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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취재|카투사 50년

꿈도 영어로 꾸는 엘리트 병사들

  • 이형삼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ans@donga.com

꿈도 영어로 꾸는 엘리트 병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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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많은 것이 변했지만, 주한미군은 지금도 변함없는 ‘현실’로 남아 있다. 2001년 4월 현재 3만7000여 명의 미군이 판문점에서 부산까지 전국에 걸쳐 산재한 90여 개 캠프에 주둔하고 있다. 동두천 시내에서 미 2사단의 상징인 ‘인디언 헤드’ 패치를 단 미군 병사들이 맥주 몇 잔을 앞에 놓고 객수를 달래는 정경도 여전하다.

변하지 않은 게 또 하나 있다. 오늘도 이들 미군 부대에는 미군 군복을 입고 한국군 계급장과 명찰을 단 카투사들이 미군들과 함께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군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으면서도 미군 사병 봉급의 100분의 1도 안 되는 10달러 정도의 월급을 받고 있는 것 또한 30년 전과 비슷하다.

달라진 것은 카투사의 자질과 지원 동기. 요즘 카투사들은 일정 수준 이상의 영어실력을 갖춰야 선발될 수 있기에 학력도 높아졌고, 허기(虛飢)와 ‘빠따’를 피해서가 아니라 ‘영어실력 향상’ ‘여유시간 활용’ ‘미국문화 체험’ 등을 목적으로 지원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카투사가 미군 지휘관의 불평 한 마디에 한국군으로 쫓겨나는 일도 없고, 한국군 하사관에게 막사 뒤로 끌려가서 ‘잘못을 깨닫는’ 일도 없다.

‘카투사(KATUSA)’는 ‘미 육군에 증원된 한국 육군요원(Korean Augmentation To the United States Army)’을 뜻한다. 한국의 지리 언어 문화 등에 익숙하지 못한 주한미군이 한·미 연합방위작전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한국군과 미군을 연결해주는 것이 카투사 임무의 핵심이다.

그런 임무 특성상 카투사는 미 8군과 한국군의 두 채널에 의해 조정·통제받는 이중적 위치에 있다. 카투사는 미 8군에 증원돼 미군의 지휘권 아래 있기 때문에 미군으로부터 교육·훈련에 대한 통제와 군수지원을 받지만, 카투사들에 대한 인사행정과 권익보호는 한국군 관할이다. 미 8군에 파견된 육군본부 예하의 ‘미 8군 한국군지원단’이 그 업무를 담당한다. 현재 80여 개 미군 캠프에 약 5000명의 카투사들이 배치돼 있는데, 60만 한국군 중에서는 극히 소수의 병력이지만 주한미군 7∼8명에 1명꼴로 카투사가 배속된 셈이므로 주한미군 전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카투사와 같은 성격의 병력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미국은 세계 여러 나라에 자국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지만 주둔지원국의 병력을 증원받아 운용하는 시스템으로는 카투사가 유일하다. 미군이 주둔지원국의 지리 언어 문화에 익숙하지 못하기는 어느 나라에서나 매한가지겠지만, 주일미군에는 ‘JATUSA’가 없고 주독미군에도 ‘GATUSA’가 없다. 그런데 왜 한국에만 이런 제도가 생겨났을까.

처절한 피의 역사

카투사 제도가 생겨난 계기는 1950년 6월25일 발발한 전쟁이었다. 미국 정부는 서울 함락 직후인 6월30일 미 지상군 투입을 명령했으나 전세는 계속 불리해 후퇴를 거듭했다. 미군이 그토록 무기력했던 가장 큰 이유는 병력 부족에 있었다. 미군 병력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했는데, 그 결과 50년 6월에 미 8군 각 사단은 전시 인가원인 1만8900명에 훨씬 못 미치는 1만25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더구나 49년까지 극동사령부의 주요 목적은 일본 등지에서의 점령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어서 예하 사단들은 훈련을 게을리 했고 전투장비의 정비·보충에도 소홀했다.

이런 상태로 전투에 뛰어들다 보니 사상자가 급증했다. 전쟁 초기 미 8군에서는 보충되는 인원보다 더 많은 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8월에 미 본토로부터 1만1115명의 병력이 증원된 데 비해 8월 말까지의 사상자 수는 1만9165명에 달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형국이었다.

카투사 제도가 본격 논의된 것은 7월 말. 당시 존 무초 주한 미 대사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과의 교감을 거쳐 일부 한국군을 미군 측에 배속시킬 것을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에게 제안했다. 한국 지형에 어두운데다 적군과 아군을 식별하는 능력도 낮고 피란민과의 언어장벽 때문에 부대 이동에도 애를 먹던 미군으로선 귀가 번쩍 뜨일 만한 아이디어였다. 더욱이 맥아더 장군은 9월 중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할 계획이었으므로 병력 증원이 불가피했다. 이에 따라 8월15일을 기해 카투사 제도가 실시됐다.

최초의 카투사들은 8월15일을 전후해 주로 피란민이 많이 모여 있던 대구와 부산 등지의 거리에서 강제 징집됐다. 이렇다 할 징집기준도 없었다. 소총을 매게 한 뒤 총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의 장정이면 집결지로 보냈다. 이렇게 징집된 최초의 카투사 313명이 8월16일 부산항에서 일본 요코하마를 향해 출발했다. 이런 이동은 8월말까지 매일 계속됐다. 이들은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7사단에 배치돼 5일 정도 훈련을 받은 뒤 8월20일부터 한국 주둔 미군 사단에 보충돼 전선으로 투입됐다.

카투사들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가한 것은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된 9월15일경이었으며, 당시 카투사의 수는 1만8000명에 달했다. 이들은 상륙작전에 투입된 미 7사단과 해병 5연대,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부대에 배치돼 소총수, 운반 및 보급병, 검문소 위병, 통신병, 탄약 운반병 등의 임무를 맡았다. 이들은 강제 징집된데다 교육수준이 낮아 영어를 잘 이해하지 못했고 훈련기간도 짧았기 때문에 초기에는 미 본토 증원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총알받이’로 내몰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카투사들은 피아 식별에 능했고, 민간인과 포로들로부터 많은 정보를 얻어냈으며, 험준한 산지에서 위장을 하고 진지를 구축하는 데도 뛰어나 인천상륙작전, 원산상륙작전, 혜산진 점령, 장진호 전투, 펀치볼 전투 등 많은 전투에서 활약했다. 6·25전쟁 중 4만3660명의 카투사가 미군과 함께 전투에 참여했으며, 이 가운데 1만1365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다. 카투사는 이렇듯 처절한 피의 역사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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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삼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an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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