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8월호

'少年 김정일'을 둘러싼 7가지 미스터리

  • 입력2006-09-22 11: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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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942년 출생’의 진위(眞僞)

    김정일이 태어난 것이 북한의 공식 발표대로 1942년 2월16일이라면, 김일성이 그 전 해인 41년 4월9일에 부인과 헤어져 만주로 국경을 넘어 출격하고 있기 때문에 김정숙(김정일의 생모)의 임신기간은 300일 이상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만약 김일성의 출격날짜를 음력(5월9일)으로 가정하면 거의 계산이 맞지만, 중국공산당이 당시 양력을 사용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양력 4월9일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런 점들을 생각해보면 김정숙의 정조를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김정일의 용모를 보면 그가 김일성의 아들인 것은 틀림없다.

    산부인과 의사에게 물어보았더니 300일 이상의 ‘유월임신’이 드문 일은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제왕절개를 안했다면 난산이었을 거라고 한다.

    1974년 2월, 김정일을 위해 ‘출생 33주년 축하전보문 발송운동’이라는 캠페인이 대대적으로 전개됐다. 이 일과 관련하여, 당시에는 한국식 나이 계산법이라고 생각했지만, 김정일의 출생연도는 1941년이라고 알려지게 됐다. 김정일이 41년 2월에 태어났다면 소련영지로 도피중이던 40년 10월 김일성이 당돌하게도 김정숙과 결혼식을 올린 후 부하들을 남겨둔 채 둘이서만 서둘러 국경을 넘어 안전지대로 피한 이유가 명백해지며, ‘유월 임신’의 의문도 풀린다.



    1975년에 발표된 오기완의 논문 ‘김정일 스토리’ 및 1980년에 발행된 중국의 ‘당대 국제 인물사전’에는 김정일의 출생연도가 1941년으로 기록돼 있다. 또 한국의 국토통일원이 1987년에 발행한 ‘북한의 기관 및 단체별 인명집’에는 1940년 출생이라고 돼 있다.

    김정일의 출생 연도를 확인하기 위해서 나는 연변 조선족자치주 연길을 방문해 김일성 연구의 일인자라고 불리는 역사가를 만나보았다.

    ―김정일이 태어난 것은 정말로 1942년입니까?

    “틀림없습니다.”

    ―김정일의 출생 연도가 확인될 만한 기록이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그런 문서는 없습니다.”

    ―그러면 1942년이라고 단정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빨치산의 증언으로 그렇게 판명됐습니다. 제88여단 주보중(周保中) 단장의 부인 왕일지(王一知) 여사도 자신의 딸이 태어난 해와 같은 해에 (김정일이) 태어났기 때문에 틀림없다고 단언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으로 귀국한 뒤에 주보중이 쓴 ‘동북항일유격일기’를 읽어보면 왕일지가 딸(가리나)을 출산한 것은 1941년 8월이며, 하바로프스크의 병원에서 낳았음을 알 수 있다. 42년 부분에는 10월에 주보중 부처가 신거로 이사한 일, 또 왕일지의 활동은 기록되어 있지만 출산에 관한 기록은 없다. 그렇다면 김정일의 출생 연도가 1941년일 가능성도 있다. 그렇지만 후술하는 것처럼 다른 정보도 있다.

    북한이 공식 발표를 통해 김정일이 1942년에 태어났다고 1년을 늦추었다면, 그것은 김일성의 출생 연도인 1912년의 2라는 끝자리에 맞추기 위해서이며, 부자가 끝자리가 같은 해에 성대하게 축하식을 행하며 후계자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쨌든 김정일의 출생 연도는 수수께끼다.

    2. ‘正日’은 본명?

