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사실이 밝혀졌다는 그 이유로 역사가 된다. 밝혀지지 않은 사실을 끌어안고 있는 사건은 역사가 되지 못한다. 역사가 되려면 밝혀져야 하고, 밝혀진다 함은 사실을 공유하는 것이다. 중국 현대사의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인 1989년 6월의 톈안먼(天安門) 사태는 ‘톈안먼 보고서(The Tiananmen Papers)’라는 책으로 사건 발생 12년 만에 비로소 역사에 들어섰다.
당시 계엄령 선포와 무력 진압의 배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당시 최고 지도자인 덩샤오핑(鄧小平)의 사태 관련 발언 내용은 물론, 자오쯔양(趙紫陽·총서기) 리펑(李鵬·국무원 총리) 양상쿤(楊尙昆·국가주석) 등의 전화 통화 내용에서부터 민심 동향 비밀보고서까지 ‘톈안먼 보고서’는 1989년 봄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껴입고 있었던 그 두껍기 짝이 없는 ‘옷’을 벗겼다. 사태 당시의 관련자 몇 사람만 알고 있던 사건이 이젠 역사가 된 것이다.
장쩌민(江澤民) 국가 주석이 직접 나서서 터무니없는 자료라고 반박했다. 허위라는 것이다. 그럴 만하다. 중국 내에서만 공개됐어도 손을 써볼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톈안먼 보고서’는 미국에서 튀어나왔다. 파장이 클 수밖에 없다. 이 자료를 손에 쥔 ‘톈안먼 보고서’(출판사 : 퍼블릭 어페어스)의 편집자 앤드류 네이선 교수(컬럼비아 대학 정치학과)는 서문에 이렇게 써놓았다.
“수백 장에 달하는 사본의 일부 혹은 전체 자료로 구성된 이 기록은 공산주의 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기록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이처럼 정치에 얽힌 최고위층의 은밀한 내용이 공개되기는 중국의 전 역사에서 일찍이 그 유례가 없다.
이런 기록을 볼 수 있는 위치는 대개 고위층 지도자 40명에게 국한되고, 대부분의 문서는 이 가운데에서도 5명의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및 8명의 원로만 볼 수 있는 극히 제한적인 자료들이며, 일부 자료는 최고 지도자 한 명이나 몇몇 지도자만 볼 수 있는 것이다.”
중난하이의 원로들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이런 극비자료가, 대체 한두 장도 아닌 수천 장의 방대한 자료가 어떻게 미국인의 손에 들어왔느냐 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밝히는 것도 ‘톈안먼 보고서’ 못지않은 책 한 권을 쓰기에 충분한 충격적인 주제다. 네이선 교수가 서문에 밝힌 입수 경위를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이런 자료를 취급할 수 있는 사람은 중국인 가운데 몇 명 되지 않는다. 중국인 편찬자(가명: 張良)가 이 자료를 손에 넣었고, 톈안먼사태의 공식적인 역사 기록을 위해 자료를 공개하도록 개혁 추진세력인 동료들로부터 자료 출간을 위임받았다. 그는 중국 바깥에서 나를 만나 도움을 요청했다. 나는 마오쩌뚱(毛澤東)의 주치의였던 리즈수이(李志綏) 박사의 ‘마오쩌뚱의 사생활’ 출간과 웨이징셩(魏京生)의 감옥 편지 출간에도 관련돼 있었다.
편찬자는 처음에 중국어로 먼저 출판하기를 원했으나 생각을 바꾸었다. 우리는 세 차례에 걸쳐 자료를 골라냈다. 먼저 편찬자가 수천 장에 달하는 문서 가운데 중난하이(中南海 : 베이징 자금성 옆에 있는 원로들의 거주지로 국무원과 당 중앙 사무실이 있음-역주)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순간의 기록들을 먼저 뽑았다.
그 다음엔 중국어로 516쪽에 달하는 초고를 만들었다. 이 책 분량의 약 3배에 달하는 양이고 중국어로 출판될 예정이다. 마지막 단계로 편찬자는 책 한 권 분량의 자료만 가려 뽑고 설명을 붙이는 작업을 우리(공동 편집자 페리 링크 프린스턴 대학 중국어학과 교수)에게 맡겼다.”
‘톈안먼 보고서’는 이렇게 걸러진 1차 자료를 사건 순서에 따라 재배치했고, 책 서문에 문서 공개의 의미와 영향 등을 해석해놓았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이 출판되면서 중국에서 가장 타격받을 사람은 고위 지도자 두 명, 장쩌민과 리펑이다. 사태 당시 상하이(上海) 당비서였던 장쩌민은 5월27일 열린 원로모임에서 비합법적으로 중국 공산당 총서기로 선출됐다. 장쩌민은 2002년 10월에는 총서기직에서, 2003년 3월에는 국가주석직에서 물러난다.
