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은 새해 첫 국무회의에서 21세기형 ‘강력한 정부’의 3대 요소를 ‘정도의 정치’ ‘법치의 정치’ ‘민생의 정치’로 정리한 바 있다.
먼저 ‘정도의 정치’는 ‘민주주의의 정도를 걷는 정치’를 말한다. ‘정도의 정치’는 첫째, 국민여론을 최고의 격률(格率)로 삼고, 둘째, 시민의 자율성을 진작하고 강권을 최대한 배제한다. 셋째, 집단이기주의에 대해서는 국민여론을 배경으로 최대한 민주적 관용과 인내로 대처하고 민주적 원칙과 법의 테두리 안에서 대화와 설득, 양보와 타협을 통해 끈질기게 협상하여 합의를 이끌어낸다.
국민여론을 최고의 격률로 삼는 정부는 “국민을 하늘처럼 받드는 정부”이다. 2001년 연두기자회견에서도 김대통령은 국민의 정부는 “국민의 여론을 최고로 두려워하는 정부”라고 말했다. 민주주의가 인류의 보편가치로 정착한 21세기에는 이런 정부가 ‘강력한 정부’다. 국민의 여론을 최고로 두려워하며 국민을 하늘처럼 받드는 정부만이 국민으로부터 지지와 신뢰를 받는 정부일 것이고, 국민의 지지와 신뢰를 많이 받을수록 ‘권력’이 ‘센’ 정부이며, 진정으로 ‘강력한 정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민의 여론을 중시한다는 말이 ‘악마의 주술’ 같은 지역감정이나, ‘노벨상도 돈 주고 샀다’ ‘북한에 다 퍼준다’ ‘북한에 끌려 다닌다’는 유언비어와 같은 흑색선전과 불공정보도에서 유래하는 속론(俗論)들까지 다 존중한다는 뜻은 아니다. 합리적 논거에 바탕을 둔 공개토론과 쟁론이 보장된 공론장(公論場)에서만 형성되는 ‘여론(public opinions)’은 어디까지나 음지의 뇌동심리(雷同心理)로 형성되는 ‘속론(popular opinions)’과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강력한 민주주의 정부는 ‘여론’과 ‘속론’을 구별할 줄 아는 정부로 저급하고 편향된 ‘속론’을 배제하고 공정한 ‘국민여론’은 하늘처럼 받드는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여론’과 ‘속론’은 구별해야
다른 한편으로 하늘 같은 여론 형성에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국민의 기본권인 언론의 자유는 민주국가에서 철저히 보장돼야 한다. 동시에 이 신성한 자유는 모독당하거나 오남용돼서도 안 되고 특정집단과 특정인의 특권으로 축소, 변질돼서도 안 될 것이다. 언론의 자유는 언론사의 권리이기에 앞서 국민의 기본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론 자유의 오남용은 중대한 인권 문제인 것이다.
의무 없이는 권리도 없다. 오늘날 언론의 자유는 사상 최대로 보장돼 있는만큼, 언론사도 공정한 비판과 책임 있는 보도를 할 의무를 지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국민과 일반 언론인들 사이에서 언론개혁에 대한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 거센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한편, 21세기형 ‘강력한 정부’는 시장, 지식경제, 시민사회를 특징으로 하는 시민자율의 사회를 지향한다. 정부는 자율적 시장 메커니즘을 발전시키고 시민의 자발성과 자율적 기율(紀律)을 신장해야 한다. 강력한 시민적 자발성에서 ‘강력한 정부’가 나오기 때문이다. 시민의 자발성과 자율적 기율을 신장시키기 위해서는 정부가 일선에서 강권을 휘둘러 일도양단(一刀兩斷)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21세기는 지식정보화와 무한경쟁의 시대다. 중앙정부는 약해지고 지방정부는 강해져야 하며 정부는 2선으로 물러나 민간을 앞세워 기업을 지원해야 한다.
또 ‘정도의 정치’를 펴는 ‘강력한 정부’는 민주주의의 기본덕목인 ‘관용’을 실천하는 정부다. 관용의 실천은 최루탄, 유혈진압 등을 과거지사로 만든 국민의 정부에 맡겨진 정치적 사명이다. 민주적 관용은 집단이기주의도 이길 수 있다. ‘강력한 민주정부’는 하늘 같은 국민여론의 힘에 의거하여 집단이기주의를 관용과 인내로 대하고 모든 분규와 갈등을 민주적 원칙과 법의 테두리 안에서 대화와 설득으로 푼다. 이해당사자들이 아집과 독선을 넘어 ‘시간이 걸리더라도’ 양보와 타협정신을 바탕으로 끈질기게 협상하면 진정한 합의를 도출할 수 있다. 정부는 끈기 있게 이를 지켜보고 독려해야 한다.
위협과 강압으로 이루어진 합의는 조만간 깨지고 마는 법이다. 위협과 강압이 없는 가운데 자유로운 대화와 타협으로 얻은 합의야말로 진정 튼튼한 것이고 이런 튼튼한 합의에 기초한 정부가 진정 강력한 정부다. 법과 원칙의 테두리 안에서 대화와 설득, 양보와 타협, 끈질긴 협상과 합의의 원리는 국회 내의 여야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돼야 할 것이다.
의약분업 분규가 준 교훈
국민의 정부는 관용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공권력을 행사하라는 조급한 권고를 단호히 뿌리치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모든 분규와 갈등을 해결했다. 국민건강을 지키기 위한 역사적인 의약분업도 대화로 이루어냈다. 일본 정부가 10여 년의 갈등 속에서도 끝내 실패한 의약분업을 국민의 정부는 4개월 반 만에 해낸 것이다. 관용과 대화의 민주적 힘은 이토록 위대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의사폐업이 반복된 4개월 반 동안 조급증에서 아우성을 쳤고 또 어떤 이들은 정부가 준비도 없이 일만 벌여 놓았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심지어 또 다른 이들은 정부가 ‘빼도 박도 못할’ 일에 된통 걸려들었다고 냉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의약분업 분규에 소모된 4개월 반이라는 시간은 의약분업 같은 위업달성이라는 역사적 시각에서 보면 찰나에 불과한 것이고 또 의약분업이라는 역사적 위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불할 수밖에 없는 최소한의 사회비용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대우자동차, 한국전력, 한국통신, 한국중공업, 철도청 등의 노사분규도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됐다. 한국 금융계의 미래가 걸렸던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합병 문제도 노사 양측의 이성적 양보와 인내, 그리고 우리 경찰의 지혜가 하나로 모여 유혈충돌 없이 원만하게 해결됐다. 이를 통해 집단이기주의 및 노사문제에서 양측이 다 사는 상생의 신(新)노사문화가 만들어지는 하나의 역사적 전기가 마련된 것이다.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