    제88 여단의 정치위원이었던 이조린(李兆麟)의 부인인 김정순(옛이름·김백린)은 김정숙의 상사이자 전우였다. 그녀는 김찬정과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소련 체재 중 중국인 및 조선인 대원은 러시아 이름으로 불렸고, 김정숙은 ‘와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조선진주군 정치위원이었던 레베셰프 소장의 부인은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뱌츠코에라는 곳에서 김일성 부부를 알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취재했을 때는 ‘가랴’라고 불렸다고 들었다. 또 ‘베라’였다는 정보도 있으며, 어느 것이 옳은가는 불명확하다. 마을사람들은 김일성에게도 러시아 이름이 있었다고 말했지만, 안타깝게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원들만이 아니라 어린아이들에게도 러시아 이름이 따로 있었다. 김정일은 ‘유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당시 소련에는 초아라는 18세 소녀가 나치·독일군의 후방에 파견돼 지하활동을 하다가 체포된 사건이 화제였다. 김일성의 상사인 이조린의 딸은 그 소녀를 닮기를 바란다는 의미에서 초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영웅시된 초아의 남동생이 유라였기 때문에 김일성의 장남은 유라라고 불렸다. 유라는 ‘유리’ 또는 ‘그레고리’의 애칭이지만 김정일의 정식 러시아 이름이 어느 것인가는 불명확하다.

    김정일의 공식기록에 의하면, 조선(북한)에 귀국한 김정일은 증조부와 증조모로부터 ‘정일’이 아니라 ‘금손(金孫)’이라고 불릴 정도로 귀여움을 받았다고 하지만, 양친은 여전히 러시아식으로 유라라고 불렀다.

    한국 중앙일보사 편 ‘김정일, 충격의 실상’에 의하면,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함께 다녔고 러시아에 사는 김단(金丹)이라는 동창생은 1960년 7월 중순 남산고급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김정일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조선식 이름이 정일이라고 결정되어, 최근 이 이름으로 공민증이 발급됐다. 이제부터 정일이라고 불러줬으면 한다.”

    또 당시 발행된 졸업앨범에 김정일은 ‘김유라’라고 기록돼 있다고 하지만,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는 앨범에 사진이 실리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

    김정일에 관한 정보가 일본에 처음 등장한 것은 그가 ‘유일 후계자’로 결정된 직후인 1974년 가을이었다.

    “김일성 주석의 장남이며 후계자로 불리는 김정일 노동당중앙위원회 비서가 10월15일 도쿄에서 열린 열국회의동맹(IPU) 제61회 총회에 ‘이정혁’이라는 가명에 수행원(조선대외문화연락협회과장) 자격으로 방일했음이 밝혀졌다.”

    1974년 11월18일 서울방송이 전한 것을 다음날자 일본 ‘마이니치(每日)신문’이 보도한 게 일본에 보도된 김정일에 관한 첫 기사였다. 당시는 북한뉴스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조선통신을 포함한 각 보도기관이 ‘金正一’로 표기했다.

    이렇게 하여 김정일은 일본의 매스컴에 데뷔했으며, 1980년 10월 공식무대에 첫 등장했을 때 한문 이름이 ‘金正日’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정일의 생모인 ‘金貞淑’의 표기도 이 때 ‘金正淑’으로 변경됐다.

    한국에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이름에서 한 글자를 따오는 풍습은 없지만, 김정일의 경우는 그러한 풍습을 무시하고 어머니의 ‘正’과 아버지의 ‘日’을 합쳐서 ‘正日’이라고 명명해 후계자로서 정통성을 과시하려고 했다고 생각된다.

    확인은 어렵지만, 정일은 ‘正一’이 본명이었음이 틀림없다.

    3. 형제자매는 몇 명인가?

    ● 김정일에게 누나가 있었다

    김정일의 출생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나는 아는 사람을 통해 김정숙의 전우였던 김선(金善) 인터뷰를 시도했다. 그 결과 이제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김선에 따르면, 김일성과 김정숙은 1940년 가을에 소련으로 갔다고 한다. 김선은 그 해 10월에 소련으로 갔다. 김정숙과는 몇 달 동안 함께 있었는데, 김선은 41년 겨울에 딸을 출산했고, 김정숙도 딸을 낳았다. 김선은 김정숙의 딸에게도 젖을 먹였는데 뒤에 소화불량으로 죽어버렸다. 김선은 김정일이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김선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과 김정숙 사이에는 1942년 출생했다는 장남 김정일이 태어나기 전인 1941년에 태어난 장녀가 있었다는 것이다. 오래된 기억이라고는 하지만 수유까지 한 경험이 있는 김선이 딸과 아들을 혼동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말한 왕일지의 딸과 같은 해에 태어난 김일성의 자식은 김정일이 아니라 어릴 때 죽은 딸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김일성의 장녀가 출생한 생년월일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41년 출생이라고 한다면 김일성과 김정숙이 황급히 탈출을 하고, 그 도중에 결혼식을 올리고, 또 둘이서 소련이라는 안전지대로 피난을 서두른 이유가 김정숙이 임신을 했기 때문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연변의 역사가들도 아직 확인하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밝혀질 것이다.

