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일 아침 8시. 서울역 광장에는 찬바람이 가득하다. 올 겨울 들어 가장 춥다는 날씨지만, 염천교로 통하는 지하도에는 몇몇 노숙자들이 아침 잠을 청하고 있다.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채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아마도 점심때나 돼야 자리에서 일어나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으로 떠날 모양이다.
지하도를 나와 봉래동 쪽으로 걷다 보면 오른편에 화신빌딩이 있다. 김유경씨(30)는 이 건물 5층 서울시노숙인대책협의회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다. 기자가 김씨를 처음 만난 건 서울역에 수백 명의 노숙자들이 진을 쳤던 98년 여름이다. 김씨는 이때부터 낮에는 서울역 광장 테이블에서, 밤에는 서울 시내를 돌며 노숙자들을 만났다. 그로부터 2년. 김씨는 노숙자가 시간대별로 움직이는 경로까지 자세히 꿰고 있다. 얼마 전에는 ‘노숙인에 대한 지역사회의 태도’를 주제로 석사학위 논문을 제출했다.
김씨는 아침 일찍부터 밀린 서류를 정리하고 있다. 그는 “연말연시에 모처럼 쉬었더니 몸이 날아갈 것 같다”고 말했다. 평소 서울역을 떠나지 않고 사무실에서 먹고 잤던 터라 모처럼 얻은 휴식이 달콤했던 모양이다. 14년 만에 처음으로 동생과 영화구경을 했다는 말이 이채롭게 느껴진다.
아침부터 전화벨이 연이어 울린다. 질문을 던지기가 미안할 정도다. 그는 통화를 끝낼 때마다 끊어진 말들을 천천히 이어갔다.
“한 달 전쯤이었는데, ‘쪽방’에 살던 분이 새벽에 일을 나가다 자동차에 치여 돌아가셨어요. 그분은 ‘희망의 집’에 계시던 노숙자였거든요. 지금까지 행정기관에서는 거리에 있는 사람만 노숙자로 판단했어요. 그래서 그분들을 시설에 수용하는 일에 집중했던 거죠. 하지만 이젠 언제든지 노숙에 이를 수 있는 한계계층을 주목해야 합니다. 아마 경기가 회복돼도 노숙자는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이건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쪽방’은 서울 회현동이나 동자동 등지에 집중적으로 분포돼 있는 0.3~0.7평 크기의 빈민층 거주지를 부르는 말이다. 전국에 8200여 개가 있는데 혼자 사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한국도시연구소에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쪽방 거주자의 58.4%는 이미 노숙 경험이 있다. 이들은 거리를 떠돌다 돈이 조금 생기면 다시 쪽방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희망의 집’은 서울시가 노숙자의 재활을 돕기 위해 복지관 등에 설치한 보호시설을 말한다. IMF 이후 많은 노숙자들이 이곳을 통해 새출발했지만,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그들 중 상당수는 아직까지 거리를 떠돌고 있으며 시설 입소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김씨는 “노숙자 문제도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날씨가 추운데도 시설 입소를 기피하는 노숙자들의 경우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는 설명이다. 김씨는 “정신질환자, 만성 노숙자, 장애인, 여성 등은 시설 입소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며 자신이 목격한 어느 여성 노숙자의 사례를 소개했다.
“남성 노숙자에게 돈을 받고 성관계를 맺는 여성 노숙자가 있었어요. 우리가 그분에게 접근하려고 하니까 험악한 분위기가 만들어지더라구요. 여러 명의 남성 노숙자들이 방어벽을 치는 거예요. 이미 그 여성을 중심으로 돈을 주고 관계를 맺는 그룹이 생긴 겁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여성이 입소한다고 해도 제대로 보호받을 수 있는 시설이 없다는 점이에요.”
