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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대특집|일본 역사교과서 왜곡파문

“대동아 공영은 있되, 위안부는 없다”

日本 우익세력의 바이블 ‘국민의 역사’ 완전해부

  • 심규선 < 동아일보 도쿄특파원 >kisshim@donga.com

“대동아 공영은 있되, 위안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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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이 쓴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원본인 ‘국민의 역사’와 이 모임이 지난해 4월 처음으로 문부성에 제출한 최초 검정본, 그리고 올 4월 검정을 통과한 최종 합격본의 차이를 검토해보는 것은 흥미롭다. 또한 문부성이 어떤 이유로 수정지시를 내렸으며 이를 모임측이 어떻게 수용했는지도 관심을 끄는 대목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한국 관련 부분은 상당 부분 수정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곳곳에 최후까지 ‘반항’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소위 그들이 말하는 ‘정신’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국민의 역사’와 최초 검정본, 그리고 최종 합격본에 문부성의 의견을 곁들여 가며 한국관련 부분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살펴보자.

우선 가장 중요한 한일합방 부분. 앞서 소개했듯 ‘국민의 역사’는 “일한병합은 당시 세계정세로는 불가피했던 일이며 주변 국가들도 모두 이를 환영했고 당시의 국제관계 룰에 따라 적법하게 이뤄졌다”고 강조했다.

이런 역사인식은 최초 검정본에 그대로 반영됐다. 최초 검정본의 한일합방 부분은 이렇게 기술돼 있다.



“조선반도는 전략적으로 중요했지만 군사적으로는 불안정했다. 영국 미국 러시아의 3국은 각자 지배하려고 했지만, 실제로 통치를 유지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자기 부담은 피하고 싶으면서도 다른 두 나라 중 어느 한 쪽이 통치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한 이 지역에, 통치자로서 신흥국 일본의 등장은 3국에 있어 아주 좋은 일이었다.

일러전쟁 후 일본은 한국에 한국통감부를 설치하고 지배권을 강화하고 있었다. 1910년(메이지 43년), 일본은 한국을 병합했다(한국병합). 이는 동아시아를 안정시키는 정책으로서 구미열강의 지지를 받았다. 한국병합은 일본의 안전과 만주의 권익을 방위하기 위해 필요했지만,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반드시 이익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이 실행되던 당시로서는 국제관계 원칙에 따라 합법적으로 이뤄졌다. 다만 한국 내에서는 당연히 병합에 반대하는 의견이 있었으며 반대파 일부가 강하게 저항했다.”

이에 대해 문부성은 전반적인 수정을 지시했다. 그 이유로 “조선반도를 둘러싼 각국의 동정과 관련, 일면적인 견해를 충분한 배려없이 취급하고 있다” “일본의 한국병합 당시 구미열강이 지지를 표명했다고 오해할 만한 표현이다” “한국병합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필요성’이나 ‘이익’이 기술돼 있고 병합이나 통치 실태를 오해할 우려가 있는 표현이다” “‘국제관계의 원칙에 따라 합법적으로 이뤄졌다’는 것만을 기술하는 것은 병합과정 실태에 관하여 오해할 우려가 있는 표현이다” “한국 내 병합 반대파의 ‘강한 저항’이 일부에 불과했다고 오해할 우려가 있는 표현이다”라는 점을 지적했다.

일언반구 없는 종군위안부

최종 합격본은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수정했다.

“일러전쟁 후 일본은 한국에 한국통감부를 설치하고 지배권을 강화하고 있었다. 일본은 한국병합이 일본의 안전과 만주의 권익을 방위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영국 미국 러시아의 3국은 조선반도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서로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1910년(메이지 43년) 일본은 한국내의 반대를, 무력을 배경으로 억누르고 병합을 단행했다(한국병합).