    ● 남동생은 연못에서 익사

    이조린의 아내인 김정순은 김찬정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답하고 있다.

    “교도여단(제88여단)에서 5년 동안 살며 결혼한 여성대원들은 어린애들을 출산했습니다. (생략) 김정숙도 김정일과 김평일 형제를 출산했습니다. (생략) 평일은 김정숙 귀국 후 사고로 죽었습니다. 현재의 김일성 부인 김성애의 자식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왜 같은 이름을 붙였을까….”

    평양에서 김일성의 이웃으로 살았으며, 비서실장이었던 홍순관(洪淳寬)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김정숙과 김일성 사이에는 그 때(해방 직후) 자식이 셋 있었다. 둘은 아들이었고 하나는 딸이었다. (생략) 위의 아들은 유라라고 부르고, 다음 아들은 슈라였으며, 딸 이름은 무엇이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김정일 남동생의 아명이 ‘슈라’였다는 것은 여러 증언에서 밝혀졌지만, 한국 이름이 ‘평일(平日)’이라는 것은 김정순의 증언뿐이다. 어째든 김정일의 남동생은 1944년 출생했다는데, 정확한 생년월일은 알려져 있지 않다.

    러시아 이름 ‘알렉산드르’의 애칭이 슈라지만, ‘사샤’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다.

    “사샤는 1947년 여름(7월), 정원 연못에 빠져 죽었다. 옆집이었기 때문에 와랴(김정숙)가 나를 부르러 왔다. 와랴는 사샤가 자고 있는 것이라며 흐느껴 울었다. 사샤가 빠진 것은 4m깊이의 연못(저수지)이었다. 나는 사고 직후 김일성의 집을 경비 서는 젊은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사고가 일어나는 것에 대해 전혀 기미를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사샤의 장례식이 언제 행해졌는지는 모르며 나는 참석하지 않았다.”

    47년 7월 김정일이 다섯 살 가량이었을 때 세 살 난 동생이 자택 연못에서 익사하는 사고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앞에서 말한 레벤셰프 소장의 부인도 증언해주었다. 레벤셰프 부부는 평양 체재 중 김일성과 이웃해 살며 친하게 지냈다. 레벤셰프 소장은 김일성이 술을 좋아했다고 증언했고, 부인은 김정숙이 러시아어를 말했다고 전했다. 부인들끼리 여행도 했고, 유년의 김정일이 찍힌 귀중한 사진도 보여주었다.

    한편 이기봉이 지은 책 ‘김정일은 어떤 인물인가’에서는 50년대 말 노동당부위원장 보좌관을 지냈고 60년대 초에 한국으로 망명한 인물의 증언을 인용해 슈라의 익사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김정일은 어린 시절부터 악동이었고 벌레를 발견하면 밟아죽였다. 1945년 해방 후 김일성의 집은 평양시 중구역 만수동에 있었다. 1948년 초여름, 그 연못에서 동생 슈라(당시 4세)가 익사했으며 6살이었던 김정일은 현장에 함께 있었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형제는 연못 가장자리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먼저 연못에서 나온 김정일이 뒤따라 연못에서 기어올라오는 동생을 몇 번이나 물속에 다시 집어넣었다고 한다.”

    고영환도 자신의 책 ‘망명 고관이 본 김정일’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적고 있다.

