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정주영은 한 묶음에 10전씩 하는 장작을 사서 아침, 저녁으로 밥을 해먹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작이 재로 변하는 것을 보면 돈이 재가 되어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밥을 안 먹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 기가 막힌 일석삼조의 방법이 있었군!”
장작을 절약하려고 머리를 짜내던 그에게 번뜩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저녁에 한꺼번에 세 끼 밥을 지으면 아침과 저녁 두 번씩 때던 장작의 양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요량이었다. 아침에 밥을 하기 위해 장작을 땔 경우 낮에 비워두는 방만 괜히 데워놓는 꼴이 되므로 낭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루 한 번 저녁에 불을 지펴 잠자리도 따뜻하게 하면서 밥도 하루 세 끼 분량을 한꺼번에 지어 장작값을 아꼈다. 저녁에 밥을 할 때 다음날 아침밥도 떠놓고 점심 도시락도 미리 싸서 아랫목 이불 속에 묻어뒀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침에 밥을 하는데, 정주영은 장작을 절약하려고 저녁에 밥을 짓는 기발한 방법을 착안해낸 것이다. 상식을 뛰어넘는 발상의 전환이었다.
정주영은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거나 커피를 마시는 것도 이상하게 여겼다.
“담배를 피운다고 배가 부른 것도 아닌데 왜들 저렇게 담배를 피우지?”
담배를 살 돈이면 우동이나 떡으로 한 끼 배를 채울 수 있는데, 뭣하러 돈을 연기로 날려보내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커피도 마찬가지였다. 종일 힘들여 번 돈을 ‘물 한 잔’ 마시는 데 쓸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물은 공짜로도 얼마든지 얻어 마실 수 있지 않은가.
막노동판을 떠돌던 정주영이 쌀도매상인 복흥상회에 취직할 때의 이야기다.
“너 자전거 탈 줄 알아?”
주인이 이렇게 묻자 정주영은 큰 소리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는 자전거를 잘 타지 못했다. 몇 번 타본 적은 있지만 익숙하진 않았다.
“흠, 가랑이는 길구먼.”
쌀가게 주인은 정주영의 다리를 내려다 보며 말했다. 정주영은 튼튼하고 긴 다리 덕분에 쌀 배달꾼으로 취직할 수 있었다. 쌀가게에서는 자전거로 배달을 했으므로 자전거를 잘 타야 배달을 나갈 수 있는데, 정주영은 일단 취직을 하고 나서 자전거를 배우면 된다고 생각했다.
며칠 후 주인은 정주영에게 쌀 배달을 시켰다. 그날은 마침 비가 내렸다. 포장도 안 된 길에 쌀가마를 싣고 나갔다가 그는 자전거와 함께 진흙탕에 나뒹굴었다. 자전거 솜씨가 서툴러 핸들을 잘못 꺾은 것이다.
진흙탕에 팽개쳐진 쌀가마를 바라보며 정주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주인에게 된통 욕을 얻어먹을 게 뻔했다. 그가 진흙투성이가 된 쌀가마를 어깨에 메고 가게로 들어서자 주인이 껄껄 웃었다.
“빗길에 넘어졌구먼.”
정주영은 면목이 없어 고개를 푹 숙였다.
“사람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밥을 먹어야 산다네. 그러니 비가 와도 쌀 배달은 해야 한다는 말일세. 그러니 앞으로는 빗길에도 넘어지지 않도록 자전거 타는 법을 제대로 배우도록 하게.”
신용 담보로 사업 일궈
당장 나가라고 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데 주인이 이렇게 따뜻하게 대해주자 그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부터 정주영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자전거 타는 법을 익혔다. 그는 선배 배달꾼 이원제를 졸라 자전거 쌀 배달의 기술과 요령을 배웠다. 불과 사흘이 지난 후부터 그는 자전거에 쌀을 두 가마씩 싣고 배달을 나갈 수 있을 만큼 실력이 늘었다. 그가 터득한 노력은 가령 이런 것들이었다.
‘쌀가마는 세워서 실어야지, 뉘어 실으면 균형이 안 잡힌다. 쌀가마는 절대 자전거에 비끄러매서는 안 된다. 쌀가마를 비끄러매고 넘어지면 쌀 무게 때문에 자전거를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정주영은 단순해 보이는 자전거 쌀 배달도 공부를 해서 익혀야 한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이 세상에 공부하지 않고 되는 일이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매일 새벽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가게 앞을 깨끗이 쓸고 물까지 뿌려놓았다. 뿐만 아니라 주인이 장부 작성하는 것도 도와주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창고 정리까지 도맡았다. 그의 성실한 태도를 지켜본 쌀가게 주인은 게으른 아들 대신 그에게 가게를 물려줬다.
