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5월호

“정·부통령제 개헌해도 지역갈등 해소 어렵다”

  • 대담 ·황의봉 <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장 >heb8610@donga.com 정리 ·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ixman@donga.com

    입력2005-04-15 14:1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잠시 5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96년 1월22일 이회창 변호사는 청와대에서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을 만난 뒤 신한국당 입당을 선언했다. 94년 4월22일 국무총리에서 물러난 지 21개월 만이었다. 김전대통령이 ‘정치초년병’ 이회창에게 맡긴 직책은 선대위의장. 특히 여권이 열세를 보이던 수도권 지역에 집중하라는 주문이었다. 3개월 뒤 15대 총선이 치러졌고, 전통적인 야당의 텃밭 서울에서 대이변이 벌어졌다. 서울지역 47개 선거구 가운데 신한국당이 무려 27석을 차지한 것이다. 정치인 이회창의 화려한 신고식이었다.

    그로부터 5년. 이회창 총재는 대선 패배라는 시련을 딛고 강력한 제1야당을 이끌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도 이총재가 내년 대선에서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총재의 행보는 어딘가 모르게 불안해 보인다. 당내에서는 비주류를 중심으로 새로운 판짜기가 한창이다. 당 밖의 상황도 그리 여유롭지 않다. 김대중 정부에 대한 국민적 실망감이 높아지고 있지만, 이총재의 지지율은 답보상태다. 이총재의 대권가도에 빨간 신호등이 켜진 셈이다. 인터뷰는 4월11일 오후 3시 국회 본관 총재실에서 있었다.

    ―96년 정계에 입문하셨으니까, 이제 꼭 5년이 됩니다. 그동안 가장 어려웠던 순간은 언제입니까.

    “역시 총풍 세풍 해가지고 몰아칠 때였죠. 당내 의원들이 무더기로 검찰에 소환당하고, 제 아우까지 구속될 때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30명에 가까운 당내 의원들이 압박 때문에 탈당해서 저쪽으로 넘어갈 때는 당이 흔들리는 것 같았는데, 용케 견뎌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순간을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입니까.



    “원칙이나 도리에서 벗어난 비정상적인 정치 운영은 결코 오래갈 수 없고, 성공할 수 없다는 믿음 같은 것이었어요. 그리고 어차피 우리 당은 총선을 통해 국민이 선택한 제1당인데 이런 식으로 무너질 수 없다는 오기 같은 것도 있었습니다. 제 힘이나 노력보다도 당원 전체가 뭉치고 대처한 결과로 봐야겠죠.”

    “다시 정치할 것 같지 않네요”

    ―만일 5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변함없이 정치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아이고….(웃음) 정말 다시 할 것 같지 않네요.”

    다시 5년 전을 떠올려보자. 이총재는 정계에 입문하면서 “법조인과 정치인의 역할은 다르겠지만 행동원칙에는 차이가 없다. 정치인으로서 그 기조를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대법원판사, 중앙선거관리위원장, 감사원장, 국무총리를 지내면서 ‘대쪽’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사람답게 그는 ‘소신’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이총재는 5년간의 정치역정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이총재께서 5년간 경험하신 것을 종합해볼 때 정치라는 건 한 마디로 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좀 거창한 것 같지만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정치에 들어오기 전에는 정치를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했고, 정치인에 대한 인상도 그다지 좋지 않았어요. 굉장히 소모적이고 없앨 수 있다면 없애도 좋은 것이라는…. 아마 지금 국민들이 정치에 대해 그런 감정을 갖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막상 들어와서 느낀 것은 달라요. 한 국가가 제대로 자리를 잡고 국민의 힘을 결집시켜가면서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느냐, 아니면 기본을 갖추지 못하고 국민에게 불안과 위기를 초래하느냐 하는 것들이 바로 정치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과거에는 정치와 정치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현재는 많이 바뀌셨습니까?