    “1946년 초여름 김일성의 아들인 유라와 슈라가 연못에서 함께 놀았다. 장난꾸러기였던 유라는 슈라에게 물을 억지로 먹이거나 다리를 끌어당겨 물 속에 빠뜨리곤 했다. 그러는 동안 둘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연못 가장자리로부터 점점 멀어졌다. 유라는 깊은 곳으로 점점 빠지는 것이 두려워서 연못에서 나오려는 동생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으며, 동생이 얕은 곳으로 가려고 하면 거꾸로 깊은 곳으로 밀어넣었다. ‘어푸, 어푸’ 하면서 동생은 물을 마시고 있었으나 유라는 그것이 재미있었다. 그러나 ‘재미있는 곳에 함정이 있다’는 말처럼 동생은 익사해버렸다. 그 소식을 듣고 달려온 김일성은 ‘연못의 물을 전부 빼버리고 흙을 채우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오늘날 그 곳에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잔디만 자라고 있다.”

    이기봉과 고영환 두 사람의 기술은 시기는 다르지만, 흡사 사고를 목격한 것처럼 상세하다. 두 사람은 김정일의 탄생에 관해서도 동일한 정보원을 인용하고 있으나, 그 정보원은 신용할 수가 없다.

    가령 누군가가 사고를 목격했다면 동생을 몇 번이나 연못에 밀어 넣는 김정일의 행동을 제지했을 것이기 때문에 악의를 가지고 지어낸 이야기라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당시 5살이었던 김정일이 동생을 고의로 익사시켰다는 이야기를 현재 김정일의 성격과 연결해서 해설하는 것에 나는 놀랐다.

    ● 전쟁고아인 양녀의 존재

    소련이 붕괴한 후 러시아 언론은 북한의 실정을 적극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즈베스티야’의 루카신 기자는 92년 6월25일자에 ‘수령님의 양녀 김경희 여사’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평양의 내부 사정에 밝은 러시아 정보였기 때문에 나는 김정일의 여동생인 김경희는 양녀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해방 후 조국에 귀환한 항일 빨치산들은 전우의 고아를 입양해 키우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것은 당시 혁명가의 의무로 인식됐다. 때문에 김경희가 양녀라 하더라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며, 그 극비를 알고 있던 러시아의 저널리스트에 의해 비밀이 밝혀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북한 잡지 ‘천리마’(96년 4월호)는 ‘우리 수령님이 기르신 소녀. 평양·중신고등학교 교감 김경손 동무가 말해준 이야기’라는 제목의 비화를 공개했다. 그 기사에 의하면, 김일성은 6·25전쟁 후 당간부들에게 전쟁고아를 양자로 삼으라고 지시하고 김 자신도 1954년 2월 평양북도 운전군의 고아원에 있던 소녀를 양녀로 받아들여 김경손으로 키웠다.

    북한으로서는 이례적인 정보를 공개함으로써 김일성 양녀의 존재가 밝혀진 결과 내 오해도 풀렸다.

    ● 은폐된 이복형제

    김정일의 어머니 김정숙이 사망한 후 김일성은 비서였던 김성애와 재혼, 적어도 딸 한 명과 아들 두 명을 낳았다. 딸은 경숙(敬淑)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경진(敬珍)이라는 정보도 있다. 아들은 평일과 영일로 확인되고 있다. 김일성의 처조카인 이한영의 ‘평양 15호 관저의 비밀통로’를 보면 “밑의 네 명(경숙, 평일, 영일, 경일)은 현 미망인 김경애가 낳은 자식들”로 돼 있으며, 또 다른 ‘경일’이라는 자식이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성별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 외에도 ‘청일’ ‘형일’이라는 자식이 있다는 미확인 정보도 있다.

    한국사회에서는 이름을 지을 때 일족간에 세대관계가 일목요연하도록 항렬에 따라 짓는 풍습이 있다.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金成柱, 金聖柱)’이며, 그 동생은 철주(鐵柱), 영주(英柱)이므로 이 세대의 항렬은 ‘주(柱)’다.

    김정일의 이복동생 ‘평일’은 형의 본래 이름이 ‘정일(正一)’이었던 관계로, ‘평일(平日)’이 아니라 ‘평일(平一)’로 표기하는 것이 올바르다. 김평일(金平一)의 서명이 ‘김평일(金平日)’이었다는 보도도 있지만, 항렬인 ‘日’은 김일성 이름의 중간자인 게 확실하다.

