 ‘싸우는 사람들과 함께 했던 자리’였다고 말한다. 경비를 제외한 공연 수익금은 형편이 어려운 사업장 노조에 지원금으로 전달했다.

    ―노조의 집회 현장에서 부르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달려갑니까?

    “그렇진 않습니다. 제 나름대로 상당히 까다로운 기준을 가지고 있어요. 우선 사전에 그 노조의 상황을 충분히 따져봅니다. 노조원들의 수와 평균 연령, 가족사항까지도요. 그후 현장에 나 같은 사람이 필요한지를 생각하고 결정합니다. 조명이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앰프를 갖춘 대형 사업장은 초청을 받아도 되도록 사절하는 편입니다. 대신에 노점상들이나 철거민들의 집회 같은 곳은 오라는 말 안 해도 달려갑니다.”

    ―상식적으로는 청중이 많아야 노래하는 사람도 기운이 날 것 같은데요?

    “그 반대입니다. 노래를 듣는 노동자들의 눈빛을 보면 내가 노래에 실어 전달하려는 진실을 그들이 가슴속으로 뜨겁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바로 알 수 있어요. 1만 명에 육박하는 대규모 청중앞에서 노래를 하면 ‘내 진실이 저들 가슴속으로 안 가고 있구나’라고 느낍니다. 하지만 20명을 상대로 노래를 하면 사람 냄새가 금세 풍겨 옵니다. 그런 경우 노래하다가 눈물을 흘리기도 해요.”

    집회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는 이 회사의 김일섭 노조위원장(37)과 잠시 마주앉았다. 김씨는 앉자마자 대우의 부실 원인과 김우중 전 회장 체포결사대를 조직하게 된 배경, 비자금 수사를 회의적으로 보는 이유, 그리고 정리해고의 부당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가수 최도은을 취재하러 그 곳에 갔기 때문에 그의 얘기를 끝까지 들어줄 수 없었다.

    ―최도은씨를 언제 처음 만났습니까?

    “90년도에 처음으로 최도은 동지를 만났습니다. 그 당시에 제가 노동조합 노래패였거든요. 최도은 동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사람입니다.”

    ―최도은씨가 대우차의 노조활동에 어떤 도움을 주고 있다고 보십니까?

    “노동자들에게 최고의 인기가수지만 그냥 가수는 아닙니다. 노래만 하는 게 아니라 자칫 흐트러지기 쉬운 조합원들의 마음을 한곳으로 결속시키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에요. 무엇보다 억눌리고 소외된 서민과 함께 하면서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는 걸 보면 존경심이 절로 납니다.”

    김 위원장은 행사진행을 위해 자리를 떴다가 다시 돌아와서는 “‘최도은은 노동자의 희망이다!’라고 꼭 써주세요”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흩어져 있던 조합원들이 속속 입장하고, 복면을 한 규찰대원들이 그들을 에워쌌다. 최도은이 노조원들의 대열쪽으로 옮겨가는 바람에 나는 또 다시 이상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노조원들은 회색의 대우 점퍼 위에 검은 색 조끼 하나씩을 더 겹쳐 입고 있는 반면, 나는 그냥 점퍼 차림으로 그들을 마주보고 있었다. 그들이 구호를 외칠 때 손을 치켜 뻗을 수도 없었고 구호를 따라 외칠 처지도 아니었다. 그렇게 되니 나는 영락없는 ‘관리부서의 밀탐꾼’이었다.

    ‘노동자의 희망이다’

    노조 간부인 듯한 사람이 다가와서 “노조원 맞습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복잡한 설명 끝에 간신히 내가 그 자리에 있게 된 사연을 이해시켰다. 잠시 후 또 다른 사람이 와서는 내 정체를 물었다. 아, 이 편도 저 편도 아닌 ‘회색분자’(?)의 고충이라니!

    경과설명을 하고 투쟁계획을 세우고 결의를 다지는 구호들을 외치는 사이사이로 ‘임을 위한 행진곡’ 등의 투쟁가가 여러 차례 울려퍼졌다. 초대된 듯한 남자 가수가 기타를 메고 나와 노래 서너 곡을 하고 들어갔다.

    또 다시 노조 간부의 연설이 시작됐다. 열두 시 반이 되자 사회자가 마지막 순서라며 ‘최도은 동지’를 소개했다. 어느 사이 ‘정리해고 결사반대’라는 붉은 머리띠를 동여맨 최도은이 우레 같은 박수를 받으며 연단에 섰다.

    “생각보다 박수가 시원찮네요. 우리 노조가 이렇게 박력 없는 조직입니까. 자, 어깨 펴고, 힘차게 구호 한 번 외칩시다. 정리해고 음모 철폐하라!”

    그는 일거에 장내를 사로잡는 탁월한 선동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사이 검은 복장을 한 남녀 무용수가 등장했다. 최도은이 이끌고 있는 노동예술단 ‘선언’의 단원들이다. ‘동지의 길’이라는 노래가 시작됐다. “허구많은 인생길 여기에서 만났지/하는 일은 달라도 같이 울고 웃었지….” 이미 노조원들은 모두 그 노래를 알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 전의(戰意)가 서려 있었다면 과장일까. 수천 명의 노조원은 그를 따라서 일사불란하게 두 손을 내뻗거나 치올리며 이른바 ‘지게차 율동’을 연출하고 있었다.