    “정치의 본질적인 의미가 중요한데도 정치를 운영하는 마당에서 매우 부정적으로 비치게끔 했기 때문에 제가 좋지 않은 인상을 갖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여소야대 정국이 됐을 때 아마도 민주적이고 정상적인 정치라면 국민이 부여한 여소야대 상황을 놓고 거기서 어떻게 정국을 운영할 것이냐, 대통령과 집권당이 어떻게 야대 국회를 상대하면서 정치를 대화로 이끌 것이냐, 여기에 정치력의 성패가 달려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걸 그렇게 보지 않고 ‘개혁을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여소야대를 여대야소로 만들어야 되겠다’ 해서 억지로 바꾸는 것을 정치의 본령으로 안다면, 그 정치는 국민에게 지탄받고 혐오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법관과 정치인은 여러 면에서 다른데 이총재는 지금 어느 쪽에 더 가까이 있는 것 같습니까?

    “지금이야 법관 쪽에서 보면 완전히 타락한 거지 뭐.”

    정쟁에 집착하지 않겠다

    지난 1월말 한나라당 지구당위원장 연찬회에서 이총재는 ‘국민 우선의 정치(people first)’라는 화두를 제시했다. 이총재는 2월 임시국회 대표연설에서도 국민 우선의 정치를 제기했고, 민생현장 방문, 지하철 탑승 같은 프로그램을 전개하고 있다. 이총재가 이런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차기 대선을 겨냥한 이미지 메이킹이라는 것이 정가의 일반적인 관측이다. 정쟁에서 한발 떨어져 국가 지도자라는 위상을 만들기 위한 홍보전략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총재의 ‘국민 우선의 정치’는 ‘알맹이가 없는 정치쇼’라고 비판도 받고 있다.

    ―최근 이총재께서 ‘국민 우선의 정치’를 말씀하셨는데요. 많은 사람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내용이 뭐냐? 잘 모르겠다’는 얘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국민 우선의 정치’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국민들이 ‘아, 이제 정치인들이 국민을 위해 뛰고, 국민을 걱정하고, 나라를 위해 일하는구나’라고 느끼게끔 하자는 것이 국민 우선의 정치입니다.

    첫째는 대중주의적인 유혹에 빠지지 않는 정치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구조조정을 제대로 해서 경제의 기본틀을 만드는 것은 국민경제를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선 당장 한 건 했다거나 얼마 동안에 마치겠다 하고 나중에 말을 바꾸는 것은 국민을 위한 정치가 아니죠. 이런 식의 포퓰리즘적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 더 긴 안목으로 국민의 이익을 위하고 국가의 이익을 생각하는 정치가 돼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둘째는 절대로 정부가 강해져야 한다는 소리를 해서는 안 되고 국민이 강해져야 한다는 겁니다. 대통령이나 정부나 권력이 강해지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수 있습니다. 법이나 제도로 제동을 걸지 않으면 그렇게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법의 지배가 돼야 합니다.

    셋째는 국민 우선의 정치는 무엇보다도 안정을 추구합니다. 가령 남북문제나 경제문제나 불확실하기 때문에 국민은 불안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남북문제도 그 동안 굴러가던 현대의 금강산 사업이 파탄나기 시작했고, 현대그룹도 대북 창구였던 회사가 파산 지경이 됐잖아요. 또 내년 경제가 어떻게 될 것인지 누구 하나 자신 있게 말을 못합니다. 그래서 민생과 국가의 안정을 지향해야 한다는 겁니다”

    ―야당 총재로서 앞으로 국민 우선의 정치를 적용한다면, 어떤 모양이 되겠습니까. 정치 스타일이 지금까지와는 좀 달라지는 건가요.