숨가쁘게 달려온 2년
김씨는 서울대 소비자아동학과 91학번이다. 소비자아동학을 전공한 사람이 뒤늦게 사회복지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졸업을 앞두고 왠지 기업에 들어가서 기계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란다. 그렇게 해서 서울대 학생생활연구소 상담원을 거쳐 서울역으로 나오게 됐다.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다 보니까 그 분야에서 일을 하게 되면 ‘내가 왜 사는지’에 대한 고민이 줄어들 것 같더라구요. 사회복지는 몸을 굴리면서 배우는 학문이잖아요. ‘공부하는 실무자’라고 할까요. 그런 게 내 체질에 딱 맞아요.”
아무리 일이 좋다지만, 포기하고 싶은 적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데 한눈 팔 시간조차 없었다고 한다. 김씨는 일에 몰두할 때 ‘이러다 죽겠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한다. 자정이 넘도록 노숙자를 상담하고 회의를 마치면 새벽이다. 이때부터 상담내용을 정리하면 날이 밝는다. 그야말로 숨가쁘게 달려온 2년이었다.
지난해 추석 연휴였다. 김씨는 그간의 활동을 정리할 생각으로 5일 동안 사무실에서 지냈다. 자물쇠로 문을 잠그고 그 안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밥을 냉동실에 넣어두고 칼로 잘라 해동시켜 고추장에 비벼 먹으며 글을 썼다고 한다. 그렇게 정리한 글들이 파일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그는 오래 전부터 기록하는 데에 집착하고 있다. ‘누가 자리를 비우더라도 경험은 전수돼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다.
“아마 제가 오락을 잘 몰라서 이렇게 살 수 있을 거예요. 자원봉사자 교육을 할 때도 저는 하드트레이닝을 강조해요. 백번을 스치는 사람보다 한 번을 제대로 파고드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죠.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에 전력을 다해 매달립니다. 얼마 전엔 13시간을 쉬지 않고 교육한 일도 있어요.”
김치찌개로 점심을 때우고 남대문 경찰서 뒤편에 있는 지역상담센터로 갔다. 김씨는 이곳의 도움을 받아 쪽방지역 거주자들의 실태조사를 준비중이다. 조사방법과 일정을 자원봉사자들과 협의한 뒤에 사무실로 돌아온 시간은 3시 10분. 이제부터 지난해 사업에 대한 평가회의가 시작된다. 김씨는 회의자료를 챙겨들고 나가면서 한마디 툭 던진다.
“전 아무래도 필드 체질인가 봐요. 힘들어도 그게 더 적성에 맞는 것 같아요.”
김씨와 다시 마주앉은 건 밤 9시가 넘어서다. 얘기를 시작할 만하면 어김없이 전화가 걸려온다. 그냥 인사만 하고 수화기를 내려놓는 법이 없다. 안부를 묻고 새로운 업무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어쩌다 노숙자의 전화를 받으면 몸상태를 체크하고 입소방법을 자세히 알려준다.
―IMF 직후엔 ‘실직 노숙자’ 차원에서 문제를 접근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경기가 좋아질 때까지 잠깐 보호하려는 차원에서 서비스했잖아요. 하지만 요즘 거리를 보면 ‘실직 노숙자’라는 각도에서 보기 힘들어요. 일반적으로 노숙자를 말할 때는 거리를 중심으로 파악하는 서비스는 시설에 제한돼 있어요. 여기서 논리적 모순이 생기는 겁니다. 거리에는 쉼터에서 아무리 손길을 뻗쳐도 개입할 수 없는 영역이 있어요. 저는 그 문제를 풀어야만 노숙자에 대한 총체적 접근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현 시스템에서는 거리의 노숙자를 그런 방식으로 풀기 어려운 것 아닙니까.
“7살 먹은 아이가 아버지를 따라 술을 마시고 입에 담기 어려운 욕을 해요. 예순살 된 아버지를 구타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 아이를 그대로 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문제를 풀려면 정신과 의사가 반드시 필요한데 그게 안 돼요. 부처마다 의견이 다르고 서로 일을 떠넘기고 있어요. 정말 불행한 일이지만 노숙자 한 명이 죽어야 서울시장이 겨우 한마디 하는 게 현실이에요. 이제부터라도 노숙자를 중심에 놓고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서비스를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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