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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가 명택 6|안동김씨 내앞(川前) 종택

人傑地靈의 명당, 선비정신의 산실

  • 조용헌

人傑地靈의 명당, 선비정신의 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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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성김씨 종택은 권력의 부조리를 정면에서 고발하는 기백과 목숨을 내건 의리로 인해 조선시대 금부도사가 세 번이나 체포영장을 들고 오는 수난을 겪었다. 또 비범한 인물들을 배출한 내앞 종택의 산실(産室)은 이문열의 소설 소재로 등장할 만큼 이야깃거리가 풍부하다.
人傑地靈의 명당, 선비정신의 산실
안동에 있는 의성김씨(義城金氏) 종택을 찾아간다. 안동 시내에서 동쪽으로 반변천(半邊川)을 따라 30리를 올라가다 보면 국도 연변 좌측에 고풍어린 기와집들이 즐비하게 자리잡은 풍경이 나타난다. 바로 5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의성김씨 집성촌이다.

그 기와집들 가운데에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년)을 중시조로 모시는 의성김씨 내앞(川前) 종택이 나그네의 눈길을 끈다. 내앞 종택은 조선 선비의 강렬한 정신이 어려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 강렬함이란 권력의 부조리를 정면에서 고발하는 직언(直言) 정신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기백을 가리킨다.

내앞 종택은 그 기백과 의리 때문에 조선시대 금부도사(禁府都事)가 직접 체포영장을 들고 찾아와 종택 뜰에 말을 매는 일대 사건을 세 번이나 겪어야 했다. 안동지역 인근에서 회자되는 ‘유가(儒家)에는 3년마다 금부도사가 드나들어야 하고, 갯밭에는 3년마다 강물이 드나들어야 한다’는 속담은, 자신의 신념과 명분을 지키기 위해서 금부도사의 체포영장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영광으로 받아들였던 조선 선비들의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언제부터인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를 과도하게 명심한 나머지 자나깨나 모나지 않기 위해서 박박 기는 삶을 전부로 알고 있는 범부들의 처세 요령과 비교해 보면 너무나 차원이 다른 처세이자 정신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내앞 종택은 조선 선비의 기개가 전해오는 집이다.

의성김씨 내앞 종택에 전해오는 선비정신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안동문화의 특징을 간단하게 짚어보는 것이 순서일 성싶다.



명문 종택의 고장

한국의 문화지도에서 안동이라는 지방을 찾아보면 ‘양반문화’라는 코드가 나타난다. 다른 지역에 비해 조선시대 양반 선비들의 문화가 현재까지도 가장 잘 보존된 지역이 안동 일대다.

필자의 주관적인 판단인지는 몰라도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의 풍습이 아직도 남아 있는 곳이 안동이다. 문중 제사가 있으면 전국에서 모여들고, 외부 손님이 왔을 때는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내색하지 않고 정성을 다해 맞이하는 고풍을 간직하고 있다. 필자는 ‘전라도 사람’으로서 수년 동안 안동 일대를 여러 차례 답사했는데, 그때마다 안내를 맡은 청년유도회(靑年儒道會)의 정성어린 접대를 받으면서 접빈객의 유풍(遺風)이 살아 있음을 실감한 바 있다.v 그런가 하면 종가에 대한 애착도 각별한 것 같다. 종손의 자녀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대학 등록금을 내지 못하면 지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갹출해서 대신 내주는가 하면, 종가의 건물을 보수하고 선조들의 문집을 번역 출판하는 이른바 ‘보종(補宗)’에도 아주 열심이다. 전국적으로 볼 때 조선시대 선비들의 문집 간행이 가장 활발한 곳 역시 이곳이다.

수백년 역사를 지닌 종택들이 가장 많이 보존되고 있는 곳도 안동 일대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의성김씨, 진성이씨, 안동권씨, 고성이씨, 하회류씨, 전주유씨, 재령이씨, 광산김씨 등등 명문종택 수십 군데가 안동, 봉화, 영양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종택이 안동 일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과거에는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 일대에도 많이 있었다. 하지만 일제 36년의 굴욕, 6·25전쟁의 겁살, 산업화로 인한 인구의 대도시 집중, 그리고 유교의 봉제사가 광복 이후 전파된 기독교의 반제사(反祭祀)와 정면으로 문화적 충돌을 겪는 과정에 유교적 풍습과 그를 뒷받침하던 종택(종가)들은 서서히 사라지고 와해돼 왔다.

그러한 역사의 풍파를 겪으면서도 유독 안동 일대만큼은 다른 지역에 비해서 유교문화의 순도를 유지하고 있다.

왜 그런가? 오늘날 안동 일대에 유교문화 또는 양반문화가 비교적 많이 보존돼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안동 내앞의 의성김씨 종택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다.