    “여야간에 하나 주고 하나 받는 정쟁에 집착하지 않을 겁니다. 무엇이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고 또 무엇이 국민을 위한 정책인가. 이런 각도에서 정책을 선택하고 행동할 것입니다. 물론 야당은 정부나 대통령의 정책과 행동이 잘못 됐을 때 강하게 비판하고 견제해야 합니다. 그것이 본래 야당의 직무이기 때문에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죠. 그러나 여야간에 정쟁으로 날을 지새는 행태는 뛰어넘어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

    정가에서는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총재를 두고 ‘궁합이 맞지 않는 조합’이라고 말한다. 하긴 우리 정치의 특성상 대통령과 제1야당 총재가 대립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는 듯하다. 97년 대선에서 일합을 겨룬 정적이라는 점말고도 서로에 대한 강한 불신이 깔려 있다. 여권 고위층에 따르면 김대통령은 이총재를 ‘표리부동한 사람’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반면 이총재는 김대통령의 말을 좀처럼 믿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도 ‘상생의 정치’를 기대할 수 있을까?

    ―김대통령은 ‘야당이 나를 실패한 대통령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불만을 터트린 적이 있습니다. 그 동안 여러 차례 말씀도 나누셨는데 김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실패한 대통령이 되면 저나 우리 당이 한마디로 힘들어져요. 대통령이 실패하면 얼마나 야당을 몰아붙이겠습니까? 우리도 그건 원치 않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대통령이 해온 업적에 대해서 냉정히 평가한다면 결코 성공적이 아니라고 봐요. 지난번에 만났을 때도 실패한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이런 점을 고쳐달라고 요구한 거죠. 야당이니까 대통령이 실패하는 것을 원한다는 건 전혀 사실과 다른 얘깁니다.

    누구나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지 실패한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와 성공은 자신의 판단으로 가려지는 게 아니라 국민들이 판단하고 역사가 판단하는 거죠. 대통령께서 국민이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이런 점에 유의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김대통령의 정치에 점수를 주신다면 어느 정도 주시겠습니까? 100점 만점에 60점은 됩니까?

    “그건 제가 말하지 않는 게 예의죠. 다만 실패하지 않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남은 임기가 결코 짧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해서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를 바랍니다.”

    ―남은 임기가 사실 길지도 않은데요. 지금부터 김대통령이 국민 우선의 정치를 한다면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보시는 거죠.

    “물론이죠. 우리가 지적한 것은 결코 몇 년 걸리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마음만 바꾸면 할 수 있는 일들이에요. 왜 시간이 짧습니까?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오래 걸릴지 모르지만 국민들은 그 결과를 기다려서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컨대 구조조정만 하더라도 ‘언제까지 마치겠다. 연말부터 경제가 좋아진다’면서 국민을 속이지 말고, 솔직하게 ‘구조조정은 최소한 10년이 걸린다. 다음 정권도 이어받아서 해야 된다. 내가 할 몫은 이러 이러한 정도니까 성실하게 원칙대로 하겠다. 나를 믿어다오’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앞으로 김대통령과의 관계에서도 이총재가 ‘큰 정치’ 혹은 ‘상생의 정치’를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기대 많이 하십시오. 사실 제가 답답해요.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인데 말이야….(웃음)”

    개헌론은 요즘 정가의 최대 이슈다. 한나라당에서는 김덕룡(金德龍) 의원을 필두로 박근혜(朴槿惠) 이부영(李富榮) 부총재가, 민주당에서는 이인제(李仁濟) 한화갑(韓和甲) 박상천(朴相千) 김근태(金槿泰) 정동영(鄭東泳) 최고위원 등이 개헌론에 불을 지피고 있다. 이에 대해 이총재는 “여권에 정략적으로 이용당할 소지가 있다”며 반대하고 있다.

    ―개헌론이 급물살을 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나라당에도 4년 중임제와 정·부통령제를 주장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총재께서는 개헌문제를 어떻게 보십니까.

    “지금은 개헌을 논할 시기가 아닙니다. 개헌할 시기는 더더욱 아니죠. 저는 우선 헌법을 누더기 깁듯이 생각하는 발상에 찬성할 수 없습니다. 헌법을 존중하고 헌법이 정한 테두리 안에서 풀어나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헌법을 손질하려고 덤벼드는 태도가 마땅치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개헌론을 말하고 있을 만큼 한가하고 태평한 게 아니잖습니까? 지금 민생과 경제가 가장 시급한 문제로 우리 앞을 짓누르고 있는데 엉뚱하게 개헌론이 가장 큰 문제인 양 말하는건 잘못된 겁니다.

