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소부인’이 인기를 얻자 타 에로 비디오 제작사들도 앞다퉈 ‘부인’을 도용했다. 각종 사물에 ‘부인’만 넣으면 영화 제목 노릇을 톡톡히 했다.
‘자라부인 뒤집어졌네’, ‘연필부인 흑심품었네’, ‘콤파스부인 다리 벌렸네’, ‘밧데리부인 충전됐네’, ‘만두부인 속터졌네’ 등 실소를 자아내는 ‘부인들’이 비디오 대여점의 ‘안방마님’으로 대접받게 되었다.
이 무렵 ‘젖소부인’에 복수라도 하겠다는 듯 ‘젖소남편 바람났네’라는 ‘맞받아 치기’형 제목도 나왔다. 하지만 이 제목은 사실 ‘부인시리즈’가 심의에 걸리자 제작자가 생각해낸 아이디어였다. 당시 한 시네마타운에서 에로 비디오를 제작하던 한지일씨는 공연윤리심의위원회로 찾아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부인’ 영화 제목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형식이 ‘무슨 부인 무엇 했네’에 맞춰져 있다는 것. 대체로 부인 앞에 붙는 단어에 따라 뒤의 서술어가 결정됐다. 주어와 서술어가 야릇한 상상을 불러일으킬수록 인기가 치솟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또 하나의 특징은 이때부터 서술형 제목이 유행했다는 점이다. 서술형을 따르면서 영화 제목이 길어졌고, 대화체가 그대로 옮겨졌다.
‘만득아 조개 받아라’, ‘고추밭에 뭔 일 있수?’, ‘당신의 부인은 오후 2시에 무엇을 할까요?’, ‘사모님 열 받았네’ 등이 대표적인 예들. ‘애들은 재웠수?’라는 제목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유행어의 반열에 올랐다.
제목이 영화의 줄거리나 흐름에 관계없이 자극적인 단어만 나열하기 시작했다는 점도 특징으로 꼽힌다. 대부분의 영화에 다양한 부인이 등장했지만, 제목과는 무관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부인 시리즈 사이에서도 다른 점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부인 시리즈의 인기는 한동안 계속됐다.
물론 이러한 시류에 편승하지 않은 영화도 있었다. 나름대로 시장에서 입지를 굳히고 있던 업체들이 내놓은 영화의 제목은 기존 흐름을 고수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유호프로덕션이 시리즈물로 엮은 ‘성애의 여행’이 대표적이다. ‘성애의 여행’은 제목과 영화의 줄거리를 일치시킨 ‘튀는’ 작품이었다. 한 남자가 세계 각국을 돌면서 말 그대로 ‘성애의 여행’을 즐기는 내용으로 짜여 있었다. 하지만 유호프로덕션 역시 ‘어쭈구리’ 시리즈를 통해 한때 방향전환을 모색하기도 했다.
패러디 전성시대
서술형 대화체를 빌린 제목 열풍은 한 동안 이어졌다. 시장에서 그다지 두각을 나타나지 못한 것까지 포함하면 98년까지 계속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젖소처녀 나타났네’, ‘딸라부인’, ‘쉬리 부인 쏘가리 만났네’ 등이 이에 속한다. 하지만 이 무렵부터는 새로운 ‘작명’이 주류로 등장했다. 90년대 말엽부터 유행한 ‘제목 패러디’가 그것이다.
패러디란 원래 ‘풍자적 개작’을 의미하는 말이다. 원본을 적절히 베끼지만, 풍자적이고 유머러스한 효과를 첨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97년 중반을 넘어서면서 국산 에로 비디오 제목에 패러디 현상이 두드러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패러디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심지어 이제 막 극장에서 개봉된 작품의 패러디 작품이 비디오숍에서 인기를 끄는 일도 있다.
이런 가운데 누가 봐도 원전을 떠올릴 수 있는 ‘충격적인’ 작품이 등장했다. 97년 출시된 ‘빨간 보자기’란 영화가 그것이다. 고등학생들이 자신들의 성행위를 찍어 한동안 세상을 요란하게 만들었던 ‘빨간 마후라’라는 포르노물을 패러디한 것이었다. ‘빨간 마후라’는 ‘O양의 비디오’와 함께 일반인들의 은밀한 사생활이 대중의 손을 타기 시작한 시대에 등장해 전국적으로 복사 테이프가 나도는 소동을 빚은 포르노물이다.
유명 영화의 제목을 패러디할 경우 일단 비디오를 고르는 사람들을 친숙하게 만드는 장점이 있다. 단어 한두 개를 살짝 바꿔놓았지만, 이미 알려진 개봉관 영화들을 쉽게 연상할 수 있다. 제작업체들은 연상효과를 배가시키기 위해 글씨체와 크기 등을 극장 포스터와 똑같이 했다. 그렇게 구성했을 때 기대할 수 있는 최대의 효과는 역시 웃음이다. 원래 있어야 할 단어는 없고 엉뚱한 단어가 들어 있는 의외의 상황이 던져주는 당황스러움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남아있는 원작을 떠올리게 하고, 동시에 원작의 파괴된 모습을 연상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예를 들어 ‘용의 국물’이라는 기발한 제목을 보는 순간 사람들은 ‘용의 눈물’을 생각한다. 이성계와 이방원이라는 거대한 ‘용’들이 흘렸던 눈물과 파란만장한 역사의 한장면을 떠올린다. 동시에 드라마의 엄숙한 ‘눈물’ 자리에 ‘국물’이 있음을 확인한다. 대하 역사드라마가 아닌 16mm 에로 비디오라는 엉뚱한 것을 대입하면서 분위기는 일순간에 망가진다. 그 뒤에 웃음이 터지고 비디오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하는 것이다. 만약 제목의 야릇함에 감동(?)해 그 영화를 고른다면 제작사의 의도가 100% 적중한 셈이다.
‘어떻게 이런 제목을 달았을까?’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도 패러디 비디오 영화가 노리는 효과다. ‘정말 원전과 무슨 상관이 있기에 이런 제목을 달았을까’ 하는 데까지 궁금증이 뻗어가다 보면, 빌려보고 싶은 욕구가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일단 제목으로 웃음을 줬다면 그 다음은 빌려보게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시장’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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