    최도은은 노래 하나가 끝나면 다시 구호를 외치거나 일장 연설을 하고 또 다시 노래를 불렀다. 그의 그런 행위를 ‘불순한 선동’이라고 못마땅해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장내를 휘어잡는 능력만큼은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대우 복장을 하니 구내 식당에서 공짜 점심을 먹을 수 있는 혜택이 주어졌다. 주방에서 배식하는 아주머니들이 최도은을 알아보고 후식으로 나오는 사과를 그에게는 두 개나 더 얹어 주었다. 인하대 콘서트 때에는 식당 아주머니들이 모두 몰려와 함께 어울려 밥과 술을 먹었다는 귀띔이다.

    우리는 구내식당의 구석자리에 다시 마주 앉았다.

    ―노조원들의 호응이 열광적이던데요?

    “내가 스물 세 살 때부터 함께 해왔으니까 친밀감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겠지요. 그리고 저는 열광적인 호응이 없으면 노래 안 합니다(웃음).”

    ―‘지게차 율동’이라는 것은 직접 개발한 몸짓인가요?

    “그렇습니다. 뻣뻣하게 앉아서 노래하는 것보다는 몸짓을 해가면서 불러야 신명이 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생산 현장의 지게차가 팔을 내밀었다 올리고 하는 모양을 본떠서 만든 거지요.”

    ―대우 노조 이외에 요즘 또 관계하고 있는 노조가 있습니까?

    “대우차에 오기 전에는 해고된 한국통신 계약직 사원들의 농성장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한국통신 4만5000명 중에서 계약직 사원 7000명이 구조조정으로 잘렸어요. 일거에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영하 10도가 넘는 혹한에 경기도 분당에서 비닐을 뒤집어 쓰고 농성을 하는데 참 안 돼 보이더군요. 그렇지만 제 노래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겠습니까. 함께 아파하는 정도지요.”

    ―집회장에 참여하러 가는 것을 ‘공연하러 간다’고 합니까 아니면 ‘노래하러 간다’고 합니까?”

    “연대하러 간다고 얘기합니다.”

    ―앞으로의 ‘연대’ 계획은 어떻게 되지요?

    “당분간은 대우차 노조원들과의 연대에만 전념하고 주말을 이용해서 다른 사업장에도 참여할 생각입니다.”

    ―더 장기적으로 세우고 있는 계획은요?

    “건강 유지에 신경 쓸 작정입니다. 현장에서 건강한 모습을 보여야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얘기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예전에는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도 노래를 잘 했는데, 요즘은 목이 빨리 잠겨버립니다.”

    ―미혼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활동하자면 기초적인 생활비 정도는 벌어야 되는 것 아닌가요?

    “밥은 현장 노동자들한테서 얻어먹고, 잠도 그들 틈바구니에서 끼어 자는 날이 많아요. 그리고 노래 강습도 하고 규모 있는 사업장의 집회에 참석하면 약간의 돈을 받습니다. 워낙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별 불편을 못 느낍니다.”

    ―처음 성악을 하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 노동 현장에서 노래하는 오늘날을 상상해본 적이 있습니까?

    “전혀 없지요. 제 아버지가 목수였습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건설경기의 붐을 타고 목수가 잘 나갔기 때문에, 개인 레슨비도 주저 없이 주실 정도로 집안이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부모님도, 제 자신도 지금처럼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요.”

    최도은은 남매를 동생으로 둔 장녀인데, 두 동생은 가정을 이뤄 평범하게 살고 있다. 맏이니만큼 부모의 과도한 기대와 집안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일탈’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사실은 그 반대라는 것이 그의 얘기다.

    “현장 활동가들을 보면 장남, 장녀나 외아들인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맏이는 어려서부터 나 아닌 남에 대한 이해와 포용력을 배우며 성장하는 반면 둘째나 셋째는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로 길러지는 경우가 많거든요.”

    ―부모님과의 갈등이 눈에 훤히 보이는데요….

    “그 연배에 이른 대부분의 아버지가 그렇듯, 그분들은 당신들이 해온 고생을 절대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동일한 고생을 자식들에게도 요구하지요. 처음에는 내가 아버지처럼 사회의 한 분야에서 성실하면서 평범하게 살아가기를 바라셨죠. 그런 문제 때문에 대학 졸업 후에는 부모님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계속 현장에서 떠돌다가 96년에야 부모님이 계시는 집으로 들어갔어요.”

    이제는 딸이 하는 활동을 ‘응원’은 안 해주지만 ‘용인’은 하는 편이란다. 그러면서 최도은은 아버지로부터 그만한 점수라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과거 운동했던 사람들이 성실했기 때문에(국회의원도 되고 장관도 되는 등 현실 사회에서도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그 후광 덕분일 것이라며 웃는다.