    헌법에 관해서 토론하거나 의견을 내는 것, 그 자체를 잘못이라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어떤 법이든 개정을 논할 수 있고 보완할 필요가 있죠. 헌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기에 개헌을 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헌법에 큰 결함이 있냐?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만일 권력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그걸 바꾸지 않으면 나라가 난리가 나게 생겼다, 이런 상황이라면 개헌을 논해야 되고 또 그런 의견이 많다면 그렇게 가야 되겠죠. 그러나 과연 그렇습니까? 무엇 때문에 필요하냐? ‘지역갈등을 없애기 위해서 필요하다. 단임제이기 때문에 권력집중이나 레임덕 현상이 와서 바꿔야 한다’ 물론 이것도 다 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전혀 다른 반대론이 강하게 작용합니다.

    정·부통령제를 하면 정말 지역갈등이 해소되는가, 부통령의 직책이라는 게 아무런 권한이 없는 명목상의 것이라면 지역융화에 도움이 되겠는가, 차라리 총리를 가지고 지역 융화의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이 낫지, 지금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있고요.

    중임제는 저도 단임제의 폐단이 있기 때문에 검토해볼 만하다고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임제의 폐단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중임제를 했을 때, 우리의 정치 현실에서, 대통령이 직위나 권한을 남용하지 않고 다른 후보자와 똑같이 선거에 임하겠느냐, 우리의 정치 현실은 오히려 대통령의 권한과 지위를 이용해서 임기 내내 선거운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대통령은 8년 임기를 갖게 되고 정권교체는 오히려 요원해질 수 있는 거죠. 우리는 이런 폐단도 생각해봐야 됩니다.”

    ―대통령과 권력을 공유한다는 차원에서 힘을 가진 부통령제를 도입한다면, 지역갈등 문제를 푸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죠. 그러나 또 한편으로 갈등을 조장할 가능성도 많습니다. 한 정부 안에서 대통령과 부통령 사이에 권한의 분점을 놓고 갈등이 생긴다면, 그것이 지역주의를 완화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분쟁을 만들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대통령제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지역주의를 강화하는 역기능을 낳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하나는 대통령 유고시에 부통령이 승계권을 갖느냐 하는 문제죠. 대통령 유고시에 부통령이 승계권을 갖는 제도라면, 적어도 대통령은 자기 사람을 부통령으로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임기중 개헌은 절대 불가

    개헌론이 대세를 이룰 경우 차기 대선구도의 변화는 불가피해진다. 벌써부터 개헌을 연결고리로 하는 정계개편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점에서 현 구도대로 차기 대선을 치르고자 하는 이총재가 불끄기에 나선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한편 정치권에서는 “개헌을 하되 차차기부터 적용하자”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개헌이 꼭 필요한 사안이라면 차기 정권에서 본격적으로 추진하자는 것이다.

    ―개헌에 대해서 부정적인 논리를 펴는 분들이 가장 먼저 지적하는 게 대선을 앞두고 정략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지적이 상당히 공감을 얻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시기 문제를 조절해서 개헌을 추진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다음부터 그런 건 논의할 수 있죠. 그러나 다음부터 할 거라면 왜 구태여 지금, 민생도 복잡하고 경제가 어려운데 헌법을 고치자고 논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 다음부터 할 거면 지금 논할 필요가 없어요.”

    ―다음부터 할 거라면 어떤 방식으로 제기하는 게 좋을까요.

    “그거야 다음 때 가서….”

    ―선거 때 공약으로 제시하는 건 어떻습니까.

    “그런 것도 있을 수 있겠죠. 각 정당이 자기 필요에 의해 표를 더 얻을 수 있겠다고 판단하면 그걸 약속으로 내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야간에 협의해서 개헌안을 만들자. 다음부터 적용할 걸 지금부터 논의하자’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죠. 거듭 말씀드리지만 개헌을 대선 전에 미리 하자는 건 시기적으로도 맞지 않습니다.”