    이복 형제들도 아버지 이름 중 한 글자를 따왔다면, 김정일은 그들과 구별하기 위해서라도 어머니 이름에서 한 글자를 가지고 올 필요성을 느꼈고, 정숙(貞淑)이 아니라 ‘正淑’이라고 개명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을 것이 틀림없다. 김정일은 김일성과 김정숙의 유일 정통한 적자(嫡子)라는 것이다.

    이외에도 문성자라는 타이피스트가 낳은 ‘김송일’, 윤이라는 간호사가 낳은 ‘장형’, 무용수인 김순희가 낳은 ‘김백연’이라는 이복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다고 하지만, 김정일의 이복동생이 정확하게 몇 명인가는 수수께끼다.

    1949년 9월22일 김정일이 7살 때 사랑하는 어머니가 급사했다. “북한의 고위간부들 사이에 잘 알려진 소문은 김정숙이 6번째 아기를 출산하던 중 난산으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한국에 망명한 고영환은 저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6번째 아이’는 분명 잘못이며 ‘5번째 아이’가 맞다. 그러나 김정숙이 병사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 이유는 나중에 김일성의 후처가 되는 김성애의 존재 때문이다. 김일성과 김성애의 관계에 대해서 고영환은 김일성 부자와 친했던 여자 빨치산이었던 황순희(현재 북한 혁명박물관 관장)로부터 1970년대 초에 들었다고 하는 귀중한 증언을 소개하고 있다.

    “(6·25전쟁이 시작한 해인) 1950년 늦가을부터 겨울까지는 무척 추웠고, 제일 힘든 기간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최고사령부의 퇴각 행렬에 섞여 자강도의 강계, 만포까지 후퇴했습니다. 먹을 것도 없었고 목욕도 못했기 때문에 이가 몸 속을 돌아다녔습니다. 최고사령관 동지(김일성)도 이 때문에 가려워서 어쩔 줄 몰라 했기 때문에 무척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때 그(김일성)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누구보다도 가슴 아파했던 것이 김성애라는 여자였습니다.

    김성애는 당시 최고사령부 기술서기, 즉 최고사령관의 기술서기였지만, 김일성과 오랫동안 함께 생활해온 우리들보다 김일성을 귀중히 여기고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김일성의 식사 준비와 의복에도 신경을 써서 김일성이 가려워하는 것을 보면 깨끗한 손수건을 김일성의 옷 속에 넣어드리곤 했습니다. 이가 손수건에 모이면 꺼내서 불에 태운 뒤 다시 손수건을 넣어드렸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고영환은 “두 사람의 관계가 이미 전쟁 전부터 시작된 것을 나는 처음 알았다”고 쓰고 있다. 김일성 곁에 있었던 홍순관은 다음과 같이 김정숙의 죽음에 의문을 나타내고 있다.

    “나처럼 숙청을 피해 중국에 망명한 전 북한간부 일부는 김정숙이 세번째 아기를 출산하는 도중에 난산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시 북한의 의료수준은 그렇게 형편없지 않았으며, 중앙간부를 진찰하는 평양중앙병원 전문의들은 절대로 김일성의 처를 난산으로 죽게 할 만큼 무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이며 김일성의 경력을 밝히는 데 일생을 바친 이명영은 저서 ‘네 명의 김일성’에서 김정숙의 사망원인에 관하여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당시 평양에서 유명한 의사였던 조진석 박사와 장기려 박사의 증언에 의하면, 김정숙은 북한의 고급간부들만 진찰받는 특별병원 산부인과 과장 황명곤 박사 밑에 있던 허신 박사에게 진찰을 받았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전치태반(자궁 외 임신)이라는 것은 조금만 늦어도 살릴 수 없는데 김정숙이 바로 그 경우였다고 한다.”