    ―아버지는 그렇다 치고, 어머니의 경우 서른 중반이 넘도록 짝을 찾아 둥지 틀 생각은 않고 선머슴처럼 돌아다닌다고 타박이 심할 것 같은데….

    “나를 붙들고 울기도 많이 하셨지만 내 행동을 존중해주려고 애를 써오셨어요. 요즘은 뭐라는 줄 아세요? 혼자 산다고 연애조차 안 하면 청승맞아 보인다고….”

    최도은은 “어머니의 그런 주문에 부응하고 있느냐”는 내 질문에 대번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여느 여자들처럼 ‘가정 만들기’를 시도해볼 생각은 없습니까?

    “그건 참 어려운 일입니다. 오래 사귀어보고 서로를 구속하지 않을 때쯤 되면 생각해볼 일이긴 합니다.”

    ―오래 사귀면 사귈수록 상대에 대한 구속 욕구가 더 강해지는 것 아닐까요?

    “한 40년쯤 사귀면 느슨해지겠지요(웃음).”

    소규모 노조 없어지는 추세

    ―노동운동 얘기를 해보지요. 노조활동이 한창 활발하던 80년대말과 지금의 운동양상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89년 당시만 해도 작은 규모의 사업장에서 조합운동이 활발했습니다. 김치도 없이 라면 끓여 먹어가면서 힘들게 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작은 사업장에는 아예 노조가 없습니다. 운동이 대규모 사업장 위주로 흘러가고 있어요. 물론 그 사이, 예전에 어용이던 대기업 노조들이 민주화한 것도 이유가 되겠지요. 그러나 작은 사업장 노동자들의 제 몫 찾기 운동이 절실한데도 그런 인식이 희박해지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조직 운영에는 관한 문제점이 없을까요?

    “노조원 개개인의 의견이 민주적으로 반영되어야 하는데, 개별 조합원의 의사표현 영역이 너무 협소해요. 너무 집행부에 의존해버리는 게 문제지요. 그렇게 되면 우리 사회의 보수세력 조직과 다를 게 뭐 있습니까. 저는 현장에 가면 노동조합 내부의 문제점들을 거침없이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저를 싫어하는 노조도 있지요.”

    ―음악 얘기로 다시 돌아가보지요. 성악 공부를 함께 했던 대학 때의 친구들을 만납니까?

    “친구들 중에는 서울시립합창단 단원도 있고, 지방대학 강사도 있고, 중고등학교 음악교사를 하는 친구도 있는데 예전에는 만나는 것 자체를 서로가 부담스러워 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자연스럽게 만납니다. 만날 때마다 저는 주로 얻어 먹는 편이지만.”

    ―요즘 유행가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질문 저변에 무슨 문제의식을 깔고 있는지 알만 하네요. 우리 나라만의 풍조가 아니라 세계적인 흐름 아니겠습니까. 예쁜 외모에 예쁜 몸짓, 예쁜 음성 가진 사람들을 선발해서 사전 계획에 따라 훈련시키고, 그랬다가 대중의 입맛이 바뀌거나 말 안 들으면 버리고… 저는 그들 역시 자본 메커니즘의 희생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노래가 좋은 노래지요?

    “부르기에, 듣기에, 함께 나누기에 좋은 노래가 역시 좋은 노래겠지요. 게다가 아프고 힘들고 억눌린 사람들의 정서를 담아 그들을 달래 주는 노래가 정말로 좋은 노래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되는 한 노동자와 자본가의 갈등이 사라질 리는 없겠지만, 만일 최도은씨가 찾아가서 응원해줄 그런 현장 자체가 없어져버린다면, ‘노래하는 최도은’도 사라지는 건가요?

    “아니오. 그땐 세종문화회관에서 콘서트도 갖는 ‘국민가수’가 돼야지요.”

    하고싶은 얘기가 대충 끝났다. 그 날의 노조집회도 끝났으니 그도 나도 회사 밖으로 나갈 일만 남았는데, 그는 나와 함께 정문을 나설 수는 없다고 했다. 그는 이미 회사측으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낙인이 찍히는 바람에 정문 출입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는 노조 집회 때면 어김없이 현장에 나타나 노동자들을 ‘선동’하고 노래를 부른다. 노조 관련 업무를 관장하는 관리부서 직원들 사이에는 그의 출입루트를 두고 소문이 무성하다고 했다. 협력업체의 화물트럭에 숨어서 들어온다는 얘기도 떠돌고, 노동조합의 승합차를 통해 위장 잠입할 것이라는 추측도 나돌았다. 실제로는 어떻게 들어오느냐는 질문에 그건 극비 사항이니 가르쳐줄 수 없다고 했다.

    그 스스로 “노래를 통해 노동자의 ‘투쟁의지’를 고양하는 것이 나의 일”이라고 당당하게 얘기하는 최도은의 ‘세상 보는 시각’에 대해, 다소 당혹스러워하거나 혹은 대단히 위험하고도 급진적인 발상으로 치부하며 비난할 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의 실천을 위해 13년 동안이나 온몸을 던져 싸우고 노래해온 그의 신념만은 존중받아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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