정주영은 성실함말고도 ‘신용’이라는 무형의 재산까지 지니고 있었다. 그는 쌀가게를 운영할 때 거래하던 삼창정미소 주인 오윤근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덕분에 그 뒤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인수할 때 그로부터 신용으로 사업자금 3000원을 빌릴 수 있었다.
“자네가 쌀가게를 할 때 외상값을 제때 제때 갚아서 이 돈을 빌려주는 것일세.”
정미소 주인은 아무런 담보 없이 선뜻 거금을 내주었다. 자동차 수리공장 인수자금이 3500원이었으니 사업자금을 전부 대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잔금을 치르고 공장을 인수한 지 닷새가 지난 새벽이었다. 밤 늦게까지 작업을 한 두 기술자가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 정주영은 숙직실에서 혼자 잠을 잤다. 늦게 잠이 들었지만 그는 다음날 이른 새벽에 일어났다. 세수할 물을 데우려고 불을 피우면서 그는 마침 옆에 있던 신나통을 들어 화덕에 조금 부었다. 그 순간 불길이 확 일어나며 신나통에 옮겨 붙었다. 그는 얼떨결에 신나통을 바닥에 팽개쳤고 그 바람에 신나가 쏟아지면서 불길은 순식간에 공장 건물을 덮쳤다. 공장은 목조건물인데다 자동차를 칠하고 닦느라 기름으로 온통 범벅이 된 상태여서 불길을 잡을 수 없었다.
불을 꺼보려던 정주영은 자칫하면 불길에 휩싸여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전화통을 집어들어 유리창을 깨고 뛰쳐나와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공장은 전소됐고, 수리를 끝낸 고객들의 자동차까지 몽땅 타버리고 말았다. 공장도 빚을 얻어 인수한 마당에 외상으로 들여놓은 부속품과 고객의 자동차까지 재로 변하면서 그는 엄청난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건설업의 유혹
정주영은 망연자실했지만 절망하지 않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다시 정미소 주인을 찾아갔다.
“공장이 모두 불에 타버렸습니다. 이대로 주저앉으면 영감님의 빚도 못 갚게 생겼으니, 빚을 갚을 수 있도록 사업자금을 더 빌려주십시오. 이번에도 담보로 잡힐 것은 없지만….”
자초지종을 들은 정미소 주인은 한동안 그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하지. 내 평생 사람 잘못 봐서 돈 떼였다는 오점은 남기고 싶지 않네. 나는 지금껏 한 번도 담보를 잡고 돈을 빌려준 적이 없고, 또 단 한 번도 돈을 떼인 적이 없어.”
정미소 주인은 “사람을 보고 돈을 빌려준다”고 했다. 정주영의 신용이 담보라는 얘기였다.
“영감님!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돈은 꼭 갚겠습니다.”
“전화위복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공장에 불이 났으니 사업이 불처럼 일어날 조짐이라고 여기고 맘 편히 먹게나.”
정미소 주인은 고맙게도 위로의 말까지 건네며 그를 격려했다.
정주영은 정미소 주인에게서 다시 3500원의 사업자금을 빌려 자동차 수리공장을 지었다. 그 후 사업은 날로 번창했고, 정주영은 정미소 주인에게 두 차례에 걸쳐 빌린 사업자금을 3년 만에 이자까지 보태 갚을 수 있었다. 그는 끝까지 신용을 지켰고, 따라서 그의 신용을 담보로 돈을 빌려준 정미소 주인의 사람 보는 눈은 아주 정확했던 셈이었다.
정주영이 건설업을 시작한 것은 1947년 5월25일 현대토건사를 설립하면서부터였다. 당시 그는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그 건물 안에 자그맣게 현대토건사라는 간판을 하나 내걸었던 것.
자동차 수리업도 잘 되고 있었다. 46년에 시작한 이 사업은 1년 만에 종업원이 30명에서 80명으로 늘어날 정도로 번창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동차 수리대금을 받으러 관청에 갔다가 우연히 건설업자들이 공사비 받아가는 것을 목격했다. 건설업자들이 받아가는 공사비는 자동차 수리대금의 몇십 배나 되는 거금이었다.
정주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동차 수리나 건설이나 똑같이 시간과 인력을 투입하는 일인데, 그 대가에는 너무나 엄청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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