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2월19일 한국통신 광화문 사옥. 사무실 한켠 텔레비전 앞에 몰려있던 직원들 사이에서 “와-!” 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됐구나!”
“야, 정말 됐네, 됐어!”
한통이 주축이 된 한국디지털위성방송(KDB)이 국내 유일의 위성방송사업자로 선정된 순간이었다. 그 4일 전인 12월15일, 한통은 SK텔레콤과 함께 꿈의 이동통신이라 불리는 IMT-2000 사업권을 획득했다. 불과 닷새 만에 2000년대 최대 이권사업 두 가지를 ‘싹쓸이’한 것이다. 공기업인 한통이 두 거대 이권을 한손에 거머쥔 이면에는 “2002년 6월까지 민영화를 완료한다”는 약조가 전제조건인양 붙어 있었다.
같은 시간, 명동성당. 두툼한 방한복으로 중무장한 한통 정규직 노조원 1만여 명이 대규모 집회를 열고 있었다. 구내를 메운 비닐천막과 트럭 5대분의 각종 농성 장비들. ‘슈퍼 공룡’ 회사의 ‘슈퍼 노조’ 다운 모습이었다. 노조는 정부의 한통 민영화 방침과 일방적 구조조정을 격렬히 규탄했다.
22일 오전, 노사합의 타결과 더불어 노조원들이 빠져나간 명동성당은 볼썽 사나웠다. 성당측은 이례적으로 “노조가 기물 파손은 물론 신도들의 새벽 미사 참석을 방해하고 구내를 쓰레기장으로 만들었다”면서 “앞으로 이익집단의 성당 내 점거 집회나 장기 천막 농성을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한통 노조가 몇몇 신문에 사과문을 게재했지만 노조원과 신도 간의 감정 싸움은 인터넷 상에서 2주 가까이 계속됐다.
12월19일을 전후해 펼쳐진 이 두 가지 광경은 거대 공기업 한국통신이 처한 오늘의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디지털 혁명을 이끌어갈 ‘사이버월드 리더’, 한국 경제의 미래를 짊어질 ‘정보통신업계의 맏형’.
그러나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인 구조조정과 민영화는 노조 설득 실패, 집단 간의 견해 차이로 성사 여부조차 의심스럽다.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는 기본통화료 인상을 계기로 한통과의 일대 격전을 준비중이다.
뿐인가. 우리 나라 통신 발전을 이끌어온 유무형의 수많은 공로에도 불구하고, 한통에 대한 국민과 업계의 시각은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자기 잇속만 챙긴다’ ‘방만하다’ ‘독점의 횡포를 휘두른다’ ‘문어발식 확장으로 업계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등 부정적인 쪽에 가깝다.
취재중 만난 한통의 현직 임직원들은 이러한 외부 평가에 대해 “뭘 모르고 하는 소리”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통신업계에 떠도는 말 그대로, 이들은 스스로를 ‘영원한 甲’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그런데도 한통의 오늘과 내일에 관심의 끈을 늦출 수 없는 건, 그만큼 우리 경제와 국민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특히 민영화 시한을 1년 앞둔 가운데 IMT-2000, 위성방송사업의 기초를 다져야 할 2001년은 한통은 물론 한국 IT(정보통신)산업의 향배를 결정할 중요한 한해가 될 것이다.
마침 한통은 개혁 성향의 젊고 의욕적인 인물을 전문경영인으로 맞이했다. 한통 프리텔 사장을 지낸 이상철(李相哲·53) 사장이다. 한통 20년 역사상 최초의 엔지니어 출신 경영인이기도 하다.
과연 한통은 ‘젊은 피’의 수혈에 힘입어 세간의 우려를 씻고 ‘IT 코리아’의 리더이자 세계적 통신업체로, 또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모범적 민간 기간통신사업자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인가.
4대 그룹 넘보는 거대통신제국
한국통신이 설립된 것은 1981년 12월10일. 정부는 대규모 통신시설 확충 및 관리를 위해 체신부 업무 영역 중 전기통신 관련 부문을 따로 떼어내 한국전기통신공사를 출범시켰다. 한통은 발족 5년 만에 전국 시외전자교환망을 완성하고 전국 전화 광역자동화를 이뤄내는 등 발빠른 성장을 보였다. 1986년에는 세계 열 번째로 대용량 전전자교환기 개발에 성공해 전화 대중화의 물꼬를 텄다.
오랜 기간 국민들은 한통을 ‘전화국’과 동일시했다. 그러나 IT혁명과 함께 기간통신망이 지닌 부가가치가 급등하면서, 이제 한통은 일개 공기업의 영역을 넘어 9개 자회사를 거느린 통신전문그룹으로 면모를 일신했다. 해저 광케이블부터 인공위성까지, 말 그대로 ‘육·해·공’을 아우르는 거대통신제국의 탄생이다.