풍수가에서 지목하는 영남의 4대 길지는 경주의 양동마을(良佐洞), 풍산의 하회(河回), 임하(臨河)의 내앞, 내성(乃城)의 닭실(酉谷)을 꼽는다. 양동마을은 건축학자 김봉렬의 표현에 따르면 조선시대의 평창동에 해당되는 고급주택지로서 손중돈과 이언적의 후손들이 사는 곳이다. 하회는 겸암과 서애로 상징되는 류씨들 동네고, 내앞은 의성김씨, 닭실은 충재의 고택으로 뜰 옆 거북바위 위에 앉아 있는 청암정(靑巖亭)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런데 4대 길지 가운데서 양동마을을 제외한 세 군데, 즉 하회·내앞·닭실이 안동 부근에 몰려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택리지’의 4대 길지

그런가 하면 ‘택리지(擇里志)’의 저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2년)은 조선에서 양반선비가 살 만한 가장 이상적인 장소로 경북 예안(禮安)의 퇴계 도산서원이 있는 도산(陶山)·하회·내앞·닭실을 꼽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반 풍수가에서 꼽는 영남의 4대 길지와, ‘택리지’에서 지목한 4대 길지 가운데 세 군데가 중복된다는 점이다. 하회·내앞·닭실이 그렇다. 이중환은 경주의 양동마을 대신 퇴계가 살던 도산을 포함시킴으로써 안동 일대 네 군데를 모두 조선의 베스트 명당으로 꼽은 것이다.

이중환은 어떤 기준으로 안동 일대를 선비의 가거지(可居地)로 본 것일까? 여기에는 이중환이 살던 당대의 정치 경제적 상황과 유교적 가치관이 반영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이중환이 생각하였던 길지의 기준은 첫째 지리, 둘째 생리(生利), 셋째 인심(人心), 넷째 산수(山水) 네 가지였다. ‘택리지’에서 안동 일대를 선비가 살기에 최적지라고 지목한 이유는 이상 네 가지 조건에서 모두 높은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 네 가지 조건을 필자의 소견으로 다시 한 번 검토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리, 즉 풍수를 보자. 경상도는 충청과 호남에 비해서 전체적으로 산세가 높고 가파른 편이지만, 안동 일대만큼은 예외적으로 높지 않은 산들이 고만고만하게 포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바위가 뾰족뾰족 돌출된 악산(惡山)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문사(文士)들이 좋아하는 온화하고 방정한 산세에 가깝다.

한반도 전체의 지맥을 놓고 보자면, 척추인 백두대간에서 부산 쪽으로 내려가는 낙동정맥과 태백산에서 방향을 틀어 속리산 쪽으로 내려가는 다른 한 맥의 분기점 중간에 안동 일대가 있다.

흔히 기공(氣功)이나 단전호흡, 쿤달리니 요가를 수련하는 방외일사(方外逸士)들 사이에 종종 화제에 오르는 ‘양백지간(兩白之間)’이 바로 이곳이다. 양백지간이란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를 일컫는 표현으로, 크게 보면 안동 일대, 즉 봉화, 춘양, 안동, 영양 지역이 양백지간에 해당하는 곳이다.

흰 백(白)자가 들어가는 산들은 백의민족이 정신수련을 하기에 적합한 산이라고 일컬어지는데, 태백과 소백은 바로 그러한 신령한 산일 뿐 아니라 이 지역 일대가 현재까지 남한에서 가장 덜 오염된 지역이고 기운이 맑은 곳이라고 평가된다. 경상도가 충청이나 호남보다 먼저 공업화의 길을 걸었지만 주로 낙동강 중하류인 대구와 부산 쪽이 오염되었지, 낙동강 상류인 이곳 양백지간은 오지라서 공장도 거의 들어서지 않은 덕택에 현재도 비교적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둘째, 경제적 조건인 생리 부문이다. 조선시대의 가치관으로 볼 때 사대부가 장사를 하면서 재리(財利)를 취할 수는 없었고, 기껏 한다면 농사나 짓고 사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경상도의 산간지역보다는 호남의 넓은 평야지대가 농사짓기에 훨씬 유리할 것 같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 지리학자 최영준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호남평야의 범위가 현재보다 훨씬 좁았으며, 바닷가의 들(갯땅)에는 소금기가 많고 관개시설의 혜택을 고르게 받지 못하여 한해와 염해를 자주 입는 곳이 많았다. 그러므로 이러한 들판보다는 약간 내륙 쪽의 고래실(구릉지와 계곡이 조화를 이룬 지역)에 사대부들이 많이 거주하고 바닷가의 들에는 주로 가난한 농민이 거주하였다. … 기계화의 수준이 낮은 농경사회에서는 홍수의 피해가 크고 관개가 어려운 대하천보다 토양이 비옥하고 관개가 용이한 계거(溪居)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최영준, ‘국토와 민족생활사’, 84쪽)

조선시대에는 관개시설도 부족하고 염해가 발생하는 평야보다는 오히려 내륙의 냇물이 흐르는 곳이 농사짓기에 적합했다는 지적이다. 산이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높은 산도 아니라서 적절한 구릉과 계곡이 이곳 저곳에 형성되어 있는 낙동강 상류지역은 바로 이러한 입지조건에 해당한다.

지형도에 나타난 지명을 통계적으로 분석한 연구에 의하면, 지명에 계곡을 나타내는 골(谷)이라는 접미어가 붙은 곳이 조선시대 안동부에 속하는 안동, 봉화에 각각 27%와 28%로 전국 최고 비율을 점하고 있으며, 골과 같은 의미인 ‘실’과 ‘일’을 더하면 35%, 32%로 역시 전국 평균 19%보다 훨씬 높다고 한다(정원진, ‘한국인의 환경지각에 관한 연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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