    ―여권의 실력자와 한나라당의 부총재급 정치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개헌을 얘기하는 상황이라면, 이건 현실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개헌 논의를 공식적으로 할 필요성이 있는 것 아니냐는 거죠.

    “말씀하시는 건 알겠는데요, 정치권에서는 자꾸 문제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어요.(웃음)”

    ―이총재께서는 개헌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커질 경우 ‘다음 대선’에서 개헌을 공약으로 제시할 의향이 있으십니까?

    “개헌에 대해서는 국민 대다수가 반대인 것으로 압니다.”

    올 들어 한나라당 개혁파 의원들의 목소리가 부쩍 커졌다. 이부영 부총재는 일찌감치 ‘개혁세력 결단론’을 주장했고 소장파 의원들은 독자적인 법안 제출까지 시도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당론’보다는 ‘소신’을 앞세우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이총재는 “개별 의원들이 자신의 견해를 담은 독자 법안을 제출하는 것은 당으로 봐서 옳지 않다. 쟁점 현안들에 대해서는 당 차원의 토론과 공론화 과정을 거쳐야 하며 당의 정체성을 훼손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한 바 있다. ‘소신’보다 ‘당론’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한나라당에는 젊은 의원들을 중심으로 ‘미래연대’라는 모임이 있고 여당 내에도 소속정당을 떠나 법안을 만들고 정치활동도 하자는 개혁파 의원들이 있습니다. 그런 움직임을 어떻게 보십니까.

    “저는 젊은 의원들이 모여서 당면한 문제나 정치개혁에 관해 토론하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통해 정치적 사고의 교환이 활성화되는 측면도 있지 않습니까? 침체하기 쉬운 분위기를 깰 수도 있구요. 그래서 반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잘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죠. 다만 이런 것들이 순수한 토론이나 논의가 아니라, 가령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 정당 내에 분당적 결과를 가져오는 식의 행동이 될 때는 다르게 봐야겠지요. 물론 현재의 움직임이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젊은 의원들은 개혁적인 법률안을 추진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크로스 보팅의 허용을 요구하고 있는데.

    “크로스 보팅 얘기가 본래 의미와 조금 다른 식으로 비치는 면이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생각해야 할 점은 지금 국회의원들이 정당의 대표성을 갖는다는 거예요. 정당이 공천해서 선거에 임하고 그렇게 해서 당선이 됐습니다. 그건 뭐냐면, 국민이 국회의원 투표를 통해서 정당을 선택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안에 대해서 정당이 확고한 의사를 결정하면 그에 따라야 합니다. 따를 수 없으면 그 정당을 떠나야죠. 자유투표라는 것은 정당이 당론을 정하지 않거나 또는 자유투표를 하기로 결정했을 때 하는 겁니다.”

    ―현실적으로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해 정당이 당론을 정하기 때문에 실제 자유투표로 할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대체로 당론을 정하지만 의원들의 의사에 맡긴 경우도 왕왕 있습니다.”

    김정일 오면 만날 기회 있을 것

    흔히 21세기는 권력분점의 시대라고 한다. 다양한 국민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권력이 한곳으로 몰리는 것보다 다양한 축을 형성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우리 정치의 현실을 봐도 그 가능성은 상당하다. 우선 3김이라는 지역맹주가 일선에서 퇴장한다. ‘포스트 3김’으로 분류되는 여야의 정치인들은 3김과 같은 절대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할 거라는 전제에서 권력분산은 필연적일 수도 있다. 이와 관련, 한나라당 뉴밀레니엄위원회는 대권과 당권의 분리 방안을 논의한 바 있다. 만일 이총재가 이것을 받아들인다면 한나라당의 권력구도는 새롭게 짜일 가능성이 높다.

