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던 날 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 밖을 나설 때 …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날의 생이여”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삽입곡이 되어 뒤늦게 인기를 모으고 있는 노래 ‘이등병의 편지’ 중 한 소절이다. 그러나 지금은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기도 그리 수월찮다.
교육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00년 2학기에 161개 국공사립대 재적생은 163만명으로 이중 휴학자는 52만7316명. 여기서 군휴학자 수는 31만4460명으로 휴학 사유의 59.6%에 이른다. 99년 1학기의 군휴학자 수가 27만8520명, 99년 2학기 29만8566명, 2000년 1학기 29만9971명이었던 것과 비교해볼 때 입영대기자는 점점 늘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자까지 합산해보면 입영적체 현상의 심각성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서울지방 병무청 현역병 지원창구는 입대지원서를 작성하려는 스무살 총각들로 하루종일 붐빈다. 김민수(21·경원대 2)씨는 5월경에 입대를 하고 싶어 연휴가 끝나자마자 병무청을 찾았다. 그런데 지원서류를 쓰기 위해 작성대에 앉아 있으려니 조그만 안내문 하나가 눈에 띄었다.
‘현역 입영 대상은 현재 2001년 7월이 가장 빠른 시기이오니 희망시기를 7월 이후로 표기하여 주십시오.’
할 수 없이 분기별로 나뉜 입대 희망시기 중 7∼9월 칸에 동그라미를 표시해 제출했다. “입대하려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확인해보지 않고 휴학부터 했으면 큰일날 뻔했다. 이젠 군대도 가는 것도 쉽지 않은 세상인가”하며 한숨을 내쉰다.
서민의 체감 경제지수가 갈수록 영하권을 맴도는 것도 학생들의 입대를 재촉하는 요인 중 하나다.
특기병 지원에 대거 몰려
최근 입대 러시는 요즘 신세대 청년들의 의식 변화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른바 N세대들의 입대취향(?)은 ‘빨리’ ‘제때에’ ‘좋은 보직’으로 구분된다. 먼저 ‘빨리’를 선호하는 경향. 몇 년 전만 해도 대학 2학년을 마치고 군대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데 요새는 대학 1학년을 마치고 군휴학원을 제출하는 학생이 많다.
“이제 2학년을 마쳤는데 우리 과 남학생 중 아직 군대를 안 간 사람은 공익근무 예정자를 제외하곤 몇 명 되지 않는다. 이왕 갈 군대인데, 괜히 늦게 가서 나보다 나이 어린 애들 밑에서 졸병 생활하고 싶지 않다. 또 병역미필자는 해외여행이나 유학도 쉽지 않고 무언가 숙제가 남아 있다는 생각을 늘 갖게 만든다. 빨리 갔다 와서 느긋하게 학교를 다니고 싶다.”
입대지원을 하러 온 이상혁(22·서울 은평구)씨의 말이다.
이렇게 ‘빨리’를 선호하는 부류는 공병, 통신, 항공, 의무 등 특기병이나 해군과 공군, 의경 복무를 지원한다. 특기병의 경우 자기가 원하는 시기에 입영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자격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주로 택하는 방법이다. 해군과 공군은 복무기간이 각각 28개월, 30개월로 26개월인 육군보다 길지만, 2~3개월 만에 입대영장이 나오므로 지원자가 많이 몰린다.
경력 쌓으려 군대 간다
다음으로 ‘제때에’ 자신의 진로 등을 고려해 가장 적당한 시기에 입대하려는 경향이다. 입대예정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달은 3월부터 5월 사이. 이때 입대하면 5월에서 7월 사이에 전역하게 되고, 곧바로 2학기에 복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이유와 함께 솔직하게 털어놓은 고백은 ‘신병훈련을 좀더 편하게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한여름의 땡볕훈련이나 한겨울의 혹한훈련보다는 따뜻한 봄날이 좋다는 것이다. 실제 신체검사 때 제출하는 입대희망서에는 대부분이 5월경으로 적는다. 입대영장이 나오면 무슨 사약(死藥)을 받은 듯 몇 날 밤을 뜬눈으로 뒤척이던 기억은 이제 촌스러운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요즘 젊은이들은 자동안내전화(ARS)와 인터넷을 통해 입대일자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고, 휴학과 복학을 고려하고, 제대 후 복학 때까지 무엇을 할 것인지도 꼼꼼히 따져보고 입대시기를 결정하는 실속파가 늘고 있다.
가능하면 몸이 편한 ‘좋은 보직’에 근무하려는 세태는 여전하다. 그러나 요즘 군대에서 ‘좋은 보직’은 단순히 ‘편하다’는 의미보다는, 자신의 적성이나 특기를 살릴 수 있는 곳에서 근무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는 다시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자신의 전공과 일치하는 분야에서 경력을 쌓으려는 경우와 자신의 전공과 일치하지 않지만 군대를 통해 새로운 도전을 해보려는 경우. 이진엽(23·서울 성동구)씨의 경우는 전자에 속한다. 항공 특기병을 지원한 이씨는 3년간 정비회사에서 근무했고 항공 관련 자격증을 3개나 갖고 있다.
“흔히 군대를 인생에서 정체되는 시기로 생각하는데 내 경우 군대에서 정비병으로 복무하게 되면 그 2년이 고스란히 경력으로 인정되어 사회생활을 계속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C대 2학년에 재학중 입대한 최모 일병의 경우는 이씨와 다르다. 현재 육군 00부대에서 의무병으로 근무하는 그의 재학중 전공은 기계설비학이었다.
“군에 입대하려면 6개월 정도 기다려야 한다기에, 그 동안 아르바이트하면서 간호전문학원을 다녔다. 그냥 주어지는 주특기를 받는 것보단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게 낫지 않은가.”
그런데 왜 하필 의무병을 택했을까.
“간호학과를 가려다가 부모님 반대 때문에 못 갔는데, 군대에서 의무병을 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군대에서 공부를 해서 제대 후엔 아예 학교를 옮길 생각도 하고 있다.”
군대를 재도약의 발판으로 삼겠다는 의지다. 군특기병 육성을 목표로 국방부에서 지정하여 운영했던 중장비 학원, 간호학원, 전산학원 등 위촉 학원은 2001년 1월1일 부로 모두 계약이 해지되었다. 전문 자격증을 가진 우수한 자원이 많아지면서 굳이 학원을 통해 특기병을 육성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래도 군입대를 위해 학원을 다니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정천교(21·서일대 1)씨는 차량정비 특기병을 지원했다. 지금 자동차 관련 자격증이 2개 있지만 3월에 하나 더 취득하여 4월에 입대할 예정이다. 사진·비디오학원에 다니는 L씨는 요즘 각종 시청각 장비 운용법을 배우는 중이다. 3개월의 교육과정을 마치면 L씨는 육군 정훈병으로 입대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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