한국내에도 일부에는 병합을 받아들이자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민족독립을 잃어버리는 데 대한 강한 저항이 일어나 그 후도 독립회복운동은 끈질기게 일어났다. 한국병합 후 일본은 식민지 조선에서 철도 관개시설을 정비하는 등 개발을 하고 토지조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 토지사업으로 그때까지의 경작지에서 쫓겨난 농민도 적지 않았고, 또 일본어교육 등 동화정책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은 일본인에 대한 반감을 높여갔다.”

최종 합격본 내용은 많이 순화됐다. ‘구미열강의 환영’은 ‘구미열강의 묵인’으로 바뀌었고 식민지통치를 통해 ‘좋은 일’도 했다는 기술이 추가됐다.

다음은 3·1운동. ‘국민의 역사’에는 언급이 없으나 최초 검정본에는 “한편 조선에서는 1919년 3월1일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는 운동이 시작돼 전국으로 확산됐다(3·1운동)”고 간단히 기술됐다. 이에 대해 문부성은 “독립운동 전체의 상황이 기술돼 있지 않아 그 실태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이라고 지적했다. 그 결과 “한편 조선에서는 1919년 3월1일 구(舊) 국왕의 장의에 모였던 지식인 등이 서울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사람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데모행진을 하자, 이 독립운동은 순식간에 조선 전토로 확산됐다(3·1운동). 조선총독부(일본이 조선지배를 위해 설치한 통치기관)는 이를 무력으로 탄압했으나, 한편으로는 그때까지의 통치방법을 바꾸었다.”

그러나 바뀐 기술에도 피해규모에 대한 언급은 없다. 관동대지진 당시의 한국인 피해에 대한 언급은 ‘국민의 역사’나 최초 검정본 모두에 한 줄도 기술돼 있지 않다. 최종 합격본에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불황’이라는 항목에 “이 혼란중에 조선인이나 사회주의자 사이에 불온한 움직임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주민의 자경단 등이 사회주의자나 조선인 중국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그러나 피해 규모는 전혀 언급돼 있지 않다.

강제연행과 황민화정책에 관한 언급은 ‘국민의 역사’에는 아예 없다. 최초 신청본에는 비슷한 대목이 있지만 일본인에 대한 것뿐이었다. 이에 대해 문부성은 “대만이나 조선의 정황에 대하여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어 전체적으로 균형이 안 잡혀 있다”고 지적했다.

최종 합격본은 일본인의 노동 동원이나 학도병 출진을 설명한 뒤에 “이런 징용이나 징병 등은 식민지에서도 이뤄져 조선이나 대만의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희생이나 고통을 강요받게 됐다. 그밖에도 다수의 조선인이나 점령하의 중국인이 일본의 광산 등에 끌려와 극심한 조건에서 사역을 당했다. 또 조선이나 대만에서는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는 황민화 정책이 강요돼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는 것 등이 진행됐다”는 기술을 추가했다.

언뜻 보면 상당히 많이 수정한 것 같다. 그러나 이 대목이 한국에는 가장 아픈 곳이다. ‘종군위안부’에 대한 기술이 단 한 줄도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모임이라는 단체가 종군위안부를 교과서에서 몰아내기 위해 조직됐다는 점에서 예견된 것이기는 하다. 원래부터 종군위안부에 대한 기술을 아예 하지 않았고 그대로 검정에 통과했다.

기존 교과서에도 악영향 미쳐

모임의 이런 태도는 엉뚱하게 기존 7개 역사교과서의 서술을 후퇴시키는데 결정적인 빌미가 됐다. 종군위안부에 대해 기술했던 기존 7종 교과서 중 4개 교과서가 이를 삭제했으며 2개교과서가 ‘강제성’과 ‘가혹성’이라는 표현을 완화했다.

82년 역사교과서 파동의 계기가 됐던 ‘침략’이라는 용어는 7개사 모두가 사용했었으나 수정본에서는 6개사가 아예 삭제하거나 ‘진출’로 바꿨다. 또 4개 교과서가 토지의 수탈성을 완화하거나 삭제하고, 5개 교과서가 3·1운동 당시의 일본군 탄압 사실과 희생자 수를 삭제했다. 모임측의 교과서에 신경을 쓰는 사이, 기존 교과서는 20년 전으로 되돌아가버린 것이다. 한국으로서는 허를 찔린 셈이다.