    ―최근 여권에서는 내년 대선과 관련해 당총재와 후보를 분리하는, 이른바 ‘당권-대권분리론’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한나라당에서도 그런 논의가 있었구요. 이 문제에 대한 이총재의 의견을 밝혀주십시오.

    “지난번에 운영위원회에서도 얘기가 나왔지만, 우리는 대통령과 당 총재직의 분리를 제안했어요. 대통령이 한 정당의 총재직을 겸하는 바람에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나오고 있잖아요. 그래서 원칙적으로 분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총재께서는 대선후보가 되신다면, 당권을 다른 정치인에게 양도할 의향이 있으십니까?

    “그것은 당원들의 의사와 무엇이 대선 승리를 위해 가장 적절한 것인가에 따라 결정될 문제입니다.”

    얼마전 민주당 정동영 최고위원은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이회창 정권으로 넘어가는 것은 역사의 퇴보다. 이회창 총재의 역사인식, 남북문제에 대한 태도, 국가보안법에 대한 태도,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관점은 너무나 퇴영적이고 냉전 잔재적이다”라고 비판했다. 정최고위원처럼 민주당 내에는 “이총재와 한나라당의 보수적 색채가 남북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이총재 주변에 냉전적 사고를 하는 5·6공 인물이 많다는 점도 그런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이 늦어지고 있는데요. 이유가 뭐라고 보세요.

    “그건 모르겠어요. 김정일한테 물어봐야죠.(웃음)”

    ―김정일 위원장이 서울에 온다면 만나자고 하실 생각은 있습니까?

    “기회가 되면 만나는 거죠.”

    ―야당 총재로서 적극적으로 만나자고 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야당으로서 꼭 할 얘기가 있으면 요구할 수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그렇게 적극적으로 요구하겠다는 것보다는 김위원장이 온다면 아마 만날 기회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죠.”

    ―만나게 된다면 꼭 하시고 싶은 말씀은 어떤 겁니까?

    “평화정착과 공존을 이루는 방향으로 남북문제를 풀어달라고 요구하고 싶어요. 남북문제를 정치적 목적이나 선전용으로 한다면, 그건 실패의 개념을 떠나 비극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진정으로 평화를 정착시키고 공존을 이루는 방향으로 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어요.”

    ―김정일 위원장이 지난해 남북정상회담 때 막상 모습을 드러내니까 ‘생각보다 똑똑하다’ ‘유머감각도 있다’는 등 긍정적인 평가가 많이 나왔습니다. 이총재는 어떻게 보았습니까?

    “완전히 장막에 가려졌던 인물이었으니 생각지 못한 행동을 한다는 면에서 우리 국민들이 큰 인상을 받은 것 같아요. 저도 김위원장이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이고 어떤 성향이라는 특별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아요. 김위원장이 꾸준하게 성실한 자세로 해나가는 인물이기를 바랄 뿐이죠.”

    ―금강산 관광이 좌초될 위기에 빠졌습니다. 현 상태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된다고 보십니까.

    “지금 상황에 어떻게 계속하겠습니까? 금강산 관광으로 남북간에 관광객이 왔다 갔다 하면서 물꼬를 튼 점에서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대는 기업이니만큼 수익성을 생각해야 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수익성도 찾지 못하면서 계속 이끌어나간다는 것은 난센스라고 생각합니다. 손해 보면서 어떻게 계속할 수 있습니까?”

    대통령 선거까지는 1년8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남아 있다. 그동안 어떤 변화가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총재로서는 지금 안정적인 우세를 보인다 해도 승리를 장담하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하물며 이총재가 현시점에서 접전을 벌이고 있다면, 더욱 불안할 수밖에 없다. 97년 대선의 경우 이총재는 월등히 앞서가다가 악재가 겹치면서 역전을 허용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총재의 고민은 또 있다. 바로 김대중 대통령과 각을 세우는 제1야당의 총재이면서도 현 정권의 실책을 지지율 향상으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말 그대로 야당 총재의 프리미엄을 살리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 발표된 여론조사를 보면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통령의 인기가 떨어지면 거꾸로 야당 총재의 지지율은 올라가는 것이 상식일 것 같은데, 이총재의 지지율도 정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뭐라고 보십니까?