리펑은 덩샤오핑과 원로들에게 시위대가 그들을 공격하려 한다는 조작된 정보를 올렸다. 또한 사태 진압 이후 정보계 및 경찰 요원들을 진보적 관리와 지식인 탄압에 활용한 사실이 이 책에서 밝혀졌다. 리펑은 1989년 사태에서 가장 능력 있고 결연한 자세를 보인 정치인이다. 그는 혼미한 사태 속에서 냉정하고 분명한 태도로 일관했다.”
리펑 편에 선 3명의 정치국원 리티에잉(李鐵映), 뤄간(羅幹), 장춘윈(姜春雲)도 이 책 출간으로 타격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며, 22명의 정치국원 가운데 2명의 선임 지도자와 그들을 포함한 직계인사 3명 역시 마찬가지다.
덩샤오핑의 가장 믿음직한 동료였던 7명 원로 - 천윈(陳雲), 리셴녠(李先念), 펑전(彭眞), 덩잉차오(鄧潁超), 양상쿤, 보이보(薄一波), 왕전(王震) - 가운데 양상쿤은 중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양상쿤은 결국 조카 양바이빙(楊白)과 함께 1992년 14차 당 대회에서 실각했다.
덩샤오핑과 양상쿤 외에 나머지 6명의 원로 가운데 5명은 이미 사망했다. 이 책이 집필될 때까지 보이보가 유일한 생존자였으나 이젠 정치적인 영향력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5명 가운데 마지막 서열이었고 학생운동에는 리펑보다 더 강경했던 야오이린(姚依林)은 1996년에 사망했다. 베이징시의 두 원로인 당서기 리시밍(李錫銘)과 천시퉁(陳希同) 시장은 이미 실각한 지 오래다. 특히 천시퉁은 리펑이 정보를 조작하도록 도왔고 지도부 내에서 무력 진압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했던 사람이다.
최종결정권자는 덩샤오핑
자료 공개로 득을 보는 사람도 있다. 현재 준가택연금 상태인 자오쯔양이야말로 최대의 수혜자임에 틀림없지만 이제 정계에 복귀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다. 1989년 당시 상하이 시장이었던 현 총리 주룽지(朱鎔基)와 당시 톈진(天津) 시장이었던 리루이환(李瑞環)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주룽지는 장쩌민과 함께 사태 대처능력에서 당 중앙의 신임을 얻었고, 목수 출신인 리루이환 역시 덩샤오핑이 총서기 감으로 점찍어두고 있었다.
정치국 상무위 서열 3위였던 차오스(喬石)는 계엄령 시행과 무력 동원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원로들에 의해 차기 총서기 물망에 올랐으나 너무 약하다는 이유로 제외됐다. 5명의 정치국 상무위원 가운데 무력 동원에 반대했던 자오쯔양, 차오스, 후치리(胡啓立)는 이 책에서 ‘3명의 다수’라는 대명사로 불리고 있다.
뭐니뭐니해도 이 책이 밝혀주는 새로운 사실 가운데 가장 압권은 덩샤오핑의 절대에 가까운 권력 행사다. 그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최종 결정을 내렸다. 자오쯔양도 자기 의견을 밝히기는 했으나 덩샤오핑에게 대들지는 못했다. 공식 직위는 국가를 대표하는 자리였지만 실제로는 덩샤오핑의 최측근으로 모든 업무를 관장했던 양상쿤은 모든 중요한 정치국 회의에 하나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가장 중요한 결정은 덩샤오핑의 집에서 내려졌다. 시위를 ‘동란’으로 규정한 사람도 덩샤오핑이고, 계엄령 선포를 최종 결정한 사람도 덩샤오핑이다. 자오쯔양을 사임시키고 장쩌민을 후임자로 세운 사람 역시 그였고, 톈안먼 광장의 군 진입 명령을 내린 사람도 그였다.
그러나 덩은 그 일을 기꺼워하지 않았다. 양상쿤에게 불편한 심기를 토로하기도 했다. 당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모든 중요한 결정을 자신에게만 떠넘긴다고 불평하면서, 그렇게 되면 당이 취약해진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덩샤오핑의 권력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결정을 내리기 전에 그는 원로들의 동의를 받아냈다. 원로들은 네 번의 회의를 거쳐 네 가지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계엄령 선포, 자오쯔양 해임, 장쩌민 지명, 무력 진압 등이다. 자오쯔양의 후임으로 장쩌민을 처음 거명하는 회의에서는 원로 가운데 천윈과 리셴녠 장쩌민의 이름을 거론한다. 사전에 덩샤오핑에게 장쩌민 이야기를 먼저 꺼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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