    홍순관의 수기에서 김정숙의 장례식은 사망 이틀 후인 9월24일로 돼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총련 총연합회 편 ‘김정일 약전’(웅산각, 95년 발행) 및 김남진 저 ‘김정일·그 지도자상’(웅산각, 96년 발행)의 김정일 활동 연표에 의하면, 김정숙의 사망일은 9월22일이 아니라 장례식이 행해진 9월24일로 돼 있다.

    한 책에만 그렇게 표기돼 있으면 실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두 책 모두 사망일이 변경돼 있는 것은 무언가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든다. 그렇지 않다면 김정일 생모의 사망일을 틀리게 쓴 ‘불경죄’로 조총련 관계자는 다음 번 조국(북한)을 방문할 때 강제수용소에 갈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5. 발표되지 않은 학력

    김정일은 초등학교시절, 매년 전학하고 있었다! 수많은 김정일 전기는 기묘할 정도로 의무교육 시기 및 그의 학력에 관해서 특히 모호하게 기술하고 있다.

    ① 삼석인민학교(초등학교)를 한참 다닌 후 평양 제4인민학교 5학년에 편입했다(최인수 저 ‘인민의 지도자’).

    ② 삼석인민학교를 다니다가 전후(戰後)에는 평양 제4인민학교 및 평양 제1중학교에서, 다음은 남산고등중학교에서 배웠다(김강일 등 공저 ‘위대한 지도자 김정일’).

    ③ 전쟁 중에는 만경대 혁명 유자녀학원을 다니고, 정전 후에 평양 제4인민학교, 평양 제1중학교에 입학했다(김강일 저 ‘김정일 지도자’).

    이들 기술에서는 입학년도 및 전학 연도가 불명확하다. 전·입학 연도를 소개하고 있는 것은 1980년대 중반에 발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재일본 조선청년동맹 편집의 ‘시대와 리더, 젊은 지도자 김정일 서기’라는 소책자밖에 없다.

    “1945년에 조국이 해방되자, 김정숙 여사와 함께 조국의 흙을 밟고 1950년 9월부터 54년 8월까지 인민학교에서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54년 9월부터 57년 8월까지 평양 제1중학교에서 공부를 하시고 동 학교를 졸업하신 후 57년 9월부터 60년 8월까지 남산고급중학교에서 공부에 열중하셨습니다.”

    일본에서 발행된 이 소책자에는 북한측이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김정일이 김정숙과 함께 조국의 땅을 밟고”라고 명확히 쓰여 있어 흥미진진하다.

    고영환은 ‘망명 고관이 본 김정일’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김정일)는 1949년 9월에 평양 남산인민학교에 입학했다. 전쟁 중 후퇴가 시작되자 1950년 10월 자강도에 있는 장가산 인민학교로 옮겼다. 오늘날 장가산은 ‘장가산 혁명사적지’가 건립돼 성지로 돼 있다.”

    이 장가산은 ‘장자산(將子山)’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전술한 소책자에 나온 연도와 달을 합쳐서 생각해보면 김정일은 전쟁중에 자강도 장강부에 있는 장자산 인민학교에 다닌 것으로 된다. 장자산 인민학교는 전쟁중 김일성이 ‘일시적인 전략적 후퇴’를 했던 자강도 강계시 근처에 있다. 그러나 유엔군이 근처까지 북상함에 따라 김정일은 국경을 넘어 중국 길림성으로 피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하이에서 발행된 ‘당대국제인물사전’에 “김정일은 51년에서 53년까지 중국동북부의 길림학원에 피신해 있었다”고 돼 있지만, 북한은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중국이 참전해 유엔군을 한반도 남부로 다시 밀어낸 다음, 김정일은 1952년 길림성에서 귀국해서 “11월22일 후방에 가설된 만경대혁명유자녀학원 인민반 4학년에 편입”(‘김정일 서기, 그 사람과 업적’)하여, 다음해 만경대혁명유자녀학원 제1기생으로 졸업하고 있다.

    “1953년 8월 전쟁이 끝나자 김정일은 평양시 삼석구역에 있는 삼석인민학교로 전학했다. 휴전협상으로 38도선이 그어지자 김일성이 이끄는 북한군 최고사령부는 정전할 때까지 평양시 삼석구역에 머물렀기 때문에 김정일은 삼석 인민학교에 편입한 것이다. 오늘날 북한 고관 중에는 삼석인민학교 출신이 적지 않다.”