    “사람이 꾸준해서 좋은 것 아닌가요?(웃음) 때가 되면 올라가겠죠 뭐.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진다는 것이 사실 좋은 현상은 아니잖아요. 거품으로 올라가는 것도 곤란하지만, 정치를 못해서 나중에 국정을 이끌어가기 힘들 정도로 지지율이 떨어지면 아주 어렵죠. 너무 안 떨어졌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여당이 자꾸 ‘물귀신 작전’을 쓰면 안돼요. 지지율이 떨어지면 자기네 지지율을 올려야지, 이쪽을 깎아내려서 같이 떨어지려고 해서는 안되고. 어쨌거나 지지율이 오르지 않고 있다면 저한테 부족하고 미흡한 점이 있기 때문이니까 누구를 탓하기 전에 스스로 끌어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부족하고 미흡하다는 점은 무엇입니까.

    “자꾸 그렇게 전부 고백을 해야 돼요?”

    ―이총재는 최고의 학벌과 경력과 경륜을 갖춘 분인데….

    “정치에는 학벌과 경력이 필요 없어요. 야당 총재는 ‘다음에 국정을 맡아서 나라를 어떻게 끌어나가겠다’ 하는 확신을 국민들에게 심어줘야 되는데, 그런 면에서 충분히 해드리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지지율이 올라가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반성합니다.”

    ―이총재에 대한 지지도와 관련, 아직도 이총재 개인에 대한 선호보다는 반(反)DJ성향 유권자들이 지지하는, 이른바 반사이익이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원래 야당은 반사이익을 얻게 돼 있습니다. 물론 야당이 반사이익만 갖고 정치를 해서는 결코 안되죠. 우리가 유일한 야당으로서 국민이 대안세력으로 볼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걸 충분히 하지 못했습니다.”

    “狹量하다고? 기분 나쁘지…”

    정치인의 강점은 때로 약점이 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대부분의 정치인은 강점은 살리고 약점은 보강하는 전략을 택한다. 이회창 총재는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 출신이다. 반대로 이것은 ‘엘리트 출신이라서 서민들의 삶을 모를 것’이라는 치명적인 약점도 된다. 특히 이총재는 97년 대선에서 서민층의 지지를 끌어내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이총재가 요즘 ‘민심투어’라는 이름으로 서민들의 삶을 파고드는 것도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포석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이총재께서는 이른바 ‘KS’(경기고-서울대) 학력이시고, 법조인 생활을 오래 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래서 그런지 이총재 같은 분이 가난하고 힘없는 밑바닥 사람들을 어루만지는 정치를 할 수 있겠느냐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그런 질문이 나오는구먼. 내가 ‘KS’고 법관 감사원장 국무총리를 지냈으니까 아주 잘 먹고 잘 살았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은 매우 어렵고 힘들었기 때문에 어려움을 모를 것이라는 건 맞지 않아요. 제가 경력 때문에 그런 인상을 받고 있다면 그건 노력이 부족한 탓이겠죠.”

    ―얼마 전 박형규 한국교회인권센터 이사장이 “이총재가 집권하면 아직도 ‘많이 다치겠다’는 이미지를 준다”면서 “이총재는 너그러운 이미지를 만들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왜 그렇게 보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한번도 누구에게 보복한 일이 없는데…. 정권교체가 자연스럽게 되기 위해서는 정치보복이 없어져야 한다는 게 저의 소신입니다. 저는 지난 대선에 출마하기 전 정치보복의 악순환을 끊는 방법으로 국가 대사면까지 말했습니다.”

    ―이총재는 ‘속이 좁다’ ‘협량하다’ 이런 말을 들으면 화를 낸다는 보도가 몇 차례 나왔습니다. 그런 지적을 들으면 정말 기분이 나쁜가요?

    “기분 나쁘지, 좋을 사람이 어디 있어. 허허허.”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