자본금 12조5610억 원에 총자산 23조 9533억 원. 2000년 추정 매출액만 10조2800억 원, 순이익은 1조2000억 원에 이른다. 이변이 없는 한 올해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하는 30대 기업집단 중 7~8위권 그룹에 진입할 전망이다. 민영화만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면 재계 순위 1~2위를 다투게 되리라는 분석도 있다.
한국통신 파워의 핵심은 각 가정까지 파고들어 있는 시내전화망(유선가입자망)과 막강한 자금력이다. 대부분의 유·무선 전화와 초고속인터넷망은 한통 시내망을 타지 않고서는 연결이 불가능하다. 이로 인해 데이콤·온세통신 등 시외·국제전화 사업자, 하나로통신 등 시내전화사업자나 초고속망사업자, SK텔레콤·LG텔레콤 등 무선전화사업자들은 1999년에만 한통측에 총 1조4500억여 원의 접속료를 지불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한통의 주요한 ‘고객’인 이 통신사업자들은 한편으로는 한정된 국내 통신시장을 놓고 한통과 치열한 다툼을 벌이는 경쟁자이기도 하다. 한통은 시내·시외·국제 전화 서비스는 물론 무선전화(한통프리텔·한통엠닷컴), PC통신(하이텔), 초고속망(메가패스), 인터넷데이터센터, 전자상거래(바이앤조이) 등 ‘돈 된다 싶은’ 정보통신사업에는 죄다 진출해 있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통은 각종 통신요금 책정과 통신 인프라 구축에 결정적 역할을 함으로써 국민생활과 국가경제에 심대한 영향을 끼쳐 왔다. 정부의 정보통신 관련 정책을 시장에서 실제 ‘구현’하는 태스크 포스이기도 하다. 수많은 정보통신 장비·설비 및 콘텐츠 업체들엔 매년 3~4조 원의 매출을 보장하는 최대 고객이다. IMT-2000과 위성방송 사업 진출이 확정된 지금에 와서는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 거대하고 독점적이며 막강한 힘을 지닌 공기업이 국민, 정부, 경쟁사업체는 물론 4만5000여 명의 직원들마저도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통 간부 출신인 한 벤처기업인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회사 안팎 사정을 두고 “공무원 조직과 재벌 그룹의 나쁜 점만 모아놓았다”고 혹평했다.
한통이 내부적으로 직면해 있는 최대 현안은 인사 개혁이다.
흔히 ‘철밥통’에 비유되는 관료적 연공서열 인사가 핵심. 능력보다 재직 기간을 중시하다 보니 과장이 말단사원보다 4배 더 많은 기형적 구조를 갖게 됐다. 실장·본부장 급이 37명, 1급 국장이 241명, 2급 부장이 1007명, 3급 과장이 4104명, 4급 대리가 1만1148명, 5급 사원이 1만5843명, 6급 사원이 8706명, 7급 사원이 1141명 등이다(2000년 기준).
구조조정에 대한 부담으로 최근 3년간 신입사원을 거의 채용하지 않은데다 이직률은 낮아 중간층의 이상비대현상이 고착됐다. 이로 인해 97년 37.9세였던 직원 평균 연령은 38.2세로 높아졌고 인사 적체도 심각한 수준이다.
한통은 1998~2000년 구조조정 차원에서 1만5000여 명을 감원해 6만여 명에 달하던 정규직원 수를 4만5000여 명 선으로 줄였다. 그러나 “직급 구조 자체의 모순은 내버려둔 채 건물 관리, 설비, 경비 등 외곽 하위직 위주의 인력 감축에 그친 ‘반쪽 구조조정’일 뿐”이라는 비난이 끊이지 않고 있다.
복잡다단한 직급·직군 구조는 업무 스피드를 떨어뜨린다. 권한도 상층부에 집중돼 있어 수적으로 월등한 과장·대리 급이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 기업체라면 대리가 할 일을 과장이, 과장이 할 일을 부장이 하는 식이다.
대리 수가 워낙 많다 보니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진다. 지난해 한통을 출입하던 몇몇 기자들은 한 ‘과장’으로부터 “이번에 과장 승진했다”는 자랑을 듣게 됐다. 이미 과장인 사람이 다시 과장으로 ‘승진’하다니. 알고 보니 그는 고참 대리였다. ‘연배도 그렇고, 업무상 효율을 높이기 위해’ 대외적으로만 과장 행세를 해 온 것. 이러한 직급 높여 부르기는 한때 공무원 사회에 만연했던 행태다. 한통의 관료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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