임나일본부설은 ‘국민의 역사’에도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최초 검정본은 “4세기 후반 야마토 조정은 바다를 건너 일본에 출병했다. 야마토 조정은 반도 남부의 임나(가라)라는 지역에 세력권을 점했다. 나중에 일본의 역사서는 이곳에 설치됐던 우리나라의 거점을 임나일본부라고 불렀다”고 단정적으로 썼다. 문부성은 “당시 조선반도와 야마토 조정의 관계에 대한 학설 등에 비추어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제동을 걸었고 최종 합격본은 “야마토 조정은 반도 남부의 임나(가라)라는 지역에 거점을 쌓은 것으로 생각된다”고 고쳤다.

삼국이 일본에 조공을 바쳤다는 내용도 쟁점이다. 최초 검정본은 “그런데 570년 이후가 되면 동아시아 일대에 그때까지 여러 나라의 움직임으로 보면 생각할 수 없는 새로운 사태가 발생했다. 고구려가 갑자기 야마토 조정에 접근해 와서 조공을 했다. 뒤이어 신라도, 백제도 똑같이 조공을 했다. 삼국이 서로 견제했기 때문이다. 그 후 589년에 중국대륙에서는 수가 통일을 달성했다. 이것이 새로운 위협이 되어 삼국은 더욱 일본에 접근했다. 임나를 잃어버리고 반도정책에 실패했던 야마토 조정이지만 예기치 않았던 강국 고구려 등의 조공으로 갑자기 자신감을 갖고, 아시아의 중심의 하나라는 강한 자각을 품게 되었다”고 기술했다.

문부성은 “사료적으로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는 할 수 없는 일면적인 견해를 충분한 배려없이 다루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종 합격본은 삼국이 조공을 바쳤다는 기술은 그대로 둔 채 뒷부분을 “임나에서 퇴각해서 반도정책에 실패한 야마토 조정이었지만 이렇게 해서 자신을 되찾았던 것으로 생각된다”고 수정했다.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설명한 최초 검정본 내용은 가장 문제가 됐던 부분 중 하나다.

최초 검정본은 “조선반도가 일본에 적대적인 대국의 지배하에 들어가면 일본을 공격할 수 있는 최적의 기지가 돼 후배지(後背地)를 갖지 못한 섬나라 일본은 자국의 방위가 곤란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반도는 일본에게 끊임없이 들이대는 흉기가 되기 쉬운 위치 관계였다”고 기술했다. 이는 극히 일본의 이익만을 앞세우는 기술이다. 이 대목의 뒷부분은 “후배지를 갖지 못한 섬나라 일본은, 자국의 방위가 곤란해진다고 생각했다”로 바뀌었다.

강화도조약에서는 일본의 도발과 불평등성이 도마에 올랐다. 최초 검정본은 “한편 이에 앞서 조선의 강화도 부근에서 일본군함이 조선군과 교전하는 사건(강화도 사건·1875년)을 계기로 일본은 다시 조선에 국교수립을 강하게 요구했다. 청나라가 조선에 일본과의 국교교섭 개시를 허가한 결과, 1876년 일조수호조규(條規)가 맺어졌다. 이로써 오랜 현안이던 조선과의 국교문제도 해결됐다”고 기술했다.

문부성은 “일본과 조선의 교전상황이 불분명하다”고 문제삼았다. 최종 합격본은 “한편 이에 앞서 일본 군함이 강화도에서 측량을 하는 등 시위행동을 했기 때문에 조선의 군대와 교전하는 사건(강화도 사건·1875년)을 계기로 일본은 다시 조선에 국교수립을 강요했다. 그 결과 1876년 일조수호조규가 맺어졌다. 이는 조선측에 불평등한 조약이었지만 오랜 현안이던 조선과의 국교가 수립됐다”로 수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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