    고영환은 이렇게 쓰고 있다. 이러한 기술에 다른 정보를 합쳐 보면, 김정일은 초등학교 시절 매년 전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54년 6월에 평양 제4 인민학교를 졸업했다고 생각되는데, 기록은 없다.

    6. ‘독일 유학’에 얽힌 오해

    한국인 오기환의 ‘김정일 스토리’에는 “(김정일은) 1958년 8월 남산학교 고등반 졸업과 동시에 동독의 항공군관학교에 유학했지만 2년 중퇴 후 북한에 돌아왔다”는 경력이 있다. 또 동베를린의 훔볼트 대학에 유학했다는 정보도 있다. 그러나 나는 김정일의 경력을 조사하기 위해 독일을 방문, 그가 훔볼트 대학에 유학한 사실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훔볼트 대학 조선연구소의 홀마 프로흐로스 박사는 북한에 유학한 경험도 있는 북한통인데,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었다.

    “정일의 동생 영일이 1980년부터 4년간 훔볼트대학에 유학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는 전자공학부를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영일의 독일어 스펠링이 ‘JONG IL’이어서, 영어발음으로는 정일이 됩니다. 이 철자를 보고서 김정일이 훔볼트 대학에 유학했다는 잘못된 정보가 전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구동독의 공군사관학교는 동부의 카멘츠에 있지만, 그 곳에 김정일이 유학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1959년 김정일이 사회주의권 나라들을 여행하던 중인 1월27일에 모스크바 대학을 방문했을 때 유학을 제의받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대학명이 밝혀져 있지 않지만 공식 전기에도 등장한다. 김정일은 그 제의를 거절하고 김일성대학에서 공부하겠다고 답했다고 하는데, 소련 유학을 싫어한 진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그가 대학 시절에 유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등학교(남산고급중학교) 시절에 유학했을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다. ‘조선의 지도자 김정일’이라는 전기에 남산고급중학교 시절의 학력이 빠져 있는 것은 유학문제와 어떤 관련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김정일은 60년 9월1일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 64년 3월18일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서 군의 위치와 역할’이라는 제목의 졸업논문을 제출하고 3월30일 졸업했다. 그러나 당시 북한 대학은 5년제였다고 하며, 김정일이 대학 2년에 편입했다는 설도 있어 대학입학 연도는 수수께끼다.

    7. 몇 번 안 되는 외국체험

    김정일이 태어난 고향 러시아로부터 귀국한 후 처음으로 외국을 방문한 곳은 전쟁 때문에 피란했던 중국(길림성)이었다. 중국에 약 1년 체재했다고 생각되지만, 당시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전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최초의 외유는 아버지와 동행해 소련의 혁명기념행사(57년 11월7일)를 본 남산고급중학교 1학년 때 일이다.

    “러시아혁명 40주년에 아버지를 따라 모스크바에 갔을 때, 그는 15세였다. 대사관에서 ‘재미있는 영화 없어요?’라고 하는 등 꽤 거만하게 굴었다.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아버지와는 달리 논리를 세워 이야기하는 것에는 약하다. 국가의 지도자 그릇은 아니다.”

    6·25 당시 인민군 소좌로 서울 점령부대의 정치장교를 지냈고, 1950년 후반 소련으로 망명해 국제고려인협회 고문을 지낸 고(故) 허진은 일본 신문 ‘마이니치’(1994년 7월23일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정일의 해외 체험은 사회주의권 국가방문(또는 고교시절의 유학) 이외에는 65년 인도네시아 방문(4월9∼21일) 및 83년 중국 극비 방문(6월1∼13일) 정도만 알려져 있다. 파리의 ‘크레이지 호스’를 극비리에 방문한 일이 있다는 소문도 들리지만 확인할 수는 없다. 만약 그런 행동을 했다면 아마도 70년대였을 것이며, 80년대에 공식장소에 등장하면서부터는 그러기가